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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날렵하게 빠진 새까만 자동차가 일렬지어 도로를 지나갔다. 그 뒤로 금색의 봉황 가운데 같은 금색의 무궁화 무늬가 반짝반짝 빛나는 리무진이 따랐다.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고 유연하지만 빠르게 네 대의 차가 지나가는 모습에 주변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에잇!"
외꺼풀의 단단한 눈매를 가려주고 있던 무테안경을 벗어젖힌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무릎 위에 놓여있던 자그마한 노트북을 옆으로 치웠다. 어둑어둑해지는 바깥풍경을 살피던 기품 있는 여자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요?"
밭은 호흡을 씩씩 내뱉는 남편의 모습에 여자는 걱정스레 주위를 살피다 노트북을 발견했다. 화면 위에 떠 있는 인터넷 기사를 보고 조심스레 노트북을 껐다.
"뭐 하러 봐요."
남편의 심기가 더 불편해질까 싶어 살살 달랬지만 표정이 계속 어두웠다.
"후.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지 않은가!"
"하루 이틀 일도 아니잖아요. 그냥 인터넷 가십이에요. 왜 매번 보고나서 맘 상해요."
남편에게 바짝 다가가 일그러진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제야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도 그렇지! 우리 진이에게 장애가 있을 거라니! 그게 할 소리야?"
"암요. 말도 안 되죠. 우리 진이처럼 예쁘고, 똑똑한 아이에게 어디 그런 소리를!"
남편의 기분을 맞춰주느라 이수희 여사도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다. 남편의 입에서 나온 장애라는 단어에 이수희도 속이 상했지만 남편이 더 화를 낼까 티를 낼 수 없었다.
"아버지 선거 운동도 도와주지 못할 만큼 머리가 나쁘다느니, 나쁜 유전자만 물려받아 아주 못 보게 생겼다느니, 하나그룹 뒷배로도 막아줄 수 없는 구제불능 사고를 쳐서 그렇다느니……."
이수희의 자조적인 말에 유준열 대통령이 의아한 듯 부인을 쳐다보았다.
"그런 말은 그래도 참아줄 수 있었지만, 우리 애에게 장애가 있다는 말은 …너무 하네요."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어미의 심정으로 도저히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끝내 이수희 여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유준열 대통령은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터뜨린 것을 후회하며 이 여사의 눈가를 닦았다.
"여보. 미안해. 그냥 안 보면 될 것을……."
"안 볼 수가 있어요? 한 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후우."
이수희 여사는 남편의 손을 잡아 내리며 긴 한숨을 쉬었다. 딸의 존재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이번에 유준열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으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노벨평화상 시상식에도 모습을 비추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와 축하연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불거진 대통령 딸 기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무니없는 루머로 이어지고 있었다. 기자들을 설득하던 비서진에서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 이제 노코멘트로 일관할 정도였다.
"앞으로는 정말 신경 쓰지 말자고. 당신 얼굴 펴. 장모님 생신에 이런 얼굴로 가면 걱정하셔. 우리 진이도."
이수희 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 끝을 약간 올렸다. 유준열 대통령도 만족한 듯 이수희 여사의 하얀 손등을 도닥거렸다.
"여보. 우리 진이가 보지는 않았겠죠?"
이수희 여사의 물음에 유준열 대통령의 표정에 다시 그늘이 졌다. 그리고 다시 긴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금세 메마른 세상을 잠식한 어둠이 성큼 차 안에 들어왔다. 한남동까지 가는 동안 조용한 정적이 이어졌다.
하나그룹 이경수 회장이 아끼는 고풍스러운 정원이 오랜만에 붐볐다.
"바쁜 건 자네인데 내가 먼저 가네."
"아닙니다. 큰형님. 내일 출장이시면 얼른 가셔 쉬셔야지요."
이수희의 큰 오빠이자 하나전자를 이끌고 있는 이종수 사장이 유준열의 어깨를 지긋이 잡았다 인자하게 웃으며 놓았다. 그 뒤로 이종수 사장의 큰 아들 내외가 인사하고, 미국 공부 중 할머니 생신으로 잠깐 들어온 작은 아들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나는 오랜만에 식구끼리 오붓하게 지내라고 피해주는 거야."
"후후. 고맙습니다. 작은 형님."
