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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르디노?!
출근 길 차 안에서 낯익은 간판이 시야에 들어오자 현우는 순간적으로 제 눈을 의심하였다.
말도 안 돼.
현우는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멈춰 세우고, 길 건너 간판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자르디노 앞에 삐꼴로라는 수식어가 불필요한 수식처럼 아주 조그맣게 붙어 있다. 멀리서 보면 눈에 잘 안 띄는 게, 아디다스 아니고 아다디스 같은 유사상표의 느낌마저 풍겼다. 하얀 회벽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화분에서 묘하게 일자르디노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싶기는 했는데 저토록 속보이는 간판을 내 걸 줄이야. 제대로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다.
석 달 전 진하네 집 담장이 허물어지는 것을 볼 때만 해도 집이 팔린 것인지 알고 오히려 한숨을 내려놓았다. 법적으로 묶인 관계는 아니지만 아버지와 가족처럼 지낸 사람들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언젠가는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짐처럼 여겨졌던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활짝 웃는 얼굴로 공사현장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는 청바지 차림의 이진하를 발견하면서 들었던 불길한 예감은 공사가 진행되면서 확신으로 바뀌어갔고, 이제는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도로 쪽 벽을 완전히 헐어서 그 자리에 자바라 창을 달고, 주방 기구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설마 진하가 자신의 레스토랑에 자르디노란 상호를 붙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뻔뻔하게 나올 줄이야, 전혀 계산 밖의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활기찬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삐꼴로 자르디노 간판 아래에서 진하가 퍽이나 반가운 표정으로 현우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가벼운 목 인사를 건네자 진하가 현우가 타고 있는 차 쪽으로 발랄하게 다가왔다.
“오늘은 어쩐 일로 여기 이렇게 서 계세요? 항상 인사할 새도 없이 바쁘게 가셔서 만날 차 뒤꽁무니에 대고 손 흔들었는데.”
눈만 마주치면 손바닥을 흔들어대며 인사를 하려고 드는 통에 현우는 진하네 집 앞을 지나칠 때면 무조건 앞만 보며 직진이었다. 얼떨결에 인사 주고받으며 지내다가 현우의 정체를 알고 난 뒤 여자가 느낄 놀라움에 대해 책임지고 싶지는 않았다. 적당히 얼버무리고 떠나면 그만일 텐데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호기심이 현우를 붙들어 놓았다.
“간판 달았네요.”
현우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 방금 전에 달았어요. 어때요?”
천연덕스럽게 감상을 물어오는 통에 하마터면 실소가 터질 뻔했다. 서로의 정체를 감춘 채 이런 묘한 대화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누는 지금의 상황이 웃음이 날 정도로 황당해졌다.
“뭐, 좋은데요. 그런데 삐꼴로 자르디노가 무슨 뜻이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은 그저 이웃집에 사는 이웃사촌일 뿐이라며 바닥에 주저앉아 울더니, 석 달 만에 자르디노라는 상호를 버젓이 내걸고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여는 여자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힌트라도 얻고 싶다.
“작은 정원이란 뜻이에요.”
진하가 간판을 올려다보며 수줍게 웃었다.
“일자르디노에 비하면 작긴 하네요.”
현우가 뼈 있는 농담을 건네며 은근슬쩍 여자의 반응을 살피었다.
“심하게 작죠!”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환하게 웃는 진하를 쳐다보며 현우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도대체 이 여자에게 일자르디노와 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 필요할 때 적당히 쓰고 뒤돌아서면 그만인 그런 존재?
“내일 시간 되세요?”
여자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현우는 내심 당황스러웠다. 적극적으로 인사를 건네다가 은근슬쩍 곁을 파고드는, 진부하고 빤한 관심 표현에는 이골이 날 정도로 익숙한 그이지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평상심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아시다시피 가게에 매여 있는 몸이라서요.”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가오픈을 하거든요. 혹시 출근 전에라도 시간 되시면 꼭 한 번 들러주세요. 드시고 싶은 음식 만들어 드릴게요.”
도대체 어떤 말로 거절을 해야 다시는 이런 제안을 꺼내지 못 할까 고민하고 있는 사이 진하가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실은 전문가의 냉정한 평가가 절실해요. 꼭 오셔서 음식 맛보시고, 부족한 점 있으면 기탄없이 말씀해주세요.”
현우가 진하의 얼굴을 분석하듯 쳐다보았다. 진심일까, 진심을 가장한 접근일까.
“제가 가봐야 도움이 전혀 안 될 텐데요.”
현우가 정색하는 표정을 짓자 진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휘휘 손사래를 쳤다.
