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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뜨거운 여자, 차가운 남자(열녀냉남)에 대해서 물어보셔서 천동에 연재했던 글을 그대로 올립니다.
만약 열녀냉남을 다시 잡는다 해도 상당히 수정해야 하니까 ^^; 차라리 그냥 올려요.
연재가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이렇게 써놓으면 덜 클릭하시겠지요. ㅎ
** 여기서 잠깐 홍보(^ㅇ^)
게스트 완결란의 그림집과 네컷만화(그림들이 안 보이던 게시물)를 다시 복구했습니다. (게시판 링크로 해결함)
뜨거운 여자, 차가운 남자
이월화 지음. (천동 연재분. 2004.06.22~23)
1.
“내가 단단히 혼을 내줬단다. 시윤이에게 너무 화내지 마라. 네 동생이 워낙에 맘이 여리잖니? 꽃뱀에게 걸려든 거야. 시우야, 듣고 있니?”
전화기에서 중년 여자의 애타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네, 네. 어머니.”
시우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양손에 쥔 아령을 가슴 위로 들어올렸다. 시우는 운동용 벤치에 누워 아령 운동을 하며 심드렁하니 흘려들었다. 그가 팔을 굽혔다 펼때마다 대흉근과 삼각근이 번갈아 긴장되었다.
“그러니까 어머니께서 제게 말씀도 않고 시윤이 카드 한도를 도로 올려주셨고요. 우리 순진한 시윤이를 열다섯 번째 꽃뱀이 꾀어냈다는 말씀이시죠?”
“시윤이는 술집에 안 가고 싶었다는구나. 그런데 애가 워낙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서로들 데려가려고 하잖니? 몇 달 만에 한번 룸살롱에 갔다가 코가 꿰었대요, 글쎄. 여자애가 나이도 어린 것이, 은지인지 윤지인지…….”
“어차피 업소용 이름이겠죠.”
“내가 은지라는 계집애한테 넉넉히 끊어주면서 다시는 시윤이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시윤이는 너한테 면목 없다고 대전으로 내려갔어.”
어머니가 눈치를 주면서 외가로 내려 보냈을 것이다. 더 이상 시우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시우는 소파 사이에서 크기가 다른 브래지어를 셋 발견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잘 처리하셨습니다.”
“그렇지? 호호.”
어머니는 겨우 숨을 돌렸다는 듯 밝아진 목소리로 웃었다.
시우의 동생 시윤은 유복자이다. 시윤은 벌써 22살이지만 어머니는 애교 많은 둘째를 형에게서 보호하려고 애쓴다. 이번일도 그렇다. 임시용의 빈 아파트에 시우가 불쑥 들리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계속 시윤을 감쌌을 것이다. 신도시에 지어진 숲과샘 아파트는 시우의 소유로 꼭대기 층은 친척의 방문에 대비해서 비워두고 있다. 며칠 전 시우가 머리를 식히러 들렀을 때 시윤은 갓 데뷔한 탤런트와 얽혀 있었다.
“카드는 막아두고 시윤이는 석달간 대전에서 지내라 하십시오. 석달동안 집안일을 제외하고 서울에 왔다는 얘기가 들리면 다섯달로 늘어납니다.”
“그, 그래. 시윤이도 이번에는 몹시 후회하는 눈치더라.”
시우의 냉정한 말투에 어머니가 떨떠름하게 답하였다. 아버지와 조부 밑에서 엄격하게 후계자 수업을 받은 시우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아들이었다. 시우는 어린 나이에 집안일을 책임지게 되면서 조숙한 성격이 더 냉철하게 발전하였다. 친어머니조차 찬바람이 씽씽 돈다며 서운해할 정도다.
그렇지만 시우는 어머니의 유약한 둘째 아들보다 자신의 이성적인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어머니의 착한아들 시윤은 아버지가 가장 적자를 본 사업이었다. 시우는 석달간 10살 어린 동생이 조신하게 지내기만을 바랄 뿐이다.
은지는 거울속의 모습을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짙은 화장에 세팅한 머리가 평소의 자신과 전혀 다르다.
“어휴. 겨우 촌티 뺐네. 자, 이번에는 옷 입을 차례야.”
의붓동생 주리가 침대위에 펼쳐놓은 샤넬 투피스를 집어 들었다. 은지는 광택이 나는 실크블라우스의 끝도 없는 단추를 하나씩 잠그며 물었다.
“그냥 친구 집에 다녀오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해?”
주리는 입술을 비죽였다.
“보통 친구가 아니고 엄청난 부자 친구라고. 은지 언니 평소 차림으로는 경비실에서 안 보내줄걸?”
“그럼 너도 그 친구 집에 갈 때마다 이렇게 입니?”
은지는 실크블라우스에 샤넬 정장을 받쳐 입으며 중얼거렸다. 주리가 톡 쏘아 붙였다.
“언니는 진석 오빠랑 결혼할 뻔 했으면서 옷차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직도 몰라? 진석 오빠 어머니가 언니더러 옷 좀 제대로 챙겨 입으라고 말했잖아. 양가 상견례에서 내가 다 창피하더라.”
