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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어! 저게 뭐야?”
진하는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제 몸 만큼 커다란 여행 가방을 질질 끌고 허겁지겁 걸음을 옮겼다.
일자르디노가 사라졌다!
“말도 안 돼.”
눈을 크게 뜨고도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아, 진하는 손톱을 세워 뺨을 콕 찔렀다. 뺨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손톱자국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혹시 다른 동네에 잘못 내린 건 아닐까, 새삼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독주택을 개조해 만든 원룸 건물의 회색 대리석, 길모퉁이에 수미 슈퍼, 저 밑으로 보이는 골프 연습장의 초록색 철망, 길 바로 건너에 있는 그녀가 다섯 살 때부터 살아온 아담한 2층 주택까지, 모두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택을 개조해 들어선 카페의 간판들이 제법 눈에 띄기는 해도 전체적인 풍경만큼은 2년 전 그대로인데, 오로지 정통 이탈리안 레스토랑 ‘일자르디노’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놀이터라는 이름도 생소한 건물이 떡하니 서 있다. 마법사 할머니가 요술 지팡이를 휘두른 것처럼.
혹시 아저씨가 업종 변경이라도 하신 건가? 설마!
진하는 활짝 열려 있는 출입구 앞에 서서 놀이터 건물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노출 콘크리트에 투명한 통유리, 정원에서 건물로 올라가는 계단마다 섬세한 각도로 놓여 있는 페인트 통이니, 안전모 등의 잡동사니들이 만들어내는 자유분방하고 경쾌한 분위기와 아저씨라니, 트레이닝복에 중절모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진하가 수상쩍게 느껴졌는지, 가게 안에서 남자 직원이 걸어 나왔다. 185센티는 족히 돼 보이는 장신에 걸맞은 쭉 뻗은 팔, 다리와 오뚝 솟은 콧날이 예술인, 길을 가다가도 뒤 돌아서 감상할 정도로 잘 생긴 남자다.
“여기 직원 분이세요?”
진하가 남자의 복장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하얀 셔츠와 검정색 바지. 충분히 격식을 갖춘 복장이지만 몸매가 출중한 남자와 만나니 오히려 육감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네. 뭐 도와드릴 문제라도 있으세요?”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하가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여기 무슨 음식 파는 데예요? 오픈은 언제 했어요?”
차분한 표정으로 서 있던 남자가 진하의 커다란 여행 가방을 쳐다보며,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숙박시설은 아닙니다.”
진하가 쑥스럽게 웃으며 주먹 쥔 손으로 가방을 툭 쳤다.
“아, 실은 제가 2년 동안 유학을 마치고 오늘 귀국하는 길인데요, 여기 놀이터 건물이 새로 생긴 걸 보고 기겁해 달려왔어요.”
그러자 남자가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여긴 패밀리 레스토랑이에요. 오픈한지는 1년 좀 안 됐고요.”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면, 아저씨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여기 사장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혹시 서진구 씨인가요?”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닌데요.”
“그럼 혹시 일자르디노는 어디로 이전했는지 아세요?”
남자가 난감한 표정으로 진하를 쳐다보았다.
“이전을 한 게 아니에요.”
“그럼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진하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순간 드는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툭 내려앉았다.
“혹시 일자르디노가 완전히 문을 닫았나요?”
“네.”
사무적인 답변으로 일관하는 남자의 무뚝뚝한 표정에서 그만 끝냈으면 하는 분위기가 역력했지만 이대로 물러나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오로지 일자르디노의 주방을 목표로 2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요리 공부를 하였는데, 귀국 첫날 들은 소식이 일자르디노가 문을 닫았다는 얘기라니. 무엇보다 기막힌 것은 일자르디노가 진하에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아저씨가 그녀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이렇게 중대한 일을 벌이셨다는 사실이다. 혹시나 이탈리아에 있는 2년 동안 연락을 제대로 못 드린 점에 서운하셨던 걸까. 그렇지만 아저씨는 혹여 그녀가 뭔가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도 부드럽게 일러 고치게 하실 분이지, 꽁하게 쌓아놓고 있다가 이런 식으로 갑자기 등을 돌리실 분은 아니다.
