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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No.02 휴일 : 염려와 기대
「미성숙아로, 생기다 만 장기를 달고 태어난 탓일까. 한때 내 몸은 온갖 병원균의 낙원이며 은신처였다. 나와 종합병원 어린이병동의 침대 한 대는 부모님의 주선으로 안면을 터 한동안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다. 의사 선생님의 그윽한 눈빛과 염려 밴 음색, 아울러 따끔한 주사에 중독된 내가 진료비와 약값 명목으로 가산을 탕진하는 동안 필연적으로 나의 가족들은 가시밭길을 걸었다. 퇴근한 아버지는 현관에 발을 들이며 다녀왔노라 고하는 대신 내 안위를 먼저 물어 집안의 안녕한 정도를 파악했고, 의지와 무관하게 병원을 집 앞 슈퍼처럼 드나든 어머니는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 일부의 가정사마저 꿸 지경에 이르렀다. 내 외도의 가장 큰 피해자 동생 신후는 심지어 친가로 유배를 당해야 했으니 가족들에겐 나 자신이 병원균 자체였다고 비꼰대도 나로선 딱히 반론의 여지가 없다.
분명, 나로 하여 안달복달 애간장을 끓이는 이들의 피로한 얼굴은 나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어른들은 대개 어린애의 도량을 낮추어보지만 이는 숫제 평가절하다. 까마득한 옛날에는 세 살배기도 천자문을 외고 공맹을 논했다던걸. 조선시대 꼬마마냥 철이 일찍 든 나는 소독약냄새처럼 찜찜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기술을 연마, 체득하여 부모님의 근심을 조금이나마 덜어보고자 했다. 물론 나의 특수기란 세간에서 흔히 아양과 재롱으로 일컫는 종류로써 지능지수의 과시와는 하등 관계가 없었다. 잦은 발휘로 말미암아 특수기는 점차 무르익어갔고 다행스럽게도 나는 나쁜 친구의 꾐에 꼬여 황천길로 새지 않아 이처럼 건강한 청소년으로 자라났다. 요컨대 이상이야말로 내가 타인의 기분에 과할만치 민감하게 반응, 대처하는 습성을 지니게 된 배경이며 <행실이 똥파리 날갯짓보다도 가볍다>는 야박한 말을 듣고만 이유이다. 참고로 언급한 폭언은, 기분이 가라앉아 보이는 정우의 책상 앞에 앉아 위로 차 <오! 솔레미오>를 부른 대가였다.
이어진 음악시간, 나는 정우가 폄하한 진심 ― 염려와 배려를 예술혼으로 승화시키느라 몹시 바빴다. 이집트인의 경건한 심정을 빌어 음악교과서 지면 네 귀퉁이에 화려한 태양무늬를 아로새기자, 광휘에 휩싸인 <오! 솔레미오> 악보에서 태양신 라의 위엄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정신적인 포만감에 뻐끔거리던 입의 크기를 약간 늘린 순간, 째지는 비명 소리가 나의 여린 고막과 반고리관과 유스타키오관 등등을 꿰뚫었다. 마치 공포영화 같은 상황에 흥미가 동한 나는 바로 몸을 틀어 여자아이들 쪽을 살폈고 쉽게 진원을 파악했다. 말벌 한 마리가 과연 똥파리와는 수준이 다른 우아한 날갯짓으로 음악실의 상공을 비행하는 중이었다. (이제와 말인데, 혹시 벌은 나에게 이쯤은 되어야 진정한 날갯짓이라는 가르침을 전하려했던 것일까?)
