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14>


有心苦笑落庭 마음이 있어 쓴 웃음 뜨락으로 떨어지네.







"무호사부 인규 들었습니다."


해단은 들어서는 사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린 한기가 그의 곁까지 퍼져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교지를 받고 입시하였나이다."


파랗게 마른 입술사이로 흐린 입김이 터져 나왔다.


"폭우라도 쏟아지는 가."


옥좌에 비스듬하게 기댄 해단은 질문은 비틀렸다. 흠뻑 젖어 물이 떨어지는 정복을 입고 들어선 인규의 얼굴에 망연함이 번졌다. 진정 모르고 계시는 것인지 알고 모른 척 하시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인규는 옥좌의 밑에 서있는 손내관을 힐끔 보았다. 손내관의 신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오전에 있던 상참을 지켜보며 대화전에만 있었다면 신이 젖을 리 만무했다. 청해에서 손내관을 보았다던 무호사병들이 제대로 살핀 것이 틀림없었다.
아직 아니 고하였나?
인규는 궁금함을 뒤로 하고 낮게 숨을 고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단비마마께서 청해에 빠지시는 황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여 신과 무호사병들이 달려가 보니 위태한 지경인지라 구증하였나이다."


차가운 기운에 턱이 덜덜 떨려 말이 흔들렸다. 설명이 끝나도 옥체에게서는 경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혀 놀라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것을 보니 이미 알고 계셨음이 분명했다. 인규는 의아함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러나 붉은 탈이 가린 용안은 어떤 귀띔도 해줄리 없었다. 턱을 괴고 앉은 왕의 손끝만 멍하니 보다 다시 허리를 숙인 인규였다. 대화전의 침묵은 꽤 길어졌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옥좌에 몸을 묻은 옥체는 한참 만에 허리를 고추 세웠다. 한손으로 턱을 괴고, 다른 손으로 옥좌를 두들기는 모양은 짐짓 여유로웠다.


"그래? 어느 정도 위태하더냐."


인규의 머릿속은 점점 어지러웠다. 그러나 옥음은 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인규는 일렁이는 마음을 바로 잡으며 입을 열었다.


"감히 생사존망을 장담치 못할 만큼 위태.."


"그래서 뛰어들었다?"


뒷말은 옥음이 대신하였다.


"그러하옵니다."


"단비는 이 추위에 어찌하여 청해에 갔다고 하더냐. 혹여 자진이라도 한 것이냐."


자진이라는 말을 꺼내면서도 왕의 음성은 흔들림이 없었다. 무심하게 읊조리는 말투는 지극히 평온하고 건조했다. 그 때문에 더 기이하고 더 불안했다. 인규는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신은 그저 물에 빠지셨다는 전갈을 전해 듣고 달려갔을 뿐이옵니다."


"허면 지금은 괜찮다 하더냐."


"그것 또한 신은 잘 알지 못하옵니다. 의청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말은 들었으나, 전하께 드는 걸음이 많이 지체된 지라 더 살피지는 못하였습니다."


옥좌에서 세상을 또렷하게 굽어보는 왕이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고 하여도, 황주성 안 일을 모를 리는 없었다. 혹여 손내관이 전하지 않았다 하여도, 의청에서 달려왔던 이들의 보고가 없을 리 없었다. 궁의 수많은 눈과 귀는 언제나 옥체를 향해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왕은 자꾸만 인규에게 답을 내놓으라 하고 있었다. 알지 못하여 답할 것도 없지만, 의아함은 자꾸 커져만 갔다.


"전하. 외람되오나 전하께서는 모르시는 일이었나이까."


"그럴 리 있겠느냐."


딱 떨어지는 간결한 답이었다. 인규는 눈을 깜박였다.


"하오시면...신에게 재차 하문하신 연유를 찾지 못하겠나이다.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궁금했다."


깊은 구덩이로 점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무엇이 궁금했다는 말씀이신가?
인규는 기다려보았지만 더 이어지는 답이 없었다.


"무엇이 궁금하셨나이까."


