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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綿綿不斷陽中 따뜻한 봄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니
헛기침은 나무문을 통해 여러 번 들려왔다. 단잠에 빠져 있던 연은 계속된 기침소리에 결국 눈을 비벼 뜰 수밖에 없었다. 긴 잠에 취해 몽롱한 연은 눈을 깜박거리다 몸을 일으켰다. 방안을 가득 채운 공기는 모호해 시각을 가늠할 수 없었다.
“어디 가느냐.”
단단한 사내의 손은 연의 맨허리를 휘어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그제서 어깨와 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앉았음을 인식한 연의 입에서 민망하여 낮아진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방은 잠이 들 때처럼 깊은 볕을 받아 환하게 빛났고, 곁에는 턱을 괴고 누운 사내가 가늘게 눈을 뜨고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서둘러 이불을 턱밑으로 끌어당겨 맨살을 가려보았지만 이불안 사내의 손은 허리를 타고 점점 위로 오르고 있었다.
“아직도 밤은 멀었는지..환하기만 합니다.”
봉긋한 가슴을 쓰다듬는 손길을 애써 모른 척 하며 연은 몸을 뒤로 빼보았다.
"이미 밤이 지나갔는지도 모르지."
"허면 이만 일어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해단은 대답 대신 연의 어깨를 끌어 당겨 밀착시키고 있었다. 강한 힘에 이끌려 온 연은 해단의 품 아래로 틈 없이 들어맞았다. 버둥거리며 빠져나오려는 연과 달리 해단의 입술은 눈 앞에 보이는 연분홍 젖무덤을 모른 척 하지 못했다. 뜨거운 입술은 이내 연의 젖가슴에 붉은 낙인을 찍고 있었다. 날름거리며 젖몽우리를 핥는 혀는 지독하게 부드럽고, 나른해 막아서려던 연의 손가락에서는 힘이 빠지고 있었다. 몽우리는 점점 높아지고 단단해졌다. 간질거리던 습한 기운은 젖가슴을 오르내리며 떠날 줄을 몰랐다. 어깨를 당겼던 사내의 손은 어느 사이에 조금 씩 등을 타고 내려왔다. 단단한 손가락은 어느 때보다 섬세하게 연의 몸을 매만졌다. 사내를 밀어내던 연의 손가락은 길을 잃고 해단의 목덜미를 끌어 안았다. 등줄기를 타고 번지는 아리한 열기는 가슴에서부터 옮아간 소름과 만나 연을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차차 넓게 퍼지는 달궈진 쾌락은 기어이 연의 입술 사이에 더운 신음을 토해내게 했다.
“하..”
점점 아래로 입술을 내리던 해단은 고개를 들어 연을 올려다보았다. 조금만 더 내리면 연의 꽃문에 닿을 듯 하던 사내의 입술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스친 연의 볼은 저녁놀을 담은 듯 발갛게 번져있었다.
“그만 하십시오. 어찌하여 자꾸 내려가십니까.”
가까스로 뱉은 말은 흔들려 흩어졌다.
“내려가면 아니 될 이유라도 있느냐.”
해단은 연의 수줍음을 모른 척 했다. 아니 진정 모른다는 듯 눈까지 껌벅이고 있었다.
“이유는 알지 못하오나, 아니함이 마땅하다 여겨집니다. 제 몸이라고는 하나 저도 살펴 보지 못하는 곳입니다. 여인의 몸에 아래 숨어 있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자리잡은 까닭이 있을 터, 자꾸 그리하시면 부끄럽고 민망합니다.”
"숨어 있는 까닭을 알겠으니 부끄럽고 민망해 할 것 없다."
고개를 숙이고 꽃문에 얼굴을 가져간 사내의 소리는 다리 사이에 막혀 웅웅거렸다. 젖어든 것이 더욱 민망하여 무릎을 오므리려 애를 썼지만 허벅지를 잡은 사내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온전하게 사내의 혀는 꽃문을 헤집으며 벌렸다. 부풀어 오른 꽃잎은 당장이라도 사내를 받아들일 수 있게 활짝 만개하였다.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사내에게 대신 살펴주라 그리 숨은 것이 아니겠느냐."
해단의 입술은 연의 꽃잎을 살짝 빨아 당기며 중얼거렸다. 더는 참을 수가 없는 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점점 더 벌어지는 다리를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머리를 가득 채운 의지는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끊겨있었다.
"밀어내지 말거라.”
거친 숨과 뒤섞인 사내의 말은 멀게만 들렸다. 연의 하복부는 해단의 혀끝에 뒤감겨 말을 삼켰다. 적나라한 옥음에 차마 답하지 못한 연의 마음은 점점 더 민망해졌다. 그러나 말을 잊은 입술은 대신 신음을 머금었다. 혀끝이 주는 찌르는 듯 날카로운 쾌감이 연거푸 연을 두드릴 때마다 연의 손가락은 해단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연도 그러하다는 것을...할 수 만 있다면 더 깊게 들이고 싶어 갈구하는 손끝까지 열기는 퍼졌다.