교사 1층, 외진 음악실은 융단폭격을 맞은 꼴이 되었으나 여자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벌이 두려운 여선생님은 미간을 물수(水)자로 구긴 채 지휘봉을 남용하여 교탁을 두들길 뿐이었다. 하기야 벌이 나이며 신분을 가려가며 엉덩이를 들이밀던가. 아무튼 이렇게 된 김에, 라는 엉뚱한 맥락을 탄 나는 벌을 시야 밖으로 쫓아내고 정우를 주시했다. 생김새만큼은 퍽 깜찍한 곤충 ― 취향에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다 ― 으로부터 지진 급의 심각한 위협을 느낀 나머지 허리를 숙여 책상 밑으로 고개를 박은 여학생들도 다수 포진한 가운데 정우는 참으로 색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먼저 뒷목을 두 번 긁고 뒷머리를 세 번 헤집은 다음 권태로운 표정으로 하품이 나오는 입을 틀어막았다. 준비동작을 마치자마자 의자에서 엉덩이를 뗀 정우가 몸을 낮추고 구석의 쓰레기통으로 다가갔다. 정우천국, 불신지옥. 그러나 천품이 나일론인 나는 불경하게도 정우의 뇌가 급작스럽게 엄습한 공포에 콩알만치 쪼그라들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다가 곧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내 안의 신앙심 그래프가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찍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을 정우는 바닥에 음료수가 얕게 깔린 페트병 하나를 손에 쥐고 원위치로 복귀했다. 병은 뚜껑이 열린 그대로 창가에 섰다.
수업중단을 환영하는 몇몇이 지방방송의 음량을 높이고, 벌의 공격력에 관한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다수가 그 동선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이 멋대가리 없는 수업종이 교실을 정돈했다. 출석부를 옆구리에 낀 음악 선생님은 신경질적으로 안경테를 들썩거리며 “이상!”을 외쳤다. 반장이 기립하기 무섭게 수업방해의 주역이 정우가 깔아둔 함정에 몸을 던졌다. 음료의 단내에 홀린 모양이었다. 멀티 플레이어 정우는 구령에 맞춰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페트병 입구에 꾹꾹 눌러 접은 노트 장을 얹었다. 나는 감격에 겨운 함성을 토하는 대신 콧김을 길게 내뿜었다. 교과서와 노트를 정리하는 정우의 얼굴에는 거들먹임이나 자랑스러움이 한 점도 비치지 않았다. 불초소생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내가 찬양을 마쳤을 즈음, 음악실에 남은 사람은 나와 정우 둘 뿐이었다. 유체이탈이 예삿일인 나는 그렇다 쳐도 정우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귓속의 초침이 째깍째깍 소리를 냈다. 때맞춰 사타구니가 슬슬 저려오는 낌새가 얼른 체내 수분을 빼주는 게 신상과 건강에 이로울 성 싶었다. 욕구에 정직한 내가 이만 나가자, 정우를 채근하려 할 때였다. 정우가 느긋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발을 한보 뒤로 물린 정우는 창가에서 멀찍이 떨어진 그대로 팔만 쭉 뻗어서 임시 마개를 열었다. 목적을 달성한 정우가 마치 도망치듯 줄을 맞춰 선 책상틈바구니를 빠져나갔다. 삼초나 당황해 있었을까. 나 역시 재빠르게 움직여 소년의 신심을 갈라진 송판처럼 격파한 정우를 따라나섰다.
막 첫 번째 계단을 딛는 의연한 등을 마주하자 어떤 직감이 퍼뜩 뇌리에 꽂혔다. 가설의 치밀한 검증은 내 소관이 아니다. 나는 무턱대고 행동했다. 내 목소리로 빚은 정우의 이름이 간극을 메웠다. 뒷목을 주무르며 나를 돌아보는 얼굴이 무심했다.
“왜?”
“정우 너, 벌 무서워?”
“응. 그게 항원항체반응인가? 한 번 쏘여서 항체 생성된 다음번에 다시 쏘이면 심각한 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다며. 나도 요전에 한 번 벌에 쏘인 전적이 있거든.”
“무서워하는 티 하나도 안 났어.”
“너한테 들켰다, 뭐.”
“무서우면 다음부터는 하지 마. 벌이야 객기 넘치는 누군가가 잡아서 양봉을 치고도 남을걸.”
