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62

저자/이선미
출판사/여우출판사

뭘봐! 저리 안 꺼져!
벼락같이 소리친 하록 덕분에 우리 주위를 둘러싼 애들이후다닥 달아났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끼고는 쯧쯧 혀를 찼다.
좀 상냥하게 대할 순 없어? 그러니까 친구가 하나도 없지. 버릇이야. 고쳐.
내가 너더러 웃고 다니지 말라고 하면 고칠래?
그거랑 이거랑 같아? 난 좋은 버릇이고 넌 나쁜 버릇이잖아.
이녀석, 정말로 날 좋아하는 걸까?  


처음 온라인 상으로 이 글을 읽을 때는 감정 몰입을 하기 힘들었다. 이건 순전히 이름 때문이다. 태랑이란 이름을 처음 본 순간 헉 했다.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의 이름이기에, 그것도 남자기에 이런 이름을 갖는 여자가 있을 수 있다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사실 태랑이란 이름은 일본이름을 고스란히 우리 말로 바꾼 것이다. 그 분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셨기에 호적엔 따로 이름이 올라가 있음에도 주민등록증에서는 태랑 이란 이름으로 적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연유 때문에 태랑의 할아버지가 교장선생님이란 설정은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 싶었다. 그것도 고지식하고 깐깐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어 도통 적응이 곤란했지만, 사실 단순히 '배테랑'이라는 영어 단어로만 보자면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닌 듯 하고. 아무튼 이래저리 복잡다난한 기분으로 처음엔 글에 몰입을 할 수 없었지만 읽다보니 태랑이란 이름이 나올 때만 눈 꽉 감고 넘어가면 그 다음은 술술 읽히는 글이다 싶었다.

술술 읽힌다고 표현했지만 솔직히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었다. <하록과 배태랑>은 정형적인 십대 취향 소설의 핵심적 요소를 대부분 갖추고 있는 글이니까.

평범한 여주인공, 뭔가 삐딱하고 과묵한 성격의 남주인공, 개방적인 학교 풍토, 갑작스런 전학으로 인한 만남, 성격 더럽지만 여주에게만 고집을 꺾는 남자애, 끼를 발휘해 연예계로 진출한 남자애와 연인 사이가 된 여자애, 팬들의 질투, 소소한 조연들간의 이야기 등은 익히 보아 왔던 일본 순정만화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었던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소녀들은 꿈을 꾼다. 절대 길들여지지 않을 것만 같은 소년이 자신만을 좋아하고 또 그로 인해 달라져 결국 만인의 성망의 대상이 되는 꿈 말이다. 이를 충족시키는 것이 바로 학원물이었고, 대부분 순정 만화였다. N소설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유도 바로 이러한 설정을 고스란히 책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라고 본다. 평범한 '내'가 절대 평범하지 않는 소년과 사랑을 하는 이야기. 역경과 고뇌 끝에 남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행복해진다는 이야기. 내 사춘기 시절 열병처럼 가졌던 그런 꿈들이 현대를 살고 있는 사춘기들에게 역시 먹힌다는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녀가 자라나 어른이 되고 나서도 그때 그 시절 장밋빛 꿈을 잊지는 못한다. <하록과 배태랑>은 바로 이러한 장밋빛 꿈을 다시 한번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으니 재미없을래야 재미없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언젠가 누군가 표현했듯이 이선미 작가는 독자들의 간지러운 곳을 긁어줄 줄 아는 능력을 가졌다. 언제 어느 곳에서 눈물이 핑 돌게 할 수 있는지 알고 있고, 또 어떤 부분에서 비실비실 웃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적절한 코믹과 적절한 애절함을 담는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임에도 이선미 작가는 이를 표현할 줄 안다(부럽다ㅜ.ㅜ).

그리고 그녀는 항상 변화하여 나를 끊임없이 놀라게 한다. 책을 낼 때마다 다른 느낌, 다른 이야기를 들고 나와 그 무한한 가능성의 끝은 어디일까 짐작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 <하록과 배태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하록과 배태랑>도 약간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아쉬움을 가장 큰 이유는 새로움이 없다는데 있다. 앞서 말했든 <하록과 배태랑>에 나온 설정은 이미 오랜 고전이나 다름없는 설정이다. 캐릭터에서조차 새로움이 없었고 내용 역시 그렇게 큰 임팩트를 줄만한 장면은 없었다.

평범한 '나'와 반항기 가득한 소년. 이는 정말 고전적인 설정이라 아니할 수 없을 정도다. 여기서 세월에 따라 조금씩 변하는 건 소년이 어떤 재능을 갖고 있냐다. 예전엔 헛 멋 가득한 영화배우였다면 요즘은 연예인, 특히 가수니까.

만일 현실에서 연예인이 아닌 비행기 조종사가 최고의 선망의 대상이라면 아마도 하록은 비행기 조종사로써 성공하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았을까? 물론 이때 어른들 시각엔 조종사가 겉보기만 화려한, 실속 없는 개살구 같다는 전제가 존재해야겠지만.

또한 평범한 소녀 - 나란 존재 역시 정형적이긴 마찬가지이다. 독자들의눈엔 절대 평범하지 않음에도 소녀인 나는 항상 평범한다 주장한다. 배태랑 역시 그랬다. 약간의 허풍을 실어 하록이 내 외모에 반한 거 아니냐고말하긴 하지만, 그녀의 독백을 쫓다보면 스스로를 굉장히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불의에 참지 못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모습 등등은 캔디의 변형된 형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풀어나가는 방법 역시 새로움은 없다. 나와 소년이 만나는 장면, 같은 학교 같은 반, 부모에게 반항하는 소년, 이를 위해 몸바쳐 싸우는 소녀, 결국 자신의 길에서 보란 듯 성공을 거머쥐는 소년 등등 무엇하나 새로운 건 없었다.

그럼에도 작가 특유의 관조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태랑과 극히 잘 어울려 글을 읽는데 어려움이 없었던 듯 하다.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하록이라는 멋진 소년을 눈으로 그리며 사춘기 시절 가슴 설레던 그때를 추억하게 하는 소설이었으니까.



정크 그러고 보니 태랑은 타로(太郞)군요. 갑자기 타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음, '하록과 배태랑' 같은 하이틴물도 좋기는 하지만 저는 요즘 연재하시는 '모던걸의 귀향'이 더 매력적인 거 같습니다. 2004-02-01 X

Miney 개인적으로 선미님께서 선미님식의 N소설을 해보고 싶으셔서 쓰신 글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물론, 작가분과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적이 없으니 그야 말로 추측이지만요. ^^; 2004-02-01 X

'코코' 아마도 그 추측이 맞으실 듯 싶네요. 저도 직접 들은 바는 아니지만 짐작컨데 다양한 시도 중에 하나였을 테니까요. 아마 N 소설 보다는 학원물을 써보고 싶은 건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학원물은 제 환상이기도 하거든요*_* 그리고 이 소설 역시나 관조적 자세-이 선미언니의 특징이 드러나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 너무 늦게 만들어진 거란 아쉬움을 달랠 길이 없군요^^; 몇 년만 더 일찍 만들어졌다면 지금관 다른 느낌을 받았을지도;;; 2004-02-02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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