“참지..못하겠습니다.”
“과인은 한참 전부터 그러하였다.”
볼멘소리는 연을 탓하고 있었다. 열찬 욕망이 뒤엉킨 입술로 연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몸을 일으켜 세운 해단은 연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웃지 말거라.”
서운하여 퉁명스러워진 말투는 여전했다. 조금 전 까지 입술이 유린하던 꽃문으로는 바짝 날선 사내의 굵은 막대창이 자리했다. 젖어 벌어진 꽃잎사이로 비벼대는 막대 끝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연의 얼굴에 번졌던 웃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팽팽한 긴장감이 번졌다. 찌르며 들어올 것을 기대하고 바라는 몸은 먼저 벌어졌다. 성이 났음을 표내 듯 옥봉은 연의 입구를 맴돌며 쉬이 들어가지 않았다. 빙빙 돌려 꽃잎 속 깊숙이 자리한 꽃술을 묵직하게 누르자 연은 참을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숨을 헐떡거렸다. 꽃술은 옥봉에 무방비로 열려 신음했다. 온 몸을 휘감는 열락에 연의 허리는 뒤로 젖혀졌다.
“하나..하나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해단은 감긴 연의 눈꺼풀 위에 살며시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옥음에 담긴 뜻을 생각하려 했지만 연의 머리는 열망에 사로잡혀 다른 것을 담아내지 못하였다.
“너의 따뜻한 계곡을 탐한 것은 과인의 입술이 처음이다.”
연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하면 계곡사이를 지분거리고 들어오지 않는 나무가 만족하여 뻗을 듯 하였다. 그러나 나무는 쉽게 뿌리내리지 않았다. 대신 사내의 단단한 손가락이 계곡을 차고 들어왔다. 계곡을 가득 채우다 입구까지 흐른 물이 부끄러운 연은 사내의 손을 거부하려 하였지만 손끝이 주는 만족감을 포기 할 수 없어 연의 무릎은 어정쩡하게 모아졌다.
“그리하지 말거라. 믿고 열어 주거라.”
해단은 민망하여 붉어진 연의 입술을 부드럽게 빨아 당기며 중얼거렸다. 사내의 진심이 담긴 애원에 연의 무릎은 조금 더 벌어졌다. 반응하며 벌어진 꽃잎사이로 사내의 손가락은 조금씩 밀려들어왔다. 억세지 아니하고 부드럽게 연의 계곡사이를 훑는 손은 따뜻했다. 따뜻하여 포근하고 연하여 뭉클했다. 다리부터 시작된 열망은 연의 가슴까지 번져왔다.
“너의 몸에 손을 넣은 것도 과인이 처음이다.”
해단의 말에 연의 까만 눈동자가 짙어졌다. 허벅지 사이를 파고 들던 늙고 매마른 노파의 손이 순간적으로 눈앞에 스쳐갔다. 괴로운 기억에 연의 어깨가 낮게 떨렸다. 으스스 돋은 소름에 잔뜩 움츠리던 연의 어깨와 흐려진 눈동자를 바라보던 해단의 얼굴에 자괴감이 번졌다. 해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연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위로하듯 들어오는 손길과 얼굴을 쓰다듬는 입술이 담은 마음을 이제야 안 연은 멍하니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일을 어찌....”
접어두었던 쓰린 상처는 날카롭게 다시 돋아났다. 연은 뒷말을 한참 동안 잊지 못하였다. 사내로 인해 겪었던 일이나 해단을 원망한 적은 없었다. 헌데, 사내의 따뜻한 눈이 연을 바라 볼수록 서러움이 북바쳐 올랐다. 조금씩 붉어지던 눈가는 미세하게 떨리다 젖어 들어갔다. 연은 감추려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해단의 단단한 손끝은 숨으려는 마음을 허락지 않았다. 연의 턱을 살짝 올려 쥔 사내는 다 안다는 듯 따뜻하게 연의 입술을 훔쳤다.
“이런 것으로 기억을 지워낼 수는 없겠지만 과인의 손이, 과인의 입술이 모두 지워낼 것이다. 과인이 대신 할 것이니. 그저 처음이라 여기고 모든 것을 잊어라.”
연은 물끄러미 해단을 올려다보았다. 말에 담긴 마음은 너무 포근했다.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떠오를 듯 잔인한 기억이지만 연은 애써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하겠습니다.”
“아팠던 기억은 모두 잊어라. 나로 인해..아팠던 일은 내 모두 갚아나갈 것이니 지우고 버리거라. 더는 나로 인해 아프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더는 혼자 뒤돌아 울음을 삼키는 일이 없도록 만들 것이다. 꼭 그리 할 것이다.”