“싫어. 다른 사람 용기에 기대는 거. 도움을 기대하는 거. 그러니까 자력으로 극복해야해.”
타인에게 건 기대나 소망은 박살난 이후가 너무 초라하고 더러우니까. 작게 웅얼거린 부연이었지만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손을 씻고자 소맷부리를 둘둘 걷어 올리다 우연히 내려 본 팔뚝에서 원인불명의 시퍼런 멍을 발견한 기분. 아무도 ― 심지어 본인조차 깨닫지 못한 미미한 흉이라 해도 그 존재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음이다. 치마주머니에 손을 지른 채 한발 두발 계단을 오르는 여상스러운 뒷모습에 울적함이 실렸다. 내 눈에 산처럼 담대하고 초원처럼 너그러운 여자아이는, 정우지만 또한 정우가 아니었다. 나는 웃었다. 줏대 없는 연정이, 의기소침한 정우까지 포괄했으므로 나의 첫사랑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
신후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누웠던 허리를 일으켰다. 불공정한 밤의 은총이 신후를 비껴가 달이 새벽 한가운데 걸린 여태껏 정신은 새로 맞춘 안경알처럼 또렷했다. 바짝 마른 혀끝에서 흘러나온 한숨이 창밖의 달을 흐렸다. 빌어먹을, 신나영이 복수랍시고 매트리스 밑에 누룽지 맛 사탕이라도 박은 거 아냐. 신후가 나직한 불평을 씹어뱉었다. 발상이 다소 동화적이긴 하나 절륜한 유치함을 뽐내는 신나영이 그 주어라면 불가능, 불가해한 맥락의 이야기만도 아니다. 불면을 베갯머리로 끌어들인 주범이 오로지 다정(多情)임을 모르지 않으면서 그는 부러 오답을 찍었다. 호시탐탐 의식을 장악할 틈을 노리는 자체 책정 금지어 ― 시문학적으로는 얄미운 나비의 일종, 병리학적으로는 지랄병 계통 ― 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금지어에 포함된 정(情)자의 훈이 <뜻, 마음>인가의 따위의 여부를 두고 석 달 열흘 사색하는 짓거리만큼은 절대로 사양이니까. 머리와 달리 지칠 대로 지친 몸은 진작 노곤하게 늘어져 시트를 그러쥐는 손에 힘이 달렸다. 이불을 왼편으로 걷어낸 신후는 다리를 내려 바닥을 디뎠다.
불이 들어온 독서등(燈)의 온화한 색감이 공간 한편을 차지했다. 중지와 검지로 뻐근한 눈두덩을 주무르느라 가늘게 연 눈에 초점이 흐린 상이 맺혔다. 눈꺼풀을 여닫기를 몇 차례, 이윽고 친숙한 기물들의 위치와 태가 선명하게 잡혔다. 수면유도제의 대안이라고 해봐야 하나 뿐. 고민 없이 몇 발짝을 떼자 덩치가 우람한 책장이 멱살이라도 잡을 모양새로 신후의 전방을 막고 섰다. 시야에 달려드는 문자열의 대개가 신선하고 낯설다. 픽, 바람 새는 웃음을 지은 신후가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 책장 맨 아래 칸을 살폈다. 신후 방식의 책장정리규칙은 그답게 배타적인 바, 불청객의 손을 탈 확률이 높은 눈높이 칸에는 독서를 고문과 동급으로 전락시킨 나무 살해범들의 책을 방치해 두었다. (이를테면 고모에게 선물 받은 자기개발서로 위장한 소름끼치는 자아도취서와 어머니의 함자를 빌려 출간한 윤후 놈의 여행기를 들 수 있다.) 반면 신후가 마음의 양식으로 인정한 책들은 사각지대이자 명예의 전당인 맨 밑 칸에 두질, 세 질씩 무리를 이룬 채 자리했다.
