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21>

 

 

“미안합니다. 정말 단비에게 뭐라 할 말이 없네요. 미안해요.”

 

연의 손을 잡은 서대비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떨리는 서대비의 음성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연은 황망함에 서둘러 엎드렸다. 서대비의 실수를 원망했던 마음조차 죄스러워지는 서대비의 긴한 사과에 연의 마음이 더욱 더 무거워졌다.

 

“어찌하여 이리하십니까.”

 

“나이를 먹고, 오랜 환후 끝에 주상과 단비를 보니 너무 즐거웠습니다. 기쁘고 보기좋아 늙은 애미가 뭔가 도와주고 싶은 마음 뿐이었는데, 이리 일을 그르치다니...”

 

점점 더 아련한 사과에 연은 고개를 서둘러 저었다.

 

“더 확인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주상께 고할 것 입니까.”

 

연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깊어진 주름 사이로 보이는 까만 눈동자에 얼핏 서린 근심이 보이는 듯하였다. 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비라고하나, 친 아들이 아니기에 늘 근심하셨는지도... 혹여 오해와 미움을 살까 늘 걱정하셨는지도...일개 후비 따위에게 허리를 숙이며 아들의 마음을 빼앗길까 우려하셨는지도... 해단에게서 들은 서대비를 향한 깊은 모정을 말로 전할 수만 있다면 몇 번이나 하겠지만, 그것은 연이 한다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몇 번이나 아니라 아니다 고하였다. 그제서야 힘없이 웃어 보이는 서대비를 보며 연은 서글픈 마음에 울컥 눈물이 맺혔다.

 

“많이 원망하였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마마”

 

처음에 원망하였던 마음까지 지워내는 연이었다. 따뜻하게 잡은 서대비의 손끝을 더 힘주어 잡으며 연은 애써 미소지었다.

 

“단비의 다친 마음은 어쩔 수 없다지만, 수자일은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내가 바로잡을 것입니다.”

 

단호한 서대비였다. 조금 전까지 쓰러질 듯 위태하던 서대비에게서 전해지는 강한 느낌에 연은 저도 모르게 서대비를 응시하였다. 마치 두 사람인 듯, 때때로의 낯선 모습에 연의 가슴 한 구석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것이 무슨....”

 

뜻을 되 묻기도 전, 서대비는 곁에 잘 놓아둔 것을 들어 탁자로 올렸다. 매듭조차 흐트러짐 없이 묶인 것을 보니 그 안의 것이 꽤 중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대비마마, 전하 드십니다.”

 

연의 생각은 해단의 등장으로 또 한번 짧게 끊겨나갔다.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는 해단의 단단한 어깨는 어느 때보다 보기 좋게 사내다웠다. 긴 밤을 함께 보냈음에도 다시 반가운 연의 떨림은 얼굴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깊게 담은 마음은 두 사람의 눈빛으로 얽혀 들어 모든 것을 멈춰 세운 듯 정지되었다.

서대비는 가만히 마른 입술을 적셨다.

 

“한결 밝아지셨습니다. 하하”

 

놀리는 듯한 서대비의 음성에 해단의 눈가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많이 티가 나니 부끄럽습니다.”

 

부끄럽다는 말과 달리 해단은 크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연은 사내처럼 당당하지 못하고 점점 붉게 물들고 있었다. 잠깐 연을 돌아본 서대비는 탁자에 놓아둔 것을 조심스럽게 들고 걸음을 옮겼다. 해단의 앞에 이르러서야 멈춰선 서대비는 그의 손에 들고온 것을 가만히 쥐어주었다. 뜻을 모르는 해단은 서대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내들의 진영에 여인이 오며 그냥 올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하여, 단비가 준비한 것입니다.”

 

“마마!”

 

저도 모르게 비명처럼 튀어나온 말이었다. 연의 말에 해단의 눈썹이 미묘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하하. 단비가 부끄러운 모양입니다. 더 민망하지 않게 어서 풀어보시지요. 단비가 며칠을 고생하며 수자한 것이니 그 정성이 얼마나 깊고, 크겠습니까.”

 

연이 뭐라 말할 새도 없이, 해단의 손은 단단한 매듭을 풀고 있었다. 연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들리지도 않는 사람처럼 그렇게 해단의 손끝만을 바라다 보았다. 연을 밤사이 더듬고, 붙잡고, 감싸던 사내의 손은 마치 지난 밤처럼 그렇게 바삐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손아래 살아 움직이는 듯 보이는 적룡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꿈인 모양이었다. 아니, 연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아 밤사이 범이 용으로 바뀐 모양이었다. 연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적룡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범이 적룡으로 바뀔리는 없는일.!

 

“주상. 뭐라..”

 

서대비의 채근은 해단의 움직임에 길을 잃었다, 천천히 연에게 다가온 해단은 연의 손끝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아무렇게나 떨어뜨려져 있던 손이었다. 아니, 해단이 잡기 전까지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한들 몰랐을 만큼, 굳어져 있던 손이었다. 그러나 해단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자 손끝은 제 멋대로 사내의 손길에 반응하였다.

 

제 것이 아니라고... 지금 저것은 이 손끝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는 입술은 해단의 입술에 막혀 말 대신, 그의 더운 숨결을 삼키고야 말았다. 짧지만 깊은 입맞춤 끝에 스치듯 들리는 해단의 들뜬 옥음은 고맙다...였다.

 

“그리 좋습니까.”

 

기뻐마지않는 서대비의 얼굴로 서대비는 놀리는 듯 했다. 애써 감추려고하지 않는 웃음을 가득 담고 고개를 끄덕이는 해단은 잡고 있는 연의 손을 놓지 않고,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울림은 지난 밤의 것과 같은데, 연은 가슴은 따라 뛰지 못하고 혼자 제멋대로 멈춘 듯 느려져갔다. 연은 해단에게 잡힌 손끝을 빼내려 손가락을 차례로 움직였다. 하지만 해단은 더욱 더 연의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많이 애쓴 손이다. 허니, 내가 조금 보듬어도 되지 않겠느냐.”

