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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청궁의 누각 위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누각의 맨 위 홀로 서 있는 해단은 떨어지는 눈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 머리와 어깨에 사뿐히 올라앉은 눈은 조금씩 높이를 더해갔다. 해단은 큰 숨을 내쉬며 멀리 보이는 붉은 지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별다를 것 없이 비슷한 지붕들이건만 그는 어렵지 않게 단비의 주화전을 찾을 수 있었다. 조금씩 밝아오는 미명을 받은 주화전의 지붕은 점점 쌓이는 눈으로 인해 하얗게 변해가는 중이었다. 손을 뻗어 움켜쥐려하면 할 수 있을 것처럼 또렷하게 보이는 주화전인데 마음은 이상하게 흐릿했다.
숙취 때문인가.? 숙취 때문이다..!
아무렴, 그래서 가슴이 울리는 북을 품은 듯 그리 저릿하고 조이는 모양이다. 이유 없이 자꾸 지리지리하게 죄는 심장의 연유를 숙취에서 찾은 해단은 이제서 마음이 편해 진 사람처럼 주화전에 머문 시선을 거두었다. 다른 이유 따위는 없다고 가볍게 여기는 그였다.
제 아무리 술에 취하지 않는다 하여도 낮부터 이어진 술은 홍비의 처소에서까지 이어졌었다. 어지러운 생각을 잊고자 할 때는 늘 찾던 홍비였다. 연의 숨결이 떠오를 때 한잔, 연의 눈물이 기억날 때 한잔, 검붉은 혈흔이 생각나면 또 한잔, 그러다 연이 부른 가락이 맴돌면 연거푸 들이켰던 술이었다. 골치 아프게 말을 섞을 필요 없이 홍비의 가무를 보면 복잡한 생각은 잠시 접어 둘 수 있었거늘, 지난밤은 달랐다. 화려하게 움직이는 홍비를 보고 있어도 마음으로는 연이 생각났다. 화가 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지만 화가 났고, 보고 싶지 않다고 중얼거리며 연에게로 갔다.
이유는 많았다.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목숨 값을 지불해야 했고, 아들을 준다 하였으니 주어야 했고, 낮에 감히 먼저 돌아서겠다는 가락을 지어 불렀으니 나도 그러하다 못 박아야했다. 그런데, 홀로 걷는 연의 뒷모습은 미와산에서 처럼 여려 보였다. 사내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모를 만큼 가늘고 약해보였다. 달려가 안아주려하는데 겹쳐 보이는 연의 어깨위로 태유연의 이름은 덧붙여 따라왔다.
그때부터였다. 화가 났고 괜한 심술은 제멋대로 춤을 추었다. 비틀리고 뒤틀려 엉킨 까닭은 그 스스로도 가늠할 수 없었다. 해단은 못마땅하게 턱을 끌어당겼다.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입술로 지친 한 숨이 이어졌다.
"전하. 그만 들어가시지요."
옥체가 근심된 손내관은 조용히 말을 올렸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해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관은 다섯 보도 안 되는 거리에 서있었다. 추위에 내관의 어깨는 낮게 흔들렸다.
"언제 온 것이냐."
손내관은 눈을 껌벅였다.
"신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시옵니까."
"대체 언제 곁으로 온 것이냐."
"일 다경 조금 안되었습니다."
"걸어 왔느냐?"
옥음은 다그쳤다.
"예?? 아. 예."
영문을 모르는 내관은 그저 어리둥절했다. 용안에 걸린 붉은 탈을 올려다보아도 성심은 짐작할 수 없었다. 만일 걷지 않고 건청궁 누각위로 오를 방도가 있다면 오히려 반가울 것 같았다. 칠층이나 되는 누각 위로 오르는 것은 젊은 시절이나 세월을 품은 지금이나 매한가지로 힘들었다.
"무호사의 걸음을 배운 것이냐?"
