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16>



紅纋葉又輝艶陽 붉은 머리끈은 고운 볕에 다시 반짝이고..






말의 더운 김은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달려 나갔다. 숨을 있는 힘껏 마시고 토해내도 공기는 몸을 채우지 못하고 헛 돌아나가는 냥 답답하기만 했다. 단단한 아랫배가 아려오고, 심장은 타는 듯 뜨거웠다. 뜨거운 열기는 살갗을 뚫고 거친 숨으로 뱉어지고 흩어졌다. 아랫배를 묵직하게 짓누르던 통증은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까지 차고 올라 결국 해단의 걸음을 막아 세웠다. 더 달려야 했다. 쇠망치로 머리를 내려치는 것처럼 세차게 찍어 누르는 생각을 잊기 위해서는 더 빠르게 말허리를 차고, 채찍을 휘둘러야만 했다. 헌데, 해단은 손끝 하나, 발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손에든 채찍은 만근의 무게가 되는 것처럼 땅으로 떨어졌다. 목에 쇠추를 매달아 끌어내리는 것처럼 숨이 막혀서 호흡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말목을 잡고 매달려 해단은 포효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람의 소리라기보다는 짐승의 소리에 가까웠다. 온통 칠흙같은 숲을 지배하는 밤의 소리이며, 마음이 흘러 넘쳐 억누를 수 없는 심장을 가르는 소리였다.


"어찌 이리 하십니까!!"


말 한 필, 홀로 달려 나간 왕의 뒤를 가까스로 따라 잡은 무호사부 인규의 음성은 거칠었다. 함께 따라온 무호사병들의 가쁜 숨소리도 하나 둘씩 해단의 주변을 채워나갔다. 고요한 밤의 산길, 급작스런 인기척에 놀란 들짐승은 부산하게 움직이며 자리를 피했다. 까만 밤하늘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별빛을 쏘아보던 해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감히 용안을 마주한 무호사병들은 말에서 뛰어 내려 허리를 굽혔다. 인규 역시 서둘러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얼핏 스친 왕의 눈빛은 기이했다.

붉게 타는 눈동자! 순식간에 인규의 등허리로 소름이 번졌다. 본 적이 있었다.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인규는 뒤를 슬쩍 돌아보며 눈짓으로 병사들을 물렸다. 그때처럼 군왕의 무너지는 모습을 병사들 앞에 드러낼 수는 없었다. 군왕의 흐트러진 눈빛을 병사들 가슴에 다시 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대는 속일 수가 없군."


모르게 한다고 병사들을 은밀히 물린 것을 왕은 알았다. 난처하여 더 허리를 숙인 인규의 등은 팽팽한 긴장감이 번져있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인규와 달리 해단의 입술 사이로는 자조 섞인 웃음이 흘렀다. 속이 텅 빈 웃음은 꽁꽁 언 개울물처럼 차갑고, 추수 끝난 논밭을 가르는 바람처럼 적막했다.


"숨이..막히다."


"까닭을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뒷말을 기대하던 인규는 침묵이 길어지자 한 참 만에 다시 말을 올렸다.


해단은 말에서 내려 굵은 나무를 짚으며 숨을 내쉬었다. 깊게 한다 하여도, 입속에서만 맴도는 듯 가슴은 허 답답하였다.


"칼에 찔린 것도 아닌데, 칼에 찔린 것처럼 숨이 이리 막힐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칼에 찔렸던 그 날보다 더욱 답답하다. 답을 찾아야 하는데 어디부터 시작인지 끝은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겠나이다."


재빠른 인규의 답이었다.


그러나 해단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연의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자꾸 생각이 났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한 마디 한 마디 이어가던 가는 숨이 금방이라도 멈출 듯이 아려서 그런지도 몰랐다. 해단은 나뭇가지를 쥐고 힘주어 꺾었다. 툭 하며 부러진 가지는 해단의 발밑으로 떨어졌다. 밑에 떨어진 나뭇가지는 산비탈을 타고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두렵다."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잘려나간 가지처럼 돌아가지 못할까 두렵다."


"신은 뜻을 모르겠나이다. 편히...하명하시옵소서."


"눈보라가 치던 날, 미와산에서의 일을 기억하느냐. 그때, 과인은 머리를 다쳤다. 정신을 잃는 순간, 인기척이 느껴졌는데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이었음에도 살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편히 눈을 감았는지도 모르겠다. 깨어나 곁을 지키던 여인은...하...여인임은 바로 알지 못했지만, 푸른 들풀처럼 파릇하고 단단했다. 지나치게 보기 좋아, 가져오지 않았고 더는 볼일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아니, 따져보니 더 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 싶다. 그대로 그 자리에 두는 것이 옳다 여겼다."


"어찌 모르겠나이까."


"허면, 그 후는 어찌 되었느냐. 바위 틈에서 곤히 숨 쉬던 들풀은 어찌 되었느냐. 들풀이 어떤 연유로 화려한 화분에 담아져 내게 보내졌으며, 들풀을 덮고 있던 허연 범가죽은 어떤 까닭으로 불에 그을려 찢긴 조각이 되었느냐."


한꺼번에 쏟아낸 옥음에 인규는 잠시 숨을 골랐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지금까지...듣지 못하셨습니까? 그 피갑에 대해 모르고 계셨습니까?"