 

누구에게라도 읽혀질 수 있는 불편하고, 어색한 얼굴을 한 연을 해단은 보지 못했다. 아니, 해단은 연에게 번진 감정을 아무렇게나 부끄러움이라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서대비의 큰 웃음소리가 막사를 크게 울렸다. 아침 볕이 꽤나 좋은 늦은 봄날 이었다.

 

 

 

 

 

“잠깐 들어도 되겠습니까.”

 

들었지만 듣지 못한 것처럼, 아니 누구의 음성인지 알고 있지만 그럴 리 없다 믿는 인규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무호사부,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착각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예. 마마!”

 

서둘러 일어난 인규는 눈에 장막을 걷은 가는 손가락이 들어왔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빛에 인규는 슬쩍 눈가를 찌푸렸다. 이내, 한없이 무거워진 단비의 얼굴이 볕 사이로 스쳐보였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예를 갖추기도 전 저도 모르게 서둘러 튀어나온 근심에 인규는 흠칫 숨을 멈추었다. 허나, 몇 걸음 뒤에 선 연은 그 근심에 담긴 마음을 알지 못했다.

 

“대비마마는 어떠하신 분이십니까.”

 

이유를 알 수없는 면구함에 인규가 말을 고르고 있을 때, 느닷없는 하문이 들려왔다. 인규는 고개를 들어 단비를 올려다보았다. 사사롭게 마주할 사이가 아님에도 보도록 만드는 질문. 인규의 얼굴로 미묘한 감정이 드러났다.

 

“어떤 것을 여쭈시는 지 신은 짐작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 보는 단비에게 인규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하였다. 하지만 단비는 그에게 다를 것을 묻지도, 다시 묻지도 않은 채, 침묵만을 지키고 서 있을 뿐이었다. 뜻을 읽을 수 없을 만큼 깊은 검은 눈동자는 지쳐 보이는 듯 했다.

 

“전장에서 뒤엉켜 칼을 나눌 때, 적과 아군을 어찌 구별하십니까.”

 

단비의 낮은 음성은 또 다시 이상한 하문을 남기고 멀어졌다. 인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첫 번째 질문과 두 번째 질문 사이에 아무런 공통점도 찾을 수 없고, 서국의 후비가 무호사부에게 하문할 것이 아닌 말들인데, 무엇인가 그를 잡는 것이 있었다. 그저 그에게 농으로 건네는 것이 아닌, 진심을 다한 말이라는 것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인규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생각을 거듭했다.

 

“대비마마는 전하의 어머니이십니다. 생모는 아니시지만, 전하를 진심으로 아끼시는 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규는 괜히 자신의 답이 틀린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불안했다. 그러나 틀릴 리가 없는 답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리 답할 수 밖에 없어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인규를 보던 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수 십번, 수 백번의 생각이 오고 가는 듯, 복잡한 얼굴을 하고 서있는 단비를 인규는 그대로 놓아 둘 수가 없었다.

연은 어둠 속에서 쓰러져가는 촛불을 들고 있는 사람처럼 희미하게 웃음을 보였다.

 

“잠깐...아주 잠깐 어떤 생각이 났습니다.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아닌데, 불안하고, 불안하여... 허나, 이제는 되었습니다. 무호사부의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됩니다.”

 

안심이 된다는 말과 달리, 긍정의 뜻으로 보이는 웃음과 달리 단비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앞에 보이는 웃음을 믿어야 하는 것인지, 들리는 말을 믿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눈동자가 간절히 비추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인지.. 마음을 정하기도 전에 인규의 혀끝은 가슴이 시키는 것을 따라 움직였다.

 

“신이 알아보겠습니다.”

 

짧은 말에 연의 입가가 가늘게 떨렸다.

 

“제 짐작이 진정 틀린 것이면 어찌합니까.”

 

답은 충분했다. 짐작이 맞으면 어찌합니까!가 아닌, 틀리면 어찌합니까!

단비는 그의 대답을 듣고 안심한 것이 아니라, 더 깊게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의심하고, 경계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비에 관한 질문에 그가 답을 하며 이유를 알 수 없이 불안해 했던 것처럼, 앞에 선 단비 역시 그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장에서 뒤엉켜 칼을 겨누고 합하여도, 제 편을 베는 장수는 없습니다. 허공에서 눈빛이 얽히고, 검이 닿는 순간 말하지 않아도 이는 내 편이다. 이는 내 사람이다.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헌데, 내 편의 옷을 입고 있는데, 살기가 느껴진다면.... 그것은 아군이 아니라 적군이기 때문, 다른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신의 답이 충분하십니까.”

 

“진심으로 아니길 바라고 있습니다.”

 

인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비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믿기 때문이었다.

 

“어떤 증엄이 있어서 이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리 말하는 순간도 죄스러울 만큼 무거운 마음인데, 자꾸만...아니라 합니다. 아니라 보여집니다. 저를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허나..”

 

단비가 차마 담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아는 인규는 애써 편안하게 웃어보였다.

 

“신의 염려도 같습니다. 신이 자청한 이유도 마마와 같습니다. 허니, 이곳에 그 마음을 내려두고 가십시오.”

 

인규의 말 속에 담긴 뜻이 연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한없이 따뜻하고, 배려하는 눈빛과 음성. 연은 가만히 무호사부를 바라보며 그가 해주었던 것처럼 애써 웃어보였다.

 

“전하는 참 좋은 분을 곁에 두셨습니다.”

