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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영업이 끝난 불 꺼진 홀에서 현우는 벽에 바싹 붙어 있는 구석진 테이블 위에 촛불처럼 스탠드를 올려놓았다. 오늘은 오전부터 괜한 일에 신경을 곤두세운 탓인지, 유난히 허기가 졌다. 마감을 하기 전에 간단히 요기를 할 것을 찾아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출근 전에 진하에게서 받은 티라미스가 한 조각 눈에 띄었다. 별 생각 없다는 말로 사양하는 현우를 위해 재환이 따로 챙겨놓은 몫이었다.

“형, 이거 어디서 주문했대요? 진짜 맛있네요. 이따 마감하다 출출하면 드세요.”

삐꼴로 자르디노의 여주인이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는 말을 하면 굉장히 충격을 받을 것 같은 분위기라 함구하고 넘어갔다. 아무것도 아닌 케이크 한 조각일 뿐인데, 이걸 진하가 직접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니 먹기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이걸 한 입이라도 먹는 순간 맛이 있다, 없다, 어느 쪽이든 감상을 하게 마련이고 현우는 진하에게 그 어떤 감정일지라도 내어주기가 꺼려졌다. 그렇지만 또 동시에 고작 케이크 한 조각을 갖고 이렇게 신경을 쓰고 있는 스스로가 짜증스럽고 한심하기도 하였다. 

먹을까, 말까.

현우는 냉장고 문을 연 채 십초쯤 망설이다가 티라미스 접시를 꺼냈다. 도대체 케이크 한 조각이 뭐라고. 기왕이면 제대로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현우는 늦은 시간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직원용으로 사용하는 커피 캡슐 기계에 디카페인 캡슐을 넣었다. 버튼을 누르고 얼마 안 있어서 뜨거운 에스프레소가 커피 안으로 가늘게 흘러내리며 고소한 커피향이 공중으로 확 퍼졌다.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부어 연하게 만든 다음 티라미스와 함께 불이 켜진 테이블 앞에 착석하였다. 현우는 케이크가 아니라 폭약을 만지는 것처럼 신중한 태도로 포크를 집어 타라미스를 한 입 떴다. 포크를 입에 넣는 순간 마스카포네 치즈가 마치 우유거품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확실히 훌륭한 맛이다. 현우는 입안에 들러붙어 있는 코코아 가루를 커피 한 모금으로 말끔히 씻어내려 보내며 모양이 허물어진 티라미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디선가 먹어 본 것 같은 맛.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크림치즈가 아닌 이탈리아에서 만든 마스카포네 치즈만을 사용해 만든 티라미스. 아마도 이탈리아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아니면 서울에도 많은 정통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마스카포네 치즈를 사용해 티라미스를 만드는 곳은 너무나 많아서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단서가 되지 못 한다.

심장의 깊은 곳을 건드리는 아련한 통증. 굉장히 행복했던, 혹은 황홀했던 것 같은 막연한 기억. 잊어버린 기억이라 접어두기엔 그 잔상이 너무나 생생해 안타깝고 괴로운 추억.

이걸 도대체 어디서 먹어봤더라.

다시 한 입 떠서 먹었지만 기억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평생을 잊지 못 하는 사람이 있는데 막상 그 사람과 마주치니까 그 사람이 누구인지, 왜 잊지 못 하고 있는지 기억을 잊은 거나 마찬가지랄까.


다음 날 현우는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출근 전에 하루도 빠짐없이 들르는 스포츠센터에서 유산소 운동으로 땀을 빼고 천천히 차를 몰아 놀이터로 향했다. 현우의 차가 주차장에 들어서자 생맥주 통을 나르던 주방 직원 한석기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 사장님. 일찍 오셨네요.”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오늘 한 삼십 분쯤 늦을 수도 있어.”

차 키를 뽑아 들고 현우는 주저 없이 삐꼴로 자르디노로 향했다. 음식 모니터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으니, 이렇게 찾아가는 것이 실례는 아닐 것이다.

그는 결코 감상적인 쪽은 아니었다. 오히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인 사람이다. 어설픈 감상은 사람의 판단을 흐리고, 삶을 우울하게 만든다고, 그렇게 믿었다. 벌써 케이크 한 조각에 하룻밤의 숙면을 망쳤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는 지금 범인을 잡는 탐정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한 음식의 느낌을 철저히 조사해 귓가에 맴도는 모기처럼 그를 성가시게 만드는 기억의 실체를 반드시 잡아낼 작정이었다. 새벽 내내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던 아련한 기억의 실체를 잡아내려면 우선 진하가 한 음식을 먹어보아야 한다.

