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15>



如夢令-送人 꿈속에서와 같은 그대를 보내며






책장은 넘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져 있었다. 문밖의 그림자가 두시진 마다 위치를 바꾸며 움직이는 것도, 초가 몇 번을 다 타서 새 초로 바뀌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어 길어진 무호사병의 그림자로 피곤이 늘어져 쳐져가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글자에 머물지 못한 마음은 주변의 모든 움직임을 살피며 더디게 흐르는 시간을 원망하고 있었다. 해단의 답답함은 손내관에게도 전해졌다.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 것도, 시선은 서책에 있으나 마음은 그러지 않음은 표나게 드러났다.


"전하. 이만 침소로 드시지요."


손내관은 정확하게 여섯 번째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다섯 번째보다 조금 더 긴해진 음성은 내관의 허리만큼이나 깊게 가라앉아있었다. 책장을 매만지던 해단은 그대로 책을 덮었다. 그러나 다섯 손가락은 한참 동안 그대로 무겁게 책을 짓누르고 있었다. 마치 책을 눌러 무엇인가를 다스리려는 듯 보였다.


"손내관."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차비를 할까요."


침소에 들 준비를 하려는 듯 손내관은 바닥에 내려놓은 등롱을 들고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일렁이는 등롱은 밝게 일렁이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붉은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는 불꽃을 보던 해단의 시선이 깊어졌다. 노곤이 묻은 눈가는 어느 사이에 충혈되어 있었다.


"어릴 때는 저 등롱이 켜지면 잠들지 못하였다. 환히 켜진 불 아래 잠드는 것이 어쩐지 아깝고 아쉬워 밤새 서책을 읽기도 하고, 몰래 숨겨놓았던 새를 풀어 내실을 휘 젖고 다니기도 했다. 검은 새가 퍼드득 거리며 날갯짓을 할 때는 나도 침상 위에서 함께 뛰어 내려 내관들을 놀래키기도 했지."


어느 사이에 흐릿한 기억에 젖어든 손내관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기억나옵니다. 잠이 든 내관의 다리를 묶어 놓기도 하셨지요."


"그랬던가?"


"예. 쿵소리에 놀라 깬 내관들이 일어나 움직이다 서로 이마를 부딪쳐 쓰러진 적도 있질 않사옵니까."


"하하. 그래서 그대의 이마가 그리 파였는가."


손내관은 주름이 깊어진 이마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그런가 보옵니다."


"헌데, 지금은 그런 때가 있었던 가 싶을 만큼 기억도 흐릿하다."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까요."


"그도 그렇지. 시간도 지나고...더는 어린 아이가 아니니 말이다. 손내관...그대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과인은 어느 순간부터는 저 등롱 없이는 잠들지 못하고 있네. 환히 밝힌 불빛이 아쉽고 아까운 것도 아닌데...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네."


멍하니 듣고 있던 손내관의 손에서 등롱이 살짝 미끄러졌다. 늦은 밤, 갑자기 털어 놓는 성심이 지나쳤기 때문이었다. 적당한 답을 고르지 못한 손내관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신..신도 그러하옵니다. 나이를 먹어도 밤은 여전히 무서운가 보옵니다. 하.하.하.."


"밤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밤에 있을 일이 두려운 것이겠지."


늙은 내관의 노력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해단이었다.


"시간이 흘렀건만 어둠 속에서 홀로 자리에 누워도 기억은 늘 또렷했고, 어둠 속에서 여인의 숨결이 과인의 곁에 느껴지면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날이 자꾸 떠올라..견딜 수가 없었다. 하여 품되 긴 밤을 함께 보낼 수 없었고, 깊은 잠을 함께 이루지도 못했다."


"어찌 신이 모르겠나이까."


십 년이었다. 십년을 한결 같이 왕의 침소를 지킨 손내관이 모를 리 없었다. 취하도록 독주를 마신 밤에도, 여인을 품고 품었던 날에도, 격무에 시달렸던 날에도, 전장을 휘젓던 날에도..왕은 고요한 밤을 보내지 못했다. 등롱아래 잠든 왕의 미간은 괴로운 듯 구겨져있었고 매마른 입술로는 아픈 신음이 터져나오곤 했다. 매일 밤,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소리고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헌데, 생각해보니 편안했던 밤이 딱 한번 있었구나."


아주 좋은 일을 기억해 낸 듯 거슬림 없이 흐뭇한 옥음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도 손내관의 머릿속에 그런 밤은 없었다. 스쳐갔던 오래 전, 그날 이후로 그런 날은 없었다. 하여 그는 쉽게 되묻지 못하고 침묵했다.


"외람되오나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언제 전하께서 편안하셨는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미와산에서 머리를 다쳤던 그 날..그 날 말이다."


손내관의 손끝으로 긴장감이 흘렀다. 마음속으로 예감은 했던 일이지만 옥체의 짐이 무거워 쉽게 기대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날은 편안하셨나이까."


"낙마하며 정신이 혼미했기 때문인가."