 

장막을 막 걷으려던 연은 슬쩍 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까 연과 마주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던 무호사부는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애써 웃는 것이 아니라, 진정 보이는 사내의 웃음이었다. 기분 좋게 보이는 따뜻한 웃음에 연의 얼굴에도 따라 웃음이 번졌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마마.”

 

나가려는 찰라 무호사부의 음성이 연의 발걸음을 잡았다. 연은 다시 한 번 뒤돌아보았다.

 

“마마께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분이 아니십니다. 절대로.”

 

힘주어 말한 사내의 얼굴은 목덜미까지 붉게 변해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연은 그를 따라 붉어지는 대신, 아까 사내가 보여주었던 웃음처럼 다시 환하게 웃어주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짧은 목례와 함께 기분 좋게 감긴 음성은 무호사부를 휘감고 흔적없이 사라졌다.

 

 

 

 

 

 

 

 

 

-대화전-

 

옥국의 사람인 서대비에 의하여 옥국의 전쟁은 끝을 보이고 있었다. 중심을 드러내지 않았던 무리는 서대비를 통해 뜻을 전하였고, 그 요구는 제법 그럴싸해보였다. 속국과 주국의 관계라는 것은 언뜻 보기엔 주국인 서국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정사라는 것은 그리 간단하게 해결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요구에 따라 옥국을 왕후의 나라로 정립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 생각 되옵니다. 대비마마께서 오랜 환후로 옥국과의 교류가 뜸했던 것도 사실인지라, 옥국의 대사들이 제일 속국으로의 안위를 염려하고 있었고, 군사와 곡물을 주고 받은 사례도 점점 줄어들고 있어 불안감이 높아졌던 것도 사실이라 사료되옵니다. 더구나 근자에 부서부를 편입함에 있어 단비마마를..”

 

말을 이어가던 윤위 재상은 말끝을 흐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을 계속 이어가기에는 주변의 헛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게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사색이 되어 곁을 찌르는 헌부사는 눈까지 찡긋해 보이며 그만하라 신호를 주고 있었다.

 

“끝인가.”

 

윤위는 잠시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어 왕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침묵으로 신료들의 말을 듣기만 하던 옥음은 감정을 읽을 수 없을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노여움이 담겨 있지 않음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멈춰야 하는 지, 잠깐 망설였지만 윤위는 왕의 발끝을 보고 다시 입을 떼었다.

 

“부서부의 편입에 따라 국경지대의 식량난이 어느 정도는 해소 될 수 있지만, 주조공국인 옥국의 넓은 평야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속국이 모두 전하의 발밑에 있고, 그 백성 또한 전하의 은덕을 입는 이들이라고는 하나 속국이라 하여 다 같을 수 없고, 백성이라 하여 온전히 다 같을 수 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강한 군사와 정치로 서국의 힘을 보여주셨다면, 이제는 옥국에서 왕후를 보시어 서국의 인자함을 보여주실 때라 생각하옵니다.”

 

윤위의 눈에 왕의 발 끝이 슬쩍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옥국 출신 왕후라.”

 

“선대부터 그리 하여오셨나이다.”

 

말 끝에 노기가 없음을 확인한 서관은 말을 보태었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몰랐다. 대대로 옥국 출신 여인에게 곤전의 자리를 맡겨왔던 것은 옥국에서 바쳐온 조공의 안정화를 위함도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왕후의 자리를 놓고 서국의 신료들끼리 서로 셈하며, 이해득실을 따라 뭉치고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함도 있었다. 내가 왕후의 아비라는 자리를 가질 수 없다면 다른 누구도 가질 수 없도록 하려는 신료들의 속내는 말만 다를 뿐 하나로 합하여 대화전을 가득 채웠다.

 

“혹, 단비마마를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순간, 긴 겨울 대지를 매섭게 얼린 바람보다 더 찬 냉기가 모든 이의 어깨를 감싸며 멀어졌다. 말을 꺼낸 윤위의 입 끝은 미세하게 떨렸고, 뭐라 말을 보태지도, 감하지도 못하는 다른 신료들의 수염도 알 수 없게 떨리고 있었다.

 

“하하하. 그리 보이는 가.”

 

뜻밖의 웃음. 그리고 인기척!

신료들은 모두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왕은 느리게 손을 들어 얼굴에 감싼 붉은 탈을 벗어 내렸다.

 

“아..”

 

이유를 알 수 없는 탄식과 긴 숨이 뒤엉켰다. 그 사건 이후 십 수 년 만에 다시 용안을 마주한 이도 있고, 등청한 후 처음 용안을 뵌 이도 있었다. 대화전을 압도하는 날카로운 기운과 알 수 없게 입가에 머문 흐릿한 웃음, 그리고 그들의 기억보다 더 수려한 용모, 아니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수년을 들어왔던 독설과 꼭 닮은 짙은 눈동자는 신료들의 시간을 그대로 잡아두고 있었다. 긴 침묵은 답답하게 이어졌다.

 

“잘 보았다. 윤위.”

 

칭찬? 멍해진 윤위는 눈을 깜박이다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저도 모르게 오랜 시간 용안을 뜯어보고 있다는 것을 이제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오랜 정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두근거리는 심장은 늙은 신료의 가슴을 터지도록 울렸다.

드디어 십 수 년의 상처가 아문 것인가! 더는 아프지 않으신 것인가!

윤위는 손으로 먹먹해지려는 가슴을 쓰다듬다 생각을 멈추었다.

 

‘잘 보았다. 잘 보았다?’

 

“가려도 다들 잘 보고 있으니, 더는 가릴 필요가 없겠다. 허나,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니 그런 눈으로 근심할 것 없다.”

 

다시 입을 열려 하던 윤위는 뜻밖의 옥음에 숨을 멈추었다. 그들을 내려다보던 왕은 어느 사이에 뒤를 돌아 등을 보이고 있었다. 단단하게 벌어진 어깨 뒤로 침묵은 길어졌다. 근심할 것 없다 하였으니 왕후 문제는 해결이 된 것 인데, 이상하게 왕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거운 무엇인가가 그를 짓누르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뜻을 받들겠나이다.”