해단은 연을 더욱 힘주어 안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사내의 물건은 한 치의 오차없이 연의 계곡을 따라 부드럽게 밀려들어왔다. 연은 사내의 말을 깊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사내의 몸도 깊게 받아들였다. 좁디 좁은 계곡으로 밀고 들어왔던 사내는 조금 씩 앞뒤로 움직이며 길을 넓혀갔다. 촉촉하게 젖은 옥봉이 연의 꽃 문 안쪽을 따라 스칠 때마다 연의 몸은 미세하게 떨렸다. 해단이 더 깊게 밀어 넣으면 연은 앞서 받았고, 해단이 뒤로 빠지면 연도 따라 물러섰다. 빈틈없이 밀려와 움직이는 사내의 무두는 연의 움직임에 더 크고 빠빳하게 날이 섰다. 해단은 조여 오는 쾌락을 거친 숨으로 토해내며 대신했다. 연의 안에서 무너져 사라질 것처럼...그렇게 마지막을 향해 몸을 밀어 넣었다.
“연아. 더는 참지 못하겠다.”
연의 아랫입술을 물고 빨아 당기던 해단의 입술은 귓불을 물어 당기며 낮게 중얼거렸다. 궁극의 절정을 위해 움직이는 해단의 등줄기로 굵은 땀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사내를 받으며 신음하던 연은 사내의 목을 끌어안고 바짝 매달렸다.
“저도 그러합니다.”
연거푸 덮쳐오는 쾌락에 흔들리는 음성은 해단이 잡고 있던 마지막 인내의 끈을 끊어놓았다. 해단은 거칠게 연의 안으로 무두를 쑤셔 넣었다. 거친 숨소리만큼 험한 움직임은 연을 더욱 자극시켰고, 연의 입술 사이로 비명같은 신음이 터져 나올 찰라 해단은 더운 진액을 쏟으며 연의 몸 위로 무너졌다. 다리 사이로 번지는 뜨거운 열기에 연의 얼굴은 더욱 붉게 번졌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구나.”
여인의 몸 안에서 작아진 무두는 계곡입구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장난치듯 지분거렸다.
“어디가 좋지 않으십니까.”
“그 반대로다. 지나치게 좋아서 큰 문제이다. 더운 진액이 흘러넘치고 나면 시간을 두고 다시 채워져야 할 터인데, 촌각도 두지 않고 채워지기만 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해단은 연의 턱을 끌어당기며 입을 맞추며 긴 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느냐.”
연은 고개를 들고 해단의 얼굴을 살폈다. 더운 공기만 가득 채운 고요한 방은 방금 전까지 가득 채웠던 신음과 거친 숨소리를 새삼 실감나게 만들었다. 두리번거리며 답을 찾는 연의 눈동자에 담긴 민망함을 모를 리 없는 해단은 피식 웃으며 연의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 당겼다. 사내의 움직임에 얼떨결에 사내의 배 위로 오른 연은 서둘러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몸을 웅크렸다. 해단은 가슴을 가린 연의 손을 잡고 아랫도리로 이끌었다. 어느 사이에 허공을 향해 다시 일어선 옥봉은 굵고 단단했다. 손아귀 안에 잡힌 뜨거운 물건에 당황한 연의 시선은 슬쩍 사내의 물건을 향했다. 손으로 가늠한 것보다 더 크고 붉은 막대에 연의 입술 사이로 놀란 숨소리가 퍼져 나왔다.
“이제 알겠느냐.”
연은 서둘러 시선을 되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만 있으면 발정 난 망아지처럼 이리 되니 어찌하면 좋겠느냐.”
짐짓 괴롭다는 듯 가라앉은 옥음이었다. 연은 손을 떼지도, 그렇다고 꽉 잡지도 못한 채 마른 침을 삼켰다.
“잘 모르겠습니다. 정히 불편하시오면 의감을 불러 살피시면..”
연의 말에 해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허허.! 의감은 멀리 있으나, 연은 이리 가까이 있고, 은밀한 교합의 일은 남녀의 문제인데 어찌 의감까지 불러 살핀단 말이냐. 의감의 거친 손은 옥봉을 다스릴 수 없으나, 그대의 부드러운 손은 옥봉을 다스릴 수 있으니 네가 살펴 풀어주면 될 듯하다.”
“어찌 할지 모르겠습니다.”
더욱 당황한 연은 무두를 힘주어 잡았다. 꽉 잡힌 막대는 새로운 자극에 팽팽하게 솟구쳤다. 해단은 끙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주 좋다. 잘하는 구나.”
“다음은 어찌 할지 모르겠습니다.”
연은 잡고 있는 막대를 내려다보며 더듬거렸다. 막연하여 연의 손에는 힘이 풀렸다. 저도 모르게 조이고 풀린 자극에 해단의 숨소리는 거칠어졌다.
“그리 하는 것이다. 연아. 연감을 먹어보았느냐.”
난데없는 홍시에 연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홍시 말씀입니까.”
“지나치게 익어 붉은 홍시를 어찌 따서 다루며 먹느냐.”
“꽉 쥐면 터질라 설게 쥐면 놓칠라 적당히 잡고 따서 먹습니다..아. 그리하면 되겠습니까.”