누구에게 하는 하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눈보라가 몰아쳐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달이 밝아 쌓인 눈 위로 환히 비춰졌기 때문인가."


"아니지. 아니야. 낙마하였기 때문도 아니고, 눈보라 때문도 아니고, 달이 밝았기 때문도 아니다."


홀로 옥음을 이어가던 해단은 내관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얼굴을 가려 보이지 않아도 손내관은 알 수 있었다. 옥체를 덮은 공기가, 옥음에 담긴 소리가 온전히 전해주고 있었다. 해단은 탁자를 짚고 일어서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과인의 뜻을 알겠느냐."


"예?"


"과인이 편안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느냐 그 말이다."


"예. 신은 짐작하고 있었나이다."


손내관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짐작한다? 헌데 어째서 그리 서있는 것이냐."


"그것이 무슨..."


커진 눈을 껌벅거리던 손내관이 순간 당황하며 내려놓은 등롱을 번쩍 들었다.


"주화전으로 모시겠나이다."


늙은 내관의 힘찬 목소리에 문 밖에 시립해있던 그림자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그제서 해단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긴한 마음이 담긴 옥보는 괜히 설레고 살짝 흔들렸다. 겹겹의 나무문이 차례로 열리고 내관들과 궁인들이 등롱을 환하게 들고 길을 따를 무렵이었다.
댓돌에 발을 내리던 해단은 멀리서 뛰어오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뛰어오는 궁인의 어깨는 한눈에 보아도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무호사병에게 제지당한 궁인은 그 자리에서 엎드려 전하를 뵙겠다 큰 소리로 청하였다. 고요함으로 가득한 깊은 어둠 속, 궁인의 음성은 해단에게 전해졌다. 해단은 그대로 댓돌 위에 멈춰 섰다.


"대체...누가..감히."


늦은 밤, 건청궁 소속이 아닌 궁인이 감히 전하를 찾은 연유를 찾지 못한 손내관은 아쉬움과 질책이 담긴 탄식을 뱉으며 살피러 향했다. 손내관이 다시 온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물끄러미 밤하늘을 올려다 보던 해단은 손내관의 무거운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느리게 뒤를 돌아 건청궁으로 옥보를 되돌려 잡았다. 아무래도 당장, 연을 보러 가진 못할 듯 했다. 지금은 뭔가 들어야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걸음마다 어려움이 담긴 손내관은 몇 보 뒤에서 그의 뒤를 쫓으며 따랐다. 해단은 깊은 숨을 표나게 내뱉었다. 조금 전 본 밤하늘이 답답할 만큼 흐릿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궁인에게 받아온 물건을 올리는 손내관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묘한 불안감을 억누르며 펼쳐보았지만 해단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손내관은 난처한 듯 답을 하는 대신 침묵을 지키는 선택을 했다. 해단의 날카로운 시선은 궁인에게 향했다. 엎드려 떨고 있는 궁인의 뒤로 어느 사이에 그림자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괜한 아쉬움이 쏟아졌다. 곤히 잠든 연의 곁에서 함께 눈을 감고 싶다 여겼는데, 밤은 멀어지고 대화전 창으로 이른 볕이 스물스물 차오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냐 물었다!"


수영의 등줄기로 지릿한 전율이 흘렀다. 어디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 지 수많은 생각이 춤을 추었다. 자칫 죽음을 맛보게 될까 두려워진 입술은 자꾸 흔들렸다.


"단비 마마의 물건이옵니다."


간신히 꺼낸 첫 말이었다. 정처 없이 생각은 뒤섞였다. 궁인의 말에 해단의 눈썹이 살짝 비틀려 올라갔다. 그러나 다시 긴장한 듯 엎드리는 궁인의 어깨는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았다. 답을 찾으려 해단은 들고 있는 천 조각을 다시 바라보았다. 검게 그을린 가죽을 연이 왜 가지고 있는 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값나갈리 없는 가죽 따위에 의미를 둔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해단은 답답한 숨을 고르며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그것이 이 시각에 과인을 찾은 까닭인가?"


"아는 것을 그대로 고하거라."


손내관은 궁인을 낮게 질타하였다. 어쩔 줄 몰라하던 수영은 매마른 입술을 깨물며 살짝 고개를 들었다.


"부서부에서 오실 때부터 마마께서 소중히 품고 오신 물건이었사옵니다. 소인이 알고 있기로는 입궁할 때도 들이시겠다 하셨사옵니다. 늘 치맛자락에 묶어 지니고 계시었고, 한 순간도 떼어놓은 적이 없으십니다. 하여..근심하였는데..."


빠르게 말을 쏟아낸 수영은 숨을 고르려 말을 잠시 멈추었다.


"하여 근심을 하였다? 이것이 과인을 헤하기라도 하였다는 것이냐. 아니면 너를 헤하기라도 하였다는 것이냐."


비틀린 성심은 수영을 물리고 싶었다.