잔뜩 꼬인 옥음에 담긴 뜻을 내관은 알 수 없었다. 무예로 다져진 그림자 친위부대의 걸음을 배웠는지 묻는 것이 농인지, 진심인지, 조롱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멍하니 서있는 내관을 날카롭게 훑어보던 해단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내관 뒤로 하얀 눈발위에 찍힌 내관의 발자국은 깊게 파여 있었다. 나이 살이 늘어진 내관의 몸으로 무호사부의 걸음 같은 것을 배울 수 있을 리 없었다. 눈까지 쌓여 주변을 살필 조건은 최적이었다. 눈을 밟을 때마다 들렸을 인기척은 또렷했을 터! 헌데,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호사병도 아닌 관절 마디마디가 무딘 내관의 걸음도 몰랐다는 말이었다. 해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의감을 부르라. 아무래도 취기가 예사롭지 않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관은 건청궁의 누각을 빠르게 뛰어 내려갔다. 계단을 따라 울리는 소리를 따라 여럿의 움직임이 함께 느껴졌다. 해단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마음으로 기이한 불안감도 엄습했다. 어디 한 구석이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모양이었다.
홍비가 내어 온 술에 무엇인가 들었던 것 인가? 아니, 홍비는 감히 그런 짓을 할 위인이 아니었다. 또한, 기미를 보고 들였음은 그도 확인한 바였다.
애초부터 술의 문제가 아니었던가? 그러고 보니 그날, 미와산에서도 그러했다. 긴 밤, 산에서 잠들었던 그 날도 그는 다가온 병사들의 발걸음을 뒤늦게 알아 차렸었다. 만일 무호사병들이 아니라 자객들이었다면 큰 일을 치룰 수 있는 상황이었다. 따져보니 근심은 커졌다. 낙마하며 머리를 다친 병증이 아직도 남아 있음이 틀림없었다.
달려온 의감은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퉁퉁하게 살이 오른 내관은 금방이라도 죽을 듯 거칠게 호흡했다.
"전..! 전...하! 하!하! 신이 진맥을 하여도 되겠습니까."
의감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해단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지금 하겠다는 말인가?"
"전.! 전하께서 허락하시면.."
"불가하다."
해단은 손을 내저으며 불쾌하게 답하였다. 급히 부르라 명하여 한 걸음에 달려온 의감과 내관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스쳐갔다. 먼저, 숨을 가다듬은 것은 내관이었다.
"그 사이 병세가 호전되셨습니까?"
"잠깐 사이에 호전 될 병이 아니다."
못마땅하게 중얼거린 해단은 느릿하게 팔짱을 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의감과 내감은 더욱 어쩔 몰라 머리를 조아렸다.
"하오신데, 진맥을 불가하다 하시니 황망하여 신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굳어진 옥음에 정신을 차린 의감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얼어갔다.
"그리 흩어진 숨으로 어찌 과인의 병세를 집어낼 수 있겠느냐.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진맥을 받고 싶지 않으니, 심호흡을 열 번 하거라. 예사롭지 않으니 잘 살펴야 할 것이다."
의감은 멍하게 서있다 서둘러 명을 따랐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의 옥체를 슬쩍 보며 눈치를 살폈다. 의감의 불룩한 배는 만삭의 여인처럼 올랐다 몸을 푼 여인처럼 푹 꺼졌다를 거듭 반복했다.
"다 하였습니다. 허면..."
답대신 왕은 손을 내밀었다. 의감은 긴장한 손을 들어 옥수를 잡았다. 차가운 눈발을 맡고 서계셨다는 말을 손내관을 통해 이미 전해 들어 차가운 손을 예사했건만, 왕의 기운은 뜨겁고 세찼다. 어떤 병세도 느낄 수 없는 의감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어떠하냐. 심각한 것이냐."
"맥으로는 별 다른 것을 느끼지 못하겠나이다. 편치 않으신 곳을 말씀해주시면 신이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명쾌한 답을 기대했던 해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얼마 전, 낙마로 인해 머리를 다쳤던 일 기억하는가. 그때 임시방편으로 내관이 치료를 하였는데, 그게 문제가 되었음이 확실하다."
힘주어 또렷한 옥음은 확신으로 가득했다. 듣고 있던 의감과 내감이 서로 의아한 눈빛을 교환하였다.
"전하, 그때의 상처는 이미 감차되신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아직 불편하시옵니까."
"머리의 상처가 문제가 아니다! 머리를 다쳐 다른 곳에 탈이 난 듯 하다. 그런 경우가 종종 있느냐."
점점 더 왕의 심중을 알 수 없어 의감은 쉽게 말을 올리지 못했다.
"신의 경험으로 그런 일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입으신 상처가 깊지 않기에 이유를 낙마에서 찾기는 어려울 듯 하옵니다. 외람되오나 증상을 소상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처신이 곤란해진 의감의 말은 점점 느려졌다.
