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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진하는 새벽부터 일어나 목욕재계를 하고 일찌감치 삐꼴로 자르디노로 내려갔다. 정식 오픈은 아니지만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가게 문을 활짝 여는 첫날이라고 생각하니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냉장고 모터기 돌아가는 소리가 윙, 울리고 시멘트 냄새가 희미하게 풍기는 일곱 평 남짓한 주방에 서 있으면 테이블 다섯 개가 전부인 자그마한 홀이 한 눈에 들어온다. 홀을 향해 뻥하니 뚫려 있는 개방 형 주방은 요리 중간에도 손님들의 동선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했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테이블보, 유리잔에 꽂혀 있는 냅킨, 군데군데 액자처럼 붙어 있는 알록달록한 꽃무늬 타일, 새파란 허브 화분이 올망졸망 자리를 잡고 있는 나무로 덧댄 선반. 주방 기기는 물론이고 아주 작은 소품까지 어느 것 하나 그녀의 손길이 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생애 처음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낸 스무 평 남짓한 이 작은 공간이 그녀는 진심으로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웠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간암으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아버지가 아내와 외동딸인 진하에게 남겼던 유일한 유언은 생계를 위해 아무 일도 벌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유능한 회계사였던 당신의 그늘 아래서 안락하게만 살아온 아내가 섣부르게 일을 벌여 그나마 있는 재산마저 허무하게 날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 탓이었다. 이제 진하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어머니의 그늘이 되기 위애 첫발자국을 내딛는 것이다.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10시가 되자 조용하던 주택가 도로가 놀이터로 출근하는 청년들로 북적거렸다. 어림잡아 테이블이 칠, 팔십 개는 너끈히 들어가는 큰 규모의 레스토랑이니 주방 직원에 홀 직원까지 합하면 어지간한 중소기업 수준은 될 것이었다. 성대한 출근 행렬이 뜸해질 무렵이면 활짝 열린 놀이터 문 사이로 클럽 음악이 쿵쿵 울렸다. 열 명이 훌쩍 넘는 젊은 부대가 클럽 음악에 맞추어 일사불란하게 홀 청소를 하고, 테이블 정리를 하는 광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젊은 혈기가 느껴졌다. 일자르디노와는 전혀 다른 자유분방하고 뜨거운 분위기. 11시 오픈 시간부터 마감을 하는 자정까지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놀이터를 길 건너에서 바라보며 진하는 씁쓸하고 섭섭하였다.
일자르디노가 있었던 자리에 전혀 다른 레스토랑이 들어와도 사람들은 여전히 행복한 표정으로 찾아와 음식을 먹는구나.
“자기야, 나 왔어.”
진하네 집 바로 옆에서 커피 공방 ‘브라운 슈가’를 운영하는 유선이 가게 문을 가만히 열고 들어와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진하보다 다섯 살이 많은 그녀와는 삐꼴로 자르디노 공사 기간 동안 커피를 주문해 마시면서 친해졌다.
“언니. 어서 와요.”
농담처럼 건넨 말을 잊지 않고 출근 전에 일부러 들러준 마음이 고마워서, 진하는 서둘러 주방에서 나와 유선의 손을 꼭 잡았다.
“혼자서 다 하는 거야? 서빙 알바는?”
놀란 것 같은 질문에 진하가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제 구인 광고를 내긴 했는데 빨리 구해질지는 모르겠어요. 공사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서빙 알바를 구해야 한단 생각은 전혀 못 하고 있었어요.”
그러자 유선이 손바닥을 반짝 쳐들며 낭랑하게 외쳤다.
“난, 잘 생긴 남자 알바!”
너무나 그녀다운 반응에 쿡 웃음이 났다.
“그렇지만 미남계는 놀이터에서 벌써 쓰고 있다면서요.”
진하가 짐짓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놀이터의 서빙 직원은 모두 훤칠한 남자들뿐이며, 음식보다는 남자 직원들 때문에 가게를 찾는 여자 손님들이 엄청 많다는 정보를 진하에게 전해준 사람이 유선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분발해야지. 놀이터에 밀려서는 안 되잖아.”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로 진지한 태도가 우스워, 진하는 픽 웃음이 터졌다.
“아무리 분발한다 해도 강동원 같은 인물 뽑을 수 있겠어요?”
유선이 마르고 닳도록 찬양하는 놀이터 사장을 거론하자 한 풀 꺾인 채 수긍하였다.
“그.......그러게.”
“여자 알바를 구하려고 해요. 여자 둘이서 소소하게 수다도 떨고 친구처럼 지내면서 소박하게 꾸려나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진지하게 속내를 털어놓자 유선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여자끼리 일하는 게 편하기는 하지.”