기계적으로 책 제목을 훑어 내리던 신후의 눈길이 한곳에 걸렸다. 신후는 손을 뻗어 책의 모서리를 앞으로 당겼다. 그가 꺼내든 <삼국지>의 겉장은 구김이나 얼룩 없이 말끔했지만 속지는 연치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누르스름하게 바랬다. 엄지로 책장을 긁자 귀퉁이의 숫자가 촤르르 넘어가며 마른 낙엽의 냄새를 엷게 풍겼다. 갓 유년기의 문턱을 넘어 소년기로 접어들 무렵, 이 한 권에 담긴 내용이 궁금해서 몸서리를 쳤던 밤이 있다.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소년들의 영원한 전시 처세술 개론서이자 등장인물 빙고게임의 기본서 ― 삼국지를 발견한 신후는 채 반 권을 읽기도 전에 격동의 후한 말로 빨려들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앉은 자리에서 내리 다섯 권을 정독한 신후는 으레 숫자 육이 적힌 책등을 찾았다. 7권 아니고. 10권은 완결. 9권 빼놓고. 8권은 다음 다음번. 일생일대의 위기에 봉착한 소년의 뒷목에선 식은땀이 배어났다. 심심파적으로 잡은 책에 이처럼 속절없이 말려들 줄 몰라 미처 권수를 헤아릴 겨를도 없었다. 벌써 늦은 아홉시. 모름지기 모범적인 소년이라면 깨끗이 씻고 등교를 준비한 뒤 잠자리에 들어야 마땅한 시각이었다. 조모를 졸라 혹시 아직 열렸을지 모르는 서점에 나설 주변머리는 신후의 사전에서 등재된 적이 없었다. 읽지 말걸 그랬다는 자책감과 전개될 내용에 대한 기대감이 번갈아 잠을 방해했다. 섣달그믐보다 길었던 소년의 백야를 되새기며 청년 신후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다르지만 같은 치열한 이율배반의 밤. 1인칭 이정우에게 2인칭은 오로지 권윤후임을 ― 이와 대조적으로 권신후의 존재감이란 가끔 언급되는 3인칭 John이나 Mike만도 못한 모양이지만 ― 인정하자 왼 가슴을 주무르는 동통 탓에. 정우와 함께할 얼마간의 휴일을 꿈꾸며 한껏 들뜬 비겁한 마음 때문에.
“……미치겠다, 정말.”
윤후는 빈말로라도 성실하다 평가하긴 어려운 남자애였다. 일례로 수행평가에 반영되는 수학문제지를 미리 풀어놓는 경우가 없어 교단에 오른 반장이 손등으로 칠판을 두드리며 제출을 독촉하노라면 그제야 다급하게 정우의 옷깃을 당기곤 했다. 사람을 해답지 취급하는 윤후가 괘씸하기도 했거니와 애써 감춰둔 마음의 꼬리를 밟히고 싶지 않아서 정우는 윤후의 간절한 손길을 일단 외면했다. 정우 같으면 거 더럽고 치사하다, 저승 갈 때도 과제 끌어안고 갈 줄 아느냐, 속으로 악담을 퍼붓고 다른 숙주를 공략했을 텐데 윤후는 좀체 변절을 몰랐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조와 절개랄까. 정우의 냉담한 등짝에 구구절절한 하소연이 처덕처덕 부딪혔다. 뒤편에서 의미가 모호한 앓는 소리가 번져올 즈음, 못이기는 척 고개를 돌리면 기척을 느낀 윤후가 책상에 얹어둔 머리를 벌컥 들었다. 과제를 베끼도록 허락만 해준다면야 신체포기각서에 아버지 인감도장이라도 찍을 기세였다. 책망하는 기색 한 점 없이 숫자로 빼곡한 16절 갱지 한 장을 숫제 보물지도처럼 받드는 남자아이를 곁눈질로 훔쳐보며 정우는 내심 혀를 찼다. 애써 다진 태연무심이 흔들리기라도 할까봐 잔뜩 겁을 집어먹은 자신이 한심했다. 자기혐오의 끝은 현실도피. 무의미한 가정이 떠올랐다. 지금이 아닌, 몇 번의 겨울과 그만큼의 봄을 보낸 뒤 ― 정우의 자가 치유가 끝난 다음에 윤후를 좋아하게 되었더라면. 마음을 잠식한 그늘을 손으로 비벼 빨아서 화창한 햇빛 아래 널어 말린 다음 ― 하얗게 표백된 이정우로 윤후를 마주할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그랬는데 말이지.