해단은 느리게 인규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눈에 담긴 열기는 놀라움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의아한 눈빛이 아니라 지금까지 어찌 모르고 있느냐 하는 책망의 눈빛이었다. 모시는 자가 취할 시선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해단은 그것을 물어 따지지 못했다. 인규의 깊은 눈동자 안에 담긴 비난만큼이나 진실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연유를 물었다. 그리 된 연유를 묻지 않느냐."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한데 엉켜 괜한 화로 솟구쳤다.


"그날 전하께서 내리신 피갑을 태유소가 뺏어 불 속에 던져 태웠습니다. 그걸 되찾으려 불 속에 손을 넣다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리 찾은 것이 그 그을린 조각입니다."


"그깟 것이 무어라고 미련하게 불 속에 손을 넣느냐. 대체 그게 뭐라고!"


"마음이라 여기셨던 모양입니다."


가까스로 해단을 지탱하던 심중의 끈 하나가 툭 끊어졌다. 애써 태연하게 버티던 해단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다른 이를 통해 다시 듣는 것인데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마음이라 여기면, 연이 그동안 그리 소중히 품었던 것이 마음 한 자락이라 하면 그가 했던 말과 행동들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 지 짐작도 할 수 없어 부인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많이 아팠겠다. 그 뜨거운 열기에 많이 아팠겠다. 상처가 꽤 깊었겠다.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는데...그 작은 손에 감당키 어려운 상처였을 텐데.."


"더 아픈 것은 아마도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손의 상흔보다 아픈 것은 그날 겪은 마음의 상흔이었을 것입니다."


인규는 물러서지 않았다. 해단의 가슴에 찬바람이 마구 밀려들어왔다. 더운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하...그리 아파하더냐. 그리 힘들어하더냐."


순간 인규는 무의식 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단비의 일을 재차 묻고 있는 옥음에는 괴로움이 담겨 있었다. 아프냐 묻는 군왕도 아파하고 있었다. 순간의 치기로 감추지 못하고 튀어나간 비난이 황망한 인규였다. 같은 마음이었을 터, 감히 그가 탓할 일도, 앞서 나설 일도 아님이 분명했다. 알 수 없게 허한 마음으로 미와산의 눈보라가 다시 부는 듯 느껴졌다. 세차게 불던 그 날 밤 한치 앞을 보지 못해 나아가지 못했던 것처럼 심중은 복잡하여 말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모진 삶이었습니다. 반쪽짜리 아비는 아비라 할 수 없는 자였습니다. 낯선 사내와 밤을 보낸 딸을 잡은 듯, 아니 그보다 도망가는 계집종을 잡아 벌하는 것처럼 극악하였습니다."


인규의 말은 어두운 기억을 더듬기만 했다.


"더 소상히 아뢰거라.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다 할지라도 들어야겠다. 들어 품어야 겠다."


"음문(陰門)...검사를 받았나이다."


망극하여 떨리는 인규의 목소리였다. 멍해진 해단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꽉 쥔 주먹으로 굵은 힘줄이 솟아났다. 해단은 인규에게 거칠게 다가가 앞섬을 휘어잡았다.


"무엇을 받아?!"


"황공하옵니다."


"그대가 어찌 그것을 보았더냐! 설마...그리.."


"노복들 앞이 었습니다. 사내종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


인규를 잡고 흔들던 해단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뒷말을 더 듣지 못하고 텅 빈 숨을 몰아 쉬는 해단은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가까스로 고목을 짚고 기대서 인규를 돌아보는 눈은 붉게 변해있었다.


"하..지독했다. 잔인했다.. 차마 담지 못할 말을 퍼부었다. 감히 할 수 없는 행동으로 모욕했다..그리 했다. 과인이...그리했다. 그리 했단 말이다!! 모진 일을 당하고도 다시 만나 좋다고 했던 여인이었다. 나로 인해 그런 일을 당했음에도 먼저 손을 내밀며 바보같이 기쁘다 하던 여인을 내가 짓밟았다. 아비에게 받은 상처를 보듬기는커녕 들쑤시고 헤집어 더 아프게 했단 말이다. 더 아프게...했다."


"모르셨으니.."


별다른 말을 찾을 수 없는 인규는 뒷말을 삼켰다.


"꺼내려던 얘기를 틀어 막고 듣지 않았다! 자포자기 하며 아들을 달라던 마음이었을 텐데, 그 마음을 비웃고 능욕하며 비틀었다. 이유를 설명하려 힘겹게 입술을 떼는 것을 외면하고 옷깃을 잡는 그 작은 손을 쳐냈다. 산에서 소중하게 보듬어 놓고 이제와 모른다고 쳐내며 당연하다 여겼다. 옳다고 여겼다. 잊으라고..다그치며 연의 마음을 보지 않았단 말이다.."


해단의 마음을 감싸며 쳐둔 단단한 벽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연이 손을 내밀어 두들기던 벽은 너무 늦게 깨져버렸다. 해단의 긴 숨처럼 흩어진 말들만이 고요한 산을 울리며 떠나갔다.


















*******************












주화전은 오가는 궁인들로 분주했다. 단비의 병세가 사흘이 넘게 계속 되었기 때문이었다. 황주성의 주인이 급작스러운 사냥을 떠나 자리를 비운 상황이라 주화전을 감싼 말들은 더 흉흉했다. 왕이 자리를 비운 사이 큰일이라도 치루면 후에 닥칠 일을 가늠하기 어려운 궁인들의 애간장은 바짝 타들어갔다. 의부감은 하루에도 몇 번씩 주화전에 들러 진맥을 하고 약을 올렸으나, 단비의 열은 떨어질 줄 몰랐다. 얼어붙은 강물에 빠지고 난 후에도 괜찮던 단비이기에 갑작스러운 발병은 의아했고 황주성은 벌써 단비의 병세를 두고 생사를 논하는 이들로 넘쳐났다.