그제서 해단의 뜻을 알겠다는 연이었다. 홍시처럼 붉은 얼굴로 같은 색으로 달아오른 사내의 물건을 잡은 연의 손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안에서 터질 듯 부푼 것을 쥐락펴락하던 연은 결연한 표정으로 큰 숨을 내쉬었다. 의아한 해단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 연의 입술은 무두의 끝을 살짝 물었다. 지나치게 뜨거운 연의 입술에 빨려 들어간 사내의 물건은 지릿한 쾌락에 사무쳐 더욱 꼿꼿해졌다. 예상치 못한 흥분에 해단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
“연감을 먹듯 하라 하시어서..불편하십니까.”
“아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있겠느냐. 아무래도 연아. 이 병은 쉬이 고쳐지지 않을 듯 하다. 허나 지병이 되어 간직하면 어떠하겠느냐. 의감보다 뛰어난 연이 네가 있으니...하! 정말 좋구나.”
몸을 파고드는 열락에 신음하던 사내의 앙다문 입술 사이로 뱉은 말은 이내 거친 숨소리와 함께 방을 가득 채웠다.
그 뒤로 들리던 헛기침이 몇 번이나 들렸는 지. 연의 몸과 들어맞던 해단의 몸이 몇 번이나 포개어졌는지. 시간은 몽롱하고 의뭉하게 흘러갔다. 곁창의 밖으로 어스름한 어둠이 시작되어 방을 채운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있었다. 연은 조심스럽게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단 잠에 빠져 미동하지 않은 사내는 엎드려 긴 숨을 고르게 토하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주어 입는 연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또 어디 가려 하느냐.”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던 연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부스스 일어난 사내의 짙은 눈동자가 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향초물을 가지러 가려 하였습니다.”
“그런 것은 필요 없다. 닦아내고 싶지 않으니 그만 이리 오너라.”
“어찌 어린아이같이 씻는 것을 싫다 하십니까.”
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무문 고리를 잡았다. 그러자 해단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사내의 벗은 몸은 크고 단단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서 휘감겼고, 넓은 어깨부터 떨어지는 가슴과 배는 단단하고 팽팽했다. 그리고 그 아래 연을 향해 솟은 막대는 굵고 팽팽했다. 한껏 만지고, 몸에 담고, 끝내 입에도 물었던 것이지만 연의 눈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서둘러 시선을 비껴 내린 연의 볼은 금세 붉어졌다. 느리게 다가온 해단은 연의 턱 끝을 잡아 세웠다.
“허면 손수 닦아 줄 것이냐.”
“어려운 일은 아니니 원하시면 그리 하겠습니다.”
“어찌하면 좋으냐.”
해단은 긴 한숨을 내쉬며 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문득 연의 배에 단단한 것이 느껴졌다.
“무..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또 시작이로다. 다시 발병하였어. 연아. 다스려 주지 않겠느냐.”
짐짓 괴로운 사내의 한숨에 연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작은 웃음 소리는 밝게 번져나갔다.
"더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아무래도 환우가 깊으시니 의감을 불러 다스려야 할 것 같습니다."
놀리는 듯 장난치는 연의 말투였다. 연을 끌어당기려던 해단의 얼굴로 표나게 실망감이 번졌다. 연은 가만히 사내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발뒤꿈치를 들었다. 사내의 품에 얼굴을 묻은 연은 붉은 입술로 사내의 어깨에 흔적을 만들었다.
"오지 말라 하여도 다시 오는 것이 어둠이고, 가지 말라 하여도 가는 것이 밝음입니다. 날은 매일이 같으니 오늘은 그만 보내드리겠습니다."
"마음에 차는 위로는 아니나 참아 보겠다."
해단은 못마땅하게 중얼거리며 긴 숨을 내쉬었다. 겹문은 열려 있지 않았으나 말은 새어나갔다. 옥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 밖의 움직임은 빨라졌고, 이내 향초물과 옷가지가 차례로 들어왔다. 궁인을 물린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닦고 보듬으며 의복을 정돈했다. 연의 손길을 따라 해단의 모습은 여인을 품던 사내에서 차가운 군왕으로 조금씩 변해갔다. 금방이라도 반짝이며 부서질 듯 빛나는 금사띠를 마지막으로 허리에 두른 해단은 연을 돌아보았다.
"손내관의 목이 다 쉬기 전에 이만 가봐야겠다."
걸음을 재촉하며 문사이로 쉴 틈 없이 들려오던 마른 기침을 두고 해단은 피식 웃었다. 연은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단은 아쉬운 듯 연의 볼을 살짝 매만지고 걸음 옮겼다. 막 문을 나서려는 순간 해단의 시선이 잘 접어둔 옷가지 위에 머물었다. 궁인이 들였던 것들을 모두 착복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강렬한 붉은 탈은 사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붉은 탈을 집어 들었다.
"어떠한 연유로 이것을 쓰십니까."