이제 막 10시를 지난 시각. 주택가 사이사이 자리를 잡고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문을 닫은 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기다란 빗자루로 바닥을 쓸기도 하고 꾸깃꾸깃한 신문지로 유리창을 닦기도 하며, 전날 들이닥친 손님들이 남긴 흔적들을 깨끗하게 지우고 오늘 찾아와줄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잘 되는 가게와 안 되는 가게는 영업 준비를 하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잘 되는 데는 이제 한 바탕 전쟁을 치러야하는구나, 하는 치열한 긴장감으로 가게 주변이 후끈 달아올라 있지만 안 되는 데는 개장이 끝난 해수욕장의 허름한 구멍가게 주인처럼 아무 의욕 없는 눈빛으로 마지못해 몸을 움직인다. 잘 되는 데는 잘 되고 안 되는 데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가게의 문을 여는 순간부터 손님들은 본능적으로 가게 안의 분위기를 감지해내기 때문이다. 손님을 오게 하려면 가게의 분위기부터 바꾸어야 한다. 최소한의 기본조차 갖추지 않은 채 손님이 오기를 바라는 것은 길바닥에 앉아서 동냥을 구걸하는 거지와 다를 바가 없다. 레스토랑은 와주면 고맙고 안 오면 어쩔 수 없는 요행이나 행운이 아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오고 싶게 만들어야 하고, 오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업이다.

현우는 맞은편 도로에 선 채 삐꼴로 자르디노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 아담하고 친근한 가정집 이미지. 간판은 비슷하게 따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일자르디노와는 태생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을 무시하고 일자르디노를 비슷하게 흉내 내려한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빤하다. 현우는 성큼성큼 긴 다리를 움직여 도로를 건넜다.


“어머, 안녕하세요!”

현우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방에 있던 진하가 뭔가에 놀란 사람처럼 소스라치며 현우를 맞았다. 뭐랄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환영인사였다. 십년은 알고 지낸 것처럼 친근한 태도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아니었던가.

“왜 그렇게 놀라요? 음식 모니터 하러 와달라고 하더니, 빈말이었나 보네.”
짐짓 실망스럽다는 듯 이죽거리자 진하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변명을 하였다.

“그게 아니라 어제 안 오셔서요, 바쁘신가 보다 하고 마음 접었거든요.”

사람의 진심이라는 것은 숨기려고 해도 은연중에 드러나게 마련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원래 안 오려고 했는데 티라미스 먹어보니까 맛있더라고요.”

꼬아서 생각하면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칭찬에 진하가 환하게 웃었다. 사소한 감정을 숨김없이 얼굴에 드러내는 사람은, 최소한 음흉하지는 않다.

“와, 그럼 합격 판정 내리고 여기 오신 거네요.”

“실은 염탐하러 왔어요. 티라미스 말고 다른 건 얼마나 맛있나.”

“어머, 그렇게 말하시니까 떨리는데요. 알았어요. 열심히, 최선을 다 해 볼게요.”

하하하, 밝은 웃음을 낭랑하게 터뜨리며 진하가 메뉴판을 건넸다.

“이거 보시고, 아무거나 주문 넣어주세요. 원하신다면 아침식사로 스테이크도 가능해요.”

“우선 좀 볼게요.”

현우는 다섯 개의 테이블 중 주방과 가까운 곳에 앉아서 메뉴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치즈와 살라미를 이용한 전채 요리가 네 종류, 샐러드가 여섯 종류, 부위와 소스가 각기 다른 스테이크가 다섯 종류, 오일 소스 파스타 세 종류, 토마토소스 파스타 일곱 종류, 크림소스 파스타 네 종류, 크림소스와 토마토소스를 이용한 리조토가 각각 하나씩, 열다섯 종류의 피자, 그리고 이탈리아식 커피와 음료들. 테이블 다섯 개가 전부인 작은 레스토랑 치고는 풍부한 메뉴구성이지만 가격이 지나치게 높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쓰고, 맛이 좋다 해도 가격이 일류 레스토랑 수준이라면 굳이 이 작은 곳을 찾을 이유가 없다.


현우는 맛을 내기 까다로운 오일 파스타 중 해산물 파스타와 가장 대중적인 마르게리따 피자를 주문하였다.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하가 도마처럼 생긴 나무 접시 위에 세 종류의 식전 빵을 올려 직접 내왔다.

“방금 구운 거라 따뜻해요. 드셔보세요.”

“근데 서빙과 요리를 직접 다 하실 건가요?”

아무리 규모가 작은 레스토랑이라 해도 셀프 서비스가 아닌 이상 혼자서 두 가지를 다 병행하는 것은 무리다.

“실은 지금 서빙 직원 구하고 있는 중이에요. 다음 주 오픈 할 때까지는 구해져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현우의 우려 섞인 질문에 진하가 실수를 들킨 학생처럼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정 안 되면 셀프 서비스 하면 되죠, 뭐.”

“아, 진짜. 그럴까요? 얼른 파스타해서 내올게요.”

진하가 주방으로 들어가고, 현우는 식전 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마늘과 양파, 그리고 토마토 소스를 각각 얹어서 구운 포카치아 두 종류, 아무것도 넣지 않고 자연 발효해 구운 빵. 발사믹 식초를 떨어뜨린 올리브오일소스, 토마토소스, 생크림소스. 손님들의 다양한 기호를 고려한 풍요로운 구성. 현우는 차가운 물로 목을 축인 다음 토마토소스 포카치아를 토마토소스에 살짝 찍어 입안에 넣었다. 담백하면서도 쫄깃한 식감, 소스와의 적절한 균형까지. 기대 이상이다.