 

서관은 서둘러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도 윤위와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그리하라.”

 

짧게 답한 왕은 대화전을 빠져 나갔다. 한참동안 멍해져 있던 신료들은 이내 목소리를 높여 서로가 본 것을, 서로가 들은 것을 재차, 삼차 확인하며 흥분했다. 저자거리보다 더 소란스럽게 오가는 음성에도 딱 두 사람은 침묵을 지키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기뻐해야 함이 마땅한 일 아닙니까.”

 

한참 후에 서관은 먼저 말을 꺼냈다. 그제서야 서관을 돌아 본 윤위의 입술 끝이 살짝 말려올라갔다.

 

“헌데, 자네의 얼굴은 어찌 그러한가.”

 

억지로 한껏 들뜬 음색과 얼굴을 하고 있던 사내의 낯빛이 마음을 드러내며 변하였다.

 

“참 먼 길을 돌아오셨습니다. 그런데, 또 먼 길을 다시 떠나시라 등을 미는 것 같아 그러합니다.”

 

지학(志學)이 되기 전 나이에 관료의 길에 들어 한결같은 마음으로 국사를 위했던 서관은 잠시 뜸을 들이다 속내를 털어 놓으며 육중한 어깨를 으쓱했다.

 

“예청의 유헌을 불러 일을 마무리 하게.”

 

“헌데, 나리.. 이대로 하여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윤위는 피식 웃으며 서관의 두툼한 등을 툭 쳤다.

 

“그대로 하겠다 한 것이 분명! 자네가 아니었던 가.”

 

“하오나. 그것은..”

 

“서관. 전하께서 가시는 길과 사내의 길이 꼭 다를 것이라 심려할 것 없네. 그 둘 사이에 만나는 어딘가도 있겠지.”

 

윤위는 몸을 일으키며 비어있는 옥좌를 슬쩍 돌아보았다.

 

 

 

 

‘저 녀석은 나를 닮았지. 꼭 닮았어.’

 

오래 전, 옥좌 위에서 들려왔던 음성이 기억 속에서 살아나 그의 귓가를 울렸다.

 

‘하오나 전하, 세자저하로 옹립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옵니다. 왕후마마께서 입궁하신지 한 해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시간을 두고 고려해보심이 어떠하십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윤위의 음성은 저도 모르게 거칠어 졌었다. 옥국에서 왕후로 뽑아 올린 오늘날의 서대비의 미색이 떨어졌었다면 모를까. 솔직히 말하면 그 반대였다. 지나치게 고왔던 젊은 날의 서대비는 성심을 갖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아름다웠다. 또한, 기품 있는 말투와 자태는 왕후로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타고난 듯하였고, 후비 소생의 왕자도 감쌀 줄 아는 따뜻한 성품의 여인이었다.

 

‘시간을 두고 기다려도 왕후에게서 후사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네.’

 

‘허면, 왕후 마마께 무슨 문제가..’

 

차마 신하가 담아내면 안 될 말이나, 그날의 윤위는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 후사를 볼 수 없는 몸으로 왕후의 자리에 앉아 있다면 그것은 국본을 위협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서국와 옥국의 정치 문제로도 비화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윤위! 왕후는 아무 문제가 없네. 문제가 있다면 왕후를 품지 않는 내게 있는 것이겠지.’

 

‘전하!’

 

설마하던 소문이 맞았던 듯했다. 윤위의 등 뒤로 땀이 송글 송글 맺혔다.

 

‘참,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네. 왕후가 일 년 정도 궁 밖에 나갈 수 있도록 해주겠나.’

 

‘그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왕후는 그냥 환후 탓에 세화전을 나오지 못하는 것으로 해두지.’

 

‘허면...’

 

‘다시 물을 것도, 더 알아 볼 것도 없네. 그냥 궁에서 어떤 궁인 하나가 잠깐 들고 나는 것으로 해두면 될 일이겠지.’

 

잊고 있던 날인데, 갑자기 떠오른 기억은 지난 날에 묻어두었던 궁금증 까지 파헤치고 있었다. 병세가 깊어 왕후가 세화전 밖을 나오지 못했다는 일 년, 그가 사병을 통해 옥국으로 안내했던 진짜 왕후, 서대비는 왜 그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아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그 긴 시간을 궁 밖에서 보내도록 허락한 것일까. 대체 무슨 일이...!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기던 윤위는 황주성문 밖에 이르러서야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 일, 이제 그의 기억에만 남아 있는 질문을 이제와 물어 무엇하랴. 그저 꿈이라 여기자 하며 그는 말 고삐를 당겨 잡았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나가는 그의 얼굴로 제법 훈훈해진 초여름의 바람이 끈떡지게 달라붙었다. 아직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도 전, 벌써 바람에 물기가 축축한 것을 보니 올해 여름은 참 길고, 후텁지근할 것 같았다.

 

 

 

 

 

 

 

 

 

 

이상하게 열이 올랐다. 해단이 꽉 잡은 손 끝은 지나치게 뜨거웠다. 연은 그와 얽힌 손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단단하게 움켜쥔 사내에게서 연은 묘한 불안감을 엿보았다.

잡고 있는 데, 잡고 있지 아니한 것처럼...

안고 있으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함께 걷고 있으나 뒤쳐져 있는 것처럼...

 

“이리 걷기만 하시면, 끝내 말을 못하십니다.”

