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에이 씨……”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오른쪽을 뜯어보고 왼쪽을 뜯어보던 주미는 스르륵 거울을 들고 있던 손을 떨어트렸다. 금세 울 것 같은 눈으로 주저앉으니 영락없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듯한 사춘기 소녀의 모습이었다.

아, 좋은 뜻이 아니다. 폼클렌징은 청정보호구역인 지리산에선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며 특별히 파편까지 출연한 연설을 20분 하고도 15분 더 연장하셨던 실장님의 감시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쓰지 못했고, 그 자리에서 마셔도 된다는 1급수의 물은 비누를 깨끗하게 씻겨내기는커녕 몇 번씩 문질러대도 찜찜함을 가실 수 없게 만들어 계속 화장실 문 앞을 왔다 갔다 하게 만들었었다. 2박 3일 밖에 되지 않는 조그마한 직원연순데 무슨 일이 있겠는가 라고 방심했던 그녀를 비웃 듯 주미의 얼굴엔 여드름 꽃이 만발했다.



심하진 않지만 피부병이라면 아토피까지 앓고 있는 그녀는 또 유난히 피부가 민감형이다. 피부 하면 최강자라 불리 우는 여직원 앞에서 자신감을 내세운다는 면목으로 로션으로 쓱 문대기만 했던 것도 한 몫 단단히 했다. 겨우 나아진다 싶었는데…… 내일부터 열리는 타회사와의 미팅 프로젝트에서 노렸던 멋진 남자친구는 이미 저 멀리 강 건너편에 가있는 듯 했다.




야 너 얼굴 꼴이 그게 뭐냐?



웃음이 스멀스멀 낌새를 보이는 목소리는 장난끼가 가득했다. 미디움 길이의 머리를 시원하게 세우고 179cm에 늘씬한 몸매에 까만 캐주얼정장을 걸치고 나타난 남자는 그녀의 동기이자 오너의 손자로 유명한 태원이었다.



니 그 번들한 운동화는 어떻고!



휴게실을 제 안방처럼 드러누워있던 주미는 벌떡 일어나 웃음을 억지로 참아내는 그를 향해 괜한 꼬투리를 잡아 끌었다. 솔직히 정장과 매우 잘 어울리는 하얀 바탕에 빨강, 파란색의 줄무늬가 예쁘게 들어간 유명 브랜드의 운동화였다. 자신과 달리 그 1급수 물이 피부에 맞는다며 한번 씻고 나서 그녀의 방에 맨발로 뛰어 들어왔던 태원에 대한 소심한 반항이나 다름없었다. 가끔씩 이마에 난 뾰루지에도 투덜거리며 출근했던 태원이지만 그것마저도 말쑥해 보이는 본바탕은 언제나 여직원들의 도마에 오르곤 했었으니 그를 시샘 반, 부러움 반으로 쳐다보는 건 어쩌면 그녀에겐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냥 폼클렌징 쓰지 그랬냐? 다른 여직원들은 다 쓰더구만.



환경이 파괴된다잖아!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소리쳤다. 어이없다는 듯 주미를 쳐다보던 태원이 웃음을 터트림과 동시에 그녀는 다시 거울을 잡아 들었다.



 


고맙다, 네 덕분에 죽어가던 환경이 살아났다.



야 넌 동료가 이렇게 좌절하고 있는데…… 빨리 진정시킬 팩이나 구해다 줘!



배배 꼬인 태원의 말투에 자신의 손에 잡힌 쿠션을 집어 던질 듯 주미가 들어올리자 태원은 혀를 날름하고는 금세 휴게실을 나갔다. 몸을 힘껏 일으킨 탓인지 나름대로 쌓인 분을 삭이지 못해서인지 씩씩거리던 주미는 결국 옷 매무새를 고쳐 입으며 일어섰다. 거래처에 제대로 된 인재가 없다는 여직원들의 소문이 사실이길 비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리허설이나 한 번 더 할까?



내키지 않는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지만 검은색 하이힐에 옅은 커피색 발을 쑤셔 넣는 그녀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문을 열어젖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홍보실직원인 우주미라고합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이 자리에 앉아계신……”



땀이 고여 조금 번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는 왼손에 빽빽이 적힌 인사말을 서투르게 읽어 내려갔다. 여러 가지 표정과 톤을 반복해가며 입을 푸는 그녀는 빨간 배경에 까만 색 무늬가 들어간 다시 말해 촌스러움의 극치를 달리는 둥근 카펫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죽어도 이 카펫이 세련되고 우아해서 자신의 이미지와 딱 떨어진다는 실장님의 잘못된 감각을 이번 기회에 바로잡아 줘야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다시 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뒤를 돌기가 무섭게 들리는 앳된 남자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복도를 울렸다.



야 너 비켜!



비상구 문에서 무섭게 뛰어 나오는 한 소년과 이마를 충돌하며 엉덩이를 뭉갤 듯 넘어져버렸다. 오른손에 들려있던 서류들은 마치 새처럼 샹들리에 밑을 화려하게 날아다녔고, 영화의 느린 화면처럼 지나가는 당황한 소년의 얼굴이 푹 눌러쓴 모자가 무색할 정도로 정확히 보였다.

이 자식아, 넌 다 살았다.


 


 


댓글 '1'

Junk

2006.04.14 21:57:41

하하하, 소년이 남주인가요? 우주미. 여주 이름이 너무 귀엽네요.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제한 크기 : 2.00MB (허용 확장자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105 묵람(墨藍) - 序曲 1 - [5] Miney 2006-10-30
104 wish - (3) [3] maliposa 2006-08-22
103 wish - (2) [4] maliposa 2006-08-16
102 wish - (1) [3] maliposa 2006-08-10
101 wish - (프롤로그) [2] maliposa 2006-08-05
100 제목있음(3.수정) [19] 2월화 2006-07-04
99 너에게 '하늘이 예쁩니까?' 1 [4] 소두믇 2006-05-15
» 늑대의 조건 - 프롤로그 [1] 몬스터 2006-04-08
97 [끝없는 밤] #25. 가슴이 하는 말 [9] 자하 2006-03-09
96 야만유희(野蠻遊戱) <2> [33] Junk 2006-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