주리와 새어머니는 은지의 파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은지는 조건이 좋은 남자와 약혼까지 갔다가 결혼을 두 달 남겨놓고 파혼하였다. 새어머니는 파혼 후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은지에게 감정 없는 로봇 같다고 나무라기도 했다. 은지가 겉으로 보이는만큼 무덤덤한건 아니다. 오랫동안 자의든 타의든 남자친구였던 사람을 잃고 슬펐다. 한편으로 떠밀리듯 진석과 애인사이로 알려지고 결혼하게 되지 않아서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사람이 나무랄데 없다고 칭찬하던 약혼자 진석. 은지는 그와 7년을 알았지만 막상 여자친구답게 마음을 썼는지 아리송하여 미안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진석의 거짓말을 알았을 때에도 조용히 파혼해 달라고만 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난 진석 오빠 마음 이해할 수 있어. 언니처럼 답답한 여자만 계속 보면 지친다고. 자기 주변에 있는 근사한 여자애들이 더 눈에 들어오겠지.”
“진석씨는 화장하고 옷 잘 입는 여자보다 내가 더 좋다고 말했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언니랑 7년을 사귀면서도 화장 잘하는 애인들 여럿 만들고 다녔잖아. 난 언니가 이해 안돼. 언니도 노력해서 진석 오빠를 붙잡으면 되지. 누구 좋으라고 파혼을 해? 언니가 앞으로 진석 오빠만큼 괜찮은 남자 만나겠어? 진석 오빠는 집안 좋지, 명문대 출신이지, 석사 밟고 있지. 언니는 까놓고 말해서 평범한 집 딸에 보통 여대에 식품영양학과 나와서 평범한 영양사 보조나 하는…….”
주리는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삼켰다. 은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
“지난달부터는 직장도 안다녀.”
약혼자였던 진석은 은지가 직장을 그만두고 시부모를 모시기를 바랬다.
“그래서? 아니, 그만두자. 거울 봐봐. 이만하면 공들인 보람 있지?”
주리는 흡족해 했지만 은지는 낯선 모습에 적응이 어려웠다. 긴 거울에 비친 은지의 모습은 주리의 미약한 판박이 같았다.
주리와 은지는 피한방울 안 섞인 의붓 자매다. 주리는 얼굴 생김이 시원시원하고 쌍까풀이다. 반면 은지는 조금조금하고 홑까풀이다. 여러 색을 겹칠 한 짙은 아이섀도와 볼터치는 은지의 얼굴을 애써서 주리와 닮게 한 느낌만 든다. 주리는 모델 체형으로 은지보다 20cm나 키가 크고 몸매도 볼륨이 있다. 전체적으로 은지의 모습은 겨우 교복을 벗고 정장을 처음 입은 듯 어색하였다. 은지가 자기 몸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다리는 키에 맞지 않는 긴 미니스커트에 가려져 어정쩡하였다. 은지의 검은 생머리는 뿌리는 염색약으로 보랏빛을 들이고 크게 컬을 하였다. 주리라면 이런 스타일을 세련되게 소화하겠지만 은지가 하니 어린 여자애가 억지로 성숙해 보이도록 기를 쓴 듯한 모습이다. 은지는 나무열매 모양의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차라리 친구더러 다음에 만날 때 가져오라고 하지 그러니?”
“난 강의 들으러 가야 해. 친구도 계속 바쁘고. 언니가 잠깐 다녀오기만 하면 간단하잖아.”
주리는 신경질적으로 말하고 지갑에서 카드 열쇠를 꺼내 주었다.
“내말 기억해?”
“음. 숲과샘 아파트 가동 3011호. 거실 화분 뒤에서 손목시계를 가져오라고…… 주리 너 예쁜 시계 많잖아?”
“생일선물로 받았단 말이야. 꼭 가져와야 해.”
“내가 혼자 갔다가 네 친구를 만나면 어쩌지?”
“상관없어! 오늘 간다고 말해놨어.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냥 가져가라고 말했다고.”
주리는 얼굴을 붉히고 입술을 깨물었다.
2.
은지는 경비실을 지나 숲과샘 아파트에 들어섰다. 가동 꼭대기층은 몇 주 동안 은지처럼 요란한 모습의 여자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기 때문에 은지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은지는 전통 가구의 느낌이 나는 엘리베이터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샘과숲 아파트는 현대적인 외관에 고급 호텔 같은 내부구조이다.
‘아파트라기보다 맨션이네.’
은지는 30층 꼭대기 층에 도착하여 카드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인 없는 집에 들어서려니 무안하여 재빨리 거실의 티비에 다가갔다. 티비 옆의 빈 화분에는 다행히 주리의 손목시계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은지는 보석을 백은으로 둘러싼 손목시계를 집어 들었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남자의 욕설과 함께 들렸다. 은지는 뒤돌아섰다. 욕실에서 허리에 타월을 감은 남자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
“넌 뭐야?”
포위하듯 덮쳐 오던 남자가 두세 발짝 앞에 우뚝 섰다. 은지가 열쇠 카드를 손으로 꼭 쥐자 남자는 은지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차갑게 빛나는 눈으로 뜯어보았다.
“시윤이 녀석의 취향과 다르군. 그 애가 열쇠를 맡겼나?”
“아…….”
은지는 할말을 잃고 남자를 보았다. 건장한 몸에 완벽하게 자리 잡은 근육이 남자의 호흡에 따라 피아노 건반처럼 흐른다. 은지는 남자의 상반신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흉포한 눈빛이지만 발톱을 감춘 날렵하고 우아한 짐승. 등을 따라 소름이 오소소 달린다. 은지는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순두부찌개를 떠올렸다. 그의 가슴을 혀로 핥으면 순두부처럼 찰지고 보드라울까? 은지는 얼굴을 붉히며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박은지예요.”
“박은지? 아아, 은지.”
남자의 말에는 경멸이 담겨있지만 은지는 그가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는 게 귀를 어루만지는 듯 하여 좋았다. 남자는 은지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다 정리했다더니 아직도 기웃거리는군.”
