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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로맨스] 비정한 작가, 제대로 생각해야 할 독자  

번호 : 110     /    작성일 : 2004-02-07 [14:56]

작성자 : yoony    



[베이비 베이비]
정은형 북박스
2003. 12 출간



몇 년 전, 방송을 시끄럽게 했던 앵커우먼 백지연의 친자확인소송 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때 백지연이 분노했었던 것이 어떤 것 이었나 알고 있는지.
그녀가 분노했던 건 자신을 부정한 것에 대한 게 아니라 자식을 부정하고 그 아이가 나중에 알고 입게 될 상처 때문인 것이었다.
아이가 사랑했던 아버지와 엄마가 아닌, 다른 이의 씨를 받아서 태어난 더러운 존재로 잘못 인식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부정당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될까, 그것에 분노한 것이다.

모성이란 그런 것이다.
예린 자신이 부정당한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자신의 사랑을 의심받은 것에 몸을 떤다 할지라도 입을 틀어막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그렇게 부정당한 아이가 태어나면, 가족들의 외면을 당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의 삶은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예린을 지켜준 이가 누구인가.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태반 속에 떠있는 아기만이 그녀를 살게 해 주는 존재였다.
태아의 움직임이 오롯이 그대로 다 드러나게 될 만큼 몸이 말라 비틀어져도 그녀는 살아남으려고 이를 악문 것이고,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의 응어리진 몸을 쓰다듬어 준 것이다.
그렇게 그녀 나름대로 아이에 대한 사랑을 몸으로 말해 주었다.
그런 그녀가 아이가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 갈 것인지 불을 보듯 뻔한 마당에 입을 틀어막으면, 그런 것이 아이에 대한 애절함이고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자기 손으로 아이를 자신이 걸었던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게 된다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그렇지만 그런 의도를 갖진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살갗이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벽난로 속으로 내던져진 아기신발을 헤집어 낼 정도로 아이에 대한 사랑은 절절하다.
그런데도 제대로 된 진실 한 자락 말 하지 않는 것으로 전개를 한 것은 어폐가 있다는 거다. 이야기를 만들어 가려고 그렇게 쓴 것이겠지만 너무나 갑갑하다.


감상에 앞서 할 말이 있다.
작가들도 이젠, 여자를 생각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무뇌아로 만드는 작업에서 매너리즘을 느낄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이제 그만 그런 일에 싫증을 느끼고, 여자라는 생물이 말 할 줄도 알고 생각이라는 걸 할 줄도 안다는 걸 좀 처음부터 머릿속에 인식을 하고 작품에 임했음 싶다.
독자를 무시하지 말라는 거다.


여덟 달 반이나 사랑하는 이의 자식을 잉태하고 있었고, 일곱 달 동안 제대로 된 진실을 말할 기회가 넘치고도 남았을 시간을 내버려두고 여자는 눈물만 흘려대고 손끝만 파들대며 “날 버리지 말아 달라.” 애걸한다.
거짓말이더라도 하고 또 하고 수 백 번, 수 천 번 말하면 진실로 들릴 법도 한 것이다.
그런 마당에 지극히 본능적인 모성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당신의 아이다’란 말 한 마디 할 줄을 모른다.

작가는 이 글에서 여주의 자존심을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나보다.
자기를 의심한 상대에게 설명해야 할 필요조차 불허하는 아픈 자존심.
어느 독자는 예린과 우현이 아기를 살해한 거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그 말에 공감을 한다.
자존심을 내세우기에 앞서 아이의 삶을 생각해야 했다.


아무리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한 도입과 갈등을 위한 시작이라지만, 여자의 어린시절이 모진 학대와 굶주린 사랑으로 점철되어 있다지만, 여자를 이렇게 자기 생각하나 제대로 말 하 지 못하는 존재로 만들어야만 하는가.