의감의 말이 마음에 차지 않은 해단의 입술이 살짝 비틀렸다. 그러나 서국 최고의 의감이 찾지 못한 병근을 다른 이가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못마땅하나 해단은 증상을 따져보았다.
"먼저, 가슴이 답답하다. 그날부터 계속 그러 하였는데, 때때로 더 깊어지기도 하여 숨이 차오기도 하다. "
"그날이라고 하시오면..?"
"미와산에서 낙마했던 그 날 말이다.!"
"아..예."
의감은 서둘러 증상을 받아 적었다.
"또한, 이유 없는 생각이 많아졌다. 딱히 기억할 이유가 없는데, 계속 떠올라 화가 나고, 쉬이 식지 않는다."
"구상하게 어떤 기억을 말씀하시온지 여쭤도 되겠나이까?"
의감은 꼬치꼬치 깨물었다. 맥으로 드러나지 않은 병세를 말로 푸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해단은 마음에 차지 않는 의감의 태도에 슬슬 역정이 났다.
"말할 것도 없는 사소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누군가 했던 말이나 행동...향기 그런 것들 말이다.!"
"누군가..그 누군가가 하나이옵니까. 여럿이옵니까. 그 자를 찾아내면 전하께서 마음 쓰시는 근본을 쉽게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의감은 답을 거의 찾은 사람처럼 옥음을 기다렸다. 의감 곁에 붙어 선 손내관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한마디면 모든 것이 해결 될 것처럼 바짝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옥음은 한참동안 들리지 않았다.
"전하..!"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내관은 나지막하게 재촉했다.
그제서 해단은 긴 상념을 놓아두고 눈을 떴다.
"누구인지 여쭈었나이다."
"되었다.! 그만 물러가라."
"예?!"
갑자기 싸늘해진 옥체는 휙 뒤를 돌았다. 멍해진 의감과 달리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손내관의 입가엔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하오나 전하."
"물러가라 하지 않으시는가. 이만 돌아가시게나."
손내관은 의감의 옆구리를 찌르며 낮게 눈짓했다. 의감은 어떨 결에 긴 인사를 하고 건청궁의 누각을 내려왔다. 계단 밑에 입시해있던 의부감이 서둘러 다가왔다.
"의감나리. 전하께서는 어떠하시옵니까."
의감은 증상을 적은 종이를 의부감에게 전해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받은 종이만을 뚫어지게 보던 의부감도 한참 후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네는 뭔가 알겠느냐?"
"비슷한 증상의 병명은 알겠는데, 그럴 리가 없기에...아닙니다.."
"아니다. 말해보거라. 전하께 도움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냐."
"제가 배운 바로는...증상은 연병(戀病)과 꼭 같습니다."
실마리를 잡아보려 고대하던 의감의 얼굴로 실망감이 번졌다.
"전하께서 말이냐.? 하하! 전하께서 연모하는 병! 연병에 걸리셨다..? 그 무슨 말이 안되는 소리인가. 성곽 위 깃발에 앉은 까마귀도 자네의 진단에 코웃음을 칠 것이네. 되었으니 그만 가세."
의감은 풀죽은 의부감의 어깨를 툭 치고 건청궁앞 마당으로 느리게 걸어갔다. 수북히 쌓인 눈 위로 의감과 의부감의 무거운 발자국이 또렷하게 새겨졌다.
****붙여넣기를 잘못하여 12편이 잘렸더군요. 요 부분까지는 12편입니다. ***********************
<13>
所思靑海春波綠 청해의 푸른 봄 물결을 생각하네.
겹창으로도 볕은 스며들어왔다. 가만히 내다보던 연은 겹창의 문을 조금 밀어보았다. 쏟아지는 겨울햇살이 쌓인 눈에 반사되어 유난히 맑게 퍼졌다. 그러나 볕과 달리 코끝으로 밀려오는 바람은 무섭게 차가웠다.
"유보를 좀 하고 싶은데, 법도에 어긋나는 일인가?
연은 창 너머에 머문 시선을 거두며 제상궁을 돌아보았다. 애써 웃고 있지만 며칠 사이에 수척해진 얼굴은 희미한 웃음마저 아리게 만들었다.
"건청궁만 향하지 않으시면 황주성안 어디든 자유로이 다니실 수 있사옵니다. 허나 오늘은 바람이 차갑사옵니다. 감기라도 걸리면 아니 되시니 다른 날 걸으시지요."