남자의 신선한 샤워코롱이 은지를 둘러싼다. 풋풋하고 서늘한 내음이 후각을 기분 좋게 자극한다. 좀더 다가가서 파묻히고 싶을 만큼. 은지는 27년의 세월동안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에 당황스러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러니까 저는 제 동생의 언니에요.”
은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쓸며 더듬거렸다. 떨리는 손 밑으로 평소보다 부푼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한다. 은지는 남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랐나 보다하고 생각하였다.
“난 내 동생의 형이지. 내가 댁을 환영해야 하나?”
남자의 눈이 차갑게 굳었다. 은지는 멍하니 서서 그가 자신을 환영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했다.
“시윤이를 만나러 왔다면 헛수고야. 동생은 몇 달간 갇혀 살아야 하니까.”
은지는 그제서야 남자의 정체를 알았다. 의붓동생 주리는 밤에 한식당 아르바이트를 다닌다. 주리는 시윤의 형이 그 식당의 사장이라고 말한 적 있다. 거만하고 재수 없는 남자라면서.
“아, 사장님이시군요?”
은지가 밝게 웃자 시우는 눈을 찌푸렸다.
“사장이 아니고 회장이오만.”
“풋! 잘 부탁드려요. 회장님.”
시우는 깔깔거리며 웃는 은지를 보며 자신이 왜 굳이 은지의 말을 정정하려고 했는지 의아해 하였다. 시우는 불쾌한 낯으로 말했다.
“동생에게 이미 부탁했으니 나한테까지 부탁할 필요가 없을 텐데?”
“부탁드려야죠. 회장님이신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은지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손목에 흘러내린 시계를 흔들었다.
“이걸 찾으러 왔어요.”
까르띠에 한정품. 동생 시윤의 카드 결재목록에서 본적 있다. 시우의 입이 비틀렸다.
“반짝이는 돌멩이를 놓치지 못하는 게 여자의 마음일 테니 오늘까지는 이해하지.”
“반짝여요?”
은지는 시계를 손에 펴서 빛에 비추어보더니 눈을 빛냈다. 초록과 황록의 투명한 돌멩이가 빛을 모으며 표면에 매끄러지는 모습에 현혹당한 듯한 표정이다.
“정말 반짝이네! 너무 예뻐요!”
동생이 정작 그것을 사주고 이 얼굴을 못 봤다면 중요한 보답을 놓친 것이다. 시우는 생각을 정정했다. 선물에 대한 감탄이야 여자의 직업적이고 습관적인 기교일 것이다.
시우는 모델 화보집을 따라 어설프게 꾸민 듯한 여자가 저 표정으로 얼마나 많은 사내들에게서 우려내었을지 궁금해 하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저속한 여자에 대한 저속한 호기심은 시우의 삶에 불필요하다.
동생의 여자가 시계에서 시우로 눈을 돌리며 또 한 번 노골적으로 감탄어린 시선을 던졌다. 시우는 여자의 감명어린 얼굴을 내심 즐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자의 얼굴이 숭배에 가깝도록 자세라도 바꿔가며 취해주고 싶다. 사실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은 강한 열망이 든다. 동생의 난잡한 섹스 파트너중 한명일 뿐인데. 시우는 내면의 압력을 곧장 쳐냈다. 시우가 불쾌한 표정을 짓자 여자가 홀린듯한 얼굴에서 깨어나 시계를 보았다.
“어머, 벌써 아홉시네. 저 이만 가볼게요. 열한시까지 서울역으로 가야 하거든요.”
서두르는 모습이 약속이라도 있는 듯 하다. 시우는 의심을 품었다.
“서울역? 혹시 목적지는 대전이고?”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요.”
“부산?”
“아는 친구가 부산에 살거든요.”
“친구라. 그 친구도 만나서 잘 부탁하려고?”
시우가 이죽거리는데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걸 보면 보통 뻔뻔한 여자가 아니다.
“오뎅을 먹여준대요.”
“오뎅.”
일식집으로 간다는 말일까?
“뜨겁고 축축한…….”
은지는 저녁에 먹을 부산 오뎅을 떠올리며 눈을 게슴츠레 뜨고 무의식적으로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려 손끝을 붉은 입술로 쪽 빨았다. 침을 넘기는 소리가 상대편에서 들려왔다. 도취된 표정으로 오뎅을 떠올리던 은지가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시우가 움찔거린다.
“회장님도 좋아하시나 봐요? 부산 오뎅은 쫄깃쫄깃해서 좋아요. 부산에서 만날 친구는 빨리 꺼낸 단단한 걸 좋아하지만요. 저는 충분히 기다려서 크게 부풀어 오른걸 좋아해요. 음……. 입안에 가득 차면 뜨거우니까 이빨로 살살 긁다가…….”
“여자가 못하는 소리가 없군!”
시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은지는 벌건 얼굴로 성을 내는 시우를 보며 주춤거렸다. 시우는 눈을 부라리며 내쳐 물었다.
“부산 친구를 만난 후에 다시 서울로 오나?”
“아뇨. 친구가 밤에 실컷 놀자고 했어요. 낮에는 일 때문에 바쁘니까.”
“밤에 실컷?”
그가 이빨 사이로 으르렁거린다.
“이번 주에는 일정이 빽빽이 짜여져 있어요. 친구들이 약혼 깨졌으니 위로 여행을 하라고 날짜 맞춰서 불렀거든요. 그다음에는 전라도로 가서 삼합을 먹기로 했죠. 물 좋은 흑산도 홍어가 들어와서 잘 삭히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홍어?”