‘무르기 없어, 이정우.’
‘허어……무르고 싶을 만한 거야?’
솔직히 인정. 정우가 안일했다. 단심가라는 복병을 맞닥뜨리자 순간 여유를 잃고 서론 없이 본론으로 직행한 부분은 부인할 수 없는 감점요소이나 성공적인 결과가 과정의 실패를 모두 보듬었다. 영구미결로 냉동될 뻔한 과제를 무사히 마무리 짓고 난 정우의 뱃속은 낙관으로 충만한 상태였다. 과연 배부른 이정우는 소크라테스가 되려야 될 수가 없는 법이다. 정우가 짐작한 윤후의 미결과제는 제일순위는 <미분문제>에 불과했다. 물론 정우는 따로 공부를 해서라도 미분의 개념과 원리를 가르쳐줄 요량이었다. 아울러 현실적인 계산도 잊지 않았는데 다소 세파에 찌든 요구라도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 수준이라면 너그러이 수용할 각오를 했다. 정중하고 점잖은 몸가짐과 청렴한 인상이 그 스스로 밝힌 이력의 신빙성을 높였으나 세상사는 본디 요지경 속. 만일 윤후가 미결과제를 들먹이며 수줍게 독일제 낚싯대나 정수기의 구매를 권했어도 정우는 나름 호쾌하게 36개월 할부로 카드를 긁었을 테다. 비록 추후 몇 달간 삶의 질이 하한선을 모르고 폭락하여 휴지조각이 될지언정, 팔자에 없는 영업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첫사랑에 대한 마지막 예우로써. 최악의 시나리오로 윤후가 조건 없이 사람을 포섭하는 특기 ― 마성을 살려 <호랑말코교> 따위의 신종교를 창시한 바, 운명적으로 해후한 정우에게 교단에의 귀의를 강요했더라면 줄행랑밖에 도리가 없었겠노라만. 그러나 이상(以上) 정우가 공들여 써내려간 예상답안을 윤후는 단칼에 벴다.
‘부정하고 구차해서……진작 버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있어.’
정우입장에서는 상식 밖의 대답. 순발력 수치가 한없이 영점에 수렴하는 정우의 대응은 지극히 어수룩했다.
‘음? 같이 쪼그려 앉아서 분리수거라도 할까?’
‘……이거, 폐기물이 본래 네 몫이라서 하는 얘기야. 내가 멋대로 갖고 있던 거 이제 너한테 돌려주려고. 다만 한꺼번엔 비우기엔 내가, 너무 힘드니까 시간 여유가 필요해.’
‘그……독일어 같은 한국말 해석 좀 부탁할게.’
‘독일 들어갈 때까지만 너, 나랑 놀자.’
‘…….’
‘이정우……. 나 네가 이미 승낙한 걸로 알고 보내도 되는 거지?’