“솔직히 잘 생긴 남자랑 같이 일하면 은근히 불편할 거예요.”
“그렇지만 매일의 활력소가 되기도 하지!”
유선이 바로 맞받아치자 진하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하하 웃었다. 스스로 밝히기를, 연예를 즐기느라 연애를 못 한다는 그녀는 화제의 절반 이상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 얘기였다. 그녀가 얼굴 구별도 힘든 아이돌 그룹 멤버의 이름을 줄줄이 열거하며 신곡 컨셉이니, 팬 사이트니, 씨디 공동 구매니 하는 얘기를 할 때면 진하는 신세계를 경험하는 사람처럼 얼빠진 표정으로 우와, 하는 감탄사만 내뱉었다. 좌우지간 세상은 넓고 나와 다른 사람은 너무나 많다. 그런 유선이 유일하게 화제에 올리는 현실 남자는 놀이터 사장이 유일하다. 그것도 그녀가 최고로 쳐주는 강동원이라는 배우이름을 애칭으로. 진하가 유학에서 돌아온 날 일자르디노와 아저씨에 대해 물었던 그 잘생긴 직원이 단순한 직원이 아니라 놀이터 사장이라고 알려준 것도 다름 아닌 유선이었다.
“척 보면 모르니. 사장 포스가 물씬 풍기잖아.”
아직 서른이 되었을까 말까, 진하와 그다지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는 남자가 일자르디노를 통째로 사서 자신만의 레스토랑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부러워서 시샘이 날 지경이었다. 그건 그녀로서는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집이 굉장히 부자인가 보다.”
한숨 섞인 목소리에 선아가 핏대를 올리며 강동원의 약력에 대해 읊었다.
“노노! 그 사람 부모 돈으로 놀이터 차린 거 아니야. 자기가 번 돈으로 한 거야.”
“정말요? 그게 가능해요?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는데요?”
“Y대에서 학생 회관을 새로 지으면서 공개 분양을 했나 보더라고. 근데 강동원이 거기다 캐주얼한 레스토랑을 차렸는데 그게 완전 대박을 친 거지. 그걸로 어마어마하게 벌었다더라고.”
대학교 내 학생 회관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일자르디노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버는 게 가능하다니, 그야말로 꿈이 현실로 이루러지는 소리였다.
“와, 정말 어머어마하게 손님이 왔나 보네요.”
“사업 수단이 보통은 아니라는 얘기지. 저 큰 레스토랑도 매일 매일 사람이 꽉 차잖아. 음식이 특별난 것도 아닌데 놀이터만의 특유의 매력이 있다고나 할까.”
진하에게 있어 레스토랑을 고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음식이지만, 누구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잘 생긴 직원일 수도 있고, 세련되고 젊은 분위기가 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작은 레스토랑도 운영만 잘 하면 일자르디노를 살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와, 놀이터 사장님이 정말 대단한 분이었네요.”
언젠가는, 하며 막연하게 그려놓은 목표를 실제로 달성한 롤 모델이 바로 길 건너에 존재하고 있다니, 뭐랄까 든든하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하였다.
진하가 유선에게 메뉴판을 건네려고 할 때 강동원의 아우디가 진하네 가게 앞을 쏜살 같이 지나갔다.
“어, 저기 강동원 간다!”
유선이 연예인의 밴을 좇는 여고생처럼 들뜬 표정으로 이미 지나쳐버린 아우디를 아쉽게 쳐다보았다.
“그러게요. 출근 전에 혹시라도 시간 되면 들러서 식사나 하고 가라고 부탁을 드렸는데, 그냥 가버리셨네.”
유선이 아쉽게 말을 하는 진하를 깜짝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진짜? 밥 먹으로 오라고 말을 했단 말이야? 언제?”
마구 몰아치며 질문을 던지는 통에 진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게 그러니까, 어제 오전에요, 사장님이 요 앞에 차를 세우고 우리 가게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밖으로 나가봤죠.”
“어머, 어머. 그래서?”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선 때문에 진하는 얘기를 하면서 뭔가 빠뜨린 점은 없는지 꼼꼼히 기억을 되짚었다.
“그래서, 아 맞다. 간판을 보고 계신 거였더라고요. 저한테 삐꼴로 자르디노가 뭐냐고 물으셔서 작은 정원이라고 알려드리고, 개업 케이크 전해드리면서 일주일 동안 가오픈을 하는데 음식 모니터링이 절실하니까 오셔서 꼭 드시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뭐래?”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결말을 재촉하는 선아의 얼굴에 대고 진하가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강동원이 했던 농담을 그대로 전했다.