시우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은지의 취미는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는 것이다. 미식가의 도락 수준은 아니고 서민음식이지만. 좋아하는 음식 이야기를 하니까 신이 난다.
“네. 외할머니가 전남 고흥 출신이라 어릴 때부터 홍어회를 무척 좋아했어요. 오드득하고 톡 쏘는 맛이 일품이에요. 저는 삼합보다 고추장에 무친 회를 좋아하지만 7년 묵힌 김치랑 싸먹는다니 무척 기대돼요.”
은지는 입가에 흐르는 침을 혀로 닦고 입술을 오므려 빨았다. 은지의 촉촉이 젖어 부어오른 입술에 시우의 시선이 머물렀다.
“회장님도 홍어 좋아하세요? 잘 못 먹는 사람도 많아요.”
“썩은 가오리를 먹는 사람도 있더군.”
은지는 빙그레 웃었다. 시우의 찌푸린 눈을 보자니 홍어에 대해 변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든다.
“삼합은요. 이렇게 돼지고기.”
은지는 왼손을 내밀어 옆으로 펴고 그의 왼손을 끌어 올린 후 자신의 오른손을 포개어 덮었다.
“김치, 홍어. 세 가지를 싸서…… 어머 죄송해요.”
시우가 움찔하자 은지의 손이 스르르 빠져나가려 했다. 시우의 오른손이 마치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시우가 커다란 손으로 붙들자 은지는 왠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내가 김치군. 그리고 돼지고기, 홍어.”
시우가 은지의 손목을 하나씩 어루만지며 눈을 들여다보았다. 은지는 그에게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인력이 작용하는 것 같았다. 시우는 그대로 포개어진 손을 들어올려 입술로 물었다.
“이대로 한입에 깨물고.”
시우는 깨물기보다 손등을 감질나게 빨았다. 은지는 어깨뼈가 홍어를 삭히듯 흐물흐물 녹아나는 기분이었다. 시우와 닿은 손끝으로부터 목덜미와 척추를 따라 꼬리뼈까지 짜릿한 느낌이 통과하였다. 어질어질하다. 시우가 갑자기 손을 놓았다. 그는 왠지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다. 은지는 시우의 손에서 떨어지자 문득 거의 벌거벗은 남자와 한집에 단둘이 있음을 의식하였다.
“홍어 다음 코스도 있나?”
“그 다음은 몰라요. 그냥 여기저기…….”
“여기저기.”
가늘어진 눈이 추궁하듯 따라붙는다.
“친구들이 하자는 대로…….”
“전국에 그런 ‘친구’들이 널려있겠군.”
은지는 울그락붉으락하는 시우의 얼굴을 보며 자기가 무슨 서투른 말을 하여 그를 화나게 했는지 걱정되었다.
“네. 모두 좋은 친구들이에요. 가끔 전화해서 놀러 오라고 하는데 서로 바쁘니까…….”
“전화 호출로 불러내는군.”
“채팅도 하고요.”
“채팅. 설마 무작위로 등록해서 아무하고나 만나나?”
은지는 아는 사람들과 인터넷의 비공개 카페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아뇨. 채팅은 거의 안하고 주로 클럽에서 활동해요. 제가 다니는 곳은 두 군데인데 둘 다 비공개 클럽이에요.”
남자는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듯 했다. 은지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정해진 자격조건에 맞아야 가입할 수 있는 클럽…….”
“회원제…… 흠.”
“회원이 몇십명 안 되긴 하지만 친한 사람 위주라 마음이 편해요.”
“아무 회원이나 부르면 나가고?”
“보통은 만나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죠.”
“하긴. 모두 씀씀이가 후하진 않을 테니.”
“맞아요. 클럽에 엄청 왕소금이 있는데 미움 받아요.”
“클럽에서 친해져서 개인적으로 연락을 다니는군?”
“원래 친했던 사람들도 있고요.”
시우는 여자를 심문하듯 다그치는 자신이 이해가 안 갔다. 여자를 내보내고 열쇠를 바꾸면 그만이다. 시우는 묻는 데로 순순히 답변하는 여자 때문에 그렇다고 책임을 돌렸다.
“한달에 몇 번이나 그런 식으로 만나지?”
“클럽 친구들과는 주중에 잠깐 만날 때도 있고 주말에 길게 놀 때도 있는데, 대충 한달에 5번에서 10번 정도?”
“한번 만나는데 몇 장을 쓰고?”
은지는 만원대신 장이라고 하는 표현이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생각하였다. 은지가 소속된 친목클럽은 직장인이 된 동창들과 먹자 클럽이다.
“보통 두 세장 안팎이죠. 술을 먹으면 좀 늘어나고. 지방에 내려가면 열장 넘기도 하고요. 한번은 어느 친구와 길게 국토 순례를 했더니 30장이나 나오지 뭐예요?”
시우는 친근하게 종알대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약혼이 깨진 기념으로 전국에 분포한 남자들을 찾아다니며 몸을 맡기려나보다. 시우는 이를 앙다물었다. 이유 모를 분노와 불쾌감에 휩싸여 어머니와 거래를 무시하고 찾아온 일도 잊고 은지가 인사 하고 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은지는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갔다.
이시우. 의붓 동생 주리의 친구인 시윤의 형. 주리가 일하는 한식당의 회장님. 초면에 반말부터 하는걸 빼면 좋은 사람이다. 은지의 친구들은 은지가 사람들에 대해 너무나 경계심이 없고 좋게만 생각한다고 말하지만, 이시우는 정말로 괜찮은 남자같다. 그는 친절하고 예의바르며 재미있는 농담으로 은지를 웃게 만들었다. 은지는 농담을 들으면 남들이 왁자하게 웃을 때 가만히 있다가 한참 뒤에야 혼자 웃곤 하는데 시우의 농담은 알기 쉬워서 좋았다. 은지는 그와의 대화가 즐거웠다. 근래 기분이 계속 저조했는데 그를 잠깐 만나고 나니 전신에 활기가 차올랐다.