"아니옵니다. 그런 일은 없었사옵니다. 다만 무슨 물건을 저리 귀하게 여기시나 그것을 근심하였나이다. 작일 청해를 거닐다 물에 빠지신 것도 그 물건 때문이었나이다. 물건을 주우려다 그리 되시었고.."


"단비가 중히 여기거나 아니 하거나 지극히 사사로운 일이다. 더 들을 말이 없는 듯 하니 그만 물러가라."


고하는 말이 계속 될수록 성심은 요동쳤다. 그러나 손바닥보다도 작은 천조각에 별다른 마음을 담았을 리 없었다. 아무렴 그러했다. 여인의 물건이니 향낭이나 떠나 온 부서부를 기억케 하는 소소한 것임이 분명했다.


"무호사부와 관련된 것 같습니다."


생각은 툭 끊겼다.


"뭐라?"


차가워진 옥음은 싸늘하게 들렸다. 마치 거짓을 고하면 당장 목이라도 벨 듯 날카롭게 수영의 귓가를 찔렀다. 더 갈 곳도, 물러설 수도 없는 수영은 빠르게 말을 뱉었다.


"무호사부와 관련이 된 것 같다 하였나이다. 낮에 무호사부께서 주화전에 드르셨나이다. 청해에서 잃어버리신 물건이 있으시냐 물으시곤 찾아 오셨다며 주머니를 올리셨나이다. 저희도 안을 본 적이 없는 물건이옵니다. 또한 주머니는 항상 치마 안쪽에 매어두셨는데, 어찌 그걸 무호사부께서는 단비마마의 물건이라 아셨는지..."


"서국으로 오는 길 함께 했으니 알 수 있을 것이다."


꽉 쥔 주먹이 낮게 흔들렸다. 해단은 애써 태연 했다.


"전하! 그 뿐이 아니옵니다. 또한 은밀히 약초를 올린적도 있으신 듯 하였나이다. 마마께서는 주신 약초로 인해 더는 아프지 않다며 감사하다 하였지만, 단비마마께서 입궁하시어 앓으신 적은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또 무호사부를 따로 만난 적도 없으십니다."


다급해진 수영의 말 속으로 사실과 추측이 뒤섞였다. 그러나 사실에 뒤엉킨 추측은 따로 떼어내지지 않고 한꺼번에 해단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밀직사의 장계를 보고 처음 들었던 마음이 다시 떠올랐다. 우직한 사내에게 여인을 찾으라 했더니 과인의 여인을 담았노라며 피식 웃은 것은 바로 그 자신이였다. 그러나 그 생각은 생각일 뿐이라 접어 둘 수 있었고, 인규는 감히 그럴 리 없다며 엎드렸었다. 지금 궁인이 고하는 바로 그 자리에 엎드려 아니라 하였다.


"알았다. 그만 물러가라."


수영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붉은 탈을 언듯 마주하곤 서둘러 다시 고개를 숙였지만 기대했던 답과 다른 명에 마음으로 불안감이 퍼졌다. 전하를 마주하였다는 사실에 두려워 빠뜨린 얘기가 있나 수영은 생각을 되짚었다.


"그만 물러가라 하였다!"


높아진 옥음으로 노기가 번졌다. 그제서 화들짝 놀란 수영은 생각 따위는 접어두고 서둘러 절하며 뒷걸음질로 빠르게 내달려 물러났다. 더 있다가는 죽을 지도 모른 다는...그런 생각이 옥음을 듣는 순간 머리를 스쳐갔기 때문이었다. 그저 살아서 대화전 밖으로 나왔다는 것에 감사할 일이라고 위안하며 건청궁의 문을 차례로 지나쳤다. 아침 해는 비스듬히 쏟아져 눈이 아리도록 환했다. 어느 덧 아침이 온 모양이었다.





궁인이 나간 뒤 서쪽의 창만을 응시하던 해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립해있던 손내관은 뜻을 몰라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계속 서쪽의 창 너머 주화전을 생각하고 계셨음인가? 그리 가시겠다는 것인가?


"전하 어디로 길을 잡을까요."


"밤은 이미 지나갔다."


"예?"


"조찰을 할 것이다. 늘 하던 일인데, 잊은 것이냐."


그제서 당황하며 앞으로 나선 손내관은 긴 숨을 간신히 내뱉었다. 옥체에서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궁인의 말의 시비를 가리지도, 다그쳐 묻지도 않으셨다. 또한, 물리시고 단비를 찾으러 가지도 않으셨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없어 답답한 그였다. 평소처럼 조찰을 하며 일과를 시작할 만큼 주화전의 여인이 무의미 한 것인지, 아니면 궁인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각 부를 돌아보며 살피는 옥보가 조금은 급하고 무겁다는 것만 느껴질 뿐이었다.


"예청에 잠시 들를 것이다."