군대 간 외아들 덕에 조촐히 부인과 온 하나건설 이종혁 사장이 익살스럽게 웃었다. 건설에서 잔뼈가 굵은 이종혁은 꼼꼼하고 냉철한 형 이종수 같지 않고 통이 크고 추진력이 있었다. 농담도 잘해 이경수 일가의 분위기 메이커이기도 했다.
"날이 춥다. 어여들 가."
뒤에 물러서 있던 옥빛 한복을 입은 윤영애 여사가 숄을 여미며 재촉하자 대문 밖에 머물러 있던 차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차에 타려던 이종수 사장 며느리 은영이 이수희 여사 옆에 서 있던 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친동생처럼 친근하게 대해주는 은영의 살가움에 진도 생긋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형수님, 저도 그렇게 챙겨주세요."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던 유현이 뒷좌석에 막 탄 은영에게 칭얼거렸다.
"어머. 도련님. 제가 미국까지 가서 어떻게 챙겨드려요?"
은영이 새침하게 말하자 옆에 앉은 은영의 남편 태현이 킥 웃었다.
"임마. 네가 우리 공주님, 진이랑 같은 줄 알아?"
"이구. 알겠어. 그럼 이제 오래 또 못 볼 테니 우리 공주님 많이 보고 가야지."
유현이 창문을 내려 진에게 열렬하게 손을 흔들었다. 장난스러운 유현의 모습에 진이 환한 웃음을 터뜨리며 차로 다가갔다.
"오빠, 밥 잘 챙겨먹고, 공부 열심히 해."
"알았다. 우리 공주님. 잘 지내고 있어."
유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현이 창문을 내렸다.
"날 추워. 얼른 들어가."
"응. 가요. 언니도요."
진이 물러나자 차가 어두운 골목길을 내려갔다. 차 뒤꽁무니를 한참 바라보고 있던 진의 곁으로 이수희 여사가 다가왔다. 싸늘해진 진의 어깨를 안자 진이 이 여사의 허리를 꽉 안았다.
"들어가세요. 장모님."
마지막차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유준열 대통령이 윤영애 여사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갔다. 진과 이여사도 그 뒤를 따랐다.
"다들 간 게야?"
"네. 안으로 들어가세요."
현관 옆 정원수를 살피던 이경수 회장이 허리를 펴고 현관으로 느린 발걸음을 옮겼다. 응접실에 모여 앉자 전주댁이 다과상을 내왔다.
"오늘 아침에 사돈이 축하전화 넣어주셨어. 바쁘실 텐데 신경 써 주셔서 고맙더구나. 네가 안부 자주 여쭤야 한다."
반대편 소파에 앉은 윤영애 여사가 차를 따르며 이수희에게 당부했다.
"그럼요.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게 너무 죄송해요. 올 겨울은 유난히 추운데 감기는 안 걸리셨는지…, 매번 괜찮다고만 하시니까요."
"엄마, 할아버지 어제도 뒷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오셨대. 소도 잡을 수 있겠다고 하시던걸."
"그래? 아유. 아버님도 참 재미있으셔."
대학 퇴직 후, 안동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유준열 대통령의 아버지 유순 박사는 평생 정치학을 공부한 학자답지 않게 시골 노인처럼 구수한 입담을 자랑했다. 진이 매일 드리는 안부 전화가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할아버지의 재밌는 말솜씨 덕택이었다.
"그래도 혼자 적적하시다. 다시 한 번 서울로 모시겠다고 말 넣어. 여기 오셔서 지내셔도 좋다고. 여기 오시면 하나 뿐인 손녀도 매일 보고 좋으시잖아."
윤영애는 진을 보고 따스하게 웃었다.
"알겠어요. 아버님도 진이 많이 보고 싶어 하시니까."
이수희는 진의 긴 머리타래를 쓰다듬으며 진에게 애정이 담뿍 담긴 눈길을 보냈다. 진은 엄마의 눈을 마주보다 가볍게 입술을 깨물고 찻잔을 들었다. 초조하게 마른 입술에 뜨거운 찻물이 따갑게 스며들었다.
"유서방, 김비서 보낼 테니 필요한 거 이야기 하게."
허리를 곧추세우고 좌중을 관망하던 이경수 회장이 유 대통령을 향해 지긋이 말했다. 막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던 유준열은 이경수 회장의 뜻을 알아챘다.
"상금에 맞게 지을 생각입니다."