근심이 가득한 얼굴의 제상궁은 식선을 들고 내실 문을 열었다. 조반도 거의 먹지 못했기에 식선에 차려진 따뜻한 죽의 맛깔스러움이 텅 빈 단비의 속을 자극하길 고대했다. 부러 표나게 달그락거리며 단비의 곁으로 다가간 제상궁은 바리의 뚜껑을 열었다. 고소한 기름 냄새는 금세 방안을 가득 채웠다.


"마마. 한 술 뜨셔야지요. 이리 드시질 않으시면 병이 깊어집니다. 부의감께서 새로 지어 올린 탕약이 독하여 식선을 조금이라도 드셔야 탈이 나지 않으십니다."


"볕이 좋은 날인 듯 하네."


제상궁은 단비의 시선을 쫓았다. 곁창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단비의 얼굴은 표나게 수척했다.


"예. 누각위에 높이 쌓였던 눈들이 녹아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청해도 많이 녹아 수 일만에 배를 띄웠다고 하옵니다."


"바람을 조금 쐬고 싶은데..."


제상궁은 들고 있던 식선을 내려두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곁창으로도 볕은 스며들어왔지만, 바람은 볕처럼 스며들지 못한 까닭이었다. 곁창을 조금 열자 쏟아지는 겨울 햇살이 녹는 눈에 반사되어 유난히 맑게 퍼졌다. 그러나 햇빛과 달리 코끝으로 밀려들어오는 바람은 아직 제법 차가웠다.


"마마, 날이 풀렸다고는 하나 아직은 바람이 차니 창으로만 스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걱정스러운 제상궁의 음성은 잔뜩 가라앉아있었다.


"내 어미 같다."


느린 걸음으로 돌아서던 제상궁은 그대로 멈춰 섰다. 짙어진 단비의 눈빛이 너무 처연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으십니까."


"그대는 아니 그러한가."


열 살도 되지 않던 나이에 궁에 들어온 제상궁은 희미해진 기억을 살풋 더듬었다.


"이제는 얼굴조차 어렴풋하여 추억할 것도 없지만 그 향내는 문득 문득 떠오르곤 합니다. 어린 기억에 품으로 파고들면 향긋한 분내가 코끝을 간지럽혔나이다. 그때 제 어미보다 주름도 깊어지고, 색 바란 흰머리도 더 늘어났지만 지금도 분내를 맡으면 어미 생각이 납니다."


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야윈 손끝으로 머리와 옷가지를 손수 정돈한 연은 제상궁은 가만히 응시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하였는 가."


"궁중의 법도가 그러하옵니다."


"후회 하는 가. 이리 들어와 보고 싶은 이를 보지 못하는 것을 후회 하는가."


제상궁의 입가로 흐린 미소가 번졌다. 제상궁은 몸을 일으키려는 연의 곁으로 달려와 부축하였다. 팔 아래로 느껴지는 가는 손목은 생기를 잃고 부서질 듯 가냘펐다. 마음이 담긴 손길이라는 것은 연에게도 전해졌다.


"후회한 적도 있지만, 입궁하지 않았으면 그 나름대로 또 후회했겠지요. 그리운 것은 그리워서 좋고, 곁에 있는 것은 곁에 있어 좋고, 사람 마음은 다 그러하니 괜찮습니다."


제상궁의 말에 연의 입가에도 흐린 미소가 번졌다.


"고맙네."


연은 뜻 모를 답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제상궁이 도우려 따라 왔지만, 연은 손을 물리며 나무문을 열 뿐이었다. 핏기없는 얼굴과 달리 연의 걸음은 무너지지 않고 또렷하여 지켜보던 제상궁은 그저 뒤를 쫓을 뿐이었다. 눈이 녹아 물기를 먹은 땅 위로 연의 발자국은 또렷하게 새겨졌다.


"마음의 병은 몸의 병을 부르는 법이옵니다. 그리움도 지나치면 병이 되오니 그만 내려 놓으시지요."


후원 가운데 작은 못을 쪼그려 앉아 들여다보던 연은 무릎에 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러한가. 하여 나도 내려놓으려 하는 중이네. 맘껏 그리워 할 때는 이렇게 아프지 않았는데, 내려 놓으려 하니...버리려 하니 이상하게 더 그리워지는 것 같으이. 이럴 땐 어찌 해야 하는 지 아는가."


"잘 모르겠나이다. 다만 신첩의 미욱한 생각으로는...아직은 마마께서 내려놓을 때가 아니라 그런 듯 하옵니다."


제상궁은 연의 작은 등을 위로하듯 바라보았다.


"그 반대일 수도 있지 않겠는 가. 진즉 했어야 하는데, 예전이 내려놓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끌고 와 힘든 것일 수도 있겠지. 그래도 곧 괜찮아 지겠지. 시간이 지나면 곧 괜찮아 지지 않겠는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오면 여름도 오고, 그러다 보면 나도 자네처럼 주름이 깊어지고 더는 아파할 마음이 남아있지 않게 될지도 모르니...이제라도 버리겠다 한 것이 천 번 잘한 일 같네."