"무호사부의 마음이 궁금했다. 전후 사정도 알지 못한 채, 단비를 구하러 청해에 뛰어든 마음 말이다. 과인의 목숨을 지키라 만든 무호사의 수장은 어찌하여 단비의 목숨을 지킨 것일까. 위급이 깊어 구하는 자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데...거듭 생각하여도 알지 못 하겠어 직접 물은 것이다. 충심일 텐데.. 분명 충심이긴 할 터인데, 어느 곳에서 근본을 찾아야 하는 충심인가.?"


인규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무호사에 들어 온 순간 그가 따라야 할 자는 왕이었고, 지켜야할 자도 왕이었다. 왕명 없이는 사사로이 아파서도 불충이고, 죽어서도 아니 되는 것이 무호사병이었다. 인규는 옥음마다 서린 날카로운 지적에 답할 길이 없어 길게 침묵했다.


답을 기다리던 붉은 탈이 살짝 흔들렸다. 해단은 천천히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느리게 계단을 내려가며 생각을 정리하여 하였지만, 추위로 얼어붙은 사내의 어깨를 보면 볼수록 가슴은 뜨거워 졌다.


"하하하! 어찌하여 침묵하느냐!! 설마 충심이 아니라 다른 마음이라 하려는 것이냐. 그대가...과인의 인규가..과인의 무호사부가...충심이 아닌 다른 마음을! 왕의 여인에게 다른 마음이라도 품었다고 할 참이더냐."


"아니옵니다! 감히. 감히! 신이 어찌 그런 마음을 품겠나이까. 신이 불민하여 생각이 깊지 못하였나이다. 신의 책무를 망각하고 경거망행 하였습니다. 전하의 허락 없이 신의 목숨을 함부로 한 죄 크고 깊으니, 신을 벌하여 주십시오."


가볍고 경솔하게 행동하였다고 엎드린 사내의 등은 말과 달랐다. 믿음직스럽게 넓고 눈에 익어 편안했다. 해단은 인규의 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늘 생각이 깊은 사내, 책무를 잊지 않고 소임에 충실한 사내였다. 만에 하나 그런 마음을 품었다 하여도 접을 사내였고, 천에 하나 그런 마음이 생겨도 모른 척 할 사내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를 다그치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인규가 연을 구했다는 전언을 들었을 때 부터였던가. 아니면 들어서는 사내의 젖은 옷가지를 보았을 때 부터였던가.

이유 없이 꼬인 마음은 깊게 가라앉으며 성심을 붙잡았다. 단비의 소식을 전해들을 때, 그는 상참 중이었다. 연이 깊고 차가운 청해에 빠져 위태하다는 전언은 간결했다. 구하러 간다는 것도 아니고, 구했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없었다. 상참은 공식적인 집무였고, 심상치 않은 옥국의 움직임 살피라 보낸 밀관사의 보고받는 자리였다. 옥국의 동태를 들은 신료들의 눈에 담긴 근심은 그대로 느껴졌고, 그 근심을 다스리지 못하면 불안은 커지고 퍼져 백성에게까지 전해질 터였다.
달려가 봐야 한다는 마음을 애써 지우고 황주성안 누구라도 연을 구했으리라.! 당연히 그리했으리라 여기며 이어갔던 조회였다.
그러나 옥국에서 바치는 조공을 가로채는 도적의 무리가 점점 세를 불려간다는 보고에 떠오르는 것 무장한 그들의 형상이 아니라 다시 만나 좋았다고 고백하던 연의 얼굴이었고, 군사를 보내 남김없이 토벌해야 한다는 신료들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한 것은 그를 잡던 연의 가는 손목이었다. 동태를 한 번 더 면밀히 살피어 배후를 찾아내라 가까스로 명하고 신료들을 물렸을 때, 깊게 절하며 빠져나가는 그들의 등으로 겹쳐 보인 것은 달밤에 외로이 서있던 연의 어깨였다. 자리를 박차고 대화전 돌계단을 달리듯 내려갈 무렵 숨이 턱에 차오른 손내관에게 무탈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그때...다행이라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기며 해단은 눈을 감았었다.
헌데, 연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감은 눈동자로 스쳐지나 간 것은 검은 새를 하늘로 날려주던 여인의 손이었다. 밤마다 그의 목을 조르며 잠 못들게 하는 그 손이었다. 그 손에 들려있던 날선 검이 다시 그를 찌르는 듯 가슴이 아프고, 숨이 막혀왔다.
그 순간처럼, 다시 답답해지는 가슴을 움켜쥐며 해단은 인규에게 무겁게 다가갔다. 옥보에 실린 가라앉은 성심은 인규에게 전해졌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