 

걸어가던 해단은 멈칫했다. 어색하게 멈춘 걸음은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만들었다. 뒤따르는 궁인들은 옥보를 따라 서둘러 멈추느라 사로 발이 엉켜 소란했다. 대열을 정비하고 몇 걸음씩 서로 물리고, 앞서느라 고요하던 청해에 노닐던 오리 떼는 푸드득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그러나 걸음이 엉켰던 궁인들은 어느 사이에 없는 듯 고요해 졌다. 살짝 뒤를 돌아본 연의 입가엔 웃음이 흘렀다.

 

“어찌 웃느냐.”

 

“뒤에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데, 모른 척 해야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러합니다.”

 

해단은 잠깐 머물던 생각을 뒤로 하며, 연을 따라 웃다 눈썹을 찡긋했다. 연은 해단의 뜻을 몰라 눈동자만 깜박했다.

 

“하나, 둘, 셋 하면 뛰는 것이다.”

 

귓가를 나지막하게 울리는 말의 뜻을 미처 헤아리기도 전 사내는 셈을 시작 하였다.

 

“하나! 둘! 셋!”

 

사내에게 손목을 잡힌 연은 그에게 끌려 뛰기 시작했다.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듯하던 연도 어느 사이에 밟힐 듯 위태로운 치맛단까지 모아 쥐고 열심히 달리기 시작하였다.

 

“어어..전하!!”

 

“전하!! 옥체 고정하시옵소서!”

 

“전하!!”

 

몇 십 보 뒤에서 천천히 따르던 궁인들의 비명같은 소리가 뒤를 따르며 쉴틈없이 들려왔지만 작정을 하고 뛰는 두 사람을 따라 오기엔 역부족이었다. 웃느라, 뛰느라 정신없는 두 사람은 청해에 묶어 놓은 배에 오르고 나서야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뱃전을 묶은 긴 줄을 서둘러 풀어 낸 해단은 손까지 여유있게 흔들어 주었다. 물길을 따라 서서히 거리를 넓히는 두 사람을 보던 궁인들의 얼굴은 점점 사색으로 변해갔다.

 

“무..무호사부께! 어서!!”

 

숨이 끊어질 듯 가쁜 호흡을 내쉬던 손내관은 거의 쓰러지며 중얼거렸다. 무사 몇이 바람을 가르며 달려 나갔고, 늙은 궁인 몇은 아예 바닥에 주저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없는 듯, 있는 듯 왕의 걸음을 쫓던 이들의 엉망이 된 모습과 달리 배에 오른 연과 해단은 마주 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찌..하여..하하 그리 하시면..하하하. 손내관께서는 울 것 같은 표정이셨습니다.”

 

훈훈하게 감싼 맞바람에 고정했던 연의 머리카락은 길게 풀어져 흩날리고, 연의 양 볼은 잔뜩 붉어졌다. 웃음과 벅찬 숨으로 가까스로 말을 뱉었지만 연의 표정은 손내관을 근심하는 말과 달리 즐거움을 가득 차 있었다.

 

“손내관을 비롯한 궁인들이 부쩍 살이 오른 듯 하여, 운동을 좀 시켜주고 싶었다. 궁인의 건강까지 챙겨주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성군이라 할 수 있겠지.”

 

장난스럽게 답한 해단은 연을 돌아보았다. 연은 해단의 입 끝에 걸린 웃음을 응시하며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단은 연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아무렇게나 뱃전에 걸터앉았다. 청해에 옹기 종기 모여있는 이들은 점점 작은 점으로 변해갔다.

 

“너무 멀리 가면 어찌 돌아갑니까. 노도 없는 데..”

 

웃음 사이에 슬쩍 걱정이 담겼다.

 

“허면, 이곳에서 돌아가지 않으면 되겠구나.”

 

농인데, 허한 옥음이었다. 연은 가만히 해단을 응시했다. 행복과 쓸쓸함이 공존하는 깊은 눈빛이 들어왔다.

 

“연아. 그냥 이렇게 둘이 떠나 버릴까.”

 

그건 바람이었다. 해단의 입에서 나왔지만 한번 스쳐가는 바람. 연은 해단의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헌데, 무엇을 먹고 삽니까.”

 

“무엇을 먹고 산다. 보통은 무엇을 하지?”

 

아예 뱃전에 누운 해단은 이리 저리 흔들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약간의 어지러움이 파란 하늘에 퍼진 볕을 따라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밭을 일구거나, 가축을 기르거나, 아. 딱 맞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사냥을 하면 되겠습니다. 사냥을 해서 저자에 내다 팔면 두 사람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만으로도 즐거운 듯 연의 목소리는 밝았다. 해단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하면 되겠구나.”

 

“다음 생엔, 꼭 그리하기로 약조 한 것입니다.”

 

해단의 짙은 눈매가 연을 향했다. 진심을 담은 것처럼 보이는 고요한 얼굴을 한 연이었다. 한도 끝도 없이 부풀던 주머니가 터져버린 것처럼 가라앉은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다음 생이 있다고 믿느냐.”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 허면 약조하마.”

 

해단은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답하였다. 마치 꼭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있던 사람처럼 연은 환하게 웃음을 보였다. 지나치게 좋아하는 얼굴은 처연하기까지 했다.

 

“어찌..”

 

그러나 해단의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다음 번에는 이렇게..꼭.. 둘이 살겠다 약속하였으니, 이번에는 봐 드리겠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를 드릴 수는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분을...최선을 다한 마음으로 모시겠습니다. 투기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나쁜 마음이 들지 않도록 꾹꾹 눌러 담겠습니다.”

 

감히 후비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누가 누구를 봐주겠다는 것이며, 진심으로 축하를 할 수 없다니.. 예를 벗어났다면 한참이고, 죽음으로 단죄를 한다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건방지고, 솔직한 고백이었다. 그러나 한 사내를 마음에 담은 여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배려였다. 해단이 뭍에 두고 온 것이 왕이라는 무거운 짐이듯이, 연도 그러했다.