다만 불편한 점은 그를 만나는 순간부터 심장이 심하게 울린 데다 팔다리가 감기몸살을 앓는 듯 수시로 힘을 잃었다는 것이다. 남의 집에 갔다가 그가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나보다.
아까부터 블라우스에 스치는 유두가 조금 거슬린다. 시우와 눈을 마주치며 손을 잡았을 때는 심장에서 허리까지 꽉 조여들었다. 통증에 가까운 여운이 남아 배가 간질간질하다. 은지는 손으로 배를 문지르다가 배가 간지러운 이유가 식욕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은지는 단골 포장마차에 들러 떡볶이와 순대를 사들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갔다.
3.
오전 10시 50분. 은지는 덜 마른 생머리를 나풀거리며 옷가방을 들고 서울역에 도 착했다. 아침에 숲과샘 아파트를 다녀오느라 시간이 부족해서 기초화장도 변변히 못했다. 겨우 머리를 감고 화장을 지운 후 순대와 떡볶이로 배를 채우고 왔다. 은 지는 매표소로 가서 예매한 표를 받아 확인하였다.
「새마을호. 서울~부산. 11:20~16:35」
부산역까지 다섯 시간. 떡볶이와 순대를 먹어서 배가 부르지만 간식을 사두는 편 이 현명할 듯 하다. 은지는 부산행 열차 입구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부산행 입구 근처 의자에 막 앉으려 할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은지야."
은지의 등이 뻣뻣하게 굳었다.
"진석씨."
은지는 어두운 얼굴로 돌아보았다. 정진석. 약혼자였던 남자. 호남형의 잘생긴 남 자가 세련된 줄무늬 양복 차림으로 은지에게 다가왔다.
"왜 이렇게 고집부리니? 미안하다고 했잖아.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내가 너한테 사정까지 하잖니?"
애원하는 말투에 간절한 표정이지만 은지는 그가 화를 내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 는 용서해 달라고 은지에게 빌게 한 사실을 기억에 담아둘 것이다. 진석은 언제나 그랬다.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처음에는 은지를 너그럽게 이해하는 척 하지 만 곧 몇 배로 앙갚음을 한다. 신뢰를 배반당하면서 은지는 처음으로 둘의 관계를 냉정히 분석하였다.
"다 끝났어요. 날 그만 놓아줘요. 더 이상 찾아오지도 말고요."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줬으니까 내 실수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자. 진짜 잘한 다니까?"
은지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진석은 확실히 기분 내킬 때는 너그러운 척 할수 있는 사람이다. 만약 자신이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진작 그의 진면모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은지는 고통스럽게 인정했다.
진석은 은지보다 두 살 위로 대학 신입생 시절 소개팅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만 나자마자 은지의 주변에 자신의 여자친구라며 소문을 내었다. 그는 잊을 만 하면 연락을 취해왔고 몇 달씩 소식이 없는 때도 있어서 부담이 적었다. 만나는 동안 은지는 억눌린 불쾌감을 조금씩 느꼈지만 진석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며 구속해왔 기 때문에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분명하게 은지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너그러운데 매몰차게 불만스럽다고 끊기가 모호했다.
그는 모든 은지의 실수에 대하여 지적은 하되 용서해 주는 방식으로 은지의 어리 석음을 인식시켰다. 진석 자신이 챙기지 않으면 은지라는 존재는 망망대해에 나부 끼는 나뭇잎 한 장의 신세가 될 것처럼.
은지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 은지는 27살이 되어서까지 이상하리만큼 주변 남자 들에 대해 이성으로서의 관심이 일어나지 않았다. 진석이 유도하는대로 따라가며 그 정도의 기분 좋음과 거리감이, 여자로서 배려 받음이 일반적인 연애인줄 알았 던 것이다. 가끔 손을 잡고 기습적으로 뽀뽀를 받는 것으로 은지에 대한 확실한 남자친구로서의 표시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얼마 전부터 그는 은지의 입안에 혀 를 밀어넣으려 했는데 은지는 번번히 불쾌한 기분이 들어 더욱 미안하였다. 은지 는 자신이 결혼한 후에 눈을 감고 국가를 생각해야 할지 고민하였다. 그냥 그런 일 없이 손잡고 아이를 돌보며 살면 좋을텐데 하고.
그래서 진석이 다른 애인들을 만들고 다녔어도 오히려 뻣뻣한 막대기같은 자신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속으로 은밀하게 기뻤다. 비로소 진석에게 당당 히 벗어날 것을 요구할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7년간 은지를 만나서 알 만큼 안다고 확신하고 있는 진석은 은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진석이 그나마 파혼에 응한 이유는 은지가 감히 그의 부모 앞에서 파혼을 요구하여서 노발대발하는 어머니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은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석은 여전히 은지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진석의 삶에 끼워 맞추기 위한 부품에 불과한 여자. 진석 이 기대하던 아내의 역할에 어울리는 수동적인 여자. 무관심한 7년에 대한 대가로 은지는 진석이 일방적으로 이끄는 대로 그런 여자가 될 뻔 했다.