이것은 폭력, 강간과 함께 다시 한 번 생각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문제이다.
잔인한 폭력과 비인간적인 강간을 일삼고도 여자에게 애정이 있다면 그것이 다 로맨스가 되고 사랑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인가.
여자의 적은 여자라 했다.
사회 탓 할 것 없이 여자를 비하하는 것도 여자가 많고 잘 된 여자를 시기하는 이도 여자가 많다. 마치 흑인을 제일 경멸하는 인종이 흑인이듯이 말이다

앞뒤 구분 없이 날뛰고 드세기만 여주를 추앙하는 것도 문제지만, 여자를 짐승처럼 다루며 학대하고 잔인하게 두들겨 패면서도 나중에 “사랑해~” 한 마디에 무너지는 여주를 만드는 것도 문제고 그 말에 열광하는 독자도 문제라고 본다.
그런 이들이 언제 한 번이라도 그렇게 오지게 맞아본 적이 있었는지.
내가 인간이던가 개, 돼지던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맞아본 적이나 있고, 인간에 대한 증오로 입안이 찢어지도록 생살을 씹어 본 적이 있는지.
그렇게 맞아 터진 후에도 “사랑해.” 이 한 마디에 모든 게 눈 녹듯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지. 그렇게 맞는 이유에 사랑이 흠뻑 녹아 있다고 생각을 하는지.
그래도 ‘나는 그런 사랑, 너무 멋있어!!’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좋다는 데야 누가 뭐랄 소냐.
그 대신 독자가 아니면 작가라도 이젠 제대로 된 글감을 좀 찾았으면 하는 심정이다.
제 밥 그릇 하나 챙기지 못하고 절절매는 여자를 보는 게 참 힘들다.


이 글에서는 여주뿐만 아니라 친모도 현실 부적응자로 만든다.
강간범에게 당해 여주를 낳게 된다지만, 평생을 살아도 지워지지 않는 악몽이겠지만 일어서 볼 생각도 한 번 안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앉은 자리에서 평생 동안 원망만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부셔버리고 어린 딸의 인생까지 부셔버린다.
30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그 일만 원망하면서 인생을 내던져 버린다.


모두가 여주를 경멸하는 집안에서 유산기가 보여도 병원조차 꿈꾸지 못하고 날 밀가루를 물에 타 마셔대야 하는, 자기의 살갗이 타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벽난로 속으로 던져진 아기 신발을 끄집어내려 불 속을 헤집는 여자를 보면서 눈물 흘리는 게 너무 힘들다.
친모처럼 자신을 키워준 시어미가 북북 찢어 내던진 배내옷을 깁고 또 기우면서 넋을 잃은 모습도, 시누이가 빠트리고 간 젖비린내 풍기는 배내옷을 움켜쥐고 바닥을 기면서 울음을 토하고 미쳐 가슴을 쥐어뜯는 여자를 읽으면서 꺽꺽 목멘 소리를 내는 것이 너무 힘들다.


무엇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 하는 지 뒤늦게 알고, 죽은 아이의 출생신고와 사망신고를 동시에 해야 하는 남자의 통한의 눈물도 너무 아프다.
여자가 혹여나 보고 아기를 떠올릴까 싶어 엘리베이터 안에 찍힌 조그만 개구쟁이의 발자국을 소맷자락으로 닦는 남자에 속이 쓰리다.
자식처럼 키우다 배신감에 몸져누워야 했던 남자의 부모도 아린 마음이었을 게다.


이 글에서는 반복하는 방법으로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반복되는 단어와 문장, 잦은 쉼표, 무지하게 사용되는 말 풀이표(ㅡ),다시 되짚어 보는 장면들...
남주 우현의 슬픔을 대신 표현해 주는 것으로써 주변 인물들의 유사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부하직원의 아내에 대한 불신으로 말미암은 유산의 고통을 듣고, 길 가던 교통 경찰관까지 나서서 그들의 유산 경험을 이야기 한다.
남자의 고통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이런 우연찮은 계기를 자꾸 반복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나 싶다.
그러지 않아도 남자의 고통은 충분한 것이었다. ‘눈썹은 널 닮고 입술은 날 닮은, 이쁜 짱구이마에 머리가 길었던’ 사산된 아이의 모습을 눈에 담은 것만으로도, 죽은 아이를 출생신고 해주었던 울음만으로도 그의 고통은 충분했다.