“자긴 경쟁 업체에는 모니터 못 해준다고요.”
유선이 파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신나게 박수를 쳤다.
“어머, 웬일이야. 진짜 괜찮다.”
“유머 감각이 좋더라고요.”
“유머 감각도 그렇지만, 거절하는 방식이 세련됐잖아. 딱부러지게 거절해서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은근한 여지를 남기면서 기대를 갖게 하는 것도 아니고 웃으면서 거절을 하다니, 센스가 끝내준다.”
순간 진하의 머리가 띵해졌다.
“아, 그럼 그게 거절한 거였어요?”
“그럼! 몰랐어?”
“전 그냥 농담하신 건 줄 알았어요.”
선아가 귀엽다는 듯이 진하를 쳐다보며 풋,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 참 순진하다.”
“순진하다기 보단 제가 눈치가 좀 없었나 봐요.”
괜스레 무안해져 진하는 손바닥으로 식은땀을 닦는 시늉을 하였다.
“하기야 그 인물에 여자들 무수하게 드나드는 레스토랑 운영 하면서 얼마나 많은 접근을 받았겠어. 그러니 거절하는 스킬도 나날이 연마가 되기도 했겠다.”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강동원 사장의 거절 매너에 대해 분석하는 유선의 얘기에 진하는 조금 기분이 상했다.
“접근이라고요? 전 그냥 음식 모니터를 부탁한 거였어요.”
유선이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진하를 바라보았다.
“자기는 순수하게 음식 모니터링을 원한 거였지만 강동원이 받아들이기엔 아마 자기한테 관심을 표한 거로 생각했을 수도 있지.”
뭐랄까, 세게 휘두른 망치에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요? 말도 안 돼.”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게 오해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점점 억울해졌다.
“앞으로 쭉 마주 보며 같이 일해가야 할 동종 업계 사람이니 적당히 선을 긋기는 해야겠는데, 그게 또 너무 노골적이면 서로 어색해질 테니 적당히 농담으로 넘어간 거지. 이 얼마나 세련된 매너야. 알수록 매력적이네.””
유선에게는 그게 매력으로 느껴질지는 몰라도 진하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고 불쾌했다.
아니, 왜 함부로 다른 사람의 진심을 오해하고 그래?
그런데, 그러고 보니 쌩하니 달려가던 차 뒤꽁무니에 대고 수차례 인사했던 일이 새삼 마음에 걸렸다.
“그럼 언니, 혹시 내가 그 사장님 출근할 때마다 차에 대고 인사를 한 것도 그럼 제가 사장님을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오해했을까요?”
“어머, 출근 할 때마다 인사를 했단 말이야?”
이게 무슨 새로운 뉴스인가 싶어 유선의 눈이 관심으로 반짝거렸다.
“아니, 출근 하실 때마다 요 앞을 지나시잖아요. 초면도 아니고 전에 놀이터 앞에서 이것저것 물어보며 귀찮게 했던 적도 있고 하니까 당연히 인사를 했죠. 근데 항상 모른 척 쌩하니 지나가버리더라고요. 난 되게 바쁜가 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혹시 그럼 그것도 내가 본인한테 관심 있어서 그런 걸로 오해하고 피한 건가 봐요.”
진하가 울상을 지으며 털어놓은 얘기에 유선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진짜 재밌네.”
유선에게 재미를 주었는지는 몰라도 진하는 그저 충격이었다.
“아, 정말 기가 막히네. 어떻게 그런 오해를 할 수가.”
“원래 잘 생기신 인물들은 자기들을 향한 관심을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알아채. 그런 관심을 한, 두 번 받아본 게 아니거든. 무심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자기를 쳐다보는 시선을 잡아내는 데는 선수야.”
유선의 자세한 설명에 진하가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지만 난 진짜 아니라고요!”
그러자 유선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굳이 거부하려 들지 마. 자기도 이미 강동원의 진가를 인정했잖아.”
“난 그저 그 분의 사업수단을 배우고 싶은 것뿐이에요. 작은 가게에서 돈을 벌어 저렇게 큰 가게를 인수하다니 대단하잖아요.”
“그래, 바로 그거야. 애정이란 게 원래 그렇게 일부분으로 시작되는 거거든. 그러다가 그 사람의 전부를 좋아하게 되는 거지. 굳이 거부하지 말고 우리 함께 같은 배를 타보자꾸나.”
유선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진하를 계속해서 궁지로 몰아붙였다.
으히히... 강동원... 저 강동원 젤루 좋아하지요. 갑자기 ㅎㅎㅎ(하하하가 아니라 흐흐흐 계열의 ㅎㅎㅎ) 하고 입가에 웃음이 감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