제상궁은 깊어진 눈을 깜박거렸다. 입궁하여 진작 버릴 마음이 대체 무엇이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간직할 수 없는 그리움이라면  어머니에 관한 것은 아닐 터, 제상궁의 주변을 감싼 공기는 지극히 위험해지고 무거워진 듯 느껴졌다. 현명한 분이니 알아 할 것이라 여기며 제상궁은 애써 태연한 척 헛기침을 했다.


"전하께서 찾지 않으셔서 혹여 궁금타 생각하지는 않으셨는지요. 전하께서는 지금 사냥을 떠나셔서..황주성을 비우셨나이다. 섭섭한 마음이 있고, 보고 싶은 마음도 있으시겠지만 한번 가시면 보통은 열흘정도 보내시는 지라. 기다리는 마음이 조급하셔도 느긋하게 기다리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입궁한 날부터 거의 매일 찾던 옥보이니 말을 먼저 꺼내지 아니해도 내심 궁금했을 거라 여기는 제상궁이었다. 아니 그 보다 전하를 맞을 때마다 짙어지던 까만 눈동자에 담겨 전해지는 마음이 어렴풋하게나마 읽혔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슬프게도, 때로는 기쁘게도 보이던 눈은 분명 애연(愛緣)을 품고 있었다. 그저 연모라 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스쳐가는 정이라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 보였던 단비였다. 그러나 못을 바라보는 연의 어깨는 미동치 않았다. 찬바람을 맞는 것인지, 피하려는 것인지 홀로 앉은 모양은 알 수 없게 처연했다.


"궁금치 않다네."


짧은 답이었다. 제상궁은 미묘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작년에는 백호를 잡아 오셨지요. 정말 그 크기가 장정 서넛은 족히 합친 듯 하였습니다. 그 가죽을 말려 피갑을 만드셨는데, 전하께서 어깨에 두르고 다니시는 것을 보고 궁인들은 다 두 마리의 범이 함께 다니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들 하였나이다. 궁인들의 눈에는 전하께서 범보다 무섭고 범보다 날래며, 범보다 잘나셨으니 그리할 법도 하지요. 대체 올해는 무엇을 잡아 올지 궁금하지 않으시옵니까."


듣고 있던 연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연은 떨리는 입술을 지긋하게 깨물었다. 찬 바람 때문이지. 다른 까닭이 있을 리 없었다. 피갑은 이미 한줌 재로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어쩌면 애초부터 그런 것은 없었던 지도 몰랐다. 가슴으로 밀려드는 자욱한 통증을 억누르려 연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 또한 궁금치 않다네. 더는...궁금치 않아."


힘주어 말한 것은 들을이가 제상궁이 아닌 연인 탓이었다. 말로라도 다짐하며 마음을 몰아가야만 했다. 연의 답에 제상궁의 등허리로 식은땀이 흘렀다. 모른 척 흘리기엔 지나친 말이었다. 한마디 말에 목숨이 오가는 황주성안, 말을 옮길 이는 어디에도 있었다.


"마마.."


막아서는 마음은 간절했다.


"듣는 귀는 모두 일곱이나, 못 안 물고기가 다섯이니...너무 근심치 말게나. 오늘은 그냥 볕이 따뜻했기 때문이네."


다 안다는 듯, 아니면 전혀 모른 다는 듯 무심하기만 한 음성은 후원을 울렸다. 제상궁은 긴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다 비명을 뱉으며 굳어졌다. 늙은 궁인의 외마디 비명에 놀란 연도 뒤를 돌아 살폈다. 서둘러 엎드린 제상궁 뒤로 선 사내의 모습은 낯설었다. 미와산에서 처음 보았을 때처럼, 어깨를 가로지르는 띠와 가죽신을 신고 말고삐를 잡고 선 모습은 황주성에 어울리지 않아 낯설었고, 기억 속에서 이미 지웠기에 서먹했다. 처음 본 산에서의 모습처럼 크고 넓은 어깨 뒤로 겨울 볕이 아로 반짝였다.


"귀가 모두 여덟이군."


농을 하듯 가벼운 옥음이었지만, 제상궁의 허리는 더욱 굽어졌고, 연은 그저 고개를 살짝 숙였을 뿐이었다.


"전하. 가져왔나이다."


가라앉은 적막을 깨고 달려온 궁인들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자루를 내려놓았다. 다섯이 넘는 사내가 땀을 비오듯 쏟으며 가져온 자루는 옥체를 가릴 만큼 크고 묵직했다. 슬쩍 곁눈질 하는 제상궁과 달리 시선을 주지 않는 연의 어깨만 바라보던 해단은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수고했다. 이만 다들 물러가라."


빠르게 후원을 비우는 궁인들과 달리 제상궁은 연을 슬쩍 바라보고 느릿하게 움직였다. 근심이 담긴 늙은 궁인의 눈빛은 왕에게도 읽혀졌다. 결국 해단은 더디기만 한 제상궁의 걸음을 재촉했다.


"근심할 것이 그리도 많으냐."


"아니옵니다. 다만 마마께서 병중이시라 그것이 염려되었나이다."


"과인에게도 눈이 있어 보이고, 귀가 있어 들리고 마음이...마음이 있어 느껴지니 염려치 말고 물러 나거라."