옥수는 엎드린 사내의 어깨를 살짝 짚고 멀어졌다. 등에 닿았던 뜨거운 손을 느낀 인규의 허리가 더욱 굽어졌다.


"전하."


"다른 말은 듣고 싶지 않다. 다시는 나서지 마라. 과인의 곁에 있는 한 어느 누구라도 명없이 사사롭게 죽는 것은 아니 된다. 자진도 불가하다. 죽으라 할 때까지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할 것이며, 이를 어기면 누구라도...용서치 않을 것이다. 누구라도!"


옥음에 담긴 것은 인규 하나가 아니라 누구라도였다. 어느 누구라도....
















**********************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가만히 누워있던 연은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둥둥 떠다니는 듯 어지럽던 몸은 훈훈한 온기로 가득 한 침상 위에 뉘여 있었다. 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곁을 지키던 제상궁이 서둘러 다가왔다. 치맛단이 서로 부딪치며 사르락 거렸다. 움직임은 기다릴 수 없을 만큼 조급했다.


"마마. 이제 괜찮으시옵니까!!"


"어쩐지 제상궁 답지 않네."


늘 가라앉아 있던 무뚝뚝한 음성 대신 다그쳐 갈라진 제상궁의 목소리를 꼭 집어 가리키고 있었다.


"예?"


"뭘 그리 놀라는가."


단비의 얼굴을 살핀 제상궁은 멍해졌다. 차가운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여인의 얼어붙은 얼굴은 분명 웃고 있었다. 젖은 머리와 생기없는 입술과 달리 눈은 반짝거리며 즐거이 웃고 있었다. 충분하게 행복하고 흐뭇하게 만족하며 제상궁을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는 지나치게 보기 좋았다. 연유를 찾지 못한 제상궁은 마른 침을 삼켰다.


"마마..혹여.."


차마 정신을 놓으신 것이라 여쭐 수 없었던 제상궁의 뒷말이 흩어졌다. 제상궁의 마음과 같은 생각을 한 주변의 궁인들도 동요하며 연의 얼굴만을 살폈다. 홀로 연만이 영문을 모른 다는 듯 큰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혹여..? "


좌중을 돌아보며 되묻는 연의 음성은 샛맑았다.


"혹여 지난 일을 기억치 못 하시옵니까."


근심어린 질문이었다. 연은 이마에 놓인 영견을 손으로 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 전 올려놓았는지 채 식지 않고 더운 온기를 머금고 있음이 전해졌다. 연은 천천히 손바닥을 펴 보았다. 더 이상 따뜻하고 포근한 사내의 손은 없었지만 손끝을 꼭 쥐면 느낌만은 아직도 생생했다. 붉은 입술이 보기 좋게 올라갔다.


"모두 또렷하다. 청해에 빠진 것도, 밖으로 나온 것도 모두 또렷하게 기억한다. 아니...나는 오히려 기억이 흐려질까 걱정이구나."


그제서 걱정을 덜어낸 궁인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긴장되던 숨을 토해낸 제상궁은 연의 손에서 영견을 가져왔다. 곁에 놓아둔 더운 물에 다시 적셔 꼭 짜낸 후 연의 이마를 닦으며 제상궁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마마.."


심상치 않은 목소리로 긴장이 계속 흘렀다.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던 연은 느리게 돌아보았다. 제상궁은 난처한 듯 뒷말을 망설였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간다는 느낌이 자꾸 입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데 뜸을 들이는가."


"마마. 밖에 무호사부가 인규가 입시해 있나이다. 마마를 뵙고 싶다고 조금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연은 제상궁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호칭은 낯설었다.


"무호사부라하면...?"