제상궁은 무뚝뚝하게 말을 올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연의 입가에 웃음이 조금씩 커졌다.
"왜 웃으시옵니까."
"다들 제상궁이 상냥치 않아 무섭다 하는데, 내게는 왜 이리 따뜻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네."
"그리들 말하였습니까."
짐짓 모른다는 말투였다.
연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그리 말하였네."
"마마께서는 어떠하시옵니까?"
제상궁은 연의 뒤를 따르며 낮게 물었다.
"나는 좋네. 웃지 않아서 좋고, 말하지 않아서 좋고, 묻지 않아서 좋다네."
얼어붙은 댓돌을 지나 눈 쌓인 나락에 발을 디딘 연은 천천히 중얼거렸다.
밤마다 찾은 사내는 진정 약조에 충실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을 빨아 당기고 혀를 탐하였다. 솟아오른 가슴을 움켜쥐고 온 몸에 붉은 낙인을 찍었다. 몸으로 퍼지는 열기를 참을 수 없어 울음처럼 신음이 터져 나오면 여인의 문으로 밀고 들어왔다가 정신이 혼미해지며 궁극의 절정에 애원하며 몸부림치면 더운 진액을 쏟아 부었다.
옥체를 받은 몸은 점점 더 사내를 기억하고 갈구하는데, 구멍이 뚫린 듯 허한 마음은 사내를 지워가고 있었다. 얼굴을 기억하려 애를 써도 매일 밤, 불 꺼진 내실에서 손끝으로 매만진 흔적만으로는 불가능했다. 촛대에 불을 올려 환히 밝힐 때, 이미 사내의 얼굴엔 붉은 탈이 자리하고 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마음 한 구석에 접어놓은 사내의 환한 웃음이 자꾸만 떠올라 그립고 아팠다. 보고 싶은 얼굴 대신 연에게 점점 더 분명하게 새겨지는 것은 사내의 뒷모습이었다. 뜨거운 교합의 땀방울이 몸에서 식기도 전 서둘러 떠나는 해단의 어깨는 미와산에서처럼 단단하고 넓었다. 다만. 더 이상 그 품이 따뜻하게 느껴지지도 포근하게 느껴지지도 않을 뿐이었다. 차갑게 식은 뒷모습을 보며 흩어진 옷가지를 끌어당겨 몸을 가리고 조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언제나 흔들렸다.
목욕을 도와주며 연의 몸에 남겨진 교합의 흔적을 발견하고 좋아하는 궁인들 틈에서 연은 홀로 웃지 못했다. 까르르 웃다 짓궂게 놀리다 결국 감흥을 묻는 궁인들과 달리 제상궁은 마지막에 와서 아무 말 없이 젖은 몸을 감싸주며 침소로 안내했다. 그런 무관심과 무신경이 연은 늘 고맙고 반가웠다.
"마마, 더 가실 것이옵니까."
생각에 잠겨있던 연은 고개를 들었다. 계속된 추위로 단단하게 얼어붙은 청해를 걷던 걸음이 꽤 멀어졌던 모양이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매어놓은 배가 아득히 보였다.
"며칠 사이에 이리 얼어붙었네."
연은 가죽신으로 눈을 살짝 밀어보았다. 얼어붙은 못 바닥은 아득하여 그 밑을 가늠할 수 없었다. 새하얗게 굳어진 얼음바닥을 한참을 내려다 보다 연은 가만히 쪼그려 앉았다. 손끝을 펴 얼음을 매만지자 차가운 기운이 한꺼번에 퍼져왔다.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가운 바닥에 손이라도 대고 있으면 답답한 가슴이 진정이라도 될 것 같았다. 손끝은 금세 빨갛게 변했다.
"마마."
연은 아쉬운 듯 바닥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저 끝까지 다 얼었는가."
연은 보이지 않는 청해의 수평선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가보지 않아 모르겠나이다. 이곳까지 오신 것도 마마가 처음이시옵니다."
제상궁은 짧게 답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신기한데,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은 가 보네."
"계절은 늘 같은 것을 보여주니까요."
짧은 말은 묘하게 허전했다.
"그렇겠구나. 내년이 되고, 후년이 되고, 시간이 지나가면 겨울마다 얼어붙는 청해가 더는 신기하지 않을 테고, 봄이 되어 녹는 청해가 반갑지 않을 테니...그렇게 되면 나도...나도 더는..."