 

“연아. 네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저도 조금은 전하를 미워할 것입니다.”

 

“하지만 너를 품 듯, 마음에 품지 않을 것이며, 너를 안 듯, 품에 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약조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미안하다 하지 않은 것은 왕으로 그가 해야 하는 일이 잘못된 것이 아닌 탓이었다. 그러나 왕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약조를 그는 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을 담았음은 어떤 연서보다 절절하게 했다.

 마음과 몸을 온전히 공유하는 것은 해단에게 연 하나라는 말.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하. 너답다.”

 

“다만, 훗날...훗날, 전하께서 하신 약조를 지키지 못하신다 하셔도 원망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예감이 들어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그날 청해에 흐르는 물처럼...

그날 뱃전을 감싼 바람처럼...

그렇게 가슴을 스쳐가는 말이었다. 그렇게 여름은 다가왔다.

 

 

 

 

 

 

 

 

 

 

 

 

 

환영연은 늘 그렇듯이 청해를 바라다보는 자리에서 열렸다. 오래 동안 비워있던 곤전에 쌓인 먼지를 날려버리기에 꼭 맞은 만큼 불어오는 바람은 연회장을 따라 길게 달아놓은 등을 가볍게 흔들었다. 등 끝에 달린 패옥은 서로 부딪혀 은은한 곡조를 만들어 내며 흥을 돋구었다. 자리 배석을 위해 도감을 들고 바삐 움직이던 유헌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설마..비가 오진 않겠지.”

 

혼잣말이었지만 따르던 예청부들이 놓칠 리 없을 만큼은 되는 음성이었다.

 

“에이! 나으리. 비라니요. 이렇게 날이 좋은데요.”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예청부의 말에 유헌은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 조금 안심이 되는 느낌이었다. 며칠 전 왕후책봉식만큼이나 중요한 연회임이 분명한데, 비라도 내리면 그야말로 낭패일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살핀 하늘의 색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그의 근심이 기우라는 듯 아침부터 볕은 쨍쨍하고, 바람은 딱 맞게 어울렸다.

 

“허면, 나으리. 혹 모르니 장막을 위에 올리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유헌의 침묵이 길어지자 함께 걱정이 늘어진 예청부의 말이었다. 유헌은 도감과 환영연회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상석부터 가까운 듯 보이는 청해까지 족히 천 보는 되어 보이는 거리인데,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장막을 칠 수는 없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칠 시간도, 여건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치부하기엔 예감이 좋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전하의 자리에 장막을 올릴 만큼은 됩니다.”

 

“전하와 대비마마, 왕후마마자리에만 일단 장막을 올리도록 할 것이니, 서둘러 준비하거라.”

 

빠르게 지시하며 유헌은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하늘로 어디 선가 날아온 듯한, 새 한 마리가 부드러운 날갯짓을 하며 오가고 있었다. 유헌은 눈이 부셔 똑 바로 볼 수 없지만 이맛살을 찌푸리면서도 새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십 수 년 전 그 일 이후 반쪽이 아닌, 곤전의 자리까지 꽉 채운 연회는 처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연회를 잘 마치고 싶은 것이 유헌의 바람이었다. 유헌의 눈길을 따라 가던 예청부 몇몇도 새를 발견하곤 박수를 쳤다.

 

“나리! 길조입니다. 연조라 하는 말도 있으니, 오늘 연회가 잘 될 것이라는 징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의 말이 마치 사실인 냥 유헌의 얼굴에도 슬쩍 미소가 번졌다.

 

“잘 끝나면, 다들 주머니가 두둑해 질 터이니, 끝까지 최선을 다하도록 해라. 꼼꼼하게 맡은 자리를 챙기고!”

 

유헌의 말에 다들 신이 난 사내들의 음성이 연회장에 울린 순간이었다.

어느 사이에 날아 온 매 한 마리가 작은 새의 곁으로 따라 붙었다.

 

“어어!”

 

뭐라 말할 사이도 없이 매에게 어딘가를 물어 뜯긴 연조는 위태하게 날아가다 다시 한 번 매의 공격을 받았다.

 

“아이쿠!”

 

바라보고 있던 이들의 탄식에 놀라기라도 한 듯 매가 잠깐 연조를 놓친 사이 새는 의미 없는 날갯짓을 하다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퍽.”

 

그들이 왕의 자리에 치고 있던 장막 위로 떨어진 연조는 붉은 피를 흩뿌리며 장막 끝으로 미끄러져 내려오다 땅으로 떨어졌다.

 

“아니! 어떻게..!”

 

당황한 예청부들은 멍하니 보기만 할 뿐, 누구 하나 나서 손쓰지 못하고 있었다. 굳어진 얼굴의 유헌은 바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다행이 장막의 색이 검붉은 터라, 별 다른 문제는 없을 듯 보였지만, 수군수군 거리는 예청부들의 가벼운 혀가 그를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유헌은 말없이 헝겊을 들어 흉측하게 죽어있는 새를 들어 감쌌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예청부들이 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닦고, 장막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제가 가져다 버리겠습니다.”

 

유헌은 대답 없이 사내에게 죽은 새를 건넸다.

 

“다들 들어라. 흉조니 뭐니 이 일을 입에 담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날선 검 끝이 목을 겨누는 듯, 날카로운 유헌의 명에 다시 조용해진 연회장 위로 부쩍 짙어진 구름 하나가 슬며시 차오르고 있었다.

 

 

 

 

 

 

 

 

 

 

 

 

곧 있을 연회 준비에 앞서 차를 한잔 하고 싶다는 옥보는 주화전으로 향했다. 향이 좋은 차를 두고 마주 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 비슷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찻잔을 막 입에 대려는 순간 해단은 나지막히 하문하였다.

 

"전장에서 받았던 귀호. 네 것이 맞느냐.”

 

따각!