"소인이 알기로는 마마께서 황주성으로 오실 때 길을 따랐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모르는 분이시옵니까. 편치 않으시면 다음에 다시 들라 하겠습니다."


그제서 연의 기억에 믿음직스럽던 사내의 어깨가 떠올랐다. 온화한 음성을 지닌 자였고, 식선을 챙겨 가져왔던 정겨운 사람이었다. 약초를 내밀며 상처를 살피라 했었고, 넘어지려는 연을 잡아주었던 사내였다.


"아니다.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분께서 어째서...기다리고 계셨는가."


"그것까지는 소인도 잘 알지 못하나이다. 무작정 뵙겠다고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제상궁은 딱 잘라 말했다. 부드럽지 않고, 상냥하지 않은 무뚝뚝한 답이었다. 무호사부가 들어오는 것을 꽤 마땅치 않아함이 음성에서 느껴졌지만 생각에 잠긴 연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다친 손에 바를 약초를 바르라 하던 그 날처럼 그런 마음이겠구나. 물에 빠졌다는 소식에 괜한 걱정을 하고 있겠구나.


"모시거라."


"예? 이리로 모시려 하시옵니까.?"


돌려보내리라 생각했던 제상궁이었다. 못으로 달려와 단비를 구하려 뛰어들던 인규의 눈빛이 스쳐갔다. 잠깐 뿐이지만 분명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이 보였던 눈매였다. 얽히는 것이 어쩐지 좋지 않다 여기는 그녀였다.


"바로 마주하지 않으면 괜찮다 들었네만.."


벌써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는 단비였다. 법도에 어긋나는 일은 분명 아니었다. 더구나 반갑다는 듯 빙그레 웃는 여인에게서는 어떤 무거운 마음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몰래 그를 은애하였다면 저렇게 웃을 수 없음인데, 맑고 순수하게 반짝이는 눈빛은 오랜 벗에게 하듯 그렇게 은은했다. 우려할 일은 없을 것이라 애써 확신하며 제상궁은 곁의 궁인에게 눈짓했다. 연의 앞으로 나무 발이 내려왔다. 적당하게 섞여 엉킨 나무 사이로는 아니 보이지도, 다 보이지도 않았다. 그 틈으로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젖은 옷과 질린 입술, 가라앉은 눈매는 나무 발을 지나 연에게 또렷하게 전해지지 못했다.


"한 번은 뵙고 싶었습니다. 그때 주신 약초로 더는 아프지 않습니다."


감사인사를 하는 연이었다.
단비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은 인규의 손끝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번졌다. 일을 서둘러 처리하고 물러나야 했다. 더 미루어 간직하면 저 발 너머의 얼굴을 자꾸 생각해낼 것만 같았다. 궁금해 하지도,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는 분이었다. 아니 애초에 보면 아니 되는 분이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마음 쓰지 마시옵소서."


경망하게 날뛰는 불충을 밀어 넣는 인규는 천천히 소매 단에 손을 넣었다. 푹 젖은 주머니가 만져졌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어디 아프십니까."


주머니를 막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저도 모르게 놀란 손은 허공에 멈춰 섰다. 참고 있던 눈동자가 슬쩍 발 너머를 비켜지나갔다. 근심하며 걱정해주는 마음은 탁하지 않고 환했다. 그제서야 잊고 있던 인규의 기억하나가 톡 튀어나왔다.


'해단...'
감히 불러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인규가 여인의 손을 잡아 구할 때, 꿈결처럼 작고 흐릿한 목소리로 부른 것은 분명 전하의 이름이었다. 인규의 입가로 허한 웃음이 살짝 번져갔다. 그가 구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계심이 분명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무거워진 짐을 안고 계시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그저 날이 조금 차가워 그런가봅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그러합니다. 괜찮습니다."


무탈하니 마음 쓰지 말라는 편안 음색인데 인규는 어쩐지 가슴이 아리했다.


"마마..혹 잃어버린 물건이 있으십니까."


연은 쥐고 있던 주먹을 가만히 펴보았다. 주머니를 움켜쥐었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 손으로 잡았던 것은 주머니가 아니라 사내의 따뜻한 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남은 안타까움과 서운함은 참을 수 있었다.


