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25




예나는 자신 앞에 있는 그 사람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처음 눈을 떴을 때에는 몹시 다정하고 세상에 하나뿐인 사람을 보는 듯한 눈길로 내려다보던 그 눈이 잠깐 어찌 할 바를 모르듯 위를 향했다. 그리고 다시 내려다볼 때에는 근엄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예나는 이름을 알지만 부를 수 없는 그 사람을 불렀다.


“영주님…….”


아드리안은 그 말에 적잖이 안심했다. 예나가 눈을 뜨고 자신을 이름으로 불렀더라면, 애써 쌓아놓은 벽이 한순간에 무너질 것 같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죠? 여기는 도대체 어디……!”


말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던 예나는 그제야 자신과 아드리안이 거의 알몸으로 딱 붙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마구 뒤척이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은 그럴수록 두 팔로 꽉 예나를 결박하고 놓아 주지 않았다.


“이거, 이거 놔 줘요! 괜찮아요, 저, 괜찮으니까!”


“시끄러워, 가만히 있어! 갑자기 움직이지 마!”


“하지만……!”


“명령이다, 가만히 있어!”


말하고 나서 아드리안은 약간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너무 격한 반응을 보여 버렸다. 생각보다 더. 예나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지?


하지만 예나는 다른 질문을 했다.


“왜, 저한테 이러시는 거예요?”


“무슨 소리냐.”


예나를 더욱 꼭 가둬서 뒤척이지 못하게, 도망가지 못하게 한 채로 아드리안은 반문했다.


“왜, 걱정하는 눈으로 이렇게 난폭하게, 명령이라고 하면서……!”


채 인과관계를 이루지 못한 말을 띄엄띄엄 내뱉던 예나의 목소리가 커졌다. 예나는 말을 다 끝맺지도 못하고 원망과 눈물을 담은 눈으로 아드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아드리안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어딘가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고개를 꺾고 예나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 그 얼굴로부터 도망쳐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아드리안은 예나의 그 눈을 되도록 태연하게, 자기가 지을 수 있는 한 가장 무덤덤한 눈으로 마주 보았다. 예나는 그 눈에 담긴 표정 때문에 더욱 질린 듯 눈을 피했다.


아드리안은 자기 안에서 무언가 일그러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아 잠깐 얼굴을 찌푸렸다. 무엇이었는지 되짚어 보기도 전에 예나가 말을 꺼내, 그쪽으로 신경이 쏠렸다.


“놔 주세요.”


“싫다.”


“정말……! 왜 안 되는 건데요!”


“아직 몸이 차갑다.”


예나는 내내 뻣뻣이 들고 있던 고개를 아드리안의 어깨로 떨어뜨렸다. 아드리안은 몹시 힘겹게 그 감촉을 느꼈다.


가까이에 있다. 오즈리크가 내 품 안에 있다. 맨살을 맞대고 체온을 나누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놓아 주어야 한다.


“질문 하나 해도 돼요?”


“뭔가?”


“지금 절 걱정해서 이러시는 거 맞죠?”


아드리안은 잠깐 고민했다. 여기에서 섣불리 부정하는 건 좋지 않다. 한 발 물러서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어떤 목적으로, 그러니까 왜 걱정하시는지 물어봐도 돼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예나의 목소리가 너무 간절했기에 아드리안은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졌다. 질문을 하나만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자를지, 왜 그런 걸 물어보는지 오히려 그게 더 궁금하다고 반격할지, 아니면 다르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생각하고 대답을 끌다가는 고민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을까 그게 더 걱정이었다. 아드리안은 그냥 뒤는 생각하지 않고 나오는 대로 말했다.


“당연히 네가 내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전 아직 영주님 소유물이 아닌데요.”


예나의 말이 뾰족하게 들렸다. 얼굴을 보지 않고 말하는 그 퉁명스러움에 아드리안은 잠깐 또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네 고용주인 건 변하지 않지.”


“한낱 하녀를 살리자고 영주님이 이러신단 말이에요?”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냐.”


