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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지금은 약육강식의 시대이고 우리가 사는 여기는 눈에 보이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영역이다. 집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도 눈으로 직접 살인과 강간을 목격할 수 있는 그런 세상. 공권력이 땅에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어둠에 빌붙지 않으면 얼마 남지 않은 ‘법의 힘’조차 유지할 수 없는 시대.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 어둠에, 굳이 집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살인과 강간이 당연한 듯 이루어지는 공간에 살고 있었다. 시프트(Shift)의 리더인 강성위의 집에 머물고 있었으니까.
물장사를 하던 엄마와 성위네 집에 들어간 건 열 살 때의 일이다. 당연히 어린 나는 그 집이 어떤 곳인지도 몰랐다. 국내뿐 아니라 동남아에 거대한 카지노를 갖고 있는 소위 검은 일을 하는 가문이라는 것도 당연히 알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없었다.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없었으니까 중요치 않다. 단 한 사람 의 가족인 엄마와 그 집에 들어가게 되고 보니, 몇몇 고용인을 제외하고 가족은 성위의 아버지인 강 회장과 나보다 한 살 위인 성위뿐이었다. 나와 엄마는 그런 그들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곱지 않은 눈총을 받았다. 특히 곱지 않은 눈총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성위였다.
나랑 자다가도 강 회장이 부르면 급히 일어나곤 하던 엄마는 내가 13살이 된 어느 날 밤, 잠자듯이 숨졌다. 물장사 바닥에 있었던 사람답지 않게 마음이 여린 엄마였다. 언젠가부터 강 회장은 엄마를 잘 찾지 않게 되었고 엄마가 하얀 알약을 삼키는 일도 늘어났다. 어쩌면 그녀의 이른 죽음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죽었지만 나는 그 집에 남았다.
고아가 된 나를 거둬준 건 강 회장의 마지막 배려였지만 어쩌면 나를 그대로 고아원에 보내는 편이 더 고마운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고교 입학을 코앞에 둔 겨울밤의 일이었다.
그 날은 겨울비가 내렸다.
고교생이 된다는 기분에 들떠 위험도 무릅쓰고 친구와 놀러 나갔다가 그만 차가운 비에 샤워를 하다시피 젖고 말았다. 법으로 정해진 통금시간인 자정직전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 목욕을 했다.
더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나자 만사가 편안해졌고, 최근 들어 내 존재 자체가 불쾌하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성위의 날카로운 시선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때.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난 자유니까. 자유롭게 날아가 버릴 거야. 이 집을 나가서, 이 도시를 벗어나서 자유로워질 거야.
어딘가에 내가 꿈꾸는 낙원이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건 낙관이고 오산이었다.
“읍……!”
머리에 타월을 만 채 살금살금 입구 쪽 욕실에서 나왔을 때, 갑자기 강인한 손이 뻗어 나와 내 입을 막았다. 충격에 막대기처럼 굳어진 내 귀에 뜨거운 숨결을 머금은 바람소리가 약간 쉰 느낌으로 귓가에 속삭인다.
“훗, 너무 늦게까지 나대는 거 아냐? 너.”
그대로 내 방으로 질질 끌려가 침대에 던져졌을 때, 이미 알아차렸다. 이것이 진짜 악몽의 시작이라는 것을. 소리를 질러봐야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성위의 집인 것이다. 강 회장은 해외출장 중이었고, 고용인들은 2층이나 별채에 있지만 없는 거나 다름없는 존재들이었으니까.
무서웠다.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처럼 무서웠다.
내 입에 타월이 물릴 때도, 양손이 끈으로 조이듯 묶일 때도, 그의 무게가 더 이상 벗어날 수 없도록 꽉 누를 때도, 살과 뼈가 갈리는 통증이 혐오스러울 만치 거대한 그의 육봉을 통해 몸을 파고들 때도.
미쳐버릴 것 같은 공포가 있었다.
아니, 그 때 이미 미쳐버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대로 그의 소유품이 될 수 있었던 거겠지.