반칙. 거절할 의욕을 말살시키는 절박하고 차분한 음색은 정말이지 반칙이다. 눈앞의 권윤후가 새삼 낯설어서 정우는 하마터면 이름을 물을 뻔했다. 현재의 그가 부르는 정우의 이름은 고유명사라기보다 차라리 절대적인 염원과 비슷했다. 세계평화보다 이정우라. 소탈하네. 부러 자조를 유도해보아도 평정의 수면에 이는 잔물결은 멎지 않았다. 냉소, 권태, 회의의 삼박자를 추구하는 척, 안으로는 사소한 데에 죽자고 연연하는 피곤한 소녀를 된통 쥐어박아서 의식 밑바닥에 봉인한지 수년. 처세에 능하고 항시 유쾌하며 적당히 가벼운 진화형 이정우에게 어울리지 않는 동요였다. 완곡하고 묵직한 작별인사는 벌써 다 창공으로 흩어졌건만 윤후는 대지에 깊이 뿌리를 박은 나무처럼 미동이 없었다. 배려 깊은 배웅. 결국 능동적이라 자부하는 정우가 먼저 등을 돌렸다. 들려오는 한숨소리가 목덜미를 스쳤다. 구태여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상냥한 시선이 정우의 발자국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우 샘, 뭐해.”
“엇, 죄송해요.”
등을 가볍게 두드리는 손길에 정신이 든 정우는 목례로 사과하고 식판을 내렸다. 급식실을 장악한 소란과 소음이 줄줄이 딸려 나오던 상념의 넝쿨을 썩둑 끊었다. 몇 백 명분의 끼니를 짓는 거대한 밥솥 위로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갓 지은 쌀밥에 허기를 부추기는 윤기가 흘렀다. 주걱을 감아쥐고 솥에서 밥을 덜자 순식간에 번진 온기가 식판을 잡은 왼손을 덥혔다. 소걸음으로 나아가며 간소한 반찬으로 식판을 채우다 열무김치를 발견한 정우의 안색이 해사하게 갰다. 언니 집에서 구걸해 온 묵은 배추김치를 이럭저럭 해치운 지 벌써 보름. 여러 종류의 김치가 번갈아 나오는 학교급식은 출근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나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퇴근과 월급이지. 두어 번 반복해 열무김치를 식판에 옮긴 정우는 잠시 생존과 체면이 동시 결부된 고민에 잠겼다.
“……좀 싸달랄까.”
중얼거림을 엿들은 미술선생님이 킥,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나 주말에 깍두기 담갔는데 좀 갖다 줄까? 맛은 보장 못하지만.”
“샘, 여신님이라고 불러도 돼요?”
너스레를 떨자 미술선생님이 정우의 등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진심인데. 어깨를 으쓱인 정우는 식판을 조심스럽게 받쳐 든 채 뒤로 돌았다. 한눈에 급식실을 훑어보니 명당이라 말이 아깝지 않은 창가 쪽 자리가 비었다. 모래바람의 메마름이 겸연쩍도록 활기가 넘실대는 운동장의 정경과 여백을 메운 아득하게 푸른 하늘은 입맛을 돋우는 색다른 반찬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라는 장점이자 단점이 있지. 희소성은 경쟁을 빚기 마련이다. 발 빠른 남자선생님에게 가로채임을 당할까, 정우의 보폭이 넓어졌다. 눈치작전의 성공으로 무사히 명당을 차지한 바, 교만하게 입매를 끌어올린 정우의 옆에 어부지리를 취한 진정한 승리자 미술선생님이 동석했다.
“근데 정우 샘, 내가 깜빡 잊고 안 물어봤는데 접때 소개팅 어떻게 됐어?”
머금은 조갯국에서 은근하게 기름 냄새가 났다. 목에 힘을 주어 간신히 국물을 넘긴 정우가 식판 위를 바삐 돌아다니던 젓가락질을 멈췄다. 화젯거리이자 횟감, 소개팅 남을 잘 다듬어서 도마에 올려야할 모양이다.
“어! 제가 말씀 안 드렸나? 그거 조기강판. 망했어요. 숨 막히게 진지하고 농담은 씨알도 안 먹히고. 덕분에 개그에 자신을 잃었어요.”
“에이, 뭐야. 초면에. 성격이 원래 무뚝뚝한가?”