“혹시 일자르디노가 최근에 장사가 잘 안 됐나요?”
불경기에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것이 외식업인데다 레스토랑도 나름 유행을 타기 때문에 시류에 편승하지 못 했을 경우 음식의 맛과는 상관없이 도태됐을 가능성도 있다. 원인은 모르겠지만 좌우지간 영업을 그만 두었다는 것은 일 자르디노의 운영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장사가 잘 됐는지, 안 됐는지, 저는 잘 모르겠군요.”
계속해서 캐묻는 게 성가셨는지, 남자의 목소리에서 불편한 심기가 역력하게 느껴졌다. 근무 하고 있는 가게에 대해서 묻는 것도 아니고 그 전에 있었던 가게에 대해서 계속 캐묻고 있으니 성가시기도 할 것이다.
“업무 중에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일자르디노가 저한테는 되게 중요한 문제라서 저도 모르게 실례가 많았습니다. 집에 얼른 가서 아저씨께 전화 드려 봐야겠어요. 아무튼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진하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는 순간 저 위쪽 허공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들렸다.
“일자르디노의 사장님, 돌아가셨습니다.”
“네? 뭐라고요?”
터무니없는 소리에 진하가 귀신에 홀린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서진구 사장님과 통화 못 하실 거라고요. 돌아가셨거든요.”
누군가 아주 커다란 쇠망치로 정수리 한 가운데를 쾅 내리친 것만 같다.
“어떻게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정말인가요?”
남자가 하얗게 질린 진하의 얼굴을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네.”
“어, 어쩌다가요? 특별히 어디 편찮은 데도 없으셨는데요.”
울먹거리는 진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뜸을 들이는 것처럼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화재에 의한 질식사, 라고 들었습니다.”
남자의 입에서 구체적인 사인이 나온 순간 진하는 다리에 힘이 툭 풀렸다. 가슴이 쿵쿵 뛰며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화재라고요? 일자르디노에 불이 났었어요?”
“네.”
화마가 덮친 레스토랑 안에 갇혀 있는 아저씨의 모습이 저절로 상상이 되어 진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전 전혀 몰랐어요. 다른 분들은요. 다른 분들은 무사하세요?”
2년 동안을 매일 같이 드나들었던 일자르디노의 주방 식구들의 얼굴이 한 명, 한 명 떠올라 심장이 터질 것처럼 조여들었다. 차라리 악몽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무사합니다. 새벽에 혼자 계실 때, 화재가 났던 거라.”
이혼을 하고 혼자가 되었다는 아저씨는 일자르디노 3층에 있는 집무실에서 기거를 하셨다. 영업시간이 끝나고 가게 뒷정리까지 마무리되면 불이 꺼진 일자르디노로 들어가는 아저씨의 쓸쓸한 뒷모습이 생각나, 순간 코끝이 매웠다.
“어쩌다가 불이 난 거죠?”
“전기 누전이었다고 하더군요.”
“어떡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요.”
진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손바닥으로 입술을 틀어막고 흐느꼈다. 뜨거운 눈물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돌아가신 사장님과는 어떻게 아시는 사이죠?”
남자의 질문에 대답을 하려는 순간 목이 콱 메었다. 아저씨를 감히 어떤 단어로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진하가 가장 힘들었을 때 무작정 내민 손을 기꺼이 잡아 주신 은인이자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를 요리의 길로 이끌어준 스승.
“죄송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머뭇거리며 말을 하지 못 하는 진하에게 남자가 다시 물었다.
“이진하예요. 일자르디노랑 이웃이었어요. 저희 집이 바로 건너편이거든요.”