10분쯤 지나서 나온 해산물 오일 파스타는 감탄의 연속이었다. 살짝 덜 삶았나 싶을 정도로 탱탱한 면발, 청양 고추로 맛을 낸 매콤한 오일 소스, 싱싱한 해산물이 과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게끔 절묘한 균형을 이루었다. 한 접시를 다 비울 때까지는 무조건 집중해서 먹을 수밖에 없는 맛. 현우는 어느덧 본연의 취지는 뒤로 한 채 음식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스파게티 괜찮으셨어요?”
마르게리따 피자를 들고 온 진하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현우의 안색을 살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음식은 흠 잡을 데 없이 훌륭하였다. 그렇지만 장사가 잘 될 것이냐 하는 문제에는 여전히 비관적이었다. 사람들이 레스토랑에서 원하는 것이 오로지 음식 한 가지인 것만은 아니므로.

“말씀 드리기 곤란한데요.”

현우가 미적거리며 대답을 피하자 진하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입맛에 안 맞으셨어요?”

“글쎄요.”

현우가 뭔가를 숨기는 표정을 지으며 진하의 애를 태웠다.

“사양하지 말고 말씀해주세요. 참고할게요.”

어떠한 형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듯 비장하게 쳐다보고 있는 진하의 얼굴에 대고 현우가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근래에 먹어본 파스타 중 최고예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찬사가 나오자 진하는 말의 의미를 되짚어보려는 것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와, 다행이다. 전 당장 가게 문 닫고 요리 공부 다시 하란 말 하실 줄 알았어요.”

“아, 그 방법이 있었네. 손쉽게 경쟁자를 없앨 수 있는.”

현우가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애석해 하자 진하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그러지 마세요. 저 진짜 간 떨어질 뻔했어요.”

죽다 살아났다는 표정으로 피자를 내려놓는 진하의 표정이 어린애처럼 무구해서, 현우는 그만 시선을 피했다. 어머니나 현우와는 전혀 다른 밝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사람들 속에서 편안한 행복을 느끼셨을 아버지가 다행스러우면서도, 어쩐지 서운하기도 한 묘한 기분. 속 좁은 질투심은 저만치 밀어두고 현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피자에 시선을 주었다. 하얀색 모짜렐라 치즈, 붉은색 토마토, 초록색 바질이 주원료인 마르게리따 피자는 이탈리아의 국기와 색깔이 같아 삼색기로 비유되기도 한다. 현우는 모짜렐라 치즈가 흘러내릴 듯 풍부하게 토핑 된 피자를 손으로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순간 티라미스를 먹었을 때와 똑같은 감정이 심장 한 가운데로 쿵 내려앉았다. 다시 한 입. 새콤한 토마토소스와 입안에 찰싹 달라붙는 모짜렐라 치즈. 뭔가 익숙하고 그리운 이 감정은 뭘까. 어디선가 분명히 먹어본 적이 있는데.

맙소사, 일자르디노다! 어렸을 적 일자르디노에서 먹었던 피자와 똑같다. 집에서 나와 살던 아버지와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날이면 일자르디노로 가서 함께 나누어 먹었던 피자의 끝내주는 맛을 잊고 있었다니. 현우는 그만 가슴이 먹먹해져 먹던 피자를 접시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심호흡을 하였다. 흘긋 주방 쪽을 돌아보니 바쁘게 몸을 움직이며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진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작은 주방에서 일자르디노 그 자체인 음식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상호 도용이라니,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시비였다.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지만 않았더라면 일자르디노를 상속 받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녀였을 테니.


댓글 '6'

Junk

2011.07.04 23:36:17

아... 요리를 아는 사람들... 정말 부럽네요. 딸내미 소풍 도시락 밑준비 끙끙대며 하다가 들어와서 한숨 돌리고 갑니다. 감자샐러드 하나 맛을 못 내는 저로서는 정말 먼 세상 얘기 같네요...ㅜ_ㅜ

margot

2011.07.05 17:49:44

이제 현우가 진하를 인정하기 시작하는건가요..

아버지라는 공통점이 있으니 더 가까워질수 있을텐데요...

어서 현우가 마음을 열기를 바라요^^

으네

2011.07.06 16:32:47

진하가 만든 마스카포네 치즈가 먹고싶어요!! 글읽는 내내 왠지 홍대 어디즘에 진하의 가게가 있을거 같은 기분이에요. ^^

캔디

2011.07.08 16:28:21

진하의 밝은, 꾸밈없는 모습이 좋으면서...현우의 안타까움이..왠지 잔해 오네요...

레띠츄

2011.07.09 21:27:22

밝음이 어두움을 몰아내게 되겠죠? 그 시간이 너무 길지 않고 힘들지 않기만을 바래요..

맛난 피자가 땡기는 밤입니다요.. ^^

핑키

2011.08.10 00:32:43

이 밤에 이런 음식 유혹은 절대 불가인데ㅠㅠ 그래도 유학까지가서 꿈을 이룬 진하가 대단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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