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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부웅. 부웅. 부웅…."
안나는 심하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푹신한 소파에 몸을 비볐다. 간질이던 진동이 끊겼다. 다시 평화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부웅. 부웅. 부웅…."
으윽. 괴로운 신음소리가 기어이 새어나왔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허리 부근을 더듬던 안나는 바지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요란한 진동음에 하아,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으…응. 어. 버스패스? …아! 맞다. 알겠어. 날아갈게!"
안나는 주위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달려 나갔다. 생활비가 떨어져 어제 빌려 쓴 제시의 버스패스가 그녀의 손에 있었다. 어젯밤 집에 들어가면 주려고 했던 건데 어쩌다 처음 와 본 집에서 잠을 자게 돼서 그럴 수 없었다. 밤새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그치고, 겨울 내내 보기 힘들었던 햇빛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안나는 햇빛을 만끽할 새도 없이 두 채의 집을 지나쳤다.
뒤통수에 느껴지는 뻣뻣함이 관자놀이까지 찌르르 뻗쳤다. 손이 물에 푹 적셔진 솜 마냥 늘어졌지만, 간신히 힘을 끌어 모아 이마를 짚었다. 흐느적 흐느적 이마를 매만지던 손 아래로 단정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서서히 눈꺼풀이 열렸다. 하얀색 천장. 주렁주렁 흘러내린 샹들리에. 샹들리…에? 흐릿한 눈동자가 짙어졌다. 우리 집에는 샹들리에가 없는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여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른쪽으로 베이지색 커튼이 달려있었다. 커튼이 다 여며지지 않은 사이로 날카롭게 햇빛이 빛났다. 아주 연한 노랑 벽지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갖가지 색깔이 마음대로 어우러진 난해한 그림들을 빼면 아주 깔끔한 공간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도 이 공간은 한 번도 온 적 없는 곳이었다. 여자의 머리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벽난로 옆에 텔레비전? 그리고 하얀색 소파? 번쩍! 눈이 커지며 손이 재빨리 몸을 더듬었다. 외투의 텁텁함이 느껴졌다. 가느다란 숨이 흘러나왔다. 깔깔한 입안에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는 볼품없이 구겨진 외투를 툭툭 당겼다. 소파 옆에 서 있는 트렁크를 보니 혼란스러운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여자는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을 더듬었다. 런던행 비행기를 타고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9시가 넘은 시간이었나? 택시를 탔고, 택시 기사에게 주소가 적힌 종이를 건네줬다. 주소의 집에서 머리가 곱슬곱슬한 여자가 나왔다. 그리고, …방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내 방세를 가지고 전에 살던 러시아 여자가 나갔다고… 맞다! 사기를 당했다!
"딸깍."
양 볼을 감싸 쥐던 여자의 동작이 일순 멈췄다.
"삐걱. 삐걱."
이어지는 소리에 여자의 피부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까슬까슬한 입안에 침이 고였다.
"삐걱."
멈춰지지 않는 소리에 여자의 고개가 서서히 들렸다. 돌아보면 안 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라고 내면에서 아우성쳤지만, 언제나처럼 본능적인 행동을 누를 수가 없었다. 여자는 떨리는 입술을 물고, 소파 등받이에 가려있던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여자의 눈이 빠질 정도로 커졌다. 눈동자는 얼었다. 하얀색 반팔 셔츠에 머리를 꿰고, 오른팔을 밀어 넣으려던 남자는 이상한 기운에 주방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이상한 기운을 따라 시선을 돌린 곳에 어제 문제의 여자가 깨어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눈 깜빡임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여자의 눈길에 그도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여자의 시선을 마주하다 어렵게 입을 뗐다. 여자의 강렬한 눈빛에 그의 목구멍도 묵직해졌나 보다. 하지만 여자는 계속 그를 시선에 묶어두었다. 셔츠를 입으려던 자세라 불편했지만,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놀란 듯, 그러나 잡아먹을 듯 맹렬한 시선은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눈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던 그의 눈도 그녀를 향해 깊게 들어갔다.
"이봐요."