조찰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특별한 궁중의 경축할 일도, 기억할 행사도 없는 데, 굳이 예청에 가는 것이 의아했지만 더 여쭈지는 못했다. 문득 비켜간 시선이 너무도 깊게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런 옥보가 예청에 닿자마자 오가던 예청부들의 걸음은 그대로 멈춰졌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며 그대로 엎드린 그들 사이로 옥체는 무심히 지나갔다. 조찰 할 때, 있는 그대로를 보이라 하던 왕이었다. 하던 것을 멈추고 따로 예를 갖추면 크게 지적하던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 마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듯 아니, 보지 않으려는 듯 묵묵히 예청의 집무실을 향했다.


내달에 있을 연헌(宴獻)을 준비하던 유헌은 턱을 괴고 도감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감의 행사도가 설행(設行)해주고는 있지만 곤전이 비어있으니 상석의 배치는 늘 어려웠다. 또한, 서대비의 환우에 차도가 없다면 매년 그러했듯이 왕의 생일연은 단촐하게 치러질 수도 있었다.


"바쁜가."


익숙하지 않은 음성이었다. 낯선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슬쩍 뒤를 돈 유헌은 붉은 탈을 보고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나무의자는 큰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뒤에 있던 사검부사가 의자를 잡고 일으켜 세우려했지만 허둥대는 손길은 자꾸 미끄러졌다. 쿵쿵거리며 바닥을 찧는 소리는 몇 번이나 이어졌다.


"흠.흠"


깊게 절하고 있는 유헌의 헛기침에 그제서 사검부사도 의자를 손에서 놓고 깊은 인사를 올렸다.


"환영연을 준비하느라 고생하였다."


"아..! 아니옵니다. 마땅히 신이 해야할 일을 하였을 뿐이옵니다."


별다를 것 없었던 환영연이었다. 끝에 단비의 가락을 듣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음을 알고 있는데, 급작스런 치하는 예상 밖이었다. 비꼬인 조롱인가 하며 슬쩍 살폈지만, 옥음은 진지하기만 했다. 또한, 신하된 자의 공업을 뒤틀린 한마디로 평가할 분은 아니셨다. 때때로 진노가 춤을 추고 암행으로 뒤를 살피시는 적은 있어도 조찰을 가벼이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유헌의 생각은 깊어졌다.


"몇 해 전의 연헌(宴獻)도감을 홀로 살펴보고 싶은데, 가능하겠느냐."


점점 더 예상을 빗나가고 있었다. 멍하니 서서 눈만 껌벅이는 사검부사와 달리 유헌은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오래된 그림에서 찾을 것이 있으시다면 마땅히 준비해야 함이 옳았다. 유헌은 도감실로 옥보를 안내했다. 유헌이 허리 춤에 차고 있던 열쇠로 도감실의 문을 열자 오래되어 바짝 마른 색료 냄새가 가득이 풍겨왔다. 내달의 연헌을 준비하고자 걸어둔 도감들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유헌은 도감에 씌워둔 검은 천을 차례로 걷어 올렸다. 종이창을 통해 스며든 미명으로 먼지가 쏟아져 퍼져왔다.


"몇 해 전의 도감을 찾으시옵니까."


옥체와 단 둘이 남게 된 유헌의 입술은 긴장으로 바짝 타들어갔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벽에 걸린 도감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왕이었다. 유헌은 말 없이 뒤로 물러났다. 홀로 살피겠다 하였기에 곁을 지키는 것이 면구하였다.


"유헌."


도감실의 문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예. 전하. 하명하시옵소서."


사검사의 사사로운 이름까지 알고 계셨던가? 유헌은 긴장하며 뒤를 돌았다.


"이것을 본적 있는 가"


그제서 답은 풀렸다. 은밀히 찾으시는 답이 있으셨던 모양이었다.


옥수에 들린 물건을 살피던 유헌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주머니를 들고 있던 해단의 손끝이 살짝 흔들렸다.
여기까지 거쳐 들일만큼 중한 물건인가..!
이깟 타다만 가죽 따위가 뭐라고..!
괜한 화기가 밀려왔다.


"본적이 있군.?!"


"예. 전하. 제상궁이 그 것을 들고 찾은 적이 있었나이다. 단비마마께서 입궁하며 들이고자 하신다 들었습니다. 하여, 신이 용처를 물었으나 제상궁도 모른다 답하였나이다. 더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제상궁이 완강히 보증하여 더는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불찰이옵니다."


유헌의 등줄기로 땀방울이 맺혔다. 그러나 굳은 옥체는 별다른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불찰? 아직은 아무 문제도 없으니! 근심 할 것도 없다. 다만 그 뿐인가.?"


말을 마친 해단은 간신히 숨을 골랐다. 거칠어지는 숨결이 자꾸 밖으로 토해져 마음을 앞서 나갈 것 같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이 더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더 있어야 했다.


"무엇을 더 찾으시는 지. 신은 감히 헤아리지 못하겠나이다. 혹여 무호사부를 말씀하시는 지요."