"예.. 소중한 것을 하나 잃었습니다. 허나, 그 덕에 더 귀한 것을 하나 얻은 것 같습니다."


알 것 같았다.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지 알 것 같았다. 허나 더는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인규는 멈춘 손을 움직여 찾은 젖은 주머니를 나무 발 아래로 밀어 올렸다.
그가 하는 것을 보고만 있던 연의 입으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마마께서 잃어버리신 물건인 듯 하여 가져왔습니다."


"어찌..찾아내셨습니까.! 감사합니다. 진정 감사합니다."


서둘러 주머니를 가져가 꼭 쥔 연의 손끝을 보던 인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멍하니 있던 연도 따라 일어섰다.


"무호부사, 감사함을 어찌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도 대접하고 싶으니 들고 가시지요."


기쁨은 나무 발너머로도 분명하게 전해졌다.


"아닙니다. 그저 신으로..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 여길 것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고개를 내저으며 물러난 인규는 빠르게 내실을 빠져나왔다. 구하려 한 순간 충심이 아니었다고 하여도, 이제는 충심이라 여길 것이었다. 아니, 충심이어야만 했다. 긴 숨을 토해내며 댓돌에 이르자 따르던 제상궁이 그의 신발을 올렸다. 높은 상궁이 손수 그리하는 것은 뜻밖이었다.


"내게 할 말이 계신가."


"주머니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상궁의 날카로운 눈매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인규는 천천히 젖은 신을 받아들어 발을 밀어 넣었다. 차가운 기운은 발끝부터 전해져 그의 온 몸으로 퍼져왔다. 괜히 더운 가슴까지 한꺼번에 식는 느낌이었다.


"마마께서는 모르고 계시네."


"예."


제상궁은 다 아는 듯 간결하게 답했다. 인규는 제상궁을 슬쩍 돌아보다 피식 웃었다. 깊은 주름에 서린 걱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기 때문이었다.


"헌데, 제상궁께서는 다 알고 계시는 듯 하네."


"그럴지도 모르지요."


"근심치 마시게. 더는 가지 않을 것이네."


찬 바람에 섞인 인규의 말은 멀어지나 단호했다. 제상궁은 젖어있는 사내의 뒷모습이 주화전을 빠져나갈 때 까지 바라보았다.











밤은 깊어 갔다. 노곤함에 잠이 든 연의 침상 곁, 탁자에는 곱게 펴 놓은 주머니와 검은 가죽이 조근조근 말라가고 있었다. 축축한 기운이 다 빠져나갈 무렵 은밀한 손 하나가 다가왔다. 손끝의 깃이 푸른 것으로 보아 낮지 않은 궁인임이 분명한데, 그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낮에 있던 일로 인하여 다들 지나치게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침상 곁에서 꼬박 꼬박 졸던 궁인도 어느 사이엔 무릎으로 엎드려 낮게 코를 골았고, 매서운 눈으로 모든 것을 살피는 제상궁마저도 곁방에서 자고 있었다. 주머니까지 함께 챙긴 궁인은 도둑고양이처럼 가볍고 빠르게 주화전의 담을 넘었다. 어둡고 은밀한 궁궐 담 아래를 따라 이리저리 걸음을 옮긴 궁인은 서인전에 이르러 안도의 큰 숨을 내쉬었다.


"마마..마마.."


누워있던 홍비가 벌떡 일어났다.


"전하께서 오셨느냐!!!"


잠결에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이어도 홍비의 손은 경갑을 끌어다 열고 있었다.


"마마...수영이옵니다."


거울을 꺼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듬던 홍비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들고 있던 거울을 경갑에 소리 나게 던져놓은 홍비는 열린 문으로 들어서는 수영의 절을 못마땅하게 받았다.


"야심한 밤에 어인일이냐. 청해에 빠졌다던 단비가 죽기라도 했더냐."


심술이 묻어나는 말에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 듯 홍비의 곁으로 바짝 다가온 궁인은 소매에서 주머니를 꺼내 올렸다. 홍비는 천천히 내려다 보았다. 별로 귀하게 보이지 않는 주머니를 품고 온 뜻이 궁금했다.