해단은 대답 대신 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씁쓸하게 웃었다.
"이상해 보이느냐."
"이상해 보이는 것은 아니나, 멀리 있는 왕으로 보입니다."
"네게서 말이냐?"
"모두에게서 그리합니다."
"멀리 있는 왕이라? 그리 보였을 수도 있겠구나. 오래 지난 일이라 잊었다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또렷한 기억이 뒤엉켜 어지럽다. 그간 까닭은 물은 이가 있었다면 한번이라도 답을 어찌할지 생각해보았을 텐데.. 연아...사실 어디부터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붉은 탈을 쥔 해단의 손끝으로 힘이 들어갔다. 힘줄이 또렷하게 솟아 오른 사내의 손은 미세하게 흔들렸다.
"편치 않으시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위로하듯 손등을 매만지는 연의 손가락을 가만히 보던 해단은 차려입은 의복의 앞섬을 천천히 벌렸다. 몇 겹의 의복사이로 보이는 단단한 가슴은 보기 좋게 나눠져 있었다. 해단은 연의 손목을 잡고 벌린 앞섬의 안쪽으로 당겨 끌었다. 해단의 손길을 따라 멈춘 연의 손끝으로 움푹 패인 굳은 흔적이 만져졌다.
"가장 가까운 이가 하나 있었다. 마음을 나누었다 생각했고, 소중해서 오래 함께 이고 싶었던 그런 이였다. 하필 왜 그날이었는지...아니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날이 그날이었겠지만,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날, 이곳에 칼을 밀어 넣더구나.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왜 죽이려 하는 지 물을 수 없었고, 왜 죽었는지도 물을 수 없었다. 그냥 나는 살았고, 그...이...는 죽었다. 죽기를 바랐던 내가 살고, 살기를 바랐던 이가 죽었기에 궁은 위험했다. 안팎에서 목숨을 노려 달려드는 자들을 가늠할 수 없었고, 그들에게 알려진 얼굴을 가려야 살 것 같았다. 누구인지 알 수 없게 같은 탈을 나눠 쓴 무사 몇이 나로 오인 받아 살해당하는 것을 볼 때마다, 붉은 탈의 뒤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곳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사사롭게 대적하여 까닭을 물을 수도 없는 것이 왕의 자리였고 죽기를 각오한 적들은 사로잡혀 원망을 풀어낼 리 없으니 살변이 잦아들어도 끝은 아득해 언제인지 모르겠더구나."
연은 가만히 해단을 올려다보다 한 참 만에 붉은 탈을 건넸다.
"쓰지 말라 청할 줄 알았다."
해단은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제가 청할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처음 쓸 때처럼 벗어야 할 이유가 또렷해 지는 날이 오겠지요. 다만..."
"다만?"
해단의 짙은 눈썹이 슬쩍 말려 올라갔다.
"다만..그때까지 얼굴을 자주 뵐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것 같습니다. 참 훌륭한 모습이라 생각했습니다."
"하하! 궁에 들어와 아첨이 늘었구나!"
순간 연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날, 미와산에서 처음 뵈었을 때, 그때부터 그리 생각했습니다."
"알겠다. 믿어주마."
신이난 듯 웃으며 중얼거린 해단은 입을 맞추고 발걸음을 돌렸다. 단단한 등으로 흐르는 무거운 짐을 슬쩍 엿본 것 같은 연은 가만히 사내의 등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연의 행동에 해단의 걸음은 그대로 멈춰졌다.
"길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허면 앞으로는 네 앞에서는 쓰지 않으마. 너무 아쉬워 말거라."
"그보다 세상을 비껴 보실까 근심이 됩니다."
해단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다른 이들은 내가 탈 뒤에서 보는 세상을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탈 뒤에 있는 나를 근심하는 데...나의 길에 네가 곁에 있어 참 좋다."
해단의 입가가 살짝 부드럽게 풀어졌다. 가슴에 머문 연의 손을 살짝 힘주어 잡아주고 놓은 사내는 알 수 없게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정전으로 향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겨울 하늘은 유난히 아득했다. 오래간만에 하늘을 올려다 본 해단은 문득 맨 얼굴로 아리도록 찬바람을 맞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할 것 같았다.
대화전에 왕이 모습을 보인 것은 일상 조참이 시작되던 시각보다 일식경이 지난 후였다. 늦었던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던 왕인 터라 모여 있던 신료들은 웅성거리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었다. 일식경의 시간에 담긴 어의를 저마다 짐작하며 뜻을 나누던 그들은 대화전의 문이 열리는 순간 침묵으로 옥체를 맞았다. 계단위에 올라 자리 잡은 왕은 좌중을 둘러보며 낮게 헛기침을 하였다.
“날이 참 좋다.”
갑작스런 날씨 얘기는 의아했다. 요 며칠은 매서운 겨울 바람이 더욱 몰아쳤기에 날이 좋다는 말이 더욱 그러했다. 좋다는 말에 담긴 또 다른 뜻을 짐작하느라 신료들은 각자 깊게 바빴다.