가슴 깊은 곳을 단단히 동여매 봉인하던 줄 하나가 툭 하고 끊어졌다. 해단의 입가로 허한 웃음이 흘렀다. 기다리던 답은 무호사부가 아니었다.


"무호사부...?"


"예. 전하. 제상궁이 다녀간 날 그가 찾아와 전하께서 보여주신 그 물건을 들여도 괜찮다며 귀띔한 일이 있나이다."


유헌의 머릿속에 불현듯 주머니 얘기를 하며 웃고 있던 인규가 떠올랐다. 믿고 허락하라 했던 그는 분명 알고 있는 듯 했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디부터 수습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보지도 않고 물건에 대해 어찌 아느냐 물었어야 한다는 후회가 사무쳤다. 허나 이제와 그 날의 일을 어찌할 수 는 없었다.


"그 뿐이냐. 다른 것을 들인 적은..없느냐."


해단은 한 마디 한 마디 끊어가며 되물었다. 딱딱해진 옥음에 유헌의 등으로 긴장이 흘렀다.
무엇인가 더 있는 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았지만 더 고할 것은 없었다. 침묵은 저도 모르게 길어졌다.


"신이 아둔하여 기억하지 못하는 바가 있을 수 있으니, 일지를 가져와 올리겠나이다. 소상히 적어두었으니 전하께서"


"그것은 백호로 만들었다."


유헌의 말은 갑작스런 옥음에 허리를 잘렸다. 백호?? 유헌은 일지를 가져오려던 걸음을 그대로 멈추고 고개를 재빠르게 돌렸다.


"새하얀 털이 보드랍고, 두르면 참 따뜻한 피갑이다."


생각을 더듬다 유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활터로 향하실 때나 사냥터로 가실 때, 어깨에 두르던 피갑을 말씀하고 계심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얘기를 왜 하필 지금 꺼내시는 지 알 수 없었다.
당황한 표정은 고스란히 해단에게 전해졌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어 실소가 번졌다.
어리석게 무엇을 기대했던가?
연이 중히 품고 들이고자 한다 했기를?
들였다는 주머니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 했기를?


해단은 들고 있던 주머니를 꽉 움켜 쥐었다. 고요한 도감실에 천조각이 바스락거리며 구겨지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해단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옥체와 마주함이 황망하여 고개를 떨군 사검사 유헌의 어깨는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과인은 도감실에서 연헌 도감을 살폈을 뿐이다. 그대는 나를 안내하며 길을 잡았을 뿐, 다른 것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다."


멍하니 있던 유헌은 황급히 엎드렸다.


"예. 전하. 그러하옵니다."


"그 뿐이니...그렇게 여길 뿐이니, 그리 알라."


도감실을 빠져나가는 군왕의 뒷모습은 유헌의 침묵만큼이나 무겁고 가라앉아있었다. 벽에 걸린 연헌도감만이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아침볕을 받아 색색을 띄며 화려하게 살아나고 있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유헌은 서둘러 도감위로 검은 천을 내려 덮었다. 오래된 색료가 잠깐이지만 볕을 보았으니, 괴손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헌은 한없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어두운 도감실처럼 그의 낯빛은 그렇게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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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이 되어도 연의 손길은 멈출 줄 몰랐다. 침상까지 들어 밑을 살폈지만 피갑조각은 보이지 않았다. 망연한 표정으로 침상에 기대앉은 연의 눈가가 붉게 변했다.


"무엇을 잃어버렸느냐."


벌떡 일어난 연의 까만 눈동자가 환하게 켜둔 등롱처럼 반짝거리며 빛났다. 연은 천천히 해단을 올려다 보았다. 꼬박 이틀 만이었다. 보고 싶었던 따스한 눈동자는 붉은 탈 아래 감춰져 보이지 않았지만 연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가 내민 따뜻한 손을 힘주어 잡았기 때문이었다. 잠깐이라도 충분했다.


"잃어버린 것이 있지만, 더 귀한 것을 잡아 보았으니 괜찮습니다."


연의 음성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해단은 흐릿한 미소가 번진 연의 입술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빨간 입술은 탐스런 과즙을 배어 문 듯 지나치게 보기 좋았다.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피해 닿은 시선이건만, 온 몸을 휘감은 열기는 더 뜨거워졌다. 해단은 소매 속에 넣어둔 주머니를 힘주어 쥐었다. 아직은 물을 것이 있었다.


"더 귀한 것?"


"감사했습니다. 너무 감사하여 더는 아프지 않습니다."