계속되는 퉁명한 대답에 역습을 가해 봤다. 의도한 그대로 예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자기가 잘한 걸까 생각했다. 상대는 예나다, 오즈리크다. 정직하게 똑바로 쑤시면 회피하는 능구렁이들과는 다르다. 어쩌면 실수일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한 실수 중 가장 큰 실수.


“그러니까, 정신을 잃고 있던 동안 꿈을 꿨어요.”


불안은 현실로 점점 다가왔다. 아드리안은 예나가 그 뒤에 무슨 말을 할지 뻔히 그릴 수 있었다.


“저, 사실 열두 살 생일 날 전후의 기억이 없거든요.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꿈에 나타났어요. 그때 집에 들어온 게 영주님이었다는 걸 봤어요.”


어떻게 할까.


그냥 꿈이라고 할까? 부정할까?


“영주님이 이상한 말을 하셨어요, 그때. 하루만 더 있었으면, 이라고. 그 뒤에 내 기억을 지우고 할아버지한테 보낸 것도 영주님인 거죠? 할아버지도, 우리 할아버지 아닌 거죠?”


어떻게 할까?


아드리안이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고 있는데도 예나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예나 또한 자신의 기억을 들여다보면서 무슨 이야기를 더 할 건지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예나는 고개를 기울이고 있다가 크게 한숨을 들이쉬더니 말했다.


“사실은 다른 기억도…….”


“말하지 마!”


그렇게 버럭 소리 지르고 나서야 아드리안은 이번에도 자기가 실수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이, 감을 잡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막지 않을 수 없었다고 자신을 추슬렀다. 정말로 저 입에서 옛날 이야기가 나온다면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차라리 모든 걸 인정하자.


“말하더라도 소용없다. 넌 어차피 오즈리크와는 다른 인간이고, 나도 그때와는 다른 사람이니까. 그것만 명심하면 돼.”


단 한 부분만 빼고.


“그럼 도대체 왜 날 계속 주시하고 있었어요? 왜 내 주위를 맴돌면서 내 안위를 고심했어요?! 그건 부정할 수 없으시겠지요?”


“부정할 마음도 없다. 그건 네가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니까.”


단 한 부분. 목적만 빼고. 그것만 감출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리라.


“위험한 존재라고요?”


“설명을 원하나?”


“그래요.”


아드리안은 언젠가 예나가 누운 침대 옆에 앉았을 때처럼 잠시 한숨을 쉬었다. 항상 긴 이야기를 싫어하는 영주의 가면을 다시금 쓰기 위해서였다. 예나는 금방 그것을 알아채고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네가 밤이라고 부르는 내 종족 올레인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뒤틀리고 변해 왔다. 처음에는 병이든지 각자에게 우연히 일어난 재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같은 증상이 여럿에게 나타나면서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었지.”


“어떤 증상인데요?”


“처음에는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아. 그 시기를 겪은 올레인은 하나같이 말하지. 주위가 갑자기 뿌옇게 보이고, 하늘이 찌그러지는 것 같고,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픈데, 바로 앞에 있는 것만 선명하게 보인다고.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그건 겨우 첫 번째 변이에 지나지 않았지.”


“첫 번째 변이…….”


“그래, 첫 번째 변이. 그 뒤로도 개인차는 있지만 셋에서 다섯 번째 변이까지 겪지. 두 번째 변이는 아주 조용해. 그저 조금 편집증이 나타나고 무료해하고 잠시도 가만 있질 못하지. 억제하려면 억제할 수는 있지만, 억제했다가 한꺼번에 폭발하기도 한다. 그러면 주위에 있던 자들, 특히 그 소유물들이 피해를 보지. 이 시기에 심하면 광폭해져서 올레인끼리 결투를 하기도 하고, 어느 하나가 죽을 때까지 누군가를 공격하기도 한다. 아직 그게 두 번째 변이라는 걸 몰랐던 때에는 종족 전체 차원에서 그런 자를 처단하기도 했지. 그자가 인간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손을 뻗친다면 귀찮아지는 건 우리 전체였으니까.”