아저씨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하는 순간 보기 흉한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진하는 손가락을 들어 일자르디노, 아니 놀이터의 바로 맞은편에 서 있는 아담한 2층 주택을 가리켰다. 남자의 시선이 한참 동안 진하가 가리킨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싶더니 이내 진하를 향해 사무적인 인사를 남기고 빠른 걸음으로 놀이터로 들어갔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진하는 짐 가방을 맹렬하게 이끌고 2차선 도로를 건너 2년 만에 집의 대문을 열었다. 어쩌면 놀이터 직원이 잘못된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남자가 아저씨랑 직접 아는 사이도 아니고 그저 전해들은 얘기일 텐데, 소문이라는 것은 원래 와전 되는 경우가 흔하지 않은가 말이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진하는 전화기부터 집어 들었다. 제발, 제발, 절실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저씨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10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동안 진하는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 한 채 오로지 전화기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였다.
없는 번호입니다.
전화기에서 없는 너머로 들리는 사무적인 목소리에 진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2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는 아저씨의 핸드폰 번호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새삼스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당연한 수순으로 때늦은 후회가 찾아와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뭐 그렇게 대단한 일 한다고 아저씨께 연락 한 번 제대로 못 드리고 살았을까.
일자르디노와 아저씨가 한 줌 재로 사라져버린 지도 모르고 말도 안 통하는 남의 나라 레스토랑에서 일자르디노 주방에 설 수 있는 실력을 다져보겠다며 혼자서 좌충우돌 고군분투하고 있었다니, 얼마나 기막히고 어리석은 짓인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황당하다. 화재라니, 일자르디노에, 아저씨가 돌아가셨다니.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아저씨를 찾아가 뵙고 향후 계획을 논의한 다음 어머니가 있는 상주로 달려가 깜짝 파티를 열려고 했지만 모든 게 일그러져버린 지금 진하는 뭘 해야 할지 그저 막막하였다. 일단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가방을 열고 짐부터 풀었다. 절망해서 주저앉아 있어 봐야 누구도 봐주지 않는다. 당장 해야 할 일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는 게 상책이다. 입지 않는 겨울옷과 당장 입어야할 여름옷을 따로 분류해 옷장에 넣고, 이탈리아에서 현장 실습을 하면서 몸으로 배운 정보를 빼곡하게 적어놓은 노트를 책장에 꽂고 나니까 전신이 땀에 흠뻑 젖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빈 가방을 창고에 넣어두기 위해 1층 거실로 내려온 순간 아저씨께 선물로 드리려고 산 와인과 발사믹 식초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다 끝났다 하는 순간에 저만치 밀어두었던 슬픔의 파도가 진하의 가슴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쪼그리고 앉아서 주인 잃은 선물 상자를 찬장 깊숙한 곳에 넣는 진하의 앙다문 잇새에서 기어이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죽음이란 참 잔인하기도 하지. 다시는 보지 못 할 곳으로 가면서도 인사 한 마디 나눌 틈도 주지 않다니.
한바탕 울음을 토해내고 나니까 극심한 공복감이 밀려왔다. 비행기에서 기내식을, 그것도 아침 식사로 먹은 것을 끝으로 물 한 모금 안 먹었으니, 속이 텅 비기도 하였을 것이다. 라면을 끓여서 허기를 대강 해결하고,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까 뭘 해야 할지 갑자기 막막해졌다. 텅 빈 집에서 멀뚱히 앉아 있기는 싫어서 간단한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밖은 아직 낮처럼 환했지만 시간은 벌써 다섯 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진하는 혼잡한 서울역 대합실에서 동대구 행 KTX 티켓을 끊었다. 동대구역에서 상주 행 무궁화 열차로 갈아타는 것이 진하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코스였다. 한시라도 빨리 서울에서 벗어나고 싶다. 어머니와 이모의 따뜻한 관심, 왁자지껄한 잡담, 일상의 온기가 절실하다.