“무뚝뚝하다기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타입이요. 중2때 그렇게 무게 잡는 남자애를 봤다면 반했을지 모르겠지만……지금은 뭐.”
도둑이 제 발 저린 심정으로 정우는 말끝을 얼버무리고 숟가락을 물었다. 내키는 대로 지껄이다보니 말인지 막걸린지 거르지 않고 갖다 붙인 터다. 나도 입이 이렇게 경박해서야, 원. 쩝, 다시는 혀끝에 엉긴 쇠 맛이 비렸다. 실상 몸을 웅크려 빈 마음만 다붓이 껴안은 열다섯 살 여자애는 누구도 좋아하고 싶지 않다고 세뇌하듯 되뇌곤 했다. 흔들림을 모르는 비정함과 냉정함에 동경을 바쳤다. 연정을 이성을 미혹하는 악덕으로 분류하고 자진하여 마음을 위험에 노출시킨 또래 여자애들을 내심 비웃고 조롱했다. 편협한 만큼 무지했다. 이정우의 암흑기. 바위 틈, 나무 구멍, 꽃 덤불 속 ― 비밀스런 곳에 숨겨진 보물처럼, 좀체 눈에 띄지 않는 타인의 장점을 꼼꼼히 짚어낸 대가가 호감이며 연심임을 몰랐다. 한참 얕잡아본 치사하고 유치한 감정이 결국 성장의 발판임을 상상도 못했다. ……정말이지 귀염성이 없다니까. 옛날 생각에 정신이 팔려 무심코 석유 맛 조갯국을 떠먹은 정우가 나직하게 신음했다.
“그럴 거였으면 괜히 나갔다, 정말. 그 소개팅 아니었으면 내가 우리 사촌오빠 소개해주려고 했는데.”
“음……뭐, 괜히 나간 거 까진 아니었어요. 결과적으로는 잘 됐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말하다보니 또 윤후가 딸려 나왔다. 집요한 남자 같으니라고. 정우가 짙은 한숨으로 미술선생님에게 상담을 요청하려는 자신을 말렸다. 저기요, 선생님. 제 친구의 엄마의 아들의 이종사촌 얘긴데 말이죠. 어쩌다보니 고교동창의 놀아달란 요구를 냅다 수락했거든요. 근데 그게……다 큰 남자는 어떻게 놀아줘야 하는지 감이 영 안와서. 만으론 스물일곱 몇 개월 일 테니 짤랑이나 모빌은 안 될 거 같고요. 에, 호텔 직행 끊어서 어른의 놀이를 하라 그러면 저 좌절할거에요. 아 물론 엄마 친구 아들의 당숙의 일이니까 제가 좌절할 건 아니지만 ― 하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아삭아삭 시원한 열무김치의 식감을 즐기며 정우는 하릴없이 눈을 굴렸다. 숟가락 대신 국자를 써서 식사를 마친 게 틀림없는 까만 머리통 여러 개가 운동장을 수놓았다. 아아. 정우는 실례를 통해 <윤후의 놀이>를 추정해보기로 작심했다.
조회대 앞에서는 여학생들 다섯이서 말뚝 박기를 하려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궂은 날이면 어김없이 꾹꾹 쑤셔대는 비루한 허리로는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기각. 시선을 옆으로 잡아끌자 스탠드 아래 모인 남학생 집단의 발아래 운동장 흙바닥을 발끝으로 파내어 그린 십자가가 보였다. 우리 세대엔 없던 <십자군원정놀이>인가……. 아니, 사거리로군. 동창들을 더 불러 모으지 않는 이상 어렵지. 기각. 저만치 철봉 근처에는 야구 글러브를 낀 녀석과 배트를 든 녀석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마주섰다. 야구공은 맞으면 아플 거 같아서 싫어. 기각. 소득 없는 헤맴을 계속하던 정우의 눈길이 씨름판 가운데에 버티고 선 두 녀석에게 멈췄다. 씨름은 아무래도 채신머리가 없어서. 아니, 근데 점심시간에 씨름을 하는 온고지신의 아이들이 있었구나. 정우가 미처 감동하기도 전에 한 녀석이 다른 녀석의 멱살을 잡고 흔들다 모래판에 내던졌다. 바닥에서 잠자다 갑작스레 일깨워진 흙먼지가 드라이아이스처럼 두 녀석을 둘러싸고 부옇게 번졌다. 저렇게 과격하게 움직이니까 5교시 마치고 배가 꺼지지. 저 놀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가 아니라. 정우가 목을 빼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싸움! 씨름판에서 애들 싸움 붙었는데요!”