하려는 말을 삼킨 연은 손을 털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만 돌아가세. 더 가면 못가에 두고 온 궁인들의 원망이 겉잡을 수없이 커질 듯하니 말이네."
따르지 말라하여도 법도를 따라 움직이는 수많은 궁인들을 어쩌지 못한 연은 어깨를 들썩였다.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추위에 떨고 있을 그들이었다.
"감히 그러하겠나이까."
엄한 말투였다. 딱딱하게 굳어진 주름으로 추위가 번지는 데도 아니라 하는 모양새가 재미난 연은 헛기침을 했다.
"허면 궁금하니 저 끝까지 가보도록 하세."
"예!?"
연의 농을 제상궁은 받아내지 못했다. 제상궁의 커진 눈을 보다 홀로 즐거워 환하게 웃은 연은 멀리 보이는 청해의 끝을 슬쩍 보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네. 그만 가세나."
뒤돌아 걷는 걸음은 처음보단 많이 가벼워져있었다. 따르는 제상궁은 앞서나가는 작은 어깨를 살피며 희미하게 웃었다. 여린 마음을 조금은 털어내신 것이 분명했다.
"제상궁."
"하문하시지요."
"자네는 전하의 용안을 바로 본 적이 있는가."
연의 물음은 차분했다.
"오래 전에는 그리 보았지요."
기억을 더듬던 제상궁의 답은 희미하지 않고 분명했다. 오래 전의 해단을 떠올려 보려 애를 썼지만 연의 머리에 나타나는 것은 붉은 탈 뿐이었다.
"오래 전... 그때는 얼굴을 가리지 않고 계셨는가."
"예. 그때는 지금과는 많이 다르셨습니다."
보고픈 것을 그리워하듯 제상궁의 음성은 아련해졌다.
"웃기도 하셨는가."
"예. 크게 웃기도 하셨습니다."
제상궁의 대답을 듣고 있던 연의 입가에 쓰린 미소가 스쳐갔다. 연이 알지 못했던 시간 속의 사내를 굳이 꺼내 무엇하려는 지 스스로가 미련했다. 다만, 자꾸 미와산에서 본 웃음이 꿈결처럼 멀게 느껴져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때로는 울기도 하셨는가."
"한 번...본 적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는 웃을 줄도, 울 줄도 아는 분이셨구나. 그것이 궁금했다.. 그저 그런 마음도 있는 분이신가..그것이 궁금했다."
"마마."
느려진 걸음을 재촉하던 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소인이 죽기 전에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근거없는 예감이지만 소인은 오래 전 그때, 전하의 모습을 다시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상궁의 주름에 밴 희미한 웃음은 보기 좋았다. 연은 따라서 살짝 미소 지으며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휙!!
매서운 광풍은 순식간이었다. 갑작스럽게 불어온 바람은 스산한 비명을 지르며 두 사람에게 파고들었다. 쌓인 눈은 마구 흩어져 광풍을 타고 회오리치며 두 사람을 애워 쌓다. 깜짝 놀라 움츠린 연은 미끄러운 얼음바닥으로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얼어붙은 청해 위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멋쩍게 웃으며 손을 짚고 얼어나자 쓰러지며 밟았던 치맛단이 결 따라 찢겨졌다. 매서운 바람을 따라 찢긴 옷은 점점 뒤로 밀려났다. 보고 있던 연의 눈동자가 까맣게 짙어졌다. 치마에 매어놓은 주머니도 함께 멀어지고 있었다. 연은 서둘러 치맛단을 쫓았다.
"마마!"
만류하려던 제상궁이 연을 잡고자 움직인 순간 팽팽하던 바닥의 얼음으로 균열이 시작되었다. 미처 숨을 쉴 시간도 없는 짧은 찰라였다. 순식간에 갈라진 틈으로 물이 솟구치며 올라왔다. 그리고 이내 가까스로 주머니를 움켜쥔 연의 몸이 차가운 못으로 빠져들었다.
"마마!"
비명처럼 터져 나온 음성에 멀리 못가의 궁인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균열은 점점 커지며 제상궁과 연의 거리를 더 넓게 만들었다. 허우적거리는 연을 향해 손을 뻗어보던 제상궁은 물에 뛰어들려 했다.
"아니야.. 위험해.. 기..기다려서.."