다음 날 아침, 더럽혀진 시트에 대해 묻는 빨래담당 아주머니께 생리가 터졌다고 태연하게 거짓말하고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내달렸다. 샤워를 틀고 더러운 몸을 씻고, 또 씻고, 또 씻었지만 여전히 내 안은 더러운 피가 고여 있었고, 비를 맞아 감기 걸렸단 핑계를 대고 며칠 동안 학교를 가지 않는 동안 나는 그래봐야 소용없단 사실마저 깨달았다. 그는 그 뒤로도 내내 내 방문을 열었으므로.
토할 것 같았다.
토해서라도 오물을 덜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내 안에는 오물이 계속해서 쌓여갔다.
*
가볍게 생각했다. 성위의 밑에 있는 녀석이겠거니, 하고.
그게 당연하다. 전에도 말했듯 이종격투기 체육관은 시프트의 전용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남자애들은 감히 들여다볼 수조차 없는 그곳에 당당히 들어와 아무도 없다고는 하지만 태연하게 샌드백까지 후려치다니, 보통 학생이라면 상상도 못할 짓이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는 건 그런 걸 가리키는 말이겠지.
나는 학교에서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나도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른 아이들에게 나는 시프트의 리더, 전지전능하신 강성위의 여자 친구로 통하므로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고, 건드려봤자 오물을 건드리는 느낌일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리고 혼자라도 상관없다. 책상에 턱을 괴고 멍하니 밖을 바라볼 자리를 배정받은 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전학생이다, 이름은 이극기.”
담임의 말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돌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 아이들의 ‘얌전하게 생긴 것 같은데 왜 하필 이런 학교에? 쟤 자칫하면 고생 좀 하겠다.’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반갑습니다. 이극기입니다.”
침착한 목소리가 귀에 꽂히기 전까지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을 때는 전학생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참이라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그가 몸을 펴기를 기다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든 사람은 안경을 쓴, 말 그대로 단정한 인상의 모범생이었다. 빈 체육관에 들어와 핸드백을 후려치는 일 따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도 않고 체육계로는 더더욱 생각되지 않는 녀석. 하지만…….
“가만, 자리는 어디로 할까? 아, 민수하 옆자리가 비었던가?”
담임의 시선을 따라 그가 이쪽으로 얼굴을 돌린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얼굴이 너무…… 닮았어. 하지만 표정이 다르다. 눈이 달라. 순간적으로 겹쳐지는 듯했지만 역시 아니었다.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의 묘한 분위기가 저기 서 있는 녀석에게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 들은 목소리가 닮았던 건 어디까지나 내 착각인 걸까.
틀려, 다른 녀석이야.
전학생은 선생이 가리키는 대로 책상 사이를 휘적휘적 걸어와 내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딱히 내 얼굴을 보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시선을 피하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가방을 열어 책과 필기도구를 꺼냈을 따름이었다.
역시 착각일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체육관은 불을 켜놓지 않아 어두웠고, 나는 그 때 수치감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뭣보다 오늘 전학 온 학생이 뭐 하러 하루 전날 미리 학교 체육관을 찾아왔겠는가. 아니, 그렇다고 해도 전학생의 목소리는 어제 들은 것과 톤이 비슷한 것 같기는 한데.
……모르겠다.
전학생을 힐끗거리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담임이 뭐라고 마지막 당부를 하고 나가는 소리를 멍하니 귓등으로 흘려 넘기고 있는데,
“잠깐.”
눈앞에 불쑥 샤프가 내밀어졌다. 덜컥 내려앉은 가슴을 억누르며 난 애써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고 샤프의 주인을 응시했다. 안경 속의 선량한 눈동자가 나를 향해 전학생 특유의 쑥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1교시가 세계지리 맞지? 교재 좀 보여줄 수 있을까? 여긴 자체교재를 쓴다고 들었는데 그것만 못 받았거든.”