옥음이 잠시 쉬어갔던 자리에는 마음이라는 말이 있었다. 황주성 주인에게 긴 시간 잊혀졌던 말이고, 듣지 못하리라 여겼던 말에 제상궁의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먼 길...다녀오셨습니다."


할머니가 세월을 돌아 장성한 손주를 맞는 듯 따뜻하고 반가운 음성이었다. 해단의 입가로 흐린 웃음이 번졌다. 괜히 민망하여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늙은 제상궁의 더욱 굽어진 허리는 어느덧 후원 문을 나서고 있었다.


"다시 일곱이 되었군. 그대와 나 그리고 물고기가 다섯이라 했지."


연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 늘 그러하듯 미소를 머금은 붉은 탈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편안했다. 숨은 마음이 무엇인지 궁금하고, 그리워 애가 탔던 날들은 그리도 보고 싶고 쓸어 담고 싶던 얼굴이었는데, 이제는 보지 않아 다행이었다. 사내가 숨긴 것처럼 연도 그러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늘 가슴에 품었던 얼굴을 더는 보지 않으면 연도 버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연은 온 몸 구석구석으로 번지다 눈 밑으로 뜨겁게 올라오는 아릿함을 애써 누르며 작게 숨을 토해냈다.


"사냥을 다녀왔다."


"그러합니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음성은 해단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무엇을 잡아 왔는지 궁금하지 않느냐."


해단은 연의 마음을 모르는 척, 자루를 가리키며 농하듯 툭툭 말을 뱉었다.


"귀가 여덟일 때, 듣지 않으셨습니까. 더는 궁금치 않습니다."


열 보도 되지 않는 거리인데, 연의 말은 점점 더 멀게만 느껴졌다. 해단은 연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생기있던 양 볼과 반짝이던 눈동자는 꿈결에서 본 냥 사라지고 없었다. 보기 좋게 자라던 들꽃을 꺾어 버린 것이 누구인지 잘 아는 해단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렵기만 했다. 말을 찾지 못한 사내는 그저 묶은 자루를 풀 뿐이었다.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해결 될 것처럼 단단히 묶어둔 자루를 열심히 풀어헤쳤다.


드러난 것은 흙곰이였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흙곰은 연 보다도 컸다. 흙곰을 번쩍 들어 바닥에 펼치자 감겨있던 가죽이 보기 좋게 펴지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붉은 빛이 도는 털은 햇빛아래 반짝거리며 빛이 났다. 바람이 불면 털이 춤을 추듯 넘실거려 마치 꽃이 피어오른 언덕을 보는 듯 보였다.


"이틀을 꼬박 쫓아 잡았다. 꽤나 빠르고 큰 녀석이라 힘이 들었지. 다시 이틀을 꼬박 말려 만든 것인데, 괜찮으냐."


그제서 연은 흙곰을 내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가죽만 덩그러니 남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딘지 모르게 자신과 닮은 듯 느껴졌다. 생기를 읽은 흙곰의 눈과 더는 더운 숨을 내뿜지 못하는 코와 입...연의 눈가가 천천히 붉어졌다.


"모르겠습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연을 향해 해단은 천천히 다가갔다.


"어찌..그러느냐. 더 멋진 것을 잡아올 것을 그랬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가서 잡아오마."


"사냥을 가시는 것은 전하의 뜻이오나, 더는 저와... 상관 없는 일입니다."


연은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내저었다.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만질 수 있는 거리였는데, 해단이 가까이 간 것보다 연은 더 멀게 물러났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손끝을 무색하게 내리며 해단은 입술을 깨물었다.


"선물이다."


"제게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 한마디는 마음을 담아내며 흔들렸다. 떨리는 음색과 달리 또렷하게 전해지는 뜻은 분명했다. 해단은 천천히 얼굴에 쓴 붉은 탈을 벗었다. 밤새 달려 온 탓에 지친 용안이었다.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과 그것보다 어두운 검은 눈동자는 연의 기억보다 보기 좋았다. 맨 처음 낙마하여 정신을 잃은 사내를 보고 했던 말과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멋지게 생긴 사람은 처음이라 했었다. 아마 그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따뜻하게 잡아줬던 손과 보듬어 주던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는데, 혼자 착각했던 것은 사내의 모습이 지나치게 멋있기 때문이었다. 제자리에 잡혀있어 군더더기 없이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는 모양새를 처음 봐서 그리 여겼던 모양이었다. 씁쓸하게 번지는 생각을 모으면 모을수록 연의 어깨는 가늘게 떨렸다.


"백호만큼은 아니지만 흙곰 역시 귀한 것이다. 이것으로 피갑을 만들어 줄 터이니.."


"이만 물러가고 싶습니다."


옥음을 자른 연의 말은 단호했다. 해단은 고개를 저으며 연에게 다가갔다.


"이런 것 따위로 괜찮아질리 없겠지만.."


"이만 물러가게 허락해주십시오.!"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귀를 막으며 고개를 숙이는 연이었다. 말을 하려는 해단의 입술은 자꾸 뒤틀렸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찾을 수가 없었다. 이틀을 꼬박 흙곰을 쫓으며 연이 보면 좋아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뼈저리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멍하게 굳어져 귀를 막은 연의 작은 손을 들여다보고 서있을 뿐이었다. 드러난 손등으로 뭉개진 작은 흔적이 있었다. 하얗고 가는 손에 어울리지 않는 붉은 흔적은 낙인을 찍은 듯 짙고, 깊었다.


"아팠느냐."


해단의 음성은 정처 없이 떨렸다.