입속으로 물이 차올라 이어지지 못한 말들이 끝을 맺기도 전에 연은 차가운 청해 속으로 깊게 밀려들었다. 얼음물이었다. 온 몸이 굳어버릴 만큼 차가운 겨울 못에 연의 팔 다리는 잘린 듯 통증을 토해냈다. 점점 의식을 잃어가는 몸으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마마!! 마마!"
연의 눈은 자꾸 흐릿해졌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안 된다며 연은 이를 악물었다. 너무 아려서 살갗이 떨어져나가는 느낌이었지만 연은 발버둥을 쳤다. 멀어져있던 얼음가가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뛰어오는 궁인들의 함성과 비명, 고함은 점점 다가오는데, 이상하게도 귓가에 닿을 땐 또렷하지 못하고 웅웅거리며 번졌다. 숨은 점점 가빠왔고 주머니를 쥔 손끝으로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몇 번씩 눈으로 꽉 잡고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감각은 무뎌지고 있었다.
"마마! 마마! 조금 더 손을 뻗으십시오!! 마마!"
가까스로 얼음 가에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연은 희미한 소리를 따라 힘껏 손을 내밀었다. 이내 따뜻한 손이 연의 손목을 낚아챘다.
어디선가 만져본 손길이었다. 따뜻하고 포근하게 감싸 쥐는 손은 연이 이미 알고 있는 손이었다.
"해단..."
해단...그대이십니까... 묻고 싶은데, 보고 싶은데, 확인하고 싶은데... 입과 코로 밀려드는 차가운 기운은 틈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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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호사부로 다시 올린다는 교지는 짧았다. 파직이 이유없던 것처럼 임명도 이유가 없었다. 다시 부르실 것이라 생각했기에 불안하지 않았고 부르지 않으셔도 성심을 알기에 괜찮다고 여겼던 인규였다. 헌데, 교지를 받아 차비를 하여 입궁하는 걸음은 참 가벼웠다. 새삼 옥체를 가까이서 뫼시는 것이 더 좋고, 더 기쁠 근본이 없는데, 마음은 설레고 신이 났다.
"경계할 만한 움직임이 느껴지십니까."
인규에게 바짝 다가온 무호사 병사들이 낮게 주변을 쏘아보며 물었다.
"무슨 말인가?"
영문을 모르는 인규였다.
"문을 지나실 때마다 자꾸 주변을 살피셔서요. 저희들은 특별한 것을 느끼지 못하였는데, 무호사부나리께서는 뭔가 찾고 계신 듯 둘러보고 계시질 않습니까."
"그랬는가?"
"예. 그리하셨습니다. 그렇지?"
곁에 있던 병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뭐..헛! 특별한 것은 없네만 오래 간만의 입궁인지라 확인 차 그리하였네."
의아해하는 병사들의 눈동자를 마주하던 인규는 괜한 기침을 했다. 실은 주변을 살피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그였다. 무엇을 찾았는지 스스로에게 묻던 그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졌다. 태유연. 아니 이제는 마마가 된 여인의 얼굴이 문득 스쳐갔기 때문이었다. 떠오른 얼굴이 민망하고 황당하였다. 왜 그 얼굴이 떠올랐는지도 알 수 없었다. 세차게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내는 순간 목까지 숨에 찬 병사가 달려왔다.
"나리!! 단비마마가 청해에 빠지셨답니다!!"
대답은 없었다. 바람처럼 내달리는 무호사부 인규의 걸음은 빠르고 날래 급박함을 대변하고 있었다. 서둘러 뒤를 따르는 무호사부들의 얼굴도 긴장감으로 굳어졌다. 청해까지 이른 그들은 얼음판을 가로질러 달렸다. 무예를 익힌 걸음은 미끄러지듯 가볍고 나는 듯했다. 비명과 탄식을 하며 모여든 궁인들을 헤치고 나선 인규의 눈에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허우적 거리며 얼음가로 오려할 때마다 얼음 조각들이 둥둥 떠다니며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가까스로 헤엄치는 여인의 움직임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마마! 마마! 조금 더 손을 뻗으십시오!! 마마!"
얼어붙은 못처럼 하얀 손은 방향을 잃고 허공을 향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정복의 어깨와 허리를 감싼 띠와 검을 한꺼번에 풀러 내린 인규는 숨을 크게 들이 쉬고 못으로 뛰어들었다.
"마마! 마마!"