"눈보라가 없으니 맑긴 하나, 바람은 아직 매섭습니다."
"겨울의 끝자락이라고는 하나 봄은 아직 오지 않으니 옥체가 염려되옵니다."
"머지 않아 꽃망울도 피어오를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청해도 녹았으니, 긴 겨울도 끝이 보이옵니다."
한참 만에 신료들이 하나 둘씩 답을 올렸다. 국사를 논할 때는 의견을 나누며 쉼 없이 말이 오가던 대화전은 왕이 던진 낯선 인사말에 어색한 인사말이 딱딱하게 오갈 뿐이었다. 날씨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 없던 사내들의 말은 음만 다를 뿐 거의 같은 뜻이었다. 언제까지 겨울 날에 대한 말을 나눠야 할 지 알지 못하는 신료들은 군왕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지루한 계절을 논하였다. 모래를 씹는 듯 불편한 얘기들도 거의 바닥이 날 무렵 대화전의 나무문이 급하게 열렸다. 붉어진 양 볼과 틈이 벌어진 의관, 턱까지 차오른 숨소리는 늦게 입시하게 된 신료의 급박함을 대신 보여주었다. 마음이 급한 육중한 서관의 걸음은 나무 바닥을 짓누르며 묵직한 소리를 냈다. 비어있는 자리에 앉은 그는 머리가 마루에 닿도록 숙이며 깊게 절하였다. 몇 가닥 빠져나온 머리카락은 땀에 젖은 양 볼에 달라붙어 볼썽사나웠다.
"신의 불충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간 조참의 시각을 어긴 적이 없었던 왕은 가끔 늦게 입시한 신료를 크게 꾸짖곤 했었다. 관중한 활처럼 정확함을 좋아하는 왕의 아침은 오늘 등장부터 묘하게 뒤엉키고 꼬이고 있었다. 그것에 일을 보태 더한 서관의 등장으로 신료들의 긴장감은 더욱 팽팽하게 당겨졌다.
"어찌 늦었느냐."
호된 질책을 기다렸던 관의 목덜미로 진땀이 흘렀다. 연유를 하문하시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옥음은 알 수 없게 부드러웠다.
"망극하옵니다."
여인의 볼처럼 붉어진 사내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해단은 피식 웃었다. 붉은 탈은 웃음을 보여주는 대신 미세하게 흔들렸다. 미동 뒤에 남은 웃음을 차마 짐작하지 못한 대화전 신료들의 숨은 타는 불안감으로 잦아들었다.
"어찌 늦었나 묻지 않느냐."
"신의 불충이옵니다. 망극 또 망극하옵니다."
"글을 깨치지 못함인가. 잠에 취한 까닭인가. 귀가 막히었는가. 과인은 그대에게 연유를 물었다."
그제서 어쩔줄 모르던 서관은 고개를 흔들며 가쁘게 답하였다.
"신이 망극하게도 늦게 첫 자식을 얻었습니다. 신의 안사람이 산통을 오래 하여 시각이 지체된 줄 알지 못하였나이다."
"축하할만한 일이로다."
또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서관은 머리를 조아렸다.
"망극하옵니다."
"늦게라도 자식을 보아 꽤 기뻤겠다. 아들인가. 딸인가."
사사로이 개인사를 묻는 일이 없는 왕이었다. 나오는 옥음마다 생각을 한참 비껴가니 신료들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이키거나 괜히 장계를 뒤적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하문에 담긴 숨은 뜻을 헤아리기를 포기한 서관은 크게 숨을 내쉬며 답을 올렸다. 본디 가는 눈은 더욱 가늘게 내려 앉았다.
"딸이옵니다."
"딸이라. 딸..그대와 과인의 근심이 크다."
"근심의 뜻을 짐작치 못하겠나이다."
서관은 눈을 껌벅였다.
"아들이면 그대를 닮아도 크게 개의치 않는 일이나, 딸이라 하니 그러하다. 그대의 여식이 그대를 닮지 않아야 할 터인데. 아니 그런가?"
즐거워 되묻는 농에 서관의 얼굴은 민망하게 붉어지고, 그를 제외한 사내들의 낮은 키득거리는 소리가 대화전을 채웠다. 오랜 시간이었다. 서국의 대화전 문밖으로 웃음이 넘쳐흐른 것은 꼭 십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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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비의 수화전(秀華)이 바빠졌다. 일 년이 가까운 시간동안 일어나지 못하던 서대비의 환우가 차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온갖 진귀한 약재를 지어 올려도 기력이 쇄하여 먹지 못하던 때와 달리 약재는 물론 끼니때 올린 수라도 절반은 비워낼 만큼 회복되었다. 내달에 있을 왕의 생일연을 앞두고 경조가 아닐 수 없었다. 효심깊은 왕은 신후를 여쭈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왔다. 오랜 기간 병상에 누워있던 서대비의 깊은 주름은 열린 창을 통해 스며 들어오는 볕을 받았다. 어두운 기운을 걷어낸 침상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간 해단은 앙상하게 마른 서대비의 손을 감싸 쥐었다. 가늘게 눈을 뜬 서대비는 희미하게 웃었다.
