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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정이 넘어서자 한산한 주택가에 틈틈이 비집고 들어와 있는 가게들의 조명이 하나, 둘 꺼졌다. 막이 내린 무대처럼 휑한 홀에 음악을 낮게 틀어놓고 하루를 마감하는 지금의 평화로운 고요가 현우는 좋았다.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피로감마저 열심히 하루를 보냈다는 성취감과 동의어처럼 느껴져, 나른한 쾌감이 들었다. 가게 안의 조명을 모두 끄고, 자그마한 휴대용 조명등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면 100평 남짓의 너른 공간이 오로지 그만을 위해 열린다.
“퇴근 하면 집에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전 퇴근 하면 얼른 집에 가야지 하는 생각밖엔 안 들던데.”
언젠가 한 번은 주방 책임자 재환이 퍽이나 존경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던 적이 있다.
“이 시간에 음악도 크게 들을 수 있고, 얼마나 좋냐.”
농담처럼 웃어 넘겼지만, 현우는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의 불같은 반대를 물리치면서까지 일자르디노를 열었던 아버지의 마음이 짐작이 갔다. 어쩌면 아버지는 자신 만의 공간을 갖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수저를 쥐는 방식까지 일일이 상관하는 아내의 매서운 간섭에서 벗어나 마음 놓고 한숨 돌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겠구나, 싶으니 아버지의 이기적인 선택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부디, 아무도 없는 새벽의 적막이 아버지 마음에 외로움 보다는 평화를 주었기를.
아버지가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한다며 멀쩡히 다니던 대학 병원에 사직서를 냈을 때부터 집안은 한시라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모든 일이 자신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가야 올바른 줄 굳게 믿는 어머니는 아버지의 의견을 큰 소리로 저지하려 들었고, 어지간하면 어머니에게 져주던 아버지는 불도저처럼 묵묵하게 어머니의 거센 저항을 밀어냈다. 그리고 그해 가을 기어이 일자르디노의 공사가 시작되면서 집안 분위기는 지옥이었다. 그쯤 되면 그냥 져줄 법도 하건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얼굴만 보이면 똑같은 내용의 말을 점점 수위를 높여가며 했고, 묵묵히 감내하던 아버지도 결국엔 큰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험악한 부모의 사이에 껴서 현우는 압사당할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도저히 막을 길이 없으니 아버지가 그만 져주길, 그래서 예전처럼 평화롭게 살 수 있길, 바라고 바랐지만 아버지의 결심은 굳건하였다.
일자르디노가 오픈을 하고 난 뒤 아버지와 일자르디노, 그리고 어머니의 기묘한 삼각관계가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모든 관심을 일자르디노에 쏟았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로 쏟았다. 원래도 집요하였던 어머니의 의심과 추궁은 일자르디노 오픈 이후 완전히 병적으로 변해갔다. 사우나에 간다고 나간 아버지가 10분만 늦게 오면 여자를 만나러 간 거 아니냐고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해 하다가 사우나로 급습해서는 아버지가 사우나에서 나오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도 ‘여자랑 만나고 뒤늦게 들어간 것이 아니냐.’며 아버지를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세웠다. 어머니가 의심하는 아버지의 여자는 상황에 따라 매번 바뀌었다. 어떤 때는 아버지가 얼굴을 마주 하며 웃었다는 이유로, 또 어떤 때는 아버지의 시선이 오래도록 머물었다며 도대체 그 여자가 누구냐며 생사람을 잡았다. 속이 훤히 비치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위태로웠던 하루하루. 먼저 손을 든 것은 아버지였다. 짐을 싸서 일자르디노 3층 집무실로 거처를 옮기는 것으로 별거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모든 것을 제 손바닥 안에 올려놓고 통제해야 직성이 풀리는 어머니가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였다. 하루 종일 신경이 바싹 곤두서 있던 어머니는 매사에 신경질적으로 변해갔고,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져 갔다. 매일 저녁 현우를 방패삼아 일자르디노로 찾아가 당혹스러워하는 아버지를 집무실로 끌고 가 폭언을 퍼부어댔다.