더디게 손을 들어 가슴을 누르는 연이었다. 연의 가는 손가락이 누른 가슴께는 살며시 솟아 있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은 바람을 지나 흩어졌다.
해단은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연의 손목을 잡아 바짝 당겼다. 그러나 그에게 안긴 연은 전처럼 두려워하지도 힘겨워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지나치게 보기 좋은 얼굴을 품에 묻으며 살포시 웃기까지 했다. 연이 더운 숨결이 그의 가슴을 아릿하게 간질거릴 때마다 해단의 몸은 터질듯 한 뜨거운 기운에 휘감겼다. 어느 사이에 몸의 한 구석은 단단하게 솟아 올라있었다. 당장이라도 연을 안고 싶은 욕망을 참아내며 해단은 연의 고개를 올려 세웠다. 마주한 까만 눈은 밝은 달을 품은 밤하늘처럼 촉촉하게 번져있었다. 고왔다. 보는 것으로는 족할 수 없었다. 해단은 손가락을 옮겨 붉은 입술을 훑었다. 그의 손길에 반응하는 탐스런 입술은 바르르 떨려왔다. 보드라웠다. 만지는 것으로 족할 수 없었다. 해단은 천천히 탈을 들어 올리고 연의 얼굴을 그대로 마주하였다. 닿을 듯 말듯 아기 숨결처럼 번져오는 연의 온기는 그를 더 끌어당겼다.


"무엇에 감사하다는 말이지?"


당장이라도 뒤엉켜 연의 입술을 빨아 당기기 직전 가까스로 뱉은 말이었다.


그의 입술을 기대하며 눈을 감았던 연은 눈을 떴다. 바로 앞에 있는 뜨거운 입술과 달리 사내의 음성은 너무 차갑고 싸늘했다. 그러나 괜찮았다. 왕의 자리가 그리 만든 것일 뿐, 잠깐이나마 왕이 아닌 사내의 마음을 보았으니 이젠 상관없었다. 연은 천천히 그의 얼굴을 쓰다듬다 목을 끌어안았다. 연이 보듬기엔 크고 단단한 사내이지만 떨리는 손끝으로 모두 품고 싶었다. 그가 했던 것처럼 그렇게 두 팔로 안아주고 싶었다. 잠깐이라도 그의 길이 편안해지게 도와주고 싶었다. 연의 손아래 그를 열기를 다 탐하기도 전에 해단은 연의 허리를 끌어안고 침상으로 눕혔다. 거칠게 옷고름을 풀어 헤치며 들어오는 손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옷가지가 뜯기고 찢겨 나가도 연은 그의 목을 감은 손을 풀지 않았다. 봉긋 솟은 가슴을 그가 움켜쥐자 연의 허리는 절로 젖혀졌다. 뜨거워 타버릴 것 같은 입술이 가슴을 빨아 당기자 연의 입술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해단의 혀는 나름거리며 젖가슴에 도드라진 돌기를 핥았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번지는 작열감이 연의 등허리를 타고 흘렀다. 기억하는 그의 손 만큼이나 뜨거운 입술은 가슴부터 배를 타고 느릿하게 내려왔다. 붉은 입술이 지나갈 때마다 연은 그의 목덜미를 더 세게 끌어 당겼고 당장이라도 온 몸은 그의 입술 안에서 녹아내려 침상 아래로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입술과 달리 너무나 살며시 여인의 꽃잎을 젖히고 들어온 손은 서서히 움직임을 시작했다. 손가락은 꽃잎을 매만져 연을 연주했다. 손가락이 부푼 꽃잎 속, 은밀한 꽃씨를 누르면 연은 견딜 수 없는 쾌락에 몸을 떨었고 꽃길을 앞뒤로 움직이며 더 깊이 찌를 때마다 연은 허리를 젖히며 반응했다. 조금 더..조금 더.. 사내는 연을 온전하게 굴복시켰다. 사내는 연의 몸을 마음대로 부렸다. 연의 온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뜨거워 사라질 지라도 상관없었다. 그를 받아들이고 품다 그리 되어도 괜찮았다. 더는 입술을 견뎌내며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손길을 따라 몸이 제멋대로 춤을 추는 것을 인내할 수가 없었다. 연은 흐느끼듯 애원했다.


"제발..."


"감사는 내가 해야 하는 것 같군. 딱딱하게 나무토막처럼 굳어진 여인대신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여인을 품게 되었으니. 아들을 얻고자 궁중비기라도 익혔느냐.!"


청해에 도로 빠진 듯, 너무 차고 매서운 냉기가 연의 몸을 감쌌다. 연은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나서야 앞에 있는 사내를 가까스로 마주 볼 수 있었다. 지독한 조롱이 번진 얼굴은 비웃듯 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내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연의 손에서 힘이 절로 풀렸다.
서둘러 몸을 추스르려 했지만 찢긴 옷가지들을 모아봐야 소용없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연과 달리 사내는 앞섬이 조금 벌어졌을 뿐, 다른 어떤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홀로 신음하고 매달렸던 것이었다. 더할 수 없는 수치심에 연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연은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몸을 웅크렸다. 해단은 천천히 침상에서 일어났다. 한 발 떨어져 연이 하는 것을 구경이라도 하겠다는 듯 여유로운 기세였다. 연은 곁에 찢겨나간 치맛자락을 들어 몸을 숨겼다. 그 안으로 터럭하나 남기지 않고 숨어버렸으면 좋겠지만 그리 하기엔 천 조각은 너무 작았다. 헐벗은 젖가슴과 배 그리고 여인의 문을 겨우 가릴 수 있을 뿐이었다.