찻잔을 떠 바치던 접시가 흔들리는 연의 손끝을 따라 찻잔과 부딪혔다. 연은 가만히 손끝에 집중하며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넘치지 않게 담긴 초록빛 차는 부드러운 파동을 그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이 멈추면 쿵쿵거리며 두서없이 뛰는 심장도 멈출 것 같아 연은 한참동안 그대로 멈춰있었다.

 

“연아.”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재촉하여 묻는다 하기엔 지나치게 부드러운 해단의 음성이었지만, 그 목소리에 당기듯 찻잔이 바닥으로 미끄러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식지 않은 차가 치마폭을 적시고, 깨진 찻잔이 바닥에 나뒹굴어도 두 사람은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전하! 새로 차를 내오겠습니다.”

 

문 밖에 물러나있던 제상궁의 음성이 들려와도 해단은 들라 명하지 않았다.

 

“전하. 제상궁이옵니다. 잠깐 들어가서..”

 

“들지 말라!!!”

 

가까스로 터져나온 옥음은 찌를 듯 날카롭고 태울 듯 뜨거웠다. 열리다 다시 닫긴 나무문이 서로 부딪히며 낸 소리가 내실을 크게 울렸다. 연은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어디부터 말을 꺼내야 할 지 몰라 앙다문 입술이 허옇게 변해가는 줄도 모르고 해단을 바라보았다.

 

“옷이 젖어 감기에 걸리겠다.”

 

조금 전 일은 없는 듯, 근심어린 말투였다. 그제서 자신의 옷이 젖었다는 것을 안 연이었다. 허벅지 어느 부분에서 데인 듯 작열하는 통증이 느껴지는 것도 그제서 느껴지는 연이었다.

 

“데인 곳이 있는 지. 의감을 불러오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모르는 연과 달리 해단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진정 의감을 부르려는 듯 해단은 일어나 뒤돌아 섰다. 저도 모르게 따라 일어난 연은 해단의 팔을 잡았다. 손 아래 느껴지는 사내의 뜨거운 살갗은 매일 밤, 매만지 던 그것이 맞는 지 모를 정도로 낯설게 느껴졌다. 해단은 천천히 돌아 연을 다시 마주하였다.

 

“괜찮다. 연아. 시간이 필요한 답이면 기다리겠다.”

 

연은 해단이 참고 있음을 알았다. 당장이라도 따져 묻고 싶은 것을 참고, 연이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는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연은 날짜를 기약할 수 없기에 그대로 해단을 보낼 수 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끝을 본다 한 들, 해단에게 말할 수 있을 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무작정 뒤로 미를 수가 없었다.

 

“귀호를 착각하여 다른 것을 만들었습니다. 하여, 제 것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답에 해단의 손끝이 살짝 흔들렸다.

 

“그날 제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 것은...솔직하지 못한 것은...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되었다.”

 

해단은 연에게 잡혀있는 손을 빼내, 다시 연의 손을 잡았다. 연이 기억하는 그대로의 따스한 손길에 연의 마음이 알 수 없게 무너져 내렸다.

 

“그럴 수도 있겠다.”

 

부족한 설명과 달리 충분한 배려와 이해.

연은 지금 할 수 있는 답을 했다. 그러나 해단은 지금 들은 것 보다 더 깊은 답을 해주었다. 어쩐지 먹먹해지는 가슴에 연은 비틀거렸다. 해단은 손아래 전해지는 연의 떨림을 느끼며 가만히 연을 끌어안아 주었다.

 

“그래도 다음에는 이러하지 말거라. 워낙 못난 사내라 살피지 않고 무작정 너에게 상처를 낼까 두렵다.”

 

“잘못하였습니다.”

 

해단은 아이를 감싸듯 연의 등을 토닥였다.

 

“전하. 시각이 되어갑니다.”

 

헛기침 몇 번과 인기척에도 답이 없자 몸이 닳은 손내관의 음성은 재촉함을 감추지 않고 급하게 들려왔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발 물러선 해단은 아쉬운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회에 늦어도 괜찮으니, 의감에게 상처를 꼭 보이거라.”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진정 괜찮습니다.”

 

비로소 같은 의미의 웃음을 보이는 연을 두고 해단은 내실의 문을 열다 문득 생각난 듯 뒤를 돌았다. 해단의 뒷모습을 따라 움직이던 연의 시선과 허공에서 얽힌 그의 눈빛은 조금 전과 다르지 않았다. 무안한 신뢰와 믿음!

연은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것을 얻은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 헌데, 무엇을 만들었는지 물어도 되겠느냐.”

 

“범을 수자하였습니다.”

 

내실의 문밖으로 디디던 발이 허공에 그대로 멈췄다. 그러나 찰나의 정지는 없던 듯 무심히 멀어지는 옥보였다. 지켜보던 이는 모르나, 멈추었던 이는 아는 찰나의 균열.

연회를 앞둔 하늘로 또 다른 구름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며칠 전-

 

그날, 해단은 뺨을 맞은 듯 서있었다. 원망어린 투정을 부리는 홍비가 계속 말을 하고 있지만 그의 귓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말을 뱉어야 하나 수십, 수백 번 따져 보았지만 입술 사이로는 아무 말도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제서 뭔가 이상한 듯 느낀 홍비는 주절거리던 입을 다물고 가만히 왕을 올려다보았다.

 

“신첩이 무슨 실수를 하였습니까.”