캄캄한 밤 동대구역 매표소는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진하는 매표소 앞으로 다가가 운행 시간표를 확인하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주 행 막차 시간이 8시 15분이다. 30분만 늦었어도 꼼짝 없이 모텔 신세를 질 뻔했다. 티켓을 끊고 나서 진하는 공중전화부터 찾았다. 상주 집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는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어 상주역으로 마중 나오라고 미리 얘기를 해두어야 한다.
전화기를 얼굴에 대는 순간 담배 절은 냄새가 확 느껴졌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3센티쯤 떨어뜨리고 고개를 드는 순간 바로 앞 유리벽에 영어와 중국어로 국제전화를 거는 방법을 상세하게 가르쳐주는 설명서가 눈에 들어왔다. 전 국민이 핸드폰을 갖고 다니는 대한민국에 공중전화를 이용하는 사람은 외국인들뿐인 모양이다.
-여보세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진하는 외국의 어느 오지 도시에서 한국 사람을 만난 것처럼 안도감에 휩싸였다.
“엄마, 나야.”
-어머, 진하야. 너 왜 거기 있어? 공오삼이면 대구잖아.
“지금 동대구역이야. 무궁화로 갈아타서 지금 상주로 가려고.”
-얘가 지금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너 한국 언제 들어왔어? 엄마한텐 한 마디 말도 안 하고.
어머니의 황당해하는 말소리가 아무 의미도 전달하지 못 한 채 공중에서 흩어져버렸다.
“엄마, 아저씨가 돌아가셨어. 일자르디노는 아예 없어지고, 그 자리에 놀이터라는 패밀리 레스토랑이 생겼어. 놀이터 직원 말이, 아저씨가 새벽에 혼자 계시는데 일자르디노에 불이 났대.”
이렇게 갑작스럽게 아저씨의 부고를 전할 작정은 아니었는데,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침착성을 잃은 목소리로 튀어나왔다.
-알아.
차분해서 오히려 냉정하게 느껴지는 말투에 진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마, 알고 있었어?”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상주에 기거하면서 주기적으로 집에 들러 이것저것 점검하는 어머니가 일자르디노 자리에 전혀 다른 레스토랑이 들어선 것을 보지 못 했을 리가 없다.
-시간 맞춰 배웅 나갈 테니까 역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기차에서 내리니까 승강장 조명을 제외하고는 주변이 온통 컴컴하였다. 진하는 어머니를 찾아 대합실 안을 휘 둘러 보았다. 달랑 하나 있는 매표소 창구 맞은편에 있는 대기석이 앉아 있는 사람 하나 없이 썰렁하였다. 정면으로 보이는 자판기에서 차가운 콜라 캔을 하나 빼서 텅 빈 대기석에 앉았다. 배낭을 껴안고 대합실에서 하릴 없이 앉아 있으려니 가출을 해 본 경험도 없으면서 가출한 여고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반쯤 남은 콜라 캔을 멍하니 흔들어대고 있을 때 대합실 입구 쪽으로 걸어 들어오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진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머니 쪽으로 달려갔다.
“엄마!”
격한 환영에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이 어머니가 잔소리부터 늘어놓았다.
“다음 주에 귀국한다며, 어떻게 벌써 들어왔어? 유럽 여행 하고 온다며.”
“여행 취소했어.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갑자기 못 가겠다고 해서. 굳이 혼자 갈 정도로 보고 싶은 데도 없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엄마한테 온단 소리 한 마디를 안 해?”
다그치는 목소리조차 지금 진하에게는 상처 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클래식 음률처럼 들렸다.
“갑자기 나타나야 깜짝 선물이지!”
“네가 깜짝 선물이야? 우와, 꿈도 야무지다.”
어머니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황당하게 웃었다.
“엄마가 나 보다 더 좋아하는 거 있어? 없잖아.”