"보기 좋은데, 굳이 가릴 것은 없다."


비틀린 시선은 치맛자락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으로 아린 통증이 밀려들어왔다.


"왜 이러십니까. 이러지 마십시오."


연은 애원했다.


"무엇을 말이냐. 언제는 과인이 아니 그런 적이 있더냐."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잠깐이라도 잡아 주었던 따뜻한 손이면 충분합니다.청해에 빠졌을 때 내밀어주신 손이면 충분한데..."


듣고 있던 해단의 얼굴이 더 차갑게 변했다.


"뭐라? 하!! 내밀어주신 손?? 그것에 감사하여 두 다리를 벌리고 나를 맞은 것이라? 허면, 문을 잘못 열었다. 내가 아니라 무호사부를 향해 열어야 함이 옳지 않으냐!"


뜻밖의 말에 연은 뺨을 맞은 듯 멍해졌다. 아무리 조롱이라도 지나치고 황망했다.


"대체! 무슨 말씀을...그리 하십니까.! 아무리.."


"진정 몰랐던 것이냐? 무호사부가 너를 구한 것을 몰랐다?! 너를 구한 것이 나라고 믿고 있었다 그 말이로구나?! 과인이 너 따위를 구하고자 얼어붙은 청해로 달려갈 리 있겠느냐. 일개 후비 따위를 구하고자 목숨을 걸고 물에 들어 갈 리 있겠느냐."


사내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말은 소나기처럼 세차게 귓가를 때렸다. 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 없습니다. 분명..따뜻한 손이었습니다. 기억하고 있는 따뜻한 손이 맞았습니다."


"하! 기억하고 있는 손이라? 네 말이 맞다면 무호사부의 손을 잡은 적이 있었던 모양이지."


한 마디 한마디 해단은 쓰게 뱉었다.


연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질렸다.


"그 무슨..."


아니라 답하려던 연의 말은 또렷한 기억에 붙잡혀 길을 잃었다. 규의를 밟고 쓰러지려던 순간 색동깃 안의 손을 잡았던 그 손..그 손도 따뜻했었다. 위로하는 듯 부드러운 손은 스쳐가는 눈빛만큼 따뜻했었다.
흔들리는 눈빛은 하얀 얼굴만큼 깊게 굳어갔다. 표나게 보이는 마음은 뒷말을 대신했다. 해단은 싸늘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라 하지는 않는 구나. 이제 너를 구한 은인을 찾았으니 가서 보답하거라. 이미 손도 잡았겠다. 마음도 통했겠다. 나에게 이럴 것이 없질 않느냐. 나에게 했듯이 그리 해도..! 그에게 그리 해도 개의치 않겠다."


여인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의 여인이라 생각한다면 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조롱도 비난도 아니었다. 연은 질린 듯 숨을 멈추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어서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청해에 빠졌을 때 숨을 조여오던 얼음 물이 다시 연을 감싸는 듯 느껴졌다.
어느 사이에 연의 눈가로 뜨거운 눈물이 솟아 올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데, 너 따위를 구하고자 얼어붙은 청해로 달려갈 리 없다는 말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볼을 타고 눈물 방울은 굴러 떨어졌다. 하나, 둘, 늘어가는 눈물을 비켜 보던 사내는 소매 깃 속에 넣어둔 주머니를 휙 던졌다.


"중한 것이니 챙겨가야 하지 않겠느냐."


연은 앞에 떨어진 주머니를 멍하니 내려 보았다. 그토록 찾았던 주머니가 어째서 그에게 있었는 지 알 수 없었다. 천천히 주머니를 향해 손을 뻗던 연은 그대로 멈춰 섰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허한 숨이 흘러나왔다.


"이것을 왜 다시 주십니까."


무미건조한 연의 음성은 나가려는 해단의 발목을 잡았다. 해단은 고개를 돌렸다.


"중히 품고 왔던 것이 아니냐. 청해에 빠져서라도 건지고자 했던 네 마음이 아니냐. 허니, 주는 것이다. 그리 소중한 것이니 품고 가거라."


품고 가라?


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던져진 주머니 안 천 조각처럼 마음은 이제 타고, 찢겨져 지킬 수가 없었다. 더는 품을 수가 없었다.


"더는 필요 없습니다."


뜻밖의 말이었다. 해단의 짙은 눈썹이 비틀려 올라갔다.


"무호사부의 마음을 알았으니, 이런 징표 따위는 필요 없겠지. 더는 숨길 것도 없는데 은밀히 품고 있을 이유가 없겠지.!"


해단의 말을 듣던 연의 눈가가 더 빨갛게 번졌다.


"이것을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무호사부와 나눈 마음의 조각이라.. 그리 말이십니까?"


연의 입으로 알 수 없는 흐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 공허하여 가슴을 울리는 그런 허한 웃음이었다.


"아니냐.?"


해단은 비웃으며 되물었다.