지체 없이 나오는 대답에 이경수 회장은 속으로 웃으면서도 흐흠. 목을 가다듬었다.
"이왕 하는 거 크게 지어야지. 어린이들을 위한 도서관이라는데."
고명딸 수희와 유준열과 연을 맺으면서 이경수 회장은 재산 불리기보다 사회 환원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덕에 하나그룹은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초일류, 엘리트 기업이라는 이미지는 사라지고, 사회를 위해 일하는 친근한 기업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유 대통령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장인어른의 도움을 받는다면 돈으로 국민의 환심을 사려는 수작이라며 야당이 반발할 것이 분명했다. 야당은 아직도 재벌 장인에 대해 비난했다. 이십 년 전부터 다양한 자선활동을 통해 이익을 사회에 돌려주고 있고, 몇 년 전 세계금융위기에는 이경수 회장 일가를 비롯해 하나그룹 전 간부의 연봉 삭감을 통해 수 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해 낸 공헌은 막무가내로 무시했다. 유준열이 대통령이 되면 서민은 나 몰라라 하고 친재벌 정책을 펼 거라는 야당의 어이없는 예상은 재벌에 과세를 부과하고 상속세를 늘리는 등의 정책에 의해 빗나갔다. 물론 재벌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대한민국 1위 기업인 하나그룹 이경수 회장의 지지에 모두 무릎을 꿇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하나그룹이 대한민국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야당만큼은 몰랐다.
"그럼 그 상금으로는 도서관만 짓게."
사위가 염려하는 것을 꿰뚫고 있는 이경수 회장은 눈썹을 으쓱 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상 토를 달지 말라는 뜻이 강건한 어조에 담겨 있어 유준열 대통령은 눈으로 물음표를 던지고 입은 열지 않았다.
"도서관 안에 들어갈 책은 다 내가 기증함세. 책에는 작가 이름만 들어있을 걸세."
무기명으로 기증하겠다는 말씀이셨다. 유 대통령은 이쯤해서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많이 보여줄 수 있다는데 야당의 생떼는 가뿐히 무시해도 될 터이다. 유준열은 그렇게 생각을 갈무리했다.
"김비서님, 다음 주 중으로 보내주십시오."
이경수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었다.
"우리 진이, 어린이 도서관 건립하면 아빠랑 같이 테이프 커팅 하는 거다."
유 대통령은 옆에 앉은 진에게 과일을 건네며 넌지시 의중을 떴다. 포크를 받던 진의 안색이 하얘졌다. 차를 음미하던 이경수 회장과 윤영애 여사, 그리고 이수희도 동작을 멈췄다. 몇 초의 고요함이 덮였다. 진은 고개를 숙이고 눈만 계속 깜빡였다. 초조해하는 딸의 모습에 이수희는 측은해져 고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신도 참. 우리 진이 얼굴이 상했다. 기말고사 준비 너무 열심히 한 거 아니야? 쉬엄쉬엄 해."
이수희는 축 늘어진 진의 얼굴을 품고 그녀의 차가운 뺨을 연신 매만졌다. 더할 수 없이 친밀한 모녀의 모습이었다. 말도 안 되는 기사에 또 선을 넘은 유 대통령은 못난 아비라 자책하며 옅은 한숨을 뱉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이경수 회장과 윤영애 여사도 가슴이 아팠다.
"괜찮아. 엄마."
"우리 딸, 엄마가 챙겨주면 좋으련만."
4년 전 한국에 다시 돌아오면서 딸에게 해준 게 없는 이수희의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할 때마다 유준열 대통령은 자신의 지위를 위해서 딸을 희생했다는 자책감에 몸서리 쳤다. 아빠의 그런 마음을 잘 아는 진은 유준열의 어두운 표정을 살피고는 엄마의 품을 벗어나 웃었다.
"엄마, 나도 이제 성인이야. 혼자서도 잘 한다고. 그리고 엄마가 자꾸 그렇게 말하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얼마나 서운해 하시겠어. 두 분이 날 얼마나 잘 챙겨주시는데."
유준열이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에 들어가면서부터 진은 쭉 이경수 회장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진이 원했고, 또 진을 위해서 그랬다.
"그래. 얘. 하나 밖에 없는 손녀딸, 내가 아니면 누가 챙기겠니."
윤영애의 새촘한 구살머리에 이수희의 얼굴에 애잔함이 조금 가셨다.