“그래, 그렇다고 치자.”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진하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는 어머니의 혈색이 건강해 보였다. 전원생활을 하면서 몸과 마음에 좋은 양분을 듬뿍 흡수한 모양이다.
상주 집은 원래 신부전증으로 오래 투병 생활을 하던 이모부의 요양을 위해 구한 집이다. 그러다 재작년에 이모부가 돌아가시면서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에 줄줄이 과부가 된 두 자매가 살림을 합치게 된 것이다. 산길을 굽이굽이 들어가야 나오는 산골 마을이지만 귀향을 선택해서 들어온 도시 사람들이 많아 농촌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적응해 나가기가 수월하다고 한다.
“아우, 무슨 할 일이 그렇게 많이. 아주 힘들어 죽겠어.”
한 번씩 서울로 올라올 때마다 어머니는 난생 처음 하는 전원생활에 대해 투덜거리면서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사계절의 변화를 뚜렷이 느끼며 철철이 제철 음식들을 만들어 이웃사람들과 나누어 먹는 것이 아버지 없는 빈자리를 채우기에 좋은 소일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엄마, 근데 아저씨 돌아가신 거 왜 나한테 암말도 안 했어?”
엄마와 팔짱을 꼭 끼고 역내를 빠져나가던 진하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어머니가 복잡한 표정으로 진하와 시선을 피하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 마음 다칠까 봐.”
목소리에 묻어 있는 진심에 어쩐지 울컥했다. 말을 하는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아 진하는 고개를 들어 별이 총총 박힌 상주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고 하던데, 아버지, 이모부, 아저씨도 저기 빛나고 있는 별이 되어 있을까.
“이제 일자르디노도 없는데, 엄마, 나 이제 어떻게 하지?”
요리 공부를 시작한 이래 진하의 목표는 오로지 일자르디노의 주방이었다. 일자르디노 말고 다른 데서 일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으니, 진심으로 막막하였다.
“당장 밥 못 먹고 사는 것도 아니고, 뭐가 그렇게 급해? 천천히 생각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 던지는 어머니의 푸근한 음성이 답답하던 가슴에 숨통을 터주었다.
그래, 천천히 생각하자.
새까만 하늘에 유난히도 반짝 거리는 별 세 개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쯤에서 아버지, 이모부, 아저씨 세 분이 술이라도 한 잔 걸치고 계신 건 아닐까. 진하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그려졌다. 진하는 하늘에서 그만 시선을 떼고 어머니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어리광을 피웠다.
“엄마, 나 항아리 고기 먹고 싶어.”
항아리 고기란 항아리에 돼지고기를 걸어놓고 바닥에 숯을 피워 훈제한 것인데,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이다.
“내일 저녁에 해먹자. 목살 사둔 거 있어.”
“평상에서 먹자!”
“항아리 고기를 평상에서 안 먹으면 어디서 먹니.”
“엄마, 무채 나물이랑 명이 나물도 있어?”
“당연히 있지!”
진하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좋았어! 그럼 점심은 그럼 항아리 고기 해 먹고, 아침에는 엄청 매운 김치찌개 어때? 돼지고기, 큼직하게 썰어서.”
머릿속으로 김치찌개의 매콤한 냄새가 상상이 되자 바싹 말라 있던 입 안에 군침이 돌았다.
“좋으실 대로.”
“아, 그리고 엄마, 명란젓 있지?”
“그럼. 당연히 있지.”
“내일 아침에 명란젓 넣어서 계란말이 해먹어야겠다.”
“얼른 가자. 이모 지금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겠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내일이 기다려졌다. 때로는 어떠한 위로의 말보다 맛있는 음식이 삶의 의욕을 샘솟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맛있는 계승 수정본입니다. 지난 내용은 살짝 지우고 감상해주세용~ ^^
진하의 상황이 바뀌었네요^^
재연재되기를 열심히 기다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