“아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경쟁업체에 좋은 모니터링은 절대로 못 해주죠.”
현우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싱거운 농담을 툭 던졌다.
“아아, 그 뜻이었구나. 농담을 다큐로 받아들여서 죄송합니다.”
짐짓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는가 싶더니 파하하, 낭랑한 웃음을 발사하는 진하의 얼굴 바로 위에 있는 구름 틈에서 햇볕이 환하게 쏟아졌다. 현우는 부시는 눈가를 가볍게 찡그린 채 진하의 웃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온전히 느껴지는 밝고 환한 기운. 아마도 어머니와 그에게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을 그런 에너지가 얼마나 신선하고 좋게 느껴졌을까, 싶으니 공연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사장님이 말씀하신 정반대로 알아들으면 되겠네요.”
“그렇게 정직하게는 안 하죠.”
“그러지 말고 좀 봐주세요. 우리 가게랑 놀이터랑은 규모부터가 상대가 안 되는데 경쟁 업체라고 견제 하시다니, 이거 완전 대기업의 횡포예요!”
유쾌한 대화에 현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픽, 터졌다.
“그럼 전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오픈 준비를 해야 해서요.”
이게 지금 무슨 짓인가 싶어 적당히 인사를 건네고 떠나려는데, 진하가 화들짝 급한 얼굴로 현우를 제지시켰다.
“잠깐만요!”
가게 안으로 바쁘게 뛰어 들어가는 진하를 쳐다보는 현우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정말로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일까? 혹시 다 알면서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건 아닐까? 그렇지만 도대체 무슨 의도로? 설마 그건 아니겠지.
해답 없는 의문들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동안 진하가 손에 뭔가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자, 이거요. 제가 만든 티라미스예요. 개업 떡 대신 드리는 거니까 놀이터 식구들하고 한 쪽씩 나눠드세요.”
급하게 서두른 탓인지, 다소 거칠게 숨을 내쉬며 진하가 파란색 케이크 상자를 차 안으로 건넸다.
“아, 네. 감사합니다.”
현우는 어색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받아 옆 좌석에 내려두고 서둘러 가속 페달을 밟았다.
“케이크 떨어지지 않게 조심히 운전 하세요!”
뒤에서 진하의 목소리가 기운차게 따라붙었다. 현우는 고개를 내저으며 곤혹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 진짜 머리 아프게 생겼군.”
아버지와 5년 동안 가족처럼 지냈다는 여자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선의의 경쟁을 펼쳐야 하는 상황이라니, 차라리 재난이었다.
“형, 그게 웬 케이크예요?”
주방장 재환이 현우가 들고 있는 케이크 상자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바로 맞은편에 새로 개업하는 집 있지, 거기서 개업 떡 대신이라고 줬어.”
현우가 케이크 상자를 재환에게 내밀며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그래요? 언제 개업한대요?”
“내일. 정식 오픈은 아니고 가오픈이래. 근데 오늘은 술 배달이 왜 이렇게 늦었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서 현우는 재환이 들고 있는 영수증을 낚아채듯 받아들어 대단히 중요한 서류라도 되는 양 그것을 골똘하게 들여다보았다. 이진하와 그녀의 레스토랑을 화제 삼아 떠드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
“오다가 접촉 사고가 있었대요. 다행히 별 피해는 없었는데 사고 처리 때문에 시간이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다행이네.”
현우가 카운터 안쪽 서랍을 열고 영수증을 파일에 끼워 넣고 있을 때 재환이 다시 말을 꺼냈다.
“형, 건너편에 간판 보셨어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아 순간적으로 등줄기에 힘이 들어갔다. 현우는 얼른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긴 채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재환을 마주보았다.
“봤어.”
“뭐라고 진지하게 한 마디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형 가게 바로 맞은편에서 자르디노란 상호를 내건다는 게 참 기가 막히네요. 무슨 시트콤 찍자는 것도 아니고.”
현우는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 한 채 시트콤 운운하며 흥분하는 재환 때문에 일순 당황스러웠다. 그렇지만 차라리 시트콤으로 보이는 게 낫지, 털어놓자니 아침 드라마다.
“열 내지 마. 상호에 특허 낸 것도 아닌데 쓰고 싶은 사람이 쓰는 거지.”
복잡한 가정사를 털어놓을 게 아니라면 이쯤에서 마무리 짓는 게 나을 것 같아 현우는 속 넓어 보이는 말로 재환을 진정시켰다. 재환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표정으로 현우를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형, 혹시 저쪽 가게 여사장한테 관심 있어요?”
“뭐?”