"저기…엄마, 아빠."
진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땀이 솟는 양 손을 맞잡았다.
"무슨 할 말 있어?"
이수희의 물음에 진은 크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유 대통령과 이 여사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심상치 않은 진의 분위기에 유준열 대통령과 이수희 여사, 그리고 이경수 회장과 윤영애 여사의 눈매가 짙어졌다. 유대통령과 이 여사는 요새 떠도는 인터넷 기사 때문인가 싶어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생각하고 결정한 거에요."
뜸을 들이던 진은 얇은 눈을 크게 떴다.
"저 영국 가요."
이 여사는 눈으로 남편에게 말뜻을 물었지만 유 대통령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회장과 윤 여사도 마찬가지였다. 진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 잡고 말을 쏟아냈다.
"저 옥스퍼드 가요. 이번 시험이 끝나면 바로."
유 대통령의 눈썹이 서서히 꿈틀거렸다.
"잠깐. 유진. 지금 영국 옥스퍼드를 가겠다는 말이야?"
"네."
진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번 시험이 끝나면 바로, 그러니까 다음 주에?"
흔들리는 눈동자에 따라 유 대통령의 목소리도 빨라졌다.
"네."
한결 마음이 편해진 결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진아, 이게 무슨 소리야? 여행 가겠다는 거니? 아빠, 영국 출장 잡히셨어요? 아니…엄마, 진이 데리고 영국 갈 일 생긴 거야?"
이수희 여사의 물음에 이경수 회장과 윤영애 여사는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 가는 거에요."
"뭐?"
진의 대답에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남은 대학 1년간 교환학생으로 옥스퍼드에서 공부할 거에요."
"교환학생?"
이 여사가 중얼거렸다. 진은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유 대통령이 성마르게 묻자 진은 입술을 얇게 저며 물고 눈썹을 상하로 움직였다.
"1년이나?"
점점 높아지는 유 대통령의 목소리에 유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다음에 이어질 말이 예상되었다.
"안 돼!"
유 대통령은 이경수 회장과 윤영애 여사 앞이라는 것도 잊고 언성을 높였다. 곤두섰던 진의 머리칼이 힘없이 떨어뜨려졌다.
"이보게. 진이 말도 한 번 들어보게."
이 회장이 끼어들어 유 대통령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진은 다 식은 차로 칼칼한 목을 축이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아빠, 가고 싶어요. 옥스퍼드 교환학생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했어요. 영문학을 전공하는 제게 좋은 기회에요. 그리고 1년이 지나면 …돌아올 거에요."
진은 마지막으로 말을 마치기 전 아빠의 눈치를 보았다. 매서운 아빠의 눈초리에 눈을 질끈 감고 결심과는 다른 말을 했다.
"다시 옥스퍼드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런 거야?"
이 여사가 진의 손을 잡고 물었다. 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옥스퍼드에서의 십 년은 그녀를 치유해 주고,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서울에 오면서부터 하루도 그 나날을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소중한 시간이었다. 진의 마음을 아는 이 여사는 여린 손을 쓰다듬을 뿐, 반대할 수 없었다.
"유서방, 보내게."
잠자코 있던 윤여사였다. 혼란스러운 유대통령은 장모를 쳐다보았다.
"공부 열심히 하겠다는 데, 우리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1년 유학 못 보내겠는가?"
"장모님, 저는 그것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닙니다."
한국에 와서 진과 함께 살지도 못하고,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했지만 그렇다고 눈에 안 보이는 곳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아네. 알아. 자네가 진이 걱정해서 그러는 거. 멀리 갈 딸아이가 눈에 밟혀서 그런다는 거. 하지만 진이도 이제 스물 셋이야. 자네 딸, 우리 손녀 많이 컸다네. 이제 홀로 세상을 바라볼 때도 됐어."
