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62

저자/최해심
출판사/신영미디어

"넌 날 떠날 수 없어!"

차가운 얼음 같은 남자 태준과의 짧았던 사랑은 도경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 결국 그녀는 무너져 내리는 신기루의 성에서 달아난다.
그리고 4년 후 재회한 두 사람, 이제 도경은 불안하기만 한 환상 위의 성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하지만 태준은 아직도 도경의 체온이 필요하다!


극히 정형적인 소재이다. 내용 전개 역시 정형적이고. 신분이 낮은 여자와 상류계층의 남자가 만나 같이 살았다가 헤어지고 몇 년 후 재회한다는 식의 로맨스는 할리퀸에서 주구줄창 볼 수 있는 스토리이다. 요즘이야 다른 스토리가 많지만, 예전 살로트 램이나 린 그레이엄, 캐롤 모티머 등은 이러한 한 가지 스토리를 가지고 굽거나 삶거나 무치거나 지지고 볶아 다양한 맛을 내곤 했었다. 이는 국내 작가들 역시 마찬가지.

그래서 그게 싫은 건 아니다. 오히려 '정형'을 최대한 살린 글은 입에 짝짝 달라붙는다. 읽는 내내 눈물이 글썽글썽 거렸다. 특히 초반 도경과 태준의 독백 장면에서는 가슴이 콱 막힌 듯 답답할 지경이었다.

사랑하는데, 그걸 인정할 수 없는 남자와 그만의 바라보다 비참하게 버림받은 여자의 이야기란, 정말 로맨스에서 빠질 수 없는 극도의 보석 같은 소재가 아닐까 싶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전개시키냐 이다.

<신기루의 성>은 재미있었다. 달달하고 시큼하면서도 맛좋아 계속 탐식하게 만드는 글이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난 다음, 남는 이 허기는 무엇일까?

태준이라는 캐릭터의 변화가 급작스웠다. 차갑고 냉담한 인물에서 출발한 그가 도경을 다시 만나면서 오만하고 거친 인물로 묘사되고, 도경이 임신을 한 후에는 생떼를 부리는 어린아이로 변해 있다. 이렇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남주의 캐릭터는 여기저기 가져다 맞춘 듯한 느낌을 던져주고 있었다.

여기서 작가에게 궁금한 게 생겨버렸다. 작가는 남주의 캐릭터에 대해 확실히 파악하고 있는 것일가?

신영 홈페이지는 내겐 인터페이스가 불편해서 잘 안가는 동네라 모크렌이라는 필명을 언뜻 들어본 적은 있지만, 글을 읽어본 적은 없다. 이 소설로 처음 접하는 거다. 못쓴 글은 아니다. 되려 독자들의 가려운 곳을 잘 긁어주는 스타일이라 본다. 한 마디로 장르에 지극히 충실하는 작가란 소리다.

끊임없이 발전하려 노력하는 것도 좋지만, 이처럼 철저하게 장르적 특성을 살리는데 집중하는 것도 좋다. 욕심내서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망치지 말고 말이다. 단, 장르적 특성을 살리는데 집중한다 해도 기본적으로 지켜야할 것이 있다고 본다. 남들이 뭐라든 그건 부차적인 문제고, 중요한 건 작가 본인이 캐릭터에 대해 얼마나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느냐란 것이다(여기서 '완벽하게 파악'이란 내 자식이니 뭐니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로써의 시점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하나의 창작물을 완성하는데 있어, 등장 인물에 대한 파악은 아주아주 중대중차한 거다. 단순히 로맨스 남주인공은 대략 이런 방향으로 흐른다라고 생각하고 있지 말고, 그 남자를 한 명의 살아있는 인물로 두고 이야기 속에서 써먹어야 한다는 거다.

태준이라는 캐릭터는 극히 정형적인 패턴을 고수하고 있는 로맨스 소설 남자 주인공이다. 그 외에 실체는 느껴지지 않는다. 책을 덮으면 잊혀지고 말 인물인 듯 말이다.

<신기루의 성> 작가는 로맨스의 맛을 안다. 어떻게 해야 가슴 찡할지, 어떻게 해야 독자들의 심금을 울릴지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자신도 태준이란 인물에 대해 애매한 느낌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때 그때 생각나는 고정된 패턴대로 그를 이끌고 갔을 뿐, 태준이란 한 명의 생명체의 독특함은 미처 고려하지 못하고 넘어가고 말았다. 이는 도경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 점이 굉장히 아쉬웠다.