다그쳐 불러도 차갑게 식은 몸은 답이 없었다. 손목을 잡아 품으로 끌어안은 인규는 온 힘을 다해 못가로 헤엄쳤다. 차가운 기운이 사무쳤지만 느낄 겨를도 없었다. 따라온 무호사부들이 던진 밧줄은 튼튼하고 단단했다. 얼음이 더 깨질 수도 있기에 인규는 줄을 몇 겹으로 손목에 감았다.
"끌어당기겠습니다."
"아니..다. 두 사람의 무게를 지탱할 수는 없으니.. 마마부터 올리겠다."
벅찬 숨으로 말을 끝낸 인규는 연의 허리를 감싸 쥐었다. 의식 없이 늘어져 흔들리는 몸은 힘주면 부러질 것처럼 가늘고 여렸다. 커다란 그의 손에는 한참 모자라게 들어맞은 허리였다. 큰 기합과 함께 여인을 들어 올리자 기다리던 궁인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환호했다. 그들은 한꺼번에 달려와 쓰러진 단비를 받아 모셨다. 따뜻한 옷가지에 겹겹이 덮여 멀어지는 여인을 물끄러미 보던 인규는 그제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몸으로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리며 참을 수 없는 오한이 덮쳤다.
"나리! 당기겠습니다. 나리!!"
힘을 주어 당기는 무호사부들의 움직임에 따라 그는 조금씩 못가로 끌어올려졌다. 차가운 얼음바닥에 몸을 대고 거친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그의 시선은 멀어지는 여인을 쫓았다.
"나리! 괜찮으십니까."
병사들은 저마다 두른 피갑을 벗어 그의 어깨에 둘러주었지만 그는 천천히 손을 내저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차가운 기운이 몸을 감싸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뜨거웠다. 인규는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휘청거리는 걸음에 병사들이 놀라 달려와 부축하였다.
"마마께서는 무사..하신가?"
"의청에서 의부들이 나와 살폈으니 괜찮으실 겁니다. 나리께서 빨리 구하셔서 다행이지...큰 일 날 뻔 하였습니다."
"헌데, 나리! 앞으로는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저희들이 해도 될 일인데, 나리께서 그리 급하게 뛰어드셔서 놀랐습니다."
전하께서 총애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저 몇몇 가운데 하나인 후비일 뿐이었다. 왕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고 지켜야 할 무호사부가 목숨까지 걸고 구할 여인은 아니라 생각하는 그들이었다. 냉정한 셈은 무호사 조직을 지탱하는 힘이자 규율이기 때문이었다.
대답대신 인규는 주변을 살폈다.
"전하께는 아니 고하였는가."
옥체가 보이지 않음이 이상했다.
"손내관이 다녀간 것으로 보아 알고 계신 듯합니다. 황주성안 전하께서 모르시는 일이 있으시겠습니까. 직접 오실 일이 아니라 여기셨나봅니다."
귀이 여겨 밤마다 품으신다는 풍문은 그저 풍문이었나.
차갑게 굳어있던 성심이 녹은 것이 아니었나.
곱게 안아주던 그 밤을 기억하며 마음을 나눈 것은 아니었다.
인규는 어지러운 이마를 짚었다. 깊어지는 생각은 제멋대로 뒤엉켰다.
"나리. 이것을 주웠습니다. 많은 이들이 있었기에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가늘게 눈을 뜬 인규는 낡은 주머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병사들은 주머니의 매듭을 풀어 보았다. 단단하게 묶인 주머니 안에서 그들이 꺼낸 것은 물에 젖은 천조각이었다. 검게 그을려 너덜너덜한 조각은 물기를 머금어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보였다. 잔뜩 기대하던 무호사병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번졌다.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어찌 할까요?"
"아. 주인을 알 것 같다. 전해줄 터이니 이리 내거라."
젖은 주머니를 받아 든 인규의 손이 낮게 떨렸다. 푸르게 변한 입술 사이로 답답한 숨이 터져 나왔다.
*개인적인 일이 있어 글이 늦어졌습니다. ^^a 14편은 더 빨리 오도록 하겠습니다. 날이 너무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욥. *
오시었어요?? 반갑사옵니다~ 금방 또 오신다니 더 반갑고요~
해단이 상사병이 걸렸는데 얼마나 버틸려고 저러는지 원..
남자들 참 불쌍해요..그러고보면 울 집 남자들도 매한가지긴 합니다만..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