윤여사는 진을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요즘 얼굴도 까칠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졌다. 손녀는 대학 생활을 즐겁게 누리고 있지 못했다. 아직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서툴러 집과 학교만 오갔다. 학교생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고, 친한 친구를 만난 적도 없었다. 박기사 말이 강의만 끝나면 재까닥 차에 올라탄다고 하니, 진이 얼마나 재미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손녀가 안쓰러워 봉사활동이나 모임에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대통령의 딸이라든지 하나그룹의 손녀라든지가 알려질까 봐 그러지 못했다. 진은 한국에 온 이후로 쭉 갇혀있었다. 틀 밖으로 나오라고 손잡아 주고 싶었지만, 진을 위해서 그럴 수 없는 모순에 윤여사는 절망했다. 하지만 이제 진 스스로 세상으로 나오고 싶어 한다. 윤여사는 손녀를 위해 기꺼이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흠. 진이가 좋아하는 공부 하러가겠다는 데 말리는 것도 부모 된 도리가 아니야. 유서방, 걱정 마세. 강비서와 경호팀도 함께 보내겠네. 위험할 일은 절대 없을 걸세."
절충안을 내 놓은 이 회장의 말에 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할아버지! 그건 …싫어요."
"그럼 정말 혼자 갈 생각인 거야?"
장인, 장모의 설득에 어느 정도 수긍하던 유 대통령의 눈자위가 새빨개졌다.
"네. 그 곳은 한국이 아니잖아요. 그저 공부하러 가는 거에요. 아빠, 저는 스스로 해내고 싶어요. 생소한 곳도 아니잖아요. 예전에 함께 지냈던 사람들이 다 있어요. 경호원들 대동하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고 싶지 않아요. 아빠, 부탁이에요."
"그래도 진아, 혼자는…,"
이 여사까지도 진을 말렸다. 하지만 진은 교환학생이 되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을 혼자 하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이제 정말 대통령의 딸, 하나그룹 손녀라는 지위를 벗어버리고 유진으로 살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게 홀로서고 싶었다.
"아빠, 엄마. …제가 처음으로 드리는 부탁이에요. 그리고 마지막일 거에요."
진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그녀의 갈망이 깊숙한 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유대통령은 다그치려던 입을 닫았다. 딸아이의 눈이 뜨거웠다. 간곡하게 청하고 있었다. 며칠째 계속되는 진에 관한 기사들을 떠올렸다. 대중의 관심이 식지 않는 이상, 파파라치가 여기저기서 따라붙어 결국 진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거야말로 진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간신히 막아놓은 봉합을 터뜨릴 것이다. 설마 진은 조만간 그렇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유대통령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렇다면 이게 옳은 결정일 수도…. 유대통령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학기는 3월 시작 아니니? 왜 이리 빨리 가?"
이수희 여사가 유대통령의 눈치를 살피며 넌지시 물었다.
"어? 아, 교환학생 프로그램이라 미리 가서 오리엔테이션 같은 과정을 밟아야 해요."
진은 뜸을 들였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그럴 듯한 답변에 이수희 여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유대통령의 심기를 살폈다. 진지하게 생각을 가다듬던 유대통령이 묶었던 입을 풀었다.
"하루에 한 번 전화해야 한다."
긴장했던 진의 얼굴이 서서히 풀렸다.
"아빠, 고마워요."
진이 유대통령을 와락 안았다. 짐짓 엄하게 있던 유대통령은 딸아이의 포옹에 미소가 그려졌다.
"연락이 두절되면 바로 경호팀 파견할거야."
"네. 그런데 아빠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니까 이메일로 연락하는 것도 봐주기에요."
"비서진이 받아줄 거니까 걱정 말고 연락해야 해. 할머니, 할아버지께라도 꼭!"
"네. 꼭이요. 그러니까 아빠도 약속 지키셔야 해요."
진이 어렸을 때처럼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때보다 길어진 손가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유대통령은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세상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될 것만 같았던 그 때로. 티 하나 없이 밝게 자라던 진의 모습이 지금의 진의 얼굴 위로 겹쳐보였다.
그래, 진이 네가 그렇게 행복해한다면 보내주마.
유준열 대통령은 슬며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진은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안녕하세요? 베로베로입니다.
오랫동안 생각했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약 십년이 묵은 것 같아요.
예전에 완결을 본 글이지만, 너무 엉성해서 나중에 다시 꼭 고쳐야지!
마음 먹었던 글인데, 우연히 런던을 여행하면서 다시 끄집어내게 되었네요.
참 신기한 것이 예전에 쓸 때는 내가 평생 런던에 갈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 런던을 보다니! 어쩌면 말과 글에 힘이 있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언제나 그렇듯 극악연재;;; 가 될 수 있고요.
그래도 끝은 낼 거라는 거. 하하하;
그럼 새 봄 활기차게 시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