연은 고개를 들었다. 사내의 시선이 머문 곳을 확인한 연은 서둘러 소매깃을 내려 상처를 감췄다.


"많이 아팠느냐."


"전하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더 이상 해단의 허락을 기다릴 수 없는 연은 멍하게 굳어진 사내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눈 앞이 자꾸만 흔들려 오롯하게 걸음을 옮기는 것은 힘들었다. 울지 않겠다고 입술을 깨물며 연은 흙곰도 지나쳤다. 걸음마다 마음은 찢겨지며 흩어져 연을 따르지 않고 후원을 굴러다니는 듯 했다. 그래도 걸음을 다 옮겨 안으로 들어가면 괜찮아 질 것 같았다. 사내의 모습을 보지 않으면 제멋대로 춤추는 마음도 다시 추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아."


한 걸음이 남은 상황이었다. 한 걸음만 더 옮기면 되는 순간이었다. 딱 한 걸음...그러나 연은 그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사내의 말이 너무 아파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 부르지 마십시오. 이미 버린 이름입니다. 입궁하며...진작 버린 이름입니다."


"연아.!"


"그리 부르지 마십시오!"


참지 못해 뒤를 돌아 소리 지르던 찰라 센 바람이 후원을 훑고 지나갔다. 미와산에서 만났던 바람처럼 세찬 바람은 서있는 두 사람을 휘감다 멀어졌다. 순간, 연의 흐릿한 눈동자에 붉은 끈 하나가 보였다. 흙곰에 목에 두른 붉은 끈은 바람을 타고 허공으로 치솟다 힘없이 떨어졌다. 연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기억..하느냐."


연의 눈은 점점 커졌다. 꼼짝할 수 없어 굳어진 연을 대신하여 해단은 흙곰의 목에 감아둔 붉은 끈을 풀어 손에 들었다.


"머리를 다친 날이 있었다. 그날 내 목숨을 구해준 여인이 내게 묶어준 것이다. 작은 손으로 단단히도 잘 묶었더구나. 그 여인은 내 머리에 피가 나서 묶은 것이었을 텐데, 훗날 보니 묶은 것이 그 뿐이 아니었다."


연은 손을 들어 가슴을 눌렀다.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이렇게 누르고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해단은 망설이지 않고 연에게 다가왔다. 연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가슴을 누르고 있는 손을 힘주어 잡았다. 뜨거운 손길에 사로잡힌 연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어지러웠다.


"무엇을 또 묶었는지 묻지 않느냐."


연의 눈은 따끔거렸다. 가슴이 요동치고 흔들려 사내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마음이다. 내 마음을 묶어...가졌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아니 예상치 못한 것은 말 뿐이 아니었다. 해단은 천천히 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거칠게 품으려던 것과는 다른 부드러운 손길은 미와산에서처럼 따뜻하고 포근했다. 연의 볼을 타고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연은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지만 그의 손길에 사로잡혀 들리고 말았다.


"몰래 감추며 우는 울음이 싫다 하지 않았느냐."


해단은 단단한 손을 펴 연의 양 볼을 감싸 쥐었다. 해단의 손을 타고 번지는 연의 눈물은 뜨겁기만 했다. 연은 눈을 감았다.


"보지 않을 것입니다. 듣지도 않을 것입니다. 분명 이리 해놓고 모른다 할 것입니다. 흙곰을 가져다 놓고...감싸놓고 그땐, 사냥에 다녀와 잠시 그랬을 뿐이다...그러실 것입니다."


온 몸으로 거부하는 연을 해단은 더욱 힘주어 안았다. 몸에 닿는 연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잘못하였다. 마음을 주는 법을 잊어...그리하였다. 누군가를 믿는 법을 잊어...그리 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너무 보기 좋아 욕심이 생겨 아낄 것 같았다. 그리 아끼다...아끼다...잃어버릴까 두려워 보지 않으려 했다. 가져 품기엔 너무 탐스럽고, 반짝거려 용기 낼 수가 없었다. 나의 길에...왕의 길에 끌어들여 함께 가자 말하는 것이 힘이 들었다. 꿈결처럼 편안했던 마음마저, 기억마저 짐이 될까봐 모른다 했던 것이다. 그저...그랬을 뿐이다. 마음은..내 마음은 그날 이미 묶였다 하지 않느냐."


아기를 어르는 듯 연의 등을 쓰다듬던 손길은 어느 덧 연을 끌어 안고 있었다. 도리질을 치던 연에게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입술을 부비었다. 따뜻하고 촉촉한 입술은 연의 눈물을 닦으며 느릿하게 기다렸다.


"미안하다..너무 늦었지만 미안하다."


진심이 묻어나는 옥음은 낮게 떨렸다. 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더는 보지 않고 싶었다. 더는 듣지 않고 싶었다. 아니, 간절히 보고 싶고, 간절히 듣고 싶었다. 하여...내려 놓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내려 놓을 수 없어 가져온 마음을 이제와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사내의 말을 믿고 싶었다. 두려움과 서러움에 쏟아지는 눈물은 쉼 없이 흘러내렸다.