뭐니, 지금? 대체 무슨 꿍꿍이를 하고 그러는 거야? 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인간 맞지? 대답해, 맞지? 대놓고 말하란 말이야! 아니, 아니야. 달라, 너무 달라. 눈이…… 눈동자가 너무 달라. 잠시 동안 얼굴을 탐색하듯 뚫어지게 들여다보자 상대는 쑥스러운 듯 눈을 피했다.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한숨을 쉰 다음, 말없이 책을 꺼내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놨다.
“아니, 난 같이 보자고 했던 건데…….”
“필요 없어. 선생이 날 지명하면 귀띔이나 해줘.”
“아, 알았어.”
머쓱한 동작으로 책을 집어 드는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혹시 어제…….”
혹시 나 본 적 없어?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보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는다.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려던 말이 갑자기 막혀버렸다. 나도 참 집요한 인간이구나. 그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그렇다 해도 모르는 척 해주는 건 고마운 일이고, 아니면 그거야말로 다행인 거고.
“아냐, 아무 것도.”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여, 전학생.”
이죽거리는 울림이 저편에서 들렸다. 우리 학급 비공식관리인 방진욱의 목소리다. 올 것이 왔군. 나는 피곤해져서 책상 위에 엎드렸다.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자고 싶었다. 물론 제대로 잘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예상대로 옆에서 요란하게 책상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씹 새끼가! 야! 부르면 재깍 반응해 얄 거 아냐! 이 쉐끼 봐라? 동작 굼뜬 게 아주 노천온천 굼벵이 수준이네?”
“왜, 왜 이래?”
“왜 이래? 하! 너 중립지대 출신이냐? 호오, 온실 속 화초가 여까지 납시셨다? 근데 이거 어쩌지?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하는 법이거든. 여긴 모 아님 도, 서울에선 강남 아님 강북이야. 중립 어쩌고 뻘 소리 까다간 알지?”
“무슨 말……, 욱!”
쾅!
방진욱은 서열은 낮았지만 그래도 ‘시프트’였다. 단 한방에 전학생의 몸은 교실 구석에 처박혔다. 늘 보는 광경이지만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지 여자애들의 숨죽인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책상에 엎드린 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지겨워.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저들의 작태가.
퍽, 쾅! 꺅! 퍽, 쾅! 꺅! 퍽, 꽝! 꺅! 끔찍한 소리를 내며 구타가 연이어지는데도 반 아이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선생들은 달려오는 기척조차 없었다. 하긴,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제 몸도 못 추리는 사태가 벌어질 테니까. 생존과 자기 몸의 평안무상을 위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게 이곳의 진리.
“방과 후 체육2관 제1별실로. 7시까지 안 오면 낼 바로 병원행이 될 거다.”
또 저 소리? 지겨워.
“히야, 공주마마? 실례, 잠을 깨웠다면 죄송했습니다요.”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일어선 나를 보더니 진욱이 놀랐다는 듯 이죽거렸다. 입만 살아서 잘난 척하긴. 약한 인간 갈구니 살맛나니? 그래봐야 성위 앞에서는 너나 나나 저기 뒹굴고 있는 저 놈이나 매한가지잖아. 안 그래?
진욱에게는 시선도 두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다 문득 돌아보았다. 벽에 늘어진 채 전학생은 아직도 충격이 다 가시지 않은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일어서. 여기는 강한 자들만이 지배하는 곳이야. 그 정도 갖고 엄살 부리지 마. 이 학교로 전학 온 책임은 1차적으로 너한테 있으니.
마음을 읽은 걸까? 멍하니 풀려 있던 눈동자가 내려다보는 내 눈과 부딪쳤다. 어디로 봐도 어제 체육관에서 본 그 눈은 아니다. 날카롭게 칼을 벼린 듯 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뇌리를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저건.
계속.
여기까지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보시다시피 현대가 아닙니다. 그냥 현대 서울과 비슷한 다른 세계죠. 갈수록 황당해지고 여러 면으로 수위가 높아질 건데 어디까지 갈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서 일단은 공개란에 뒀는데 19금방으로 옮길 가능성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