"이것이 무엇이냐?"


답을 기다리지 않고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본 홍비는 더 못마땅한 표정으로 수영을 쏘아보았다.


"이 물건이 무엇인지는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마마. 헌데 이것이 예사 물건은 아닌 듯 합니다. 단비마마께서 입궁하던 때부터 어찌나 소중히 품고 계신지..오늘 청해에 빠진 것도 이 물건 때문이었습니다. 주머니를 주우려다 깊은 곳으로 가게 되었으니.."


"답답하다! 그러니까 이 그지 같은 물건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 말이다. 단비가 이걸 소중히 여기든, 불태워 버리든 값도 나가지 않는 넝마조각인데!! 이 물건을 줍다 물에 빠져 죽었다면 고마우나 질긴 목숨 건졌다고 하질 않느냐!"


"사내의 것이 아니옵니까.!!"


수영은 강조했다. 검은 가죽을 들고 흔들던 홍비의 손이 그대로 허공에 머물렀다. 손끝으로 긴장감이 퍼졌다. 홍비는 다시 가죽을 눈앞으로 가져와 이리저리 살폈다.


"그렇지. 분명 계집이 지닐 물건은 아니다. 허면??"


"그 주머니를 무호사부가 찾아내어 가져왔습니다."


"무호사부?? 인규말이냐?? 그자가 주머니가 단비의 물건인지 어찌 알고?"


그제서야 수영의 얼굴에 완연한 웃음이 번졌다.


"마마!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듣고 있던 홍비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살짝 비틀린 입술을 깨물던 홍비의 생각이 깊어졌다.


"청해에 빠졌을 때, 구한 것도 무호사부라 하지 않았느냐?"


"그러하옵니다!"


"근데, 무호사부가 주머니를 찾아 왔다!?"


"그러하옵니다!"


"기뻐하더냐? 반갑게 맞았느냐 그 말이다."


"처음에는 누군지 모르는 듯 하시더니..이내 보겠다 하셨습니다. 이상하게도 제상궁마마께서 꺼려하시는데도, 굳이 들이겠다 하셨습니다."


"모르는 듯 하였다? 부러 그런 걸 수 도 있지. 부러 모르는 척! 순수한 척! 전하를 한 번에 홀린 계집이 아니냐. 순진한 척, 환영연에서도 양가 규수처럼 뻣뻣하게 앉아 나를 조롱한 계집이다.! 잠깐...! 헌데, 제상궁이 꺼려했다? 그 말이지. 암. 그렇지! 그 늙은 여우가 괜히 그러할 리 없다. 뭔가 냄새를 맡은 게야. 비릿한 피냄새가 늙은 여우의 코에 퍼졌음이 분명하다. 또! 또 고할 것은 없느냐."


수영은 생각을 더듬었다.


"약초를 주셔서 더는 아프지 않다고..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상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어디가 아프다는 말씀이셨을 까요? 오늘까지 특별히 환우를 앓으신 적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무슨 약초를 말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무호사부께서 주화전에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신데..또한 주머니를 받고 벌떡 일어나 감사하다. 진정 감사하다 하며 깊이 기뻐하셨습니다."


"무호사부가 그 계집을 서국으로 들여왔다고 하였지?"


"예. 마마."


"하룻밤이면 족하다!"


홍비는 무의식 적으로 소리쳤다.


"마마. 무슨 말씀이시온지."


"이미 두 사람은 서국으로 오는 길에 만난 적이 있는 사이란 말이다. 남녀가 마음을 나누는데, 뭐가 필요하겠느냐. 그저 하룻밤이면 충분하지 않겠느냐!"


탄식하며 홍비는 무릎을 쳤다.


"어찌 할까요? 서궁에 알리셔야 하지..."


홍비는 가죽을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다시 매듭을 지었다.


"서궁? 다 죽어 말라 비틀어 죽어가는 늙은이다. 시키는 데로 세월을 기다린 것이 벌써 십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내가 쥔 것이 무엇이냐. 이룬것이 대체 무엇이냐. 그 늙은이의 말을 듣다가는 나도 그리 될지 모르는 일이다. 너는 이대로 건청궁으로 가거라."