"은지야. 난 남자야. 신체 건강한 남자인데 생리 현상쯤 이해해주면 안되니? 나 라고 좋아서 그랬겠니? 널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 7년 동안 널 지켜주려고 그렇 고 그런 여자애들한테 배출했을 뿐이야. 그 여자들 나한테 아무런 의미도 없어. 내 마음은 완전히 네 것이라고. 그래, 내가 나쁜 놈이야. 무릎이라도 꿇을까? 결 혼하면 절대로 바람피우지 않는다고 맹세해!"
"상관없어요. 처음부터 몰랐던 사람으로 헤어져요."
"결혼 앞두고 너 신경 예민해진 거 배려 못한 내 책임이야. 알았어. 어머니도 간 섭이 지나치셨다고 더 이상 신접살림에 대해 입 다무신대. 당분간 분가해서 살자. "
진석은 항상 그랬듯이 은지를 어린애 취급하며 달래려고 하였다. 젊은 남녀가 옥 신각신 실랑이를 하자 주위에서 힐끔거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애정싸움 정도로 판단하였는지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알았으니까 집으로 가자. 너희 집에서 오는 길이야. 미리 말씀드려놨으니까 부 모님께 다시 날짜 잡는다고 하면 돼."
진석은 은지의 팔목을 잡고 의자에서 끌어내었다.
"이것 놔요!"
"은지씨."
무게감 있는 남자의 저음. 고개를 드니 시우가 트렌치코트를 입고 서 있다. 위압 감이 느껴지는 시우의 모습에 진석이 주춤거리자 은지는 그 틈을 타서 잡혀있는 팔을 뺐다. 뻗어오는 진석의 손을 피해서 은지가 물러나자 시우가 한 발 성큼 나 서며 자연스럽게 등 뒤로 은지를 돌렸다. 은지는 진석을 피하려다 시우의 뒤에 숨 는 형상이 되어버려 당황하였다. 진석은 망신을 줬다고 화를 낼 테고 시우는 공연 히 다툼에 휘말릴 참이다.
"저는 은지 약혼자입니다. 참견하지 마십시오."
"가요! 진석씨에게 남은 감정 없어요. 할 말도 들을 얘기도 없다고요."
"은……."
"그럼 됐군."
진석이 입을 열려 하는데 시우가 압력이 실린 목소리로 잘랐다. 진석은 위축이 되 어 시우를 쳐다본 후 신중하게 물었다.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요?"
시우는 대답 없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대꾸해줄 가치도 없는 상대라는 듯이. 은 지는 자신도 모르게 시우의 팔꿈치를 붙잡고 있었다. 진석은 은지와 시우를 번갈 아 보고 경악어린 얼굴이 되었다.
"너 설마…… 이 사람과 여행을……?"
시우는 진석을 무시하고 주머니에서 카드 열쇠를 꺼내 은지에게 주었다.
"아파트 열쇠를 새로 바꿨어. 전의 거는 폐기하고 오늘부터 이걸 써."
"네……."
은지는 열쇠를 받으며 시우와 눈을 마주하였다. 시우가 열쇠를 쥔 은지의 손을 감 싸자 은지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진석은 아예 하얗게 질려버렸다.
"가지."
시우는 바닥에 팽개쳐진 은지의 가방을 들고 왼팔로 은지의 어깨를 끌어안듯 감싸 서울역사 바깥으로 데려갔다. 은지는 순순히 시우를 따라 대기하고 있던 검은 차 의 뒷자석에 올라 탔다. 은지는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쥐고 있다가 시우를 보았다 . 시우는 무심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는 금요일 오전이라 막힘없이 달렸다. 시우는 어느 한적한 카페에 은지를 데려갔다.
"고맙습니다. 공연한 수고를 끼쳐드렸네요. 이제 괜찮아요. 영등포 역으로 가서 고속열차를 타면 되니까요."
시우는 대답이 없었다. 은지는 캐모마일을 꿀꺽 마시고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부 산에 갈 예정이었는데 다시 볼 일이 없으려니 싶었던 남자와 함께 앉아있다.
"여행은 그 남자를 피하기 위해서인가?"
"솔직히 그래요."
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지는 결혼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면서 기숙사에서도 나 와 집에서 살고 있다. 파혼 후 진석이 집으로 몇 번 찾아왔고 그 때마다 새어머니 가 은지를 진석 앞으로 밀어내려고 애썼다. 은지는 집에 있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하였다. 아예 진석의 눈앞에서 사라져 주면 더 이상 붙잡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긴 여행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시윤이의 애인이 된지는 얼마나 됐지?"
"네?"
은지는 시우의 뜬금없는 물음에 눈을 떴다. 시우는 알 수 없는 눈으로 은지를 주 시하였다.
은지가 알기로 시윤은 의붓동생 주리의 학교 친구다. 주리에게는 양가에 인사를 다닌 진지한 남자친구가 따로 있다. 21살인 주리에게 이르지만 새어머니의 소개로 맞선을 봐서 만난 남자이다.
"시윤? 아직 둘이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교양 과목 리포트 몇 번 도와주다가 고 맙다고 점심도 사주고 그래서 친해진 친구인걸요."
시우의 눈이 점점 차가워지다 어느 순간 풀렸다.
"하긴 녀석의 취향과는 다르니까."
시우는 은지의 말에 수긍하였다. 어차피 시윤의 여자는 은지 말고도 많다. 어머니 가 타겟을 잘못 잡았거나 엉뚱하게 둘러댔을 가능성도 있다.
"제 동생 얘기로는 시윤이와 사이가 더 진전되면 좋겠다고 하던데……."
"그럴 순 없어."