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주머니를 열어 타다만 가죽을 꺼내 들고 바라보다 침상 곁에 켜둔 초로 가져갔다. 일렁이는 촛불에 금방이라도 타버릴 것 같은 작은 조각은 위태하게 연의 손 끝에 매달려 있었다.


"어느 날,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던 눈보라가 치던 어느 날, 한 사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푸른 들판의 향기를 품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품이 따뜻했습니다. 그가 어깨에 둘러준 피갑처럼 그렇게...편안하고 참 좋았습니다. 품이 너무 포근해 오래 나누고 싶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꿈결인 듯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온 산을 뛰어다니며 찾았는데, 하얀 털로 된 피갑만 남아 있을 뿐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마저 없어지면 사내를 영영 잊어버릴 것 같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마저 사라지면 사내의 따뜻했던 품도 기억하지 못해버릴 것 같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는데, 아마 꿈이 맞았던 모양입니다. 그런 사내는...제가 기억하던 사내는 처음부터 아마 없었던 모양입니다. 처음부터 없었는데, 어리석게도 혼자 그리 보듬어 품고 있었습니다. 이제 더는...더는 기억할 조각도 없으니 제가 꿈을 꾼 것이 맞겠지요."


연의 손에서 아슬아슬하게 들려있던 조각은 빨갛게 달아오른 촛불 아래로 떨어졌다. 검은 연기를 내며 순식간에 타들어가 촛대 근처 떨어진 검은 재만이 타다만 가죽의 흔적이 되어있었다.


멍하니 듣고 있던 해단은 서서히 굳어갔다. 눈보라 속 떨어졌던 그 순간처럼, 모든 것이 희미하게 멈춰 그를 감싸고 돌았다. 해단은 목구멍에 걸려있는 듯 넘어가지 않는 숨을 간신히 삼키고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것이 무슨..."


그러나 그의 하문에 답을 할 연은 더 이상 듣지 못하는 듯 하였다.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드는 연은 감정이 없는 나무인형처럼 보였다. 해단은 거칠게 연에게 다가가 연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묻지 않느냐!"


다그침은 허공에 흩어졌다. 마주한 연의 눈은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의 것처럼 아득히 멀어져있었다. 연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보았지만, 힘없이 흔들리는 몸과 달리 눈은 그를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눈으로 가득한 들판처럼 공허한 연의 눈동자는 너무 깊었다. 연의 어깨를 쥐고 있던 해단의 손끝이 비틀거렸다. 어둡게 깊은 연의 침묵에 해단은 그만 숨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신지현입니다*

오래간만이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09년 마지막날 부터, 우리 가족에게 신종플루 쓰나미가 밀려와서 저를 제외한 가족 구성원이 모두 아팠습니다.ㅠㅠ
병구완하느라..저도 힘들었고요. 흑흑
덕부에 2010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르게 이만큼 흘러버렸네요.
역시, 건강이 최고입니다. 다들 편안하시죠?


댓글 '10'

마가렛

2010.01.07 11:55:14

옙..신지현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옵소서!!
하여간 무서븐 신플..하지만 역시 울 테러리스트님께는 신플도 피해가는구만요..가족분들만 왕창 고생..ㅠ.ㅠ
반갑습니다..저 한국이여요..근데 너무너무 춥네요..같은 하늘아래 라는것만도 너무 행복하긴 합니다만^^;;;

울 연이가 해단을 굴릴 준비가 다 되었구만요..험하게 굴립시다요..우리 모두..ㅎㅎㅎㅎㅎ

베로베로

2010.01.07 11:57:56

두근두근하면서 읽었어요! 해단, 너 좀 당해보오. ㅋㅋ
그래도 다행히 잘 넘어가신 거 같으셔요. 올해 마지막 액땜했다 생각하시고, 새해에는 모두 건강하실거에요^^

나여

2010.01.07 12:06:32

지현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쇼~~~~
연이 맘의 문을 굳게 닫아 버렸으니,,,,,,,,나 참,,,,

beti

2010.01.08 03:34:06

지현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제 연의 마음이 닫혔네요;
다들 같은 마음인지ㅎㅎ 해단. 어디 좀 당해보오~

위니

2010.01.08 05:17:10

지현님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이번편에느 또 애꿏은 무호사부 잡으려나 싶어 두근두근 거리며 읽었습니다.
해단때문에 가슴을 칩니다..이 답답한 사람아..ㅋㅋ

건필하시고 다음편을 기다릴께요 화이팅

sympathy

2010.01.08 11:13:12

아, 안타깝네요. 해단과 연에게도 새해의 복이 가득하기를^^

지마

2010.01.08 23:51:13

앞으로가 더욱 기대됩니다아-

2010.01.14 04:49:37

건강이 최곱니다요. 제발..

혹혹

2010.01.15 22:06:33

두근거려요,,,,,

lara

2010.01.16 00:34:18

언넝 오시와요 기다림에 ~~~ 애타 죽겠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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