꼴좋네. 음식 접시나 나르겠다고 집을 나와요?
솔직하게 고백해.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거야.
여자들이랑 시시덕거리면서 지내는 게 그렇게 행복해?
애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언제 정신 차릴 거야?
기어이 나 죽는 꼴 보고 싶어서 이래?
꿈쩍도 하지 않는 아버지에게 보란 듯이 어머니가 거기서 뛰어내리기라도 할 것처럼 3층 집무실의 창을 열었다. 순간 아버지는 어머니가 아닌 현우에게 달려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목숨을 담보로 협박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지 못 하도록.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애 앞에서 이게 지금 무슨 망발이야!”
태어나서 처음 듣는 아버지의 고함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에 현우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이 이어지고 난 뒤에 아버지가 현우를 꼭 끌어안았다.
“현우야, 미안하다. 미안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이혼을 요구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이혼을 요구하고 7년 동안의 싸움 끝에 아버지는 양육권을 비롯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대가로 어머니와의 질긴 인연을 끊는 데 성공하였다. 일자르디노는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놓지 않은 유일한 소유물이었다.
아버지와 이혼을 하고 난 뒤에도 어머니는 용의자를 감시하는 형사처럼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끊임없이 감시하였다. 본인이 직접 나설 길이 없으니 주방 직원을 하나 포섭해서, 매일 아버지의 일과를 보고 받는 식이었다. 별 일 없이 평탄하던 보고에서 이진하의 어머니 허미영의 이름이 나온 것은 한 3-4년 전쯤이다. 아버지의 옆에 여자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어머니는 어떻게 그럴 수가 하는 분노보다는 거봐, 내말이 맞지, 하는 통쾌함을 드러내며 흥분하였다. 전후 사정 모조리 생략해 버린 채 여자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서 한순간에 여자에 미쳐 조강지처 버린 천하에 불한당으로 전락해버렸다. 아버지가 돌변한 이유를 찾기 위해 하루 온종일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신경을 곤두세우는 어머니에게 시달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버지를 비난하는 게 차라리 마음 편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가버리실 줄은 몰랐으므로.
노트북을 앞에 두고 오늘 하루 매상을 꼼꼼하게 점검한 뒤 현우는 목을 좌우로 꺾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 앞에 서서 2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놀이터와 바로 마주 보고 있는 2층 주택을 살펴보았다. 벌써 잠이 들었는지, 창틈으로 불빛 한 점 새어나오지 않는다. 이진하.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여자의 얼굴은 장례식장에서 한 번 본 적 있는 그녀의 어머니보다는 훨씬 평범했고 밝아 보였다.
-허미영이란 여자 딸이 요리를 배운다는 구실로 일자르디노에 제 집처럼 드나들면서 네 아버지 옆에 딱 들러붙어 있다는 구나.
-그게 어때서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러니 제발 그쪽 일에는 그만 신경 끄세요. 모른 척 남으로 살면 되는데 왜 그렇게 쓸데없이 속을 태우세요?
-어떻게 신경을 꺼? 너한테 돌아올 재산을 그 여자가 홀랑 뺏어가게 생겼는데, 그걸 그냥 잠자코 보고만 있으라고?
-저 아버지 재산 한 푼도 안 받아도 돼요. 욕심 없어요. 그냥 마음 비우세요.
-넌 괜찮을지 몰라도 난 안 돼. 어디 내 아들한테 줄 돈을 갖고 애먼 여자 뒤치다꺼리를 해? 말도 안 되지.
-그 돈이 얼마나 된다고 자꾸 돈, 돈 하세요? 그 돈 없으면 우리 굶어 죽어요?
-그럼 그게 적은 돈이야?
-엄마 그 돈 없어도 살잖아요. 왜 자꾸 억지 부리세요. 엄마가 지금 정말로 돈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그 돈이 네 아버지 돈인 줄 알아? 다 내 돈이야. 아무 것도 없는 남자 교수로 만든 것도 나고, 돈 모아준 것도 나야. 부자가 처음부터 부자인 줄 알아? 난 내 것 빼앗기는 일은 못 해.