시우는 딱 잘라 말했다. 은지는 무안한 낯으로 그를 힐끔거렸다. 시우는 은지를 처음 발견한 것처럼 일일이 뜯어보았다. 그는 10살부터 할아버지를 수행하며 재계 의 능구렁이들을 상대해온 오랜 연륜으로 거짓의 기색을 금세 알아챈다. 거짓말 같지는 않다. 거짓이라면 연기력이 대단히 뛰어난 여자일 것이다.
정황 증거는 의심스럽지만 그는 은지의 말을 믿기로 했다. 한달. 앞으로 한달 정 도는 믿는 척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중요한 점은 동생이 은지의 고객은 아니라는 것이다. 혹여 예비 고객 목록에 올라있었다 치더라도. 은지가 웅얼거렸다.
"지나가는 얘기였어요."
박은지. 이 여자는 이번 주에 상대를 바꿔가며 뜨겁고 축축한 여행을 다닐 계획을 세웠다. 시우의 이성은 은지를 보내주고 해프닝을 잊어버리라 하는데 당장 오늘 저녁에 은지가 부산 남자의 품에 안길 모습을 떠올리자 격렬하게 솟구치는 피가 얼토당토않은 짓을 부추긴다. 시우는 심호흡을 하고 냉정을 되찾았다.
"내 생전 직업여성에게 이런 제의를 하기는 처음이지만."
시우는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가격을 제시했다.
"큰 거 두장에 한달을 사지."
"네?"
"은지씨의 시간을 나 혼자 사겠다고. 한 달간 나와 함께 있어주기만 하면 돼. 나 는 집에 머무는 시간도 적고 며칠씩 비우기도 하니까 평소보다 훨씬 여유로울 거 요."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세요? 아, 동생에게 들었군요."
"요구사항은 입주에 내 전속이 되어주는 거고."
"입주…… 전속……."
은지는 생각에 잠겼다. 한달간 개인 영양사로 시우의 집에 입주하라는 말은 마침 지금 상황에 적절한 제안이다. 새어머니가 눈치를 주는데다 진석에게 시달리다 못 해 집에서 나가살려던 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제의를 재빨리 수락하고 싶 지만 역시 젊은 남녀가 한집에 살기란 무리다. 아무리 눈앞의 남자가 기대 안기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켜 강렬한 자력으로 은지를 단단히 휘어 감는 느낌일지라도.
"감사하지만……."
"아래층이 비어있으니 그곳을 써. 29층 말이야."
은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29층요?"
"시끄러울까봐 평소에 비워두거든. 그래도 기본 세간은 갖춰져 있어. 난 30층에 있을 테니까 필요할 때만 얼굴을 맞대면 돼."
집이 다르면 이야기도 달라진다.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끌리는 조건이다. 핸드폰 번호도 바꿨으니 당분간 안전하게 숨어있을 공간 만 주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다.
영양사를 왜 입주까지 시키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자이니까 삼시세끼 잘 점검하라는 뜻인 듯 하다. 은지는 직업적인 면에 정신을 집중하였다. 영양사이지만 반찬도 만 들어야 할 것 같다. 식사준비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설마 청소나 빨래까지 맡기지 는 않겠지.
큰 것 두장이라는 월급은 지나치게 적다. 직장에 다닐 때 은지의 한달 월급은 150 만원 정도였다. 회사도 아니고 개인 영양사라면 200이 아니라 20일 것이다. 입주 조건에 한달 20만원은 너무 짜다. 은지는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급여 를 여러 번 뜯겼다. 친구들은 그런 은지에게 봉급 협상을 확실히 하라고 타박하였 다. 은지는 주먹을 꽉 쥐고 눈에 힘을 주었다.
"두장은 너무 적네요. 제가 맹해보여도 돈 계산은 확실히 한다고요."
시우는 은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기묘하게 품안에 끌어안고 싶은 여자이긴 하 지만 작은 키에 서비스 업종에는 치명적이게도 둔한 말재주로 보아 도저히 고급 매춘부로 발탁될 것 같지 않다. 하룻밤 화대로 2~3백만원을 받는다는 말도 의심스 러운데 한달에 2억이 적다니. 사실 하룻밤 2~30만원도 과분해보인다. 이번에 큰 건을 물어서 단단히 한몫 잡으려나보다.
"이렇게 하지. 은지씨. 두장 선불에, 한달이 지나면 세장을 추가해 준다고."
"보험도 없고 식대나 차비는 안나오겠죠?"
"생활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으리라 장담해."
"으음. 계약서를 쓸까요?"
"농담이겠지?"
은지는 얼굴을 붉혔다. 은지의 생각으로도 50만원 이하의 사적인 아르바이트에 계 약서는 과분하다.
"네. 그럼 언제 갈까요?"
"다른 약속을 모두 취소하고 오늘 밤까지 들어와. 근처니까 한번 들르지."
은지는 시우와 함께 샘과숲 아파트로 갔다. 시우는 경비실에서 29층의 열쇠를 찾 아 열어주었다. 29층은 30층보다 검소하고 평범한 구조였다.
"짐은 여기다 풀어. 몸만 와도 상관없고."
시우는 은지에게 29층의 카드 열쇠를 내주었다. 은지가 인사를 하고 떠나려 할 때 시우가 덧붙였다.
"참, 아침처럼 요란한 화장을 하고 오면 타월로 문질러 줄 테니 그렇게 알아 둬. "
은지는 시우가 욕실에 마주앉아 은지의 얼굴을 타월로 박박 문지르는 모습을 상상 하고 쿡쿡 웃었다. 시우의 집에 다른 가족의 흔적은 안 느껴진다. 시윤이 대전에 내려갔다고 하니 시우 혼자서 사나보다. 부엌 출입은 전혀 안 하게 생긴 남자다. 밥을 제대로 못 챙겨먹어 급한가보다. 저녁에 일찍 들어와서 솜씨를 부려야겠다. 은지는 눈을 반짝이며 상냥하게 말했다.