현우는 터져 나오려는 실소를 간신히 눌러 삼키고 재환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뭣 때문에 이런 황당한 소리를 하는 건지, 이유가 궁금할 지경이다.
“너 설마 지금 내가 사심 때문에 상호를 문제 삼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는 거냐?”
“아니, 사실 형 요즘 계속 틈만 나면 저쪽 가게만 쳐다보고 계시잖아요. 전 형이 누구한테 그렇게 관심 갖는 거 처음 봤거든요. 아니에요?”
그게 이런 식으로 해석이 될 수도 있구나,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근거 없는 구설수라는 게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모양이다.
“내가 전에 놀이터 이름 붙여서 디저트 카페 열면 어떨까 그랬던 거 기억나지? 저 집이 위치도 괜찮고, 또 비어 있는 집 같아서 내심 카페 자리로 점찍어 두고 있었거든. 그런데 공사가 들어가더라고. 황당하지 않겠냐?”
“아, 그렇구나.”
재환이 궁여지책으로 만들어 댄 핑계에 고맙게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역시 형은 타고난 사업가예요.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미래를 생각한다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수긍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재환이 존경 어린 눈빛으로 현우를 쳐다보았다. 낯간지러운 분위기를 풀기 위해 현우는 얼른 농담을 꺼내었다.
“저 자리에 레스토랑을 열다니 감이 영 없네.”
현우가 매우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왜요?”
현우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 재환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아, 얘가 겸손한 사람 잘난 척 하게 만드네. 놀이터 바로 맞은편에서 레스토랑이 웬 말이니. 1년이나 버틸 수 있으려나.”
“그래도 형, 저기는 정통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잖아요. 피자나 스파게티 좋아하는 손님들은 우리보다는 저쪽으로 가지 않을까요.”
적당히 농담으로 무마하면 될 분위기에서조차 진지함을 잃지 않는 것이 재환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호기심으로 몇 번 가보면 끝이야. 진짜 끝내주는 요리가 아니고서는 메뉴 가짓수가 작은 레스토랑은 쉽게 질릴 수밖에 없거든.”
개인적인 기대가 다분히 들어간 현우의 편파적인 평가에 재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자 굽는 화덕도 만들었다는데요. 피자 같은 건 적어도 우리 보다는 제대로 만들지 않을까요?”
점점 진지해지는 우려를 현우가 단칼에 정리해버렸다.
“됐어. 망해야 돼. 그래야 우리가 디저트 카페를 만들지.”
“하긴 그렇긴 하네요.”
재환이 금세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넌 저 집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주방에 화덕 만들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저쪽 이찌로 사장님이 정보통이잖아요. 출근길에 마주치면 순전 저 집 얘기뿐이에요.”
이찌로는 진하네 집 왼 쪽으로 자리 잡은 일본 라면 전문점인데, 오십이 넘은 사장이 아들을 요리사로 두고 꾸려가는 아담한 식당이다. 식당 규모도 그렇고 드나들 수 있는 고객층도 그렇고 여러 면에서 삐꼴로자르디노와 겹치는 부분이 많으니, 이찌로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일 법도 하였다.
“남의 말 많이 하지 마. 쓸데없는 소리 나온다.”
현우는 아무래도 이찌로 사장의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오가는 길에 마주칠 때마다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는데 주로 하는 얘기가 주변 가게 얘기뿐이라는 게 영 꺼림칙했다.
“저야 듣기만 하죠, 뭐.”
재환이 순진하게 웃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10분 후면 오픈이다. 현우는 셔츠 깃을 정리하며, 손님을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머릿속으로 진하의 얼굴이 다시 비집고 들어왔다. 쉴 새 없이 따라붙는 얼굴이 이제는 지긋지긋하였다. 집 팔고 다른 데로 가줬으면 바랐더니 보란 듯이 집을 개조해 일자르디노의 어설픈 축소판을 열다니. 그렇지만 사실 문제는 그런 게 아니었다. 진하가 뭘 하던 모르는 척 적당히 거리를 두며 살면 그뿐이다. 진짜 문제는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었다. 얼마나 또 말도 안 되는 억측을 해가며 스스로와 주변을 괴롭힐 것인가 생각하니 하나님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의 인생에 태클을 거는 것은 가족, 오로지 가족과 연관된 인간들뿐이었다. 이럴 때면 차라리 이 세상에 피붙이 하나 없는 천애고아였으면 하는 마음이 다 들었다.
말안되는 억측....현우 또한 진하에 대한 말 안되는 잘 못된 정보(?)를 갖고 있는게 아닐까 싶어요..
제 삼가인 사람이 볼땐 그냥 감사한 아저씨께 나름 감사의 마음을 보이는것으로 보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