"주상. 벌써 봄이 온 것입니까. 봄볕을 보게 문을 더 열어주시지요."
"보기와 달리 아직은 겨울입니다. 볕은 따뜻해도 바람은 아직 찹니다. 좀 어떠십니까. 이리 뵈오니 참 좋습니다."
서대비는 눈가가 붉어진 해단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효심이 깊은 아들이었다. 황주성에 피바람이 불 때도, 춤추는 칼의 날카로운 날이 목을 베어 갈 때도 서대비에게 만큼은 어린 시절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아들 그대로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그때부터 조금씩 나빠지던 서대비의 환우가 더욱 깊어진 일 년 동안은 문후조차 여쭈지 못했지만 아침마다 사람을 보내 약재를 챙기고 차효(差效)를 확인했던 해단이었다.
"많이 나아졌습니다. 볕이 이리도 좋은데 아직 겨울 바람이 매섭다니.. 하긴 사람이나, 계절이나 다 겉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법이지요. 이리 주상을 보니 나도 참 좋습니다. 주상의용안을 보니 이 늙은 이의 눈에는 주상의 마음도 이제는 괜찮아진 듯 보이는 데. 그간 강령하셨습니까."
몸을 일으키려는 서대비를 서둘러 부축한 해단은 서대비의 등 뒤에 두툼한 포단을 겹쳐주었다. 자연스럽게 기대 앉은 서대비는 느린 손길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짙어진 주름 위로 자리 잡은 머리채는 이제 검은 머리보다 색 바란 흰 머리가 더 많이 보여 서대비의 나이를 가늠케 만들었다. 열일곱의 나이에 옥국에서 바쳐져 궁에 들어온 지 벌써 서른 다섯 번째 봄을 기다리는 서대비였다.
해단은 곁의 궁인이 바친 거울을 서대비의 손에 들려주며 옅은 웃음을 내보였다. 서대비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말이었다. 보일 듯 말듯 흐린 웃음을 모를 서대비가 아니었다. 서대비는 눈을 반짝이며 해단의 등을 힘주어 안았다.
"장하시오. 장해. 잘 하시었소. 주상. 정말 잘하시었습니다. 잘 이겨내셨습니다. 이 어미도 그 여인을 한 번 보고 싶은데, 언제 보여주려 합니까."
"여인이 있음을...아십니까."
놀란 듯 고개를 든 해단이었다. 서대비는 잠깐 마른 입술을 적시고는 더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디거나 빠르지 않고 한결 같이 흘러가는 시간을 궁에서 홀로 버틴 여인만이 지을 수 있는 그런 여유와 미소였다.
"주상이 이 곳에 발걸음을 한 순간 알았지요. 그 발걸음 소리로도 알 수 있었지요. 주상의 환한 얼굴과 한결 빛나는 눈매를 봐도 알 수 있지요. 이 어미가 모를리 없지요."
당연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서대비의 음성은 나른하게 잦아들었다. 노곤함이 다시 묻어나자 곁을 지키던 노상궁이 슬쩍 다가와 침상을 정리했다. 서대비의 병환이 완전하게 낫지 못했다는 뜻이자, 해단이 이만 물러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해단은 잠을 청하는 듯 눈을 감은 서대비를 한참동안 보다 몸을 일으켰다.
"이만 나가겠습니다."
이미 잠이 든 서대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다정한 옥음은 따뜻하게 방안에 퍼졌다. 이내 몇 겹의 문이 열리고 금석을 신은 왕의 걸음도 멀어져 사라질 무렵 서대비의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토해졌다.
"꽤나 힘이 드는 구나. 몸 좀 일으켜 다오."
"식선을 준비할까요."
노상궁은 서대비의 마른 어깨를 잡아주었다. 서대비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운 뒤 힘겹게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구나."
"흘러가는 말들이셨나이다."
노상궁은 힘주어 대답하였다.
"그야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용안이 좋아 뵈서 다행, 또 다행이네만... 시간이 더 지난 후였으면 더 호기였을 텐데, 부리 긴 새가 매가 없다고 함부로 입을 놀리니 더 누워있을 수도 없고, 긴 세월 기다려온 것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리 되실 것입니다."
"그리 되어야지."
서대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풀썩한 머리카락이 바스락거렸다. 가는 세월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지만 어쩐지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문득 생각해보니 많이 늙었구나."
"약해지시면 아니 되십니다. 마마의 뜻이 곧 그 분의 뜻입니다."
"그렇지. 그걸 잊을 리 있겠느냐. 세상에서 가장 강한 새는 둥지 안에 있는 알을 지키는 어미가 아니겠느냐. 알에서 깨어난 새가 온 세상을 굽어보고 날 때까지는 힘들고, 지치고, 배가 고파도 참고 기다리며 품어 줄 것이니 말이다."