아드리안은 예나가 자신의 말에 담긴 뜻을 속속들이 파고들지 않길 바랐다. 종족 전체 차원에서 그런 자를 처단해야 했던 것이 수장인 자신이라는 것을 예나가 못 알아채기를 바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런 자신에게 실소했다.


어차피 지금 하는 이야기는 예나가 자신을 경멸하길 바라면서 늘어놓는 것이 아니던가? 지금 무슨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나중에야 알았다. 그게 단계별로 진행되는 변이라는 것을. 계속 그대로 올레인은 뒤틀리고 변하다가 살아 있는 시체처럼 몸은 죽었으되 영혼은 남아 있는 상태까지 변하지.”


“아, 설마?”


“그래, 네가 맨 처음에 들어갔다가 쫓겼던 그곳에 있는 시체들은 사실 모두 한때는 건강한 올레인이었다. 그 상태까지 진행되면 일체의 행동을 귀찮아해서 어두운 곳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으려만 하지. 살아 있는 상태 자체가 지옥이니까.”


“그럼 그래서 절 쫓아왔던 건가요? 휴식을 방해해서?”


“그것도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그럼?”


“그것은 네가 오즈리크이기 때문이다.”


“오즈리크라서……? 무슨 뜻이에요?”


“살아 있는 시체가 되는 데까지 이르는 변이를 겪으면서 우리 종족은 이것이 신이 준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영원히 살아서 인간의 피로만 기운을 얻을 수 있다는 것만 가지고는 신이 사랑하는 한 종족을 멸망시킨 죄를 씻을 수 없어서였을 거라고, 이것이 진짜 벌일 거라고, 우리 모두 결국 살아 있는 시체가 되어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한 채 그렇게 스러져 갈 거라고, 그렇게들 말했다. 이 절망에 이르러서 모두가 생각한 것이, 단 하나 살아 있는 메나르의 오즈리크라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였지.”


예나는 조금 알겠다는 듯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이야기를 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던 아드리안은 갑자기 자신이 얼마 만에 오즈리크를 품 안에 안고 있는 건가 생각했다. 조금만 있으면 놓아 줘야 할 포옹일지라도.


“그래서 그렇게 내가 떨어질 때 다들 오즈리크라고 외쳤던 거군요.”


“그렇다. 그리고 난 네…… 오즈리크를 찾는다고 해도 구원이란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널 가지고 올레인들이 경쟁을 벌이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널 숨기고 계속 주시해 온 거다. 올레인의 수장으로서.”


예나가 품 안에서 한숨을 쉬는 것이 느껴졌다. 아드리안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오즈리크의 성격이라면, 기억까지 가지 않더라도 요 사이에 느꼈던 예나의 성정이라면 여기에서 그대로 물러날 리 없었다. 이제 곧 최대의 고비가 닥칠 것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그러니까, 사적인 감정은 전혀 없이, 올레인의 수장으로서 가진 관심이라고요?”


“그렇다.”


“당신은 오즈리크를 잊은 건가요?”


“잊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오즈리크가 아니다.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오즈리크는 언제나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고, 너 또한 예나이고 인간일 뿐이다.”


거짓말. 가슴이 차가워진다.


“하지만 나는, 여기 있는 나는, 그러니까 예나인지 오즈리크인지…….”


예나는 정말로 혼란에 빠진 듯 다시 횡설수설 말을 잇지 못하다가 아드리안을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 아무 느낌도 없는 거예요? 내가 딴 사람이라고! 당신은 관심이 없다고! 정말이에요?”


“그만해라. 추하다.”


“뭐?”


“네가 예나라는 소녀로서 나를 마음에 두었던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상황을 낭만적으로 왜곡시키려고 들어선 곤란하지 않겠나? 내가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사실이라고 믿을 텐가? 지금으로서도 나는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라고 변이를 피할 수 있었을 것 같나? 하지만 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지금도 참고 있는데, 자꾸 그렇게 부정해서 어쩌려는 건가? 네가 좋을 대로 생각하고 나서 그 뒷감당을 할 수 있겠나?”