그와 그녀의 대치된 눈빛이 만들어낸 가라앉은 공기를 걷어내고자 그가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여전히 여자의 눈빛은 떠날 줄 몰랐다. 아! 갑자기 생각났다. 펍의 종업원과 낯선 언어로 대화하던 여자가. 이 여자는 지금 그의 영어를 못 알아듣고 있는 것이다. 경계 눈빛의 이유를 알게 된 남자는 팽팽한 긴장감을 걷어내기 위해 천천히 엉거주춤 있던 오른팔을 내리고 왼팔을 셔츠에 끼워 넣으려 했다. 순간, 여자의 눈이 그의 눈에서 떨어졌다. 그의 맨가슴에 눈길을 닿자마자 여자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옇게 질려있는 여자의 얼굴에 놀란 그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꺄아악
그가 움직이자 여자가 새된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이봐요. 진정해요!"
그가 한발자국 더 다가가며 소리쳤지만, 여자의 비명은 더욱 커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그도 그녀에게 손사래를 치며 진정하라고 계속 외쳤다.
"이봐요! 나는 어제 펍에서… 아니. 그러니까!"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던 그는 여자가 영어를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상기했다. 젠장! 그는 이를 악물고 새까만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러자 여자가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돌려 달려 나갔다. 문이 열려있었는지 여자가 현관을 가로질러 낮은 대문을 열어 길가로 질주했다. 남자는 놀라 막 샤워하고 나와 맨발이라는 사실도 잊고 여자의 뒤를 따랐다.
"이봐요!"
남자의 부름 따위는 여자에게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자의 긴 머리가 강풍에 휘날리는 사시나무가지처럼 제멋대로 휘날렸다.
"어?"
밤샘을 하고 옷이라도 갈아입겠다고 휘적휘적 집으로 가던 부락은 멍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한산한 주택가에서 한 여자가 바람처럼 뛰어가고, 그 뒤로 상체가 반쯤 발가벗겨진 남자가 맨발로 쫓아가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부락은 며칠 밤을 새서 헛것이 보이는 건 아닌가 싶어 눈을 잠시 감았다 떴지만, 이상한 남녀의 추격전은 조금 멀리서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집에 가야한다는 생각은 잊은 채, 경찰서에 전화를 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했다.
"어? 어? 어!"
제시와 함께 나오던 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뛰어오는 여자가 점점 또렷해졌다. 그리고 그 여자가 어제 펍에서 뻗은 여자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나는 놀라 대문을 열고 거리로 나왔다.
-이봐요!
안나가 여자가 지나가려는 길목을 막고 큰 소리로 외치자, 여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달려오던 여자가 안나의 팔을 잡고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이봐요!"
여자의 뒤에 뛰어오는 남자를 보고 안나의 아래턱이 떨어졌다. 남자의 모습이 정말 가관이었다. 누가 보면 어디 미친 사람이 아침부터 생쇼를 한다고 여길 차림이었다. 남자가 몇 걸음 앞에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남자의 격한 호흡소리에 안나의 팔을 잡고 있던 여자가 깜짝 놀라더니 안나의 등 뒤로 모습을 감췄다.
-에? 왜 그래요?
여자가 겁에 질린 듯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저었다. 안나는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구나 직감했다. 남자를 보는 안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에요?"
허리를 굽혀 배를 부여잡고 있던 남자가 번쩍 머리를 들어 안나를 쳐다보았다. 아직 숨이 가쁜 그는 눈으로 대체 무슨 뜻이냐!고 묻고 있었다.
"지금 모습을 보세요!"
남자가 미간을 확 찌푸리며 자신의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왼팔부터 복부까지 맨살이 훤하게 들어나 있었다. 트레이닝 팬츠 아래로 맨발은 빨갛게 얼어있었다. 젠장. 그의 입에서 낮은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는 후, 긴 한숨으로 눈앞을 가린 머리칼을 걷어내고, 천천히 티셔츠를 입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믿음이 안 가는 말인데요."
안나의 팔을 잡은 여자의 손아귀에 더 힘이 들어가자, 안나도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하룻밤 재워준 보답치고는 너무 과하군요."
남자가 양팔을 올려 떳떳하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럼 왜 이 분이 이렇게 무서워 하는 거죠?"