서대비는 느린 말을 이어가며 창밖을 응시했다. 깊어진 눈동자로 긴 세월 참아낸 열기가 스며 올라왔다.
"마마. 신후 여쭈고자 단비 들었습니다."
침묵을 지키던 서대비의 볼이 살짝 움찔거렸다. 분명 제상궁의 음성이었다. 십년이 지난 일이지만, 음성은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노상궁도 알아차린 듯 몸을 바짝 일으켜 세웠다.
"물릴까요."
"보고 싶은 아이니, 보는 것이 좋겠다. 언제고 볼 아이가 아니냐. 헌데, 제상궁은 어찌하여 그 아이를 모시고 있는 것이냐. 주상이 보낸 것인가."
"저도 알지 못하나이다."
곁에 서있던 노상궁의 허리가 굽어졌다. 한참을 말이 없던 서대비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뒤로 기댔다. 제상궁의 깊은 눈매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부리 긴 새가 멀리도 갔구나."
"망극하옵니다."
"되었다. 그럴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노상궁. 내 많이 아파보이느냐."
"그러하옵니다."
노상궁은 서대비의 이불을 덮어주며 답하였다. 서대비는 낮은 기침을 몇 번 하다 문가를 바라보며 들기를 허락하였다. 말라 갈라진 음성은 문밖으로 간신히 새어나갔다. 사뿐한 발걸음은 나무바닥으로 전해졌다. 서대비는 눈을 살며시 감고 소리에 집중했다. 걸음을 짐작하니 대충 단비의 성정을 알 법 했다. 맨 마직 내실을 닫아둔 문이 열리자 바닥에 닿는 보드라운 비단버선이 자리에 멈춰서 서대비를 향함이 느껴졌다.
"대비마마, 단비 들었사옵니다."
서대비는 가는 눈을 뜨고 발치를 바라보았다. 큰절을 올리며 인사를 올리는 여인의 어깨가 시선에 들어왔다. 아직은 다 영글지 못한 꽃봉우리였다. 다 피어나면 고울 것은 의심할 나위없으나 열매를 품어 가지기엔 덜 달콤할 텐데, 어찌하여 성심이 향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이유를 찾아보려 애쓰던 서대비의 날카로운 눈매가 살짝 올라갔다.
"병이 깊어 환영연에 참여치 못하였네. 혹여 이 늙은이에게 섭섭하였는가"
인자한 음성은 부드러웠다.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단비의 답은 진실했다. 살짝 서대비에게 닿은 눈동자는 까맣고 깊었다. 입궁하여 성심을 가지고 옥체를 받아낸 여인의 눈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여리고 다정해보였다. 서대비의 입술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흐리지만 분명 미소였다. 예상했던 것과 모두 다른 여인의 모습 탓이었다. 얼마 간 유흥의 상대가 될 여인이 아니었다. 그런 여인처럼 농염하지도 못하였고, 서툰 몸짓은 사내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옥보가 향했다면 이유가 있었을 터, 성심을 알아내 살피는 것은 서대비의 몫이었다.
"부서부에서 왔다했는가?"
"예."
"먼 길 이었을 텐데, 마음이 무거웠겠구먼."
쓸쓸하게 들리는 서대비의 목소리에 여인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미세한 변화를 놓칠 리 없는 서대비의 입가로 잔잔한 주름이 늘어났다. 두고 온 마음이 분명 있었다. 입궁한 여인도 처음 서대비가 입궁할 때처럼 짊어진 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날이 좋으니, 바람을 좀 쐬고 싶은데, 좁은 뜨락이라도 걸으면 답답한 마음이 가벼워 질 것 같아. 늙은 것이라 저어하지 않는 다면 같이 해 줄 수 있겠는 가."
다정한 말이었다. 대비를 만난다는 긴장감으로 뻣뻣해졌던 연의 마음이 알 수 없게 반가웠다. 입궁한 뒤 처음으로 어머니 같은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듯하였다. 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려는 서대비의 팔을 부축하였다. 낮게 신음하며 힘을 주던 서대비의 팔로 단비의 손끝이 느껴졌다. 마음이 담긴 손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서대비는 일어나 연의 어깨를 살짝 토닥거려주었다. 다 안다는 듯, 다 이해한다는 듯 그런 손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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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핫. 커피 마시며 올리다 노트북에 커피를 쏟았습니다. ㅠ
지금 대충 닦긴 했는데...불팽중 다행인것은 그나마 설탕없는 아메리카노였지만~ 컴맹인지라 이걸 어케 청소해야 하는지
노트북을 들어 뒤집어 놓으면 괜찮을까요?
아웅...
언능 글올리고 컴퓨터 전문가 친구들에게 텔레뽕해봐야 겠습니다.
늦게와서 죄송합니다.
왜이리 막대라는 단어만 눈에 들어오는지..ㅎㅎ
오랜만에 와주셨어요.
다음에도 빨리 뵐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