정형에 충실한 만큼 일반 소설로써의 개연성은 조금 떨어졌다. 두 사람이 '왜'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개연성은 없다. 상대를 죽어라 괴롭히는 남자를 그 여자는 도대체 왜 사랑하는 것일까? 4년 전 끝장을 내고 도망쳤으면서 다시 그를 만나자마자 난 저 남자를 사랑해 하고 너무 쉽게 단정하고 만다. 이게 단지 '로맨스 소설이라서', '운명적인 상대라서' 라는 이유만으로 넘어간다는 건 로맨스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먹히겠지만 일반 독자들에게는 힘들다. 이것도 아쉬웠고.

문장은 평이하다. 우리가 자주 목격하는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그래서 개성이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름대로 문장을 꾸미기 위한 노력이 종종 보이곤 했다. 지금 당장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갈팡질팡인 듯 보이지만, 곧 작가만의 독특함을 가지고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충분히 가져보게 될 정도로.

건조한 문체는 아니다. 카피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미안하지만 건조한 문체는 아니더라. 되려 감정적 절절함에 호소하는 문체이다. 일반 독자들이야 이런 면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겠지만, 소설이란 창작품을 만들어 포장하는 전문가라면 눈가리고 아웅식은 좀 지양해야하지 않을까? 아마도 그동안 너무 많이 우려낸 소재라 싶어 이런 식의 포장을 한 것 같던데 그건 매우 어설픈 속임수였다.

정형적이면 어떤가? 그게 나쁜 건 아니다. 정형적이든 그렇지 않든 소설의 매력을 충분히 살리는 글이라면 독자들에게 당당하게 내놓아도 무관하다 본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욕을 듣지 않기 위해 어설픈 카피로 눈속임하려 들지 말고.

결론을 내리자면, <신기루의 성>은 로맨스 소설로써 충분히 재미있는 글이다. 그 불편한 곳을 찾아가 연재작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재미있다. 동시에 뭔가 아스라한 것이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채 끝을 내 아쉬웠다. 다음 작에서는 그것이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기를 내심 고대한다.






청 97년인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보그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패션이란 동네네서 더 이상의 새로운 디자인은 없다. 어떤 소재를 썼느냐가 앞으로의 승패를 좌우한다.' 가장 특이한 디자인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는 디자이너가 띠에르 뮈글러인데, 실제로 옷을 보면 옷이라기 보다는 조형물에 가깝습니다. 그런 그의 디자인도 '지극히 있던 것에서 출발한'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베이직한 디자인에 소재로 승부를 건 디자이너가 바로 미우치아 프라다이고요  2004-01-26 X

청 하지만 프라다가 선택한 소재도 일상적으로 널려있던 소재를 패션에 적절하게 매치한 것이고요. 모든 장르소설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디선가 봤던 새로움과 정형. 어디선가 봤던 유니크와 포멀함의 공존. 사실 완벽히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글이든 패션이든 창작의 작업이 수반되는 것들이라면 정형과 탈피, 그리고 이 정형과 탈피 사이를 넘나드는 현실은 비슷하지 않나 싶네요.^^  2004-01-26 X

청 잘 된 작품이라면 틀을 따지기 이전에 만든 사람이 어떤 맛을 냈느냐를 따라가는 시선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2004-01-26 X

'코코' 어떤 맛이라...그건 설명하기 곤란하군요. 맛은 있지만 특별하게 기억날만한 맛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정형을 농축 시켜놓았으나 그 이상은 없더군요. 대신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걸 기대하는 것입죠. 2004-01-26 X

청 딱히 신기루의 성이 아니라, 괜찮은 글에 대해선 관념적인 시선을 벗어나면 어떨까 해서요.^^ 2004-01-26 X

'코코' 요즘 들어 비판적으로 소설을 바라보고 있는 면은 있습니다. 그건 단순히 '읽는 것'에 그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만큼 기대치가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그걸 알면서도 재미있게 읽은 글에서 굳이 꼬집을 거리를 찾는 이유는 아쉽기에 그렇습니다. 조금만 더 하면, 조금만 더 독특하면 더 좋은 글이 될 것 같다는 아쉬움이겠죠. 사실 그저 읽고 말 글이라면 굳이 리뷰를 할 필요도 없는 거 같다는 게 제 기본적인 관념이랍니다^^; 똥고집이죠. 흐흐 2004-01-27 X

'코코' 허접이지만 출간을 하고 나서 깨달은 점이 있는데요, 사실 제일 무서운 건 반응이 없는 거랍니다. 악평이든 호평이든 비난이든 성원이든 뭐든 반응이 없이 그저 조용히 잊혀지는 것, 그게 제일 무섭더군요-_-;; 2004-01-27 X

Jewel 가장 무섭지 그거.  2004-01-27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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