예나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눈이 커져서 사정없이 쏟아지는 아드리안의 잔인한 말을 들었다. 아드리안이 한 마디를 덧붙일 때마다 예나의 눈에 맺히는 눈물 덩어리도 커지는 것 같았다.


아드리안은 그런 예나를 품에서 떼어냈다.


“날 흔드는 품을 보아하니 이제 충분히 몸이 따뜻해진 것 같군. 더 이상 붙어 있다가는 어떤 짓을 할지 무서우니, 이만 옷을 입어라.”


예나는 눈물 어린 눈으로 아드리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마지막 기회를 주듯이 말했다.


“방금 그 말, 내 눈 똑바로 보면서 말해 봐요.”


여기가 고비다.


아드리안은 스스로를 격려하고 자꾸 무너지려는 자세를 추슬렀다.


이걸 넘겨야 돼. 한순간 눈을 보는 게 두려워서 천년이 넘도록 목표로 했던 바를 깨뜨릴 텐가? 지금 다정하게 본심을 말하면 분명 오즈리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날 용서하고 바로 내 품에 안길 테지.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정말로 정말로 그것을 원하고 있다. 하지만 정신 차려. 오즈리크가 다시 한 번 내게 온다는 것은 메나르와 올레인의 질긴 악연을 이어간다는 뜻이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떠올려. 모든 악연을 끊고 전혀 연관 없는 생을 살도록, 오즈리크가 정말로 새 사람이 되도록 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세월을 바쳐 왔는지를 떠올려. 자신을, 시간을 배신하지 마라.


아드리안은 예나의 눈을 똑바로 지그시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내 옆에 계속 붙어 있고 싶나? 이해는 하지만 말이지…….”


경쾌한 짝 소리가 나고 예상보다 더 호된 따귀가 들어왔다. 아드리안은 나쁜 놈이라고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와 거칠게 몸을 떼내고 옷을 입는 모습을 보면서 계속 웃음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눈으로 말을 할 수 있다면, 얼굴에 선명한 메시지를 새길 수 있다면 너와 조금도 더 있기 싫다는 말을 하려고 온 힘을 다했다. 예나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지 않고 입술을 앙다물고 옷가지를 모아 오두막을 나갈 때까지 계속 그랬다.


예나가 나가고 잠깐 있다가 아드리안은 그 자리에 무너졌다. 연회에서 거기 있는 모든 올레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할 때보다도, 그 옛날 끝도 없이 메나르를 베어 넘길 때보다도 더한 피로가 몰려들었다. 계속 속으로는 일어나라고, 예나가 금방 돌아올 수도 있다고, 그게 아니라고 해도 늑대들에게 숲을 빠져나갈 때까지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자신을 윽박질렀지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일그러졌다.


아드리안은 놀라 눈을 들어 주위를 보았다.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처럼 주위가 온통 회색으로 보였고, 그나마도 사물간의 구별이 잘 되지 않았다. 귀에서는 벌레가 기어가는 것도 같고, 뱀이 흔드는 것도 같은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당황해서 일어나려는 순간 온 뇌가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날카로운 통증이 꿰뚫고 지나갔다.


아드리안은 고통에 신음하면서 허리를 펴지 못하고 고꾸라졌다가 다시 배를 움켜 쥐고 앞으로 엎드렸다. 식은 땀을 흘리면서 잠깐 고생하고 나자 제정신으로 있을 만한 순간이 잠시 돌아왔다. 그때에 아드리안은 자신이 둘로 나뉘어 저마다 비웃어 대는 착각에 빠졌다.


오즈리크를 떠나 보내고 바로 이렇게 되다니, 정말 지독히도 나약하구나. 이때까지 무엇으로 버텼는지 알 만하구나.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없다. 수장도 연인도 아니게 된 몸, 이대로 변이가 진행되지 않더라도 살아 있는 시체인 것은 마찬가지.