무너진 흐느낌이 한 참 만에 멈추었을 때, 연의 입술은 해단의 입술에 맞닿아있었다. 어느 때보다 뜨거우나 부드럽고, 어느 때보다 세차나 기다릴 줄 알았다. 굳어있는 연의 어깨가 부드러워질 무렵 해단은 연을 번쩍 들어 올렸다. 길어진 입맞춤에 혼미하던 연은 가늘게 눈을 떴다. 눈물이 맺힌 검은 눈동자로 해단의 짙은 눈매가 아로 새겨졌다. 온전히 연을 향한 눈은 보기 좋게 웃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내의 웃음에 연의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졌다.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사내라는 것을...웃으면 이리도 보기 좋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연이었다.


"그리 웃을 수 있다는 것을..처음 알았습니다."


해단은 연을 침상에 가만히 내려놓다 눈을 반짝였다.


"마음에 드느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연의 볼이 빨갛게 물들어갔다. 해단은 연의 볼을 감싸 쥐며 더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는 자주 웃으마. 마음에 든다 하니 다행이다."


해단의 입맞춤은 연의 입술을 따라 머물다 조금씩 목덜미를 타고 내려왔다. 해단의 입술이 지나간 자리마다 뜨거운 흔적은 빨갛게 꽃을 피웠다. 연의 입술 사이로 아리한 숨결이 토해졌다.


"이렇게...좋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연의 옷을 풀어 젖히고 드러난 어깨를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해단은 중얼거렸다. 듣고 있는 연의 볼은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같은 마음임이 부끄럽고, 방안을 가득 채운 숨소리가 민망하고, 창을 통해 들어오는 한낮의 햇빛이 면구했다.


"아직 볕이 따갑습니다."


"창을 닫으면 될 일이다."


해단의 입술은 어느 덧 치맛단을 파고들고 있었다. 무릎을 지나쳐 조금씩 올라오는 사내의 입술을 감당하지 못한 연의 허리는 점점 뒤로 젖혀졌다. 그러나 사내는 연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더욱 뜨겁게 탐하였다.


"밖에서도.... 다 알 것입니다."


가까스로 토해낸 말에 해단은 잠깐 고개를 들어 웃었다. 방안을 낮게 울리는 웃음소리는 듣기 좋게 굵었다.


"밤에는 밖에서 모를 것이다 여겼느냐. 황주성안 왕을 따른 이들에게 밤낮이 없으니 개의치 말거라."


해단의 말에 연의 눈이 더 동그랗게 커졌다. 몸을 비틀며 옷자락으로 가려보려 애를 썼지만 사내의 손길이 닿은 곳은 의지와 상관없이 힘이 빠질 뿐이었다. 어느 때 보다 더 천천히 연을 탐하던 해단의 손끝은 허벅지를 타고 올라 밑바대를 파고들었다. 연의 몸은 좁고 따뜻했다. 희미하게 배어나오는 꿀물은 꽃잎을 촉촉하게 적시고 있었다. 해단은 더 깊게 손을 밀어 넣으며 꽃잎을 헤치고 들어갔다. 부드럽게 어루만질 때마다 연의 몸은 가늘게 떨렸다.


"허락하거라. 간절히 원하고 있으니 허락해 주거라."


연의 귀를 간질이는 옥음은 기다리고 있었다. 연이 허락하길 바라고 있었다. 연은 고르지 못한 숨을 가까스로 내뱉으며 해단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허락한 것이냐."


"예."


"마음을 주는 것이냐."


"예."


해단은 몸을 일으키며 옷가지를 하나씩 풀어헤쳤다. 속대를 풀자 부풀어오른 하의가 연의 눈에 들어왔다. 놀란 연은 눈을 감아버렸다. 해단은 연의 손을 가만히 잡아끌었다. 사내의 손을 따라 닿은 곳은 뜨겁고 단단했다. 어찌해야 할 지 몰라 어색하게 굳은 손이 사내의 무두를 스치자 해단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제발..."


이번엔 사내가 애원하고 있었다. 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은 조금 더 용기를 내 사내의 기둥을 움켜쥐었다. 얇은 천 아래 느껴지는 옥봉은 사내의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사내의 떨림도, 사내의 마음도...연의 손끝으로 진하게 전해졌다. 손안에서 더 솟구치는 기둥을 연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떨리는 마음을 다 안다는 듯, 파고들어 탐하고자 하는 기운을 이해한다는 그런 손길이었다. 연은 천천히 눈을 뜨고 해단을 바라보았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버티는 해단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저도..같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저도 원하고 있습니다."


가까스로 뱉은 말은 도화선이 되었다. 순식간에 허리춤을 내린 해단은 기다리고 있는 연의 몸으로 밀고 들어갔다. 연이 미처 숨을 쉴 새도 없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연은 거부하지 않았다. 깊게 들어오는 사내의 몸과 함께 숨을 쉬며 함께 움직이면 되었다. 빠빳하게 달궈진 기둥이 연의 꽃길을 따라 움직일 때마다 연은 사내의 목을 끌어안았고, 해단은 여인의 입술을 더 세차게 빨아 당겼다. 어느 때보다 간절한 마음이 담긴 기둥은 더 단단하게 여인을 두드렸고, 어느 때 보다도 원하는 여인의 꽃길은 부드럽게 사내를 조여왔다. 곁창을 통해 들어오는 볕은 사내의 등줄기를 따라 맺힌 땀방울을 반사시키며 방안에 고르게 퍼졌다. 두 사람을 태울 듯 뜨거운 열기는 사내의 하복부가 빠르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퍼져, 거친 숨소리로 돌아 나왔다. 극정을 향한 사내는 결국 연의 이름을 부르며 뜨거운 진액을 토해냈다. 이름을 부를 때, 궁극의 절정은 사내에게서 여인으로 전해져 끝을 맺었다. 거친 호흡을 추스르지 못한 사내는 연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내려앉았다.


