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62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바퀴를 굴리는 몸은 체인이 매개하는 구동축을 따라서 길 위로 퍼져나간다. 몸 앞의 길이 몸 안의 길로 흘러들어왔다가 몸 뒤의 길로 빠져나갈 때, 바퀴를 굴려서 가는 사람은 몸이 곧 길임을 안다. 길은 저무는 산맥의 어둠 속으로 풀려서 사라지고, 기진한 몸을 길 위에 누일 때, 몸은 억압 없고 적의 없는 순결한 몸이다. 그 몸이 세상에 갓 태어난 어린 아기처럼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길 앞에서 곤히 잠든다.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기면서, 다 가고 나서 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탄하다. 그래서 자전거는 내리막을 그리워하지 않으면서도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

(중략)

   그러므로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을 오를 때, 길이 몸 안으로 흘러 들어올 뿐 아니라 기어의 톱니까지도 몸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몸이 나의 기어인 것이다. 오르막에서, 땀에 젖은 등판과 터질 듯한 심장과 허파는 바퀴와 길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땅에 들러붙어서 그것들과 함께 가거나, 함께 쓰러진다.
   '신비'라는 말은 머뭇거려지지만, 기진한 삶 속에서도 신비는 있다.
   오르막길 체인의 끊어질 듯한 마디마디에서, 기어의 톱니에서, 뒷바퀴 구동축 베어링에서, 생의 신비는 반짝이면서 부서지고 새롭게 태어나서 흐르고 구른다.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 위의 모든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


                                                                  - 김훈 에세이 <자전거 여행> 프롤로그 중에서




덧) 리체양의 일기에 올라온 동영상을 보다가 문득 이 구절이 생각났답니다^^


댓글 '5'

Miney

2004.11.15 03:34:19

헉... 어쩐지 말하는 방식이 눈에 익다 싶었더니, 김훈님의 에세이였군요. 저는 역시 '칼의 노래'가 제일 좋았어요. ^^;;

코코

2004.11.15 04:15:52

칼의 노래는 아직 못 읽었답니다. 사실 인터뷰가 마음에 들어서 책을 읽기 시작했더라죠^-^; 일단은 그 동안 나온 에세이를 다 읽어본 후에 소설에 도전 할 생각입니다.

Miney

2004.11.15 11:05:49

저는 '현의 노래'랑 여기저기 실린 글 조각;들을 좀 읽었는데, 젤 처음 읽은 게 되어 놔서 그런지 칼의 노래가 좋았어요. 게다가 개인적으로 무장답지 않은 이순신님에 대한 환상이 좀 있어서 그런지도...;(굉장한 지략가지 않습니까? 원래 몸도 특별히 건강한 사람이 아니었고-마초맨이 아니란 생각으로 좋아함-_-;;- 섬세하고 인간적이시고... 전 전쟁은 싫어하지만 아무래도 이순신님은 전술의 예술의 경지;로 만드신 분 같아요)

D

2004.11.15 12:41:05

잡지에서 읽었는데, 이분이 처음 자전거를 사고선 사모님에게 이 자전거로 꼭 밥먹게 해줄께! 라고 장담했다고 합니다. 그리곤 그 자전거로 이렇게 에세이를 내셔서 밥을 먹게 해주었다고....

코코

2004.11.15 12:47:44

마이니/제가 가장 보고 싶어하는 건 밥벌이의 지겨움 입니다. 빨리 자전거를 끝내고 읽어볼 생각으로 가슴 두근두근^^
그런데 소설과 달리 에세이를 읽을 때는 천천히 쉬엄쉬엄 보기 땜시 아마도 시간이 쪼깨 걸릴 듯 합니다ㅡㅡ;
D/호오- 그런 인터뷰 기사가 났었군요. 딱 그 분 같은 대답이네요. 흐흐흐
제가 본 인터뷰는 사과나무 중 한 코너였습니다. 소탈함과 세심함, 직설적인 말투 등이 정말 마음에 들더군요. 이 사람은 어떤 글을 쓸까가 무지 궁금해졌어요. 그 후 김훈의 작품들을 한 권 한 권 모으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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