"후우. 그게 나도 궁금합니다. 나는 그저 셔츠를 입으면서 주방으로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아직 당신들이 깨어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죠. 그런데 갑자기 여자가 나타났죠. 그리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어요. 나는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지만, 여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여자가 영어에 능숙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설명할지 생각하는데 여자가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대체 뭐 때문에 그랬는지 한 번 물어보시죠."
쉼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그의 말에 안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저렇게 막힘없이 말하는 건, 분명 거짓말이 아니었다. 안나는 슬쩍 여자를 살폈다. 여자는 아직도 겁에 질려 있었다.
-괜찮아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줄 수 있어요?
안나의 속삭임에도 여자의 불안함을 가시지 않았다.
-후…음, 그러니까 어제 펍에 오신 건 기억나죠? 내가 데리고 들어갔잖아요.
여자가 눈을 깜빡였다. 기억이 난다는 신호였다.
-당신이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말했어요. 맥주를 마셨고, 당신은 …뻗었어요.
-네?
여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신, 술이 많이 약하던데요. 여하튼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데 저 남자가 하룻밤 지낼 곳을 제공해 주었어요. 정말이에요. 나도 함께 묵었어요. 당신이 자고 있는 반대편 소파에서 잤어요. 룸메이트에게 급한 볼일이 있어서 잠시 나왔던 거에요.
의심의 눈빛이 쉬이 걷히지 않아, 안나는 영문을 몰라 서 있던 제시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고개를 돌려 안나의 시선을 따라갔다. 까만 피부에 섹시하게 생긴 여자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안녕하세요? 안나의 룸메이트, 제시에요."
어색함을 지우려 제시가 인사하자, 여자가 호기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런데 왜 뛰어나온 거에요?
-그러니까 …맨…살이…,
안나가 팔짱을 끼고 돌부처처럼 서 있는 남자를 흘긋 보고, 다시 여자에게 집중했다.
-거기다 …까만 …머리에 …까만…눈.
-네?
여자의 띄엄띄엄 이어지는 대답에 안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이해는 되었다. 낯선 장소에 낯선 남자의 맨몸에 놀란 것이다.
"아무래도 …당신의 그 …맨몸 때문에 놀란 거 같아요."
남자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단지 그거 때문에 그렇게 놀라 뛰어나간 겁니까?"
"그럴 수도 있죠! 모르는 장소에 모르는 남자가 맨몸을 보이는 데, 놀랄 수 있어요. 거기다 어제 이 나라에 처음 왔고, 사기를 당했죠. 그리고 영어도 잘 못하고. 그런데 모르는 남자가 그렇게 있었다면, 저라도 놀랐을 거에요."
남자에게 말하면서 안나도 여자의 심정에 동화되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오해가 풀린 건가요?"
안나의 설명에도 남자의 기분이 썩 나아지지 않았는지 계속 구겨진 표정이었다.
"아마도…,"
안나가 여자를 끌어당겼지만 여자는 계속 안나의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아마도 아직인 것 같군요."
남자는 이제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제 괜찮아요. 저 남자는 당신을 도와줬어요. 아까 그건 그냥 옷을 입으면서 주방으로 향하던 중이었대요. 정말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게 아니에요.
안나의 구구절절한 설명에도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남자쪽은 쳐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안나! 아는 사람들이었어?"
길 건너에서 부락이 안나에게 뛰어왔다.
"부락! 아니, 뭐, 어쩌다 보니."
여자는 부락을 힐끔 보고, 다시 머리를 숙였다.
"무슨 일이야? 나는 미친 사람들인 줄 알았어."
호들갑스러운 부락의 말에 남자의 입이 어이없게 벌어졌다.
"야이! 부락. 그런 거 아니야. 말하자면 복잡해."
안나의 호통에 부락이 풀이 죽어 제시에게 다가갔다. 부락이 제시에게 뭐라고 물었지만, 제시도 검지로 입을 막았다.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부락과 제시는 떠날 수 없었다. 아카데미에 지각할 지도 모르고, 빨리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출근해야 하지만, 둘은 이 흥미진진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했다.
-도와준 사람에게 이렇게 대하면 기분이 안 좋을 거에요. 네?