"참 좋다."


연은 사내의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며 살짝 웃었다. 해단은 고개를 들어 연의 눈동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반짝이는 연의 눈동자에 더욱 미안해진 해단은 씁쓸하게 웃으며 연의 입술을 가만히 매만졌다.


"미안하다."


"이젠 괜찮습니다."


"그래도 미안하다."


"정말 괜찮습니다."


"한 숨 자고 싶은데, 곁에 누워도 되겠느냐."


연은 몸을 살짝 일으키며 이불을 정돈하였다. 작은 손이 비단에 닿을 때마다 바스락 소리가 듣기 좋게 퍼졌다. 해단은 연이 하는 것을 가만히 보다 연의 손을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런 행동에 중심을 잃은 연은 해단의 품에 쓰러지듯 안겼다.


"이불을 정리해두겠습니다."


"이불 따위는 필요없다."


"감기 드십니다."


"미와산에서처럼 네가 꼭 안아주면 될 것이 아니냐."


"그때는 전하께서 주신 피갑도 있지 않았습니까."


"허면, 밖에 있는 흙곰을 가져오면 되겠구나. 내 잠시 나갔다 올 터이니 기다리거라."


해단의 말에 연은 도리질을 쳤다.


"곰을 처음 봐서...솔직히 무섭습니다."


"그리 생각할 줄 알았다. 하여 나도 머리를 자르려 했다. 헌데, 그리하면 끈을 묶을 곳이 마땅치가 않더구나. 네가 준 머리끈 없이 흙곰 따위는 내밀어 봐야 소용없을 것 같아 머리를 남겨두었다."


"참..고약하십니다. 그걸 보고 마음이 풀어질 거라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연의 음성은 앙칼져졌다. 해단은 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기대는 했지만 자신은 없었다. 다만...흙곰만 가져가는 것 보다는 낫겠지 싶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짐짓 호들갑을 떠는 사내의 행동에 연은 피식 웃었다.


"어찌 지니고 계셨습니까."


"너는 어찌 피갑을 지니고 있었느냐."


"어쩐지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그러했다."


답하는 해단의 말에 연은 희미하게 웃으며 마음을 보여주었다. 해단은 연의 입술에 몇 번이나 입을 맞추며 연을 보듬었다. 사내의 품에 안겨 눕자 연의 몸으로 나른한 온기가 퍼졌다. 연은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깜박이며 애를 썼지만 쏟아지는 잠은 어쩔 수 가 없었다.


"연아. 나는...오래 전에...나는.."


막 잠이 들려는 순간 무슨 말이 들렸던 것도 같지만 연의 숨소리는 이미 고르게 번지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댓글 '9'

하루

2010.01.23 02:33:37

기다리고 있었어요.^^
해단이 연의 마음을 알아줘서 다행이예요. 그 동안 연이 아파한거 다 상쇄할 만큼 연에게 잘 해줬으면 해요.

줌마

2010.01.23 06:07:08

제가 본 럽씬중에....가장 숨막히고.....조심스럽고......눈가를 울리는 연과 해단이었습니다.
작가님!!!! 영영 안오시는 줄 알고.....해단의 맘을 기다리는 연처럼, 연의 맘을 기다리는 해단처럼 기다렸지 뭡니까.
이제라도 오셔서..넘 다행이고....이렇게 연과 해단이 더이상 서로의 맘 가눌 곳을 찾지 못하여 흩어지지 않아도 되어 너무나 다행입니다. 맘이 넘쳐 몸으로 흐르는 둘의 사랑 많이많이 보여주실거죠.

혹혹

2010.01.23 10:02:42

으하,,,,,아까워서 읽는게 너무 싫을만큼,,,너무 좋았습니다 해단이 마음을 끝까지 보여준것도
연이 미적미적 끌지 않고 바로 받아준것도ㅡㅡㅡ 너무 좋고 므흣해져요ㅡㅡㅡㅡ

마가렛

2010.01.23 11:51:00

지현님은 무늬만 테러리스트 입니다요..마음 약해서 해단을 못굴리시고..ㅎㅎㅎㅎㅎ
연이 쉬이 해단을 용서해주누만요..하긴 저리 밑바닥까지 진심을 보이는데 도리가 없죠..ㅠ.ㅠ

하지만 지현님은 여전히 조금씩 테러를 하시는군요..기다리다 목빠지는 줄..흑흑..
맘같아선 아기천사님 제가 봐 드리고 싶은 맘이 굴뚝이라는^^;;

위니

2010.01.23 14:52:41

왕이니까 봐준다는 심정으로 글을 마쳤...^^;;....두사람 이제 마음을 확인했으니 더이상의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잘읽고갑니다 건필하세요

큐리

2010.01.25 13:18:25

두사람이 솔직해지니. 제가 다 후련하네요..

나여

2010.01.25 20:08:17

서로 솔직해지니,,,,분위기 좋잖아요....

너구리

2010.02.19 11:47:13

어서오세요. 제발..

독립815

2010.03.11 20:33:59

현실에서 저런 남자라면 당장 이혼하라고 그걸 용서해주는 연이 미련하다고 한마디 해 주었을텐데..
둘의 마음은 이어졌는데 태유소가 앞으로 어찌 방해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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