무언의 압력을 받은 젊은 남자선생님 두 명이 어정어정 달려 나갔다. 세 학년 각기 12개 반. 학교란 데가 원체 비무장지대라 뉘댁 지뢰가 저리 장렬하게 터졌는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우리 반 애들은 아니었어. 이기적인 안도와는 별개로 한번 놓은 수저를 다시 들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교직 3년차. 앳되기 짝이 없는 중학생 사내애들이 월요일엔 우울해서 싸우고 화요일엔 화나서 싸우고 수요일엔 수업이 길어서 싸우고 목요일엔 비가 와서 싸우고 금요일엔 복장검사 스트레스를 풀려고 싸우고 주말엔 들떠서 싸우는 데엔 도통 적응이 되질 않는다. 질린 낯을 숨기지 않은 정우가 엉덩이를 미끄러트려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눈치 없이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요동치며 피부를 간질였다. 잔반을 국그릇에 덜며 정우는 건성으로 한 줄짜리 문자메시지를 읽어 내렸다. 내용인즉 <학교 어딘데?>, 어제부로 수정 입력한 발신자명은 <어떤 독일인>. 현장검거의 추이를 살피랴, 자리를 정리하랴 바쁜 정우가 굼뜬 놀림으로 학교이름을 화면에 찍었다.
……불운하게도 문자메시지의 핵심인 <절대로 오지 마.>가 누락된 사실을, 정우는 늦은 오후에 학교를 방문한 손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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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초에 걸린 05편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생각했어요. 이 빌어먹을 자아성찰물이야말로 <읽기>를 고문으로 전락시키는 거 아닌가. 어휴, 뭐 갈 때까진 가봐야죠. 혹시 읽는 게 정말 짜증나지는 시점에는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요. 개작이고 하다 보니 얘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저는 도통 모르겠습니다.(먼산)
ssunny님/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을 거에요! (헛소리) 불쌍하지 않은 신후는 신후가 아니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수줍)
다향님/ 추울 때일수록 체온을 높이기 위한 구르기가 필요합니다. 심지어 독일 학제랑 맞춘다고 얼척없이 봄을 배경으로 했네요. 뭐야 이 글(...)
plum님/ 윤후랑 헷갈리는 건 절대적으로 신후의 손해 같아요.(웃음) 웃긴 거하고 일기를 쓰는 거 밖에 장점이 없는 남자인데. 기대라니 면구합니다.(흑흑)
위니님/ 전에 잠깐 엔딩편을 써서 공개한적이 있는데(...) 신후는 좀 더 행복해져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더랬어요(...) 신후에게 좋은날이 먼저 올지 제가 일요길 쓰기를 포기할지 사투가 벌어질겁니다.(덜덜)
아루님/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하지만 그럼 신후의 인생이 너무 미궁이니까요! 그리고 일단 연애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대놓고 자아성찰만 하다 끝나면 허무해요.(눈물)
지마님/ 중학교 때 자작시(라고 제출했지만 인터넷에서 베낀거)를 읽으며 구토직전을 얼굴을 했던 남자애 덕분이에요.(웃음)흐울우륭귤구 얘네들 괜찮을까요?
베로베로님/ 또 어디가서 안오시나욘. 연석이랑 결이랑 손잡고 마실가셨나욘.(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