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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친정이 가깝다는 것은 약간 귀찮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윤주는 돌이 지난 조카를 안고 서 있는 게 힘에 겨웠다. 윤주의 품이 비좁을 정도로 자란 조카 민서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걸 조용하게 타이르며 그녀가 거실을 서성이는 사이 식구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 식사 중이었다.
“엄마. 오이김치가 맛있네. 나, 이것 좀 싸주라.”
윤주의 언니이자, 민서의 엄마는 아삭한 오이김치를 씹으며 말했다. 결혼해서 민서라는 아들도 있지만, 친정에서 겨우 10분 남짓한 근처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탓에 끼니때 마다 들러서 식사를 해결하곤 했다.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은 엄마와 아버지, 언니와 형부였다.
“혜주, 다 먹었으면 얼른 애 받아. 윤주도 밥 먹어야지.”
“좀 늦게 먹으면 어때서 그래요. 집에서 가만히 있는데 무슨 배가 고프다고요.”
아버지의 말에 언니가 빈 그릇을 들고 일어나서 남편에게 밥 한 공기를 더 덜어주며 투덜거렸다. 형부가 얼른 민서에게 가보라고 고갯짓을 했다.
“민서야~ 이모, 밥 먹어야 하니까 엄마한테 와.”
언니가 두 팔을 활짝 피며 민서에게 다가왔다. 윤주에게서 아이를 받아 안으며 눈을 흘겼다.
“무슨 애물단지라고 종일 안고 있어? 혼자서도 얼마나 잘 노는데.”
“안아달라고 울고, 보채는데 그럼 어떡해.”
윤주가 변명처럼 말을 웅얼거렸다. 민서가 제 엄마의 품보다 이모의 품이 더 좋은지 온몸을 흔들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소리를 질렀고, 언니는 그런 아들을 능숙하게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윤주는 식탁에 앉아 머뭇거리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티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집에서 논다, 네가 하는 일이 뭐냐는 등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따끔따끔해졌다. 이제는 웬만큼 무뎌진 것도 같은데도 상처가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젓가락이 갈 길이 없었다. 오늘 저녁의 주 메뉴는 해물탕, 가지무침, 오징어 젓갈, 갈치 김치. 일단 밥 한 숟가락을 김에 싸서 한 입 입에 넣었다. 온통 싫어하는 음식들뿐이지만, 뭐라고 투정할 처지도 못 되었다.
“내일, 민서 데리고 가서 예방접종 좀 맞추고 와.”
언니가 그새 민서의 손에 장난감을 쥐어서 거실에 내려두고는 주방으로 와서 말했다. 엄마에게 말했던 데로 오이김치를 가져가기 위해서 김치냉장고를 열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언니는 왜?”
“나는 내일 곗날이야. 약속 있어.”
윤주는 김에 싼 밥을 천천히 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안돼. 내일…….”
내일은 물론 앞으로 당분간은 민서를 봐주기 힘들다고 이야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미처 말을 이어나가기도 전에 언니가 말을 잘랐다.
“왜 안돼?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뭐해? 바람도 쐴 겸 병원 좀 다녀오면 되지.”
“언니는 약속이 내일 하루 종일 있어? 아침에 병원 갔다가 약속 나가면 되잖아.”
“그럼 민서는 누가 봐? 그냥 너, 내일 집에 있어라. 윤주, 너도 알지? 우리 친구들 모임에는 애는 절대 안 데리고 나가는 거. 그게 룰이야. 처녀 적부터 약속이라구.”
식탁에 앉아 묵묵히 밥만 먹고 있던 형부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처제, 내일 차 가지고 가. 내일 나가기 전에 기름값도 줄게.”
윤주가 슬그머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 사람들이 지금 용돈을 타내기 위해서 괜히 작전을 쓴다고 생각하는 걸까?
“안돼요. 나, 내일부터 일하러 가기로 했어요.”
적어도, 졸업을 하고 1년을 놀던 딸이 일하러 나간다고 이야기했을 때 적어도 이런 반응은 아니어야 한다. 가족들 모두 잠시 멍한 얼굴로 윤주가 바라보다가 저마다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쏟아냈다.
“네가? 어디에?”
“엄마는……. 얘가 무슨 일을 한다고 그래? 얘가 살림이나 하라면 하지 어디 가서 직장 생활할 스타일은 아니지.”
언니는 늘 이런 식이다. 왜 같은 말을 해도 이렇게 밖에 못 하냔 말이다!