정말로 병원에서 사산된 아기를 부모에게 보여줄까.
친분이 있는 병원이라지만, 죽어버린 아기를 품에 넣어주며 안 보면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 지금 안아보라고 억지로 안겨주는 게 맞는 걸까.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
막연한 형태의 슬픔이 좀 더 구체적인 모습과 말캉한 체온으로 눈앞에 놓여진다면 제정신으로 버텨낼 이가 누가 있을 런지.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여주가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피를 쏟으며 고통에 울부짖을 때, 아무리 전화가 안 되어도 그렇지 어떻게 결혼한 후에도 모든 문제의 발단이 된 옛날 약혼자의 전화번호를 누를 수가 있었을까.
이야기를 만들어 가려고 그랬겠지만 아직까지 그 번호가 남아 있다는 것조차 이상하기만 하다.
그리고 여주 친모의 경우, 경찰이 강간범을 찾아야 된다며 강간범의 아기를 그대로 낳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임신 최초기이고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에, 범인을 찾아야 된다고 강간범의 아기를 그냥 낳으라는 경찰이 우리나라에 있다고? 정말이지 기가 막힌다.
아무리 2,30년 전의 일이라지만 이런 경우가, 이런 경찰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랑과 상처
다정했던 시간들을 의심하는 남자가 용서되지 않고 이미 그를 용서해 버린 자신이 용서 되지 않는, 사랑했던 사람의 배신이 주는 깊은 상처
얼마만큼 사랑해 줘야 하는 건지 몰라서, 줄 수 있는 사랑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상대를 보는 게 힘들고 아파했던 여자.
사랑하는 방법에 서툰 우리들.
이 글이 로맨스라는 것에 안도를 한다. 결과에 아파하지 않아도 되니.

블루문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좋았고 인도의 여류작가 줌파 라히리라는 이의 ‘축복받은 집’을 읽고 싶어 진 것이 좋았다.
글을 읽는 내내 내 뱃속에서 아이의 태동이 느껴지는 듯한 생경함에 몸서리가 쳐지는 때도 있었다.
세상의 빛을 채 보지 못하고 스러진 많은 이들의 아이와 나의 아이에게 슬픈 사랑을 전한다.



여니 책이건 영화건 드라마건 눈물 짜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선뜻 읽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네요. 현실에서도 괴롭고 힘든 일들이 얼마든지 많은데 굳이 슬픈 얘기들을 찾아다닐 건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거든요. 그나저나 글을 보니 읽는 동안 비장한 마음이 드셨던 것 같습니다. 2004-02-07 X

'코코' 신파입니다. 읽는 내내 70년대 이야기가 생각나더군요. 우리네 사람들이 아무리 한이 많다지만 이젠 세상이 달라졌는데, 휴대폰이란 단어가 나오니 현대임이 분명한데도 등장인물 모두는 70년대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답답함을 넘어 한숨이 나오더군요. 2004-02-08 X

yoony ㅎㅎ 70년대... 읽는 동안 깝깝하긴 했지만 재밌게 읽은 것 같어요. 아는 이가 자기의 문체랑 비슷한가 보라고 해서 읽은건데 감정을 강요하는 듯한 것 말고는 딱히 거슬리는 건 없었던 듯 (보는 눈이 없어놔서;;) 2004-02-08 X

김선하 언제 여기에 쓰셨어요? 어째 요즘은 글 구상하기전 리뷰를 먼저 보게되더란..... 2004-02-09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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