일어나라, 멍청아. 아직 그녀가 무사히 이 숲을 빠져나가지도 못했다. 지금 여기서 널브러질 만큼 네가 편한 처지인 줄 아느냐?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이것밖에 안 되는 녀석이었으면 진작 집어쳤어야지, 이젠 그것도 안 된다.


사정없이 자신을 몰아치면서 겨우 일어나 앉아 숨을 가다듬고 있을 때, 갑자기 어디선가 몹시 따뜻하고 시원한 기운이 몸 안으로 들어왔다. 누군가가 아드리안의 몸에 손을 대서 변이의 기운을 몰아내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자신을 보호하는 그 손의 주인을 보고 놀라 뒤로 물러섰다.


예나가 여전히 눈물을 담은 눈으로, 웃으며 서 있었다.


“이 바보.”


“왜, 왜 온 거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어. 혼자서 끙끙대고, 혼자 옳다고 믿는 대로 마구 나가 버리고.”


그리고 아드리안의 품으로 작은 여자가, 천년 동안 계속해서 품고 싶었던 여자가, 그러나 차마 품을 수 없었던 여자가 안겨 들어왔다. 그 여자는 아드리안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내가 이번에도 놓칠 줄 알아? 이젠 이 가슴이 하는 말만 믿을 거야.”


아드리안은 그 말을 듣자 갑자기 크게 웃고 싶었다. 언제나 그랬다. 좁은 가슴으로 이것저것 생각해 놓고 속이려 해도 오즈리크만은 속일 수가 없었다. 잊고 있었다. 오즈리크가 자기 마음을 짚어 내는 데에 자신보다 더 고수였음을.


그러나 목이 메여서 크게 웃어 젖히지도 못하고 끙끙대고 있는데, 그녀의 입술이 다가왔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살아 있는 입술. 잠시 머물렀는데도 갈망과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천년 동안 계속 그리워했던 입술. 이제는 늪에서 자신을 끌어 올리는 강하고 부드러운 입술. 아드리안은 잠시 눈을 감고 그 맛을 음미하듯이 가만히 있었다. 예나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러세요, 영주님?”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계속 알면서, 깨어났을 때부터 알면서 존대말을 쓰고 영주님이라고 부른 거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막힌 데가 뚫리면서 웃을 수 있었다. 아드리안은 품에 들어온 그녀를 두 팔로 감싸안으며 말했다.


“아드리안이라고 불러.”


그러나 부를 틈은 주지 않았다. 아드리안이라는 이름은 공기 중에 나오기도 전에 그 이름을 가진 한 남자의 입술 속으로 사라졌다.



댓글 '9'

떠돌이별

2006.03.09 09:50:07

오오~ 드디어!!! +_+ 좋아요 좋아~~ /ㅅ/

mirage

2006.03.09 10:00:55

근데....숨기고있는 비밀이 뭘까~~
작가님~너무너무 기다렸답니다.
그나저나 여주인공에 마구 휘둘리는 남주인공은 정말 좋네요.>.<

귀연천사

2006.03.09 10:32:56

웅.. 넘 오랜만이셔욧.. 이제 빨랑 빨랑. 두사람 이야기 풀어가 주실꺼죠??

귀여운이

2006.03.09 19:33:19

드디어!!!! ++

mehee

2006.03.09 21:24:54

멋진 오즈리크, 예나.
사랑을 아는 영주님, 아드리안.
둘의 그 다음 이야기.....

둥글레

2006.03.09 22:59:18

흐흐흐... 침 흘리며 보고 있답니다. 넘 좋습니다. 담편도...

애플

2006.03.09 23:49:49

드디어 올라왔네요..호호..전 책나오길..그냥 기다려야겠어요..^^

미르냥

2006.03.10 00:22:18

어...왜 이러지...아드리안이 거짓말 하고 예나를 보내고 난 뒤, 변이를 겪으면서도 아직 예나가 숲을 빠져나가지 못했다고 보호해야한다고 다그치는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어요. ㅡㅜ 최고!

시즈

2006.03.10 20:34:28

미르냥님, 저도 찡했어요.
둘이 무사히 도망쳐야 할텐데.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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