 

홍비의 가슴은 심하게 두근거렸다. 옥국에서 왕후를 데려온다는 말에 절대 안된다고 처소에 홀로 앉아 눈물을 뿌리며 발악했지만, 그것은 그냥 답답한 속내를 털어내려는 것 뿐, 그 스스로 한번도 왕후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왕후가 되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왕후에 자리에 오른 다는 것은 끝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서대비가 처음부터 왕후의 자리는 주지 않겠다 하였으니, 만약 왕후에 올린다면 쳐내겠다는 뜻이거나, 서대비가 죽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 둘 다 홍비에겐 결코 좋은 일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에 홍비는 왕후 일을 말해주려 들른 왕에게도 슬쩍 수자얘기를 꺼내며 섭섭하다고 했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헌데, 왕의 반응이 이상했다. 마주 보고 있으나, 전혀 보지 않는 것처럼 아득한 검은 눈동자는 다른 곳에 있는 듯 아득하기만 했다.

 

“신첩은 다만, 전하께 귀호를 받으시면 서찰이라도 한번 보내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 섭섭한 마음이 지나치다면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하오나..”

 

말을 이어가던 홍비는 흠칫하며 말끝을 흐렸다.

설마! 알게 된 것일까? 아니, 그럴 리 가 없었다. 이미 세상에 없는 이가 말을 할리 없고, 서대비가 말을 했을 리는 더더욱 없는데...

혼란스러워 하는 홍비와 굳어져 말이 없는 해단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해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하. 신첩이 무슨 잘못을 하였습니까.”

 

떨리는 홍비의 음색이었다.

 

“홍비.”

 

무겁도록 가라앉은 옥음에 홍비의 등허리로 깊은 소름이 돋았다.

먼저 엎드려 잘못을 빌어야 하나! 끝까지 모른 척 아니라 해야 하나!

홍비의 망설임을 알리없는 해단은 뒷말을 빠르게 이어 붙여주지 않았다.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 두 개의 상반된 마음이 서로를 밀어내며 해단을 휘 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귀호는 네가 한 것이다.!?”

 

억양은 기이했다. 하문을 하는 듯하지만, 묻지 않는 것 같고 인정하는 듯하지만 아니라 하는 것 같고. 홍비의 속은 남몰래 타들어갔다.

 

“너는 거짓을 고하진 않는다. 이제와 그것을 네 것이라 거짓을 고할 만큼 대단한 셈 따위는 하지 않는다.”

 

뜬금없이 이어지는 말은 차갑고 단호했다. 홍비는 무엇에 이끌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귀호는 네가 한 것이다. 귀호는 네가 한 것이다. 그러면..그러면..같은 것이 두 개 였던 모양이다.”

 

“예?”

 

“하! 어찌 그 생각을 못하였지? 홍비 네가 한 것, 그리고 또 하나. 그렇게 두 개 였던 게다. 이리 간단한 답을. 하하하. 그렇지 아니하냐.”

 

홍비는 미간을 좁게 찡그렸다. 한 글자 한 글자, 글자 그대로를 놓고 보면 다 알 수 있는 말인데, 옥음을 통해 나오는 말들은 뜻을 이해하기는 커녕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말 뿐이었다. 오래도록 고민하던 문제의 답이라도 찾은 냥 웃고 있는 해단을 홍비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미처 알지 못했다. 허나 꽤 애썼겠지. 고맙다.”

 

해단은 홍비의 어깨를 한번 매만지고는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왕의 뒷모습을 보던 홍비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졌다.

 

“마마. 전하께서 마마의 정성을 알아주시나 봅니다.”

 

완벽하게 위장하라는 서대비의 지시에 삼일 동안 궁인조차 들이지 않고 되지도 않는 수자를 놓고 있던 홍비이니 궁인들은 홍비가 완성해 낸 귀호를 보고 대단하다 솜씨가 대단하다 여길 수밖에 없었다.

 

“고맙다고 하셨지요! 전하께서 고맙다고, 마마께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저렇게 따뜻한 음성은 처음 들어보았습니다.”

 

호들갑스럽게 달라붙는 궁인들의 음성에도 홍비는 왕이 사라진 쪽만 바라볼 뿐이었다. 가슴 부터인가, 아니 목덜미부터인가, 알 수 없게 뜨거워지던 것은 어느 사이에 코끝을 타고 지릿하게 올라오더니 눈동자 밑을 무겁게 억눌렀다. 조금씩, 조금씩, 더해가는 무게에 더는 버티지 못한 눈물이 홍비의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마마!”

 

홍비의 눈물을 본 궁인들이 소리쳤지만 홍비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흔들림 없이 서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마마.”

 

유곽에 여인으로 팔려오기 전에도 홍비는 유곽에 있었다. 여인이 아니라 잔심부름을 하는 계집종으로 여러 유곽을 전전하며, 홍비는 많이 보았다.

욕정에 가득한 눈을 한 사내가 여인을 어떻게 하는 지. 그 사내를 위해서 여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배운 것이 아니라, 눈을 뜨면 보고, 눈을 감으면 얇은 문 너머로 듣고. 홍비가 아는 남녀 사이는 그저 욕정을 채우고, 댓가를 치루는 것뿐이었다.

 

헌데, 오늘 자신을 찾은 왕은 어느 한 순간에도 욕정을 채우려는 눈빛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오랜 벗에게 하듯, 따뜻하게 어깨를 감싸쥐며 고맙다고 할 뿐이었다.

 

슬펐다. 더는 왕이 그녀를 품지 않을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너무 슬펐다.

그런데, 기뻤다. 왕이 욕정의 상대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이 기뻤다.

 

 

 

 

 

 

 

 

 

 


댓글 '2'

Junk

2011.05.19 22:31:51

아아, 불쌍한 여인네들... 역사 로맨스는 이런 점이 슬퍼요ㅜ_ㅜ

판당고

2011.05.21 23:14:10

컴백하셔서 기쁘네요 ^^

저는 이제까지 대비 좋게보다가 뒤통수맞아서 얼떨떨합니다. 간악하다고 생각했던 홍비도 안쓰러워지고. 에잇. 정크님 말대로 불쌍한 여인네들이예요. 덧붙여 무섭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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