"그럼 오늘 저녁부터 기대해 주세요."
현관까지 바래다주던 시우의 어깨가 굳었다. 시우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문 질렀다.
"나는 밤늦게까지 처리할 일이 있으니까 오늘은 쉬고 내일 봐. 그리고 모레부터 일주일간 출장이야."
은지를 보내고 나서 회사로 갈 준비를 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나다."
"네, 할아버지. 시우입니다."
시우는 전자수첩을 덥고 등을 폈다. 이명호. 어릴 때부터 시우를 철저히 후계자로 단련시켜온 할아버지이다. 때로는 경쟁자로 때로는 후원자로 모습을 바꿔가며 시 우의 모범이자 뛰어넘어야 하는 목표인 남자. 실향민으로 맨손에 태경 상점을 세 우고 태경 물산으로 성장시킨 인물. 전문경영인 수업을 받았던 시우의 아버지와 함께 오늘의 태경 그룹을 일궈온 전 회장.
10 살의 시우에게 방과 후 과외시간을 제외하면 태경의 밑바닥 일부터 배워야 한다 며 노동을 강요한 거친 조부이기도 하다. 22살에는 시우를 전방에 보내겠노라 큰 소리 쳐서 욱한 시우가 해병대에 자원하였다. 30개월을 채우고 돌아온 시우를 상 무로 또 곧바로 사장에 앉혀 실컷 패배와 성공을 맛보여주다가 자리에 익숙해지자 이제 쓸만해졌다며 회장직을 떠맡겨버렸다. 언제라도 힘에 부치면 도움을 청하라 고 약 올리면서. 덕분에 시우는 29살에 할아버지가 회장직을 물러나면서 한동안 일에만 매달려 있었다. 조부는 회장직만 물러났을 뿐 은퇴한 적은 없지만 시우의 낯을 보아서인지 주로 뒤에서 조력하였다.
"대영 건은 어떻게 하기로 했니?"
"화요일에 시간을 내겠습니다."
"흠……. 잘 생각했다. 만나봐서 해될 건 없지."
32 살이 될 때까지 시우의 경험으로는 여자보다 사업 쪽이 긴장도 크고 즐거우며 만족스러웠다. 현재 시우는 사귀는 여자가 없다. 몇 번 애인이 있었지만 시우의 지독한 일중독에 지쳐 떨어져 나갔다. 시우의 위상이 회장으로서 안정되어 여유가 생기자 주변에서 중매를 서려고 안달하였다. 체면을 보아 간간이 소개하는 여자들 을 만나긴 하지만 진지한 상대는 아직 없다. 무엇보다 시우 자신이 결혼에 흥미를 느끼지 않아서이다.
"최 회장 체면을 봐서라도 대영 아가씨는 만나 봐야해. 최 늙은이 손녀딸은 예전 에 널 봤다더구나."
"누구든 올해 안에 결정짓겠습니다."
"정말이냐?"
수화기 건너편으로 조부가 회색 눈썹을 꿈틀거리는 모습이 느껴진다.
"저도 슬슬 가정을 가질 나이가 되었으니까요. 연락은 보냈습니다. 화요일, 뉴욕 에서 보기로 했습니다."
"녀석. 찾아가야지 여자를 불러내다니?"
조부가 혀를 찼다.
"재원에 활달한 미인이라더구나. 그쪽은 이미 네게 호감이 있는 눈치이니 알아서 잘 해 보거라."
최가영은 대영 그룹 회장 장남의 무남독녀이며 25살로 동부의 명문대에 재학 중이 다. 시우는 조부와 통화를 마치고 창가로 갔다. 블라인드 너머로 은지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시우가 갑작스럽게 혼담에 관심을 보이게 만든 여자.
한 달. 사춘기 시절의 첫 몽정처럼 들끓는 기분은 한 달 동안 충분히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시우는 눈을 찌푸렸다. 동생의 상대였을지도 모르는 여자에 대한 일 시적인 욕망은 그에게 거추장스럽다. 급한 불을 끈 후 가정의 울타리를 치면 혼란 을 효과적으로 제거할수 있을 것이다.
약혼이 깨진 게 불과 며칠 전 이랬던가? 시우의 어머니가 끊어준 수표 액수를 보 고 결혼보다 수지맞는 일에 머물렀을까?
시우는 시계와 홍어를 언급하던 은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홍어라니. 32년의 세월 동안 두엄더미에 썩힌 가오리 외에 홍어에 대한 느낌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은지 가 내밀던 손은 홍어래도 한입에 삼켜버리고 싶었다. 시우에게 완전히 내어맡기던 눈빛과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분방한 목소리.
시우는 고개를 저어 기억을 털었다. 고객에게 어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천진 난만하고 맹한 얼굴로 남자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직업여성으로서의 서비스에 시우조차 거의 현혹될 뻔 했다. 뉴욕 지사로 일주일간의 출장은 적절하다. 작은 요부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면 곧 제정신이 들 것이다.
더 많은 분들이 클릭하실 듯..;;;
저만 해도 제목없음? 뭐지? 하고 낚였는걸요^^;;
그치만 저도 언젠가 이 글을 찾으며 질문을 남긴 적이 있어서 무지무지 반가워요~~~>.<
월화님 감솨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