-하…지만…,
여자는 안나의 애원에 슬쩍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리려 했지만,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잔상이 그녀를 나약하게 만들었다. 새까만 머리카락, 새까만 눈동자! 그리고 …맨몸! 무섭다. 너무 무서웠다. 여자는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안나는 여자의 반응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외국에 홀로 나와 사기를 당한 상태이니, 마음이 많이 허약해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안나는 향수병에 우울증까지 갔었던 자신의 지난날을 생각하며 여자의 등을 토닥여줬다.
"너무 충격이었나 봐요. 미안해요. 도와줬는데."
남자는 허탈하게 웃었다. 대체 자신이 무슨 짓을 했다고 무서워하는 건지! 이제 화가 났다. 원래 동양의 문화가 서양의 문화와 다르다는 말은 들었지만, 애먼 사람을 치한 취급하는 건 너무 하지 않는가! 어떻게 자신을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미친놈으로 생각할 수 있냐고! 어떻게 나에게! 바로 영국의…, 거기까지 생각하던 남자는 차가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숙녀에게는 항상 상냥하게 대해야 한다고 그랬죠? 그런데 어떻게 머리를 당길 수 있어요? 숙녀가 무서워하거나 울 때는 항상 먼저 사과해야 해요. 그게 신사가 가져야 할 덕목이랍니다. 자, 신사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아. 아. 알겠다고요. 어머니."
남자는 그 순간을 기억해냈다. 새침하게 그를 외면하던 여자애의 양갈래 머리를 당겨 그 아이가 우앙 울음을 터뜨렸을 때, 그의 어머니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던 그 순간을. 한없이 다정했던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여자애에게 다가갔었다. 그리고 '신사의 사과'를 시켰다. 그의 지위에서 굴욕적인 순간이었지만, 어머니는 그의 행동에 자랑스러운 눈빛을 보내셨다. 그 이후로 다시는 누군가에게 '신사의 사과'를 한 적이 없었다. 아니, 하지 않도록 그는 언제나 철저하게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 믿었던 그 굴욕적인 순간이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후우. 내 명예를 위해서야."
그는 단호하게 말하고 결연하게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안나 옆에서 풀이 죽은 아이마냥 왜소하게 서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그는 여자의 앞에 섰다. 어두운 그늘에 여자의 어깨가 움찔거렸고, 여자가 뒷걸음치려고 했지만, 남자의 행동에 멈춰졌다. 안나에게서 헉, 외마디 비명이 흘러나왔고, 제시와 부락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남자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다른 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공손히 말했다.
"당신이 못 알아듣겠지만, 내 행동이 당신을 놀라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억울했지만, 그는 사과를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억울함을 토로하지 않았다. 누구의 잘잘못이든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그가 들어있었고, 그는 오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그는 싫었지만,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명예였다. 벗어나고 싶지만, 그의 삶의 기준은 명예였다. 그는 이 지독한 모순을 다시 상기하며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를 비켜갔지만, 그는 집요하게 여자를 쳐다보았다.
"다시 한 번 미안합니다. 부디 내 사과를 받아주세요."
남자의 눈동자가 새까매졌다. 여자의 눈이 서서히 남자에게 향했다. 흠칫. 그의 새까만 눈동자에 그녀의 눈에 파도가 출렁였지만, 남자의 진실함에 여자는 점점 빨려 들어갔다. 숨이 막혔다. 까만 머리칼, 까만 눈동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자의 뜨거움, 남자의 진정이 그녀의 무의식에 녹아들었다.
"사과를 받아주는 건가요?"
남자의 물음에 여자는 입술을 물었다. 남자는 올곧은 눈길을 거두지 않고,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여자의 눈동자가 팽창되었다.
"고맙습니다. 레이디."
남자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건네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여자의 눈이 남자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그는 한발자국 물러나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이제 짐을 챙기러 갑시다."
"네? 아, 네."
안나는 맨발이지만 너무나 기품 있게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자석에 이끌리듯 그를 쫓아갔다. 물론 굳어있는 여자를 데리고. 제시와 부락은 서로를 바라보다 다시 남자의 뒷모습을 보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너무 로맨틱하다!
*
한 편을 길게 써서 올리려다 포기하고...
조금씩 자주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통령 딸 버금가는 지위의?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