“근사한 데 아니야. 그냥 카페에서 아르바이트야.”
아……. 또 기가 죽는다.
“그럼 그렇지. 난 또 뭐라고.”
“갑자기 웬 아르바이트야? 니가 직장 다닐 나이지, 아르바이트 할 나이야?”
“그냥 집에만 있으니까 너무 무기력해져서 그래. 뭐라도 좀 하려고. 아르바이트 하면서 직장도 알아 볼 거야.”
엄마와 언니의 공격을 한꺼번에 받아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윤주에게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지는 형부는 묵묵히 밥만 먹고 있었고, 아버지는 식사를 끝내고 물을 마시며 듣고만 계셨다.
“니가 일할 거면 어디서든 벌써 했겠지. 쓸데없이 고생만 하지 말고, 그냥 얌전히 집에 있어.”
“그래. 아르바이트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너 아르바이트 한 번도 안 해봤잖아.”
이 나이 먹도록, 대학 다니는 내내 아르바이트 한 번 못해봤다는 이야기는 윤주 자신이 듣기에는 창피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언니가 이런 말을 하면 울컥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분가해서 따로 살고 있는 오빠네에서 첫 조카가 태어났다. 맞벌이인 오빠 부부를 위해 아기 보는 일로 여대생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얼마 후 언니가 민서를 낳았고 몸조리와 육아를 도왔다. 언니는 전업주부이지만 뭐가 그리도 바쁜지 지금도 일주일에 사나흘은 민서를 봐주고 있었다. 예전에는 아르바이트나 배낭여행보다 조카를 봐주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값어치를 따지면 안 되는 일인 줄은 알지만, 이제 와서 후회가 되는 것을 보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왔는지 절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너, 대학원 보내주신다며? 대학원 안 갈 거야?”
윤주가 아버지가 계신 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에게 대학원 가기 싫다는 이야기를 진작 해야 했던 걸까. 아버지는 이제까지 윤주가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대학원 진학 준비 중이라고만 생각하고 계셨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윤주로써도 편한 일이어서 굳이 더 이상 공부는 생각 없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었다.
“처제. 일하고 싶으면 밑에 병원에서 일하지 그래?”
형부의 말에 엄마가 반색을 했다.
“그래. 윤주야. 어디 가서 고생하지 말고, 아버지 병원에서 일해라. 여보, 당신. 카운터에 윤주 자리 하나 만들어 봐요.”
윤주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아버지 병원은 싫어. 일자리 구했다니까!”
아버지도 형부도 한의사이고, 1층은 두 분이서 같이 일하고 계시는 한의원이었고, 2층은 부모님과 윤주가 함께 살고 있는 살림집이었다. 한의원에 간호사, 접수 직원 다 있는데 쓸데없이 한자리 마련해서 꿰차고 들어가기는 싫었다. 아버지, 형부, 수시로 들락거리는 엄마와 언니 눈치를 보며 일하기는 죽어도 싫었다.
“너같이 물러터진 애가 어디 가서 남의 돈을 벌겠니? 이게 배가 불러서 이러지. 백순데도 식구대로 용돈 줘가며, 차 빌려 줘가며 하니까 얘가 세상이 어떤지 몰라요. 엄마, 내버려둬요. 윤주는 고생 좀 해봐야 되요. 남의 돈 먹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아니? 일주일도 안돼서 못 한다고 앓는 소리 낼걸.”
윤주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소리를 바락 질렀다.
“내가 알아서 해! 그러니까 언니도 이제 나한테 민서 맡기지 마!”
“야! 서윤주! 이게 어디다 데고 소리를 질러?”
언니 역시 눈에 쌍심지를 켰다.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에 윤주가 슬그머니 눈길을 피해서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도 이제 어디 갈 때 나보고 운전하라고 그러지 마. 오빠한테도 그대로 이야기해. 나한테 다시는 수빈이 맡기지 말라고. 민서도 안 봐 줄 거고, 수빈이도 안 봐 줄 거야. 자기 애는 자기가 키우라고 해!”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팽개치고 벌떡 일어나서 발소리를 요란하게 쿵쿵 울리며 방으로 향했다.
“서윤주! 밥 안 먹을 거야?”
“안 먹어!”
뒤통수에 걸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다시 한 번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씩씩거리며 문을 걸어 잠갔다. 목이 말랐지만, 뒤돌아 방을 나와서 물을 가지러 주방에 가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목은 말랐지만 속은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