멍하니 답을 기다리던 수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마..! 저를 죽이시려 하시옵니까..마마!"


홍비는 수영의 턱끝을 끌어 당겼다. 날카로운 손톱이 떨리는 수영의 턱을 부드럽게 긁어 내려갔다.


"내가 너를 그리할 리 없지 않느냐. 또한 전하께서도 그럴 리 없으시다. 아무리 살기가 돌아도 미욱한 궁인에게 함부로 하신 적은 없으시다! 그 옛날 그 때도, 곤전의 궁인들은 터럭하나 다치지 않았다. 살아있는 증거가 제상궁이 아니더냐! 너는 가서 전하께 바짝 엎드려 본 바와 들은 바를 고하거라. 더 붙일 것도 덜 것도 없이 내게 고한 그대로 고하거라."


"마마.."


"그럴 리 없겠지만, 만에 하나 내 이름이 올려 지면 어찌 되는 줄 알고 있겠지? 나는 너를 모르니, 네 가족 또한 모른다 할 것이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만의 하나이니 근심치 말거라. 품었던 계집이 다른 사내의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그저 봐줄 전하가 아니시다. 하! 그냥 품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주셨다면, 단비는 곧 황주성을 떠도는 혼령이 될 지도 모르지. 어서 가보거라. 밤은 그리 길지 않으니."


단호하게 명한 홍비는 주먹을 꽉 쥐며 쓰게 웃었다.
감사.? 진정 감사는 내가 할 일이다..!
























*날이 조금 풀렸어요 *
길에 나가보니 징글벨~징글벨~하더군요. 벌써 크리스마스라니~다들 좋은 계획 세우셨나요? 

그래도 이정도면 저 빨리 오지 않았나요? ^^ 15편도 언능 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그나저나 우리 홍비가 신이 났네요. 뭐..감사는 누가 할지 두고봐야 할겠지만요 ^^


댓글 '5'

위니

2009.12.22 14:18:40

제가 일번인가요 선댓글 달아요 !!!
작가님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시고 붉은탈도 앞으로 더욱 건필하세요

위니

2009.12.22 14:23:21

아니 무호사부하고 연을 의심하는건가요..이일로 연하고 황제사이에 오해가 좀 풀리면 좋을틴디요..ㅠㅡ

루드베키아

2009.12.22 15:43:21

인규 . 참 좋은 사람이네요. 인규를 먼저 만났더라면 어찌되었을지.

마가렛

2009.12.22 22:16:21

오호홋..홍비가 저리 이쁜 짓을 하다닛..사라지기 전에 좀 이뻐해 줘야겠네요^^;;;
테러리스트 그거 아주 나쁜사람 이거든요..오명을 벗으소서..지현님..ㅋㅋㅋ
옙..조금 빨리 오셨네요..클스마스 전에 꼭 한번 더 오시어요~~기다리옵나이다!!!!!^^*

지현님 손가락 잡아당겨 저 혼자 도장 찍었슴돠!!!!!!!!!!ㅎㅎㅎ

2010.01.14 04:24:41

어떻게해요.. 더 궁금해집니다.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제한 크기 : 2.00MB (허용 확장자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235 푸른봄-프롤로그 [2] 편애 2010-03-23
234 2010 대통령의 딸 (02) [5] 베로베로 2010-03-21
233 2010 대통령의 딸 (01) [6] 베로베로 2010-03-14
232 2010 대통령의 딸 (프롤로그) [4] 베로베로 2010-03-11
231 붉은 탈-<17> [8] 신지현 2010-03-09
230 붉은 탈-&lt;16&gt; [9] 신지현 2010-01-23
229 붉은 탈-&lt;15&gt; [10] 신지현 2010-01-07
» 붉은 탈-&lt;14&gt; [5] 신지현 2009-12-22
227 붉은 탈-&lt;13&gt; [4] 신지현 2009-12-18
226 일요일로 가는 길목 05 [4] 버져비터 2009-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