집착을 탐욕으로 위장하는 어머니의 구질구질한 미련에 시달리면서도 현우는 진하 모녀에게 악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아버지하고는 이제 완전히 남남처럼 되겠구나, 하는 서운함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보다는 혼자 계신 아버지가 그들로 인해 행복할 수 있다면 오히려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이 훨씬 더 컸다.
-일자르디노랑 이웃이었어요.
서진구 사장과 어떻게 알고 지내는 사이냐고 묻는 질문에 여자가 했던 대답은 그들에 대한 좋은 감정을 흔들어 놓았다. 아버지가 준 돈으로 유학은 갈 수 있으면서, 관계를 묻는 질문은 피해가려는 비겁함이 이해는 가면서도, 씁쓸하였다. 꼭 직설적인 표현이 아니더라도 둘 사이를 적당히 포장할 수 있는 단어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아버지 같은 분이라든가, 아니면 많은 도움을 주신 고마운 분이라는 표현도 나쁘지는 않겠다. 하여간에 더 나은 표현을 다 놔두고 고작 이웃사촌이라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들으셨다면 적잖이 서운하셨을 일이다. 하기야 1년이 넘도록 돌아가셨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고작 이웃사촌 정도를 가지고 서운함을 논할 일이 아니기는 하다. 어떻게 1년이 넘도록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가 있는지, 도무지 믿기지는 않지만 아까 낮에 일자르디노의 행방을 묻는 여자의 표정에서 가식이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던 그 모습이 진심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녀는 요리사가 아니라 배우로 노선을 바꾸어야 한다. 그렇다는 건 즉 이진하는 제 어머니에게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단 소식을 1년이 넘도록 전해 듣지 못 했다는 것이다. 유학 가 있는 딸의 마음이 걱정 돼서 가족처럼 지내던 남자의 죽음을 숨기다니, 참으로 눈물겨운 모성애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는 게, 아버지는 그들 모녀에게 퍼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셨을 수 있고, 그들은 아버지가 주는 것을 받아주는 것으로도 충분히 의무를 다 한 것일 수도 있다. 당사자인 아버지가 괜찮다고 한 일에 대해 제3자가 왈가왈부하며, 그들이 아버지와 똑같은 마음을 갖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은 명백한 월권이다. 머리로 억지 이해를 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에 휑한 바람이 불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여기서도 외로웠겠구나.
1시, 핸드폰 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뜨렸다. 굳이 번호를 보지 않아도 누구에게서 온 전화인지는 빤하였다. 이 시간에 전화를 걸 사람은 어머니 밖에 없다.
“네, 저예요.”
-왜 아직 안 와? 아직 가게에 있어?
아직까지도 잠에 들지 못 한 어머니의 날이 선 목소리에 현우는 내심 한숨이 먼저 나왔다.
“갈 거예요.”
-당장 와.
“아직 정리할 게 남아 있어요.”
-정리를 네가 왜 해? 다른 직원 시키라니까.
다그치는 목소리에 순간 짜증이 울컥 솟았다.
“매상 정리를 다른 직원한테 어떻게 시켜요.”
-그런 건 집에 와서 해!
말을 하면 언성이 높아질 것 같아 한숨으로 대신하였다.
-가스 점검은 제대로 했지?
“했어요. 걱정 마세요.”
-지금 당장 나와.
“네.”
-운전 조심하고.
“네.”
-술 마신 건 아니지?
“제가 언제 영업 중에 술 마시는 거 보셨어요?”
-빨리 와. 지금. 알았지?
매일 밤, 똑같은 걱정, 똑같은 얘기를 하는 어머니가 짜증스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왜 이렇게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사는 걸까.
어머니는 아마도 평생 모를 것이다. 아버지를 집 밖으로 내몰아 이곳으로 도망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과 구속이라는 것을. 그게 얼마나 사람의 목을 조이며 숨통을 막히게 한다는 것을.
이번에는 남주의 사정이군요... 아... 이 골이 어떻게 해결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