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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소설] 리오우  

번호 : 70     /    작성일 : 2003-12-25 [07:36]

작성자 : Junk    



리오우(李歐)
다카무라 카오루/김소연 역


운송창고회사와 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내던 대학생 카즈아키는,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하는 클럽 뒷문에서 수수께끼의 청년과 마주치게 된다. 그 만남은 평범하고 나른하기만 하던 카즈아키의 인생을 순식간에 바꾸어놓게 되는데…….





내게 반했다고 말해.





이보다 더 강렬한 자기 PR이 있을 수 있으며,
이보다 더 강력한 큐피트의 마법이 달리 있을까.

이 이야기는 무려 10년에 걸친 '우정(조금은 연애감정?)'에 관한 이야기다.

우정이라기에는 강렬하고, 그렇다고 연애 감정이라기에는 어디까지나 플라토닉한, 그러나 그 만큼 질기게 주인공들의 가슴을 메우고 있는 어떤 감정에 관한 이야기.

그러나, 연애소설은 전혀 아닌.

이 소설은 성장 이야기다. 다만 그 성장의 과정이 다소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상권을 읽을 때 나는 주인공 카즈아키가 언제 리오우를 만날까를 내내 기다렸으며, 하권을 읽을 때는 두 사람이 언제 재회할까를 내내 기다렸다. 그리고 그 기다림들에 비해 강렬한 매력의 소유자인 리오우의 등장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짧아서, 사실 카즈아키가 단숨에 리오우에 반해버린 이유를 납득하기 힘들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납득해 버렸다. 바로 위의 한 마디 때문에.

내게 반했다고 말해.



사실 부들부들 떨면서 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내가 하드에서 쓰고 있는 물건 중 '마린(馬躪)'이라는 소설과 흡사하지 않나 걱정이 되어서였다. 남주가 여주를 만나 인생이 확 바뀌어 버린다는 설정이 특히나(이런 설정 무쟈게 좋아한다. 이왕 사랑하려면 인생 정돈 가뿐히 바꿔줘야지. 안 그런가?).

'여름의 소금'이라는 책을 읽다가 우연히 보게 된 이 소설의 광고문구가 어째 너무 찔리는 감이 있어서 그 때부터 내내 이 책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읽었다. 다행스럽게도 전혀 닮지 않았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 때부터 집중해서 읽었다. 하지만, 으음.

실은 그리 집중이 잘 되는 소설은 아니었다.

작가의 문체는 일본 작가 중에서는 드물게 긴 만연체다. 사실 로맨스 소설을 쓰는 한국 작가 중에 이렇게 긴 만연체를 많이 봤다. 이런 수식이 많은 긴 문체는 등장인물을 구구절절한 신파에 젖어들도록 만드는데 아주 효과적인 경향이 있다.

그런데 리오우는 예외였다.
굉장히 건조하고, 그러면서도 묘했다.

아직도 짧은 문장이 긴 문장보다 낫다, 헤밍웨이가 토마스 만보다 좋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 글을 읽으면서 만연체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지 않은가 되짚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길다란 만연체가, 주인공의 나른하고 답답한 상황을 연출하는데는 제격이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글을 잘 쓰는 작가일 경우에지만. 주어와 술어가 일치하지 않을 정도로 쓸 거면 차라리 초등학교 수준으로 짧은 문장이 낫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 끝간데 없는 만연체 소설의 또 하나의 주인공 리오우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카즈아키의 과거에 대한 징한 설명이 무려 40페이지가 넘어가도록 이어진 끝에서야 겨우 등장하는 리오우.

그리고 기다린 보람은 있었다.

단 1페이지.

단 1페이지로 리오우는 읽는 사람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고, 그리고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가 180페이지가 넘어서야 재등장한다(매우 비싼 몸이시다).



먼저 내게 반했다고 말해.
xiān shuō nǐ mí liàn wǒ ba.



이 얼마나 대단한 자신감인가.

물론 리오우는 남자이기는 하지만, 로맨스 소설에서도 이런 여주인공이 등장하면 얼마나 근사할까 하는 생각을, 읽는 중에 문득 했다. 특히나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여주들은 하나 같이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고 남주에 휘둘리며 궁상맞은지. 물론 자신감이 있는 여주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던지고 받아치는 말싸움에 능할 뿐, 이렇게 강렬한 카리스마와 한 계단 올라선 압도감으로 지배하는 여주는 없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좋아해서일까.

아무튼 이 순간의 만남으로 인하여,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던 대학생 카즈아키의 인생은 완전히 바뀐다. 나는 이런 설정을 굉장히 좋아하지만, 사적으로 '리오우'는 아주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것이 카즈아키라는 남자의 본질은 그리 크게 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리오우가 걸 수 있는 마법이 그 정도였던가에 대해서는 실망이 컸다.

게다가 하권 내내 리오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등장하고, 마지막 장면에서야 그 멋진 모습을 잠시 (그것도 중년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끝이 나기 때문에 리오우에게 잔뜩 반해버린 나는 완전히 바보 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즉,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작가를 원망했다. 이렇게 매력적인 인물을 창조하지 말던가, 창조했으면 제대로 보여주던가 하지. 대관절 어쩌자고 무기력한 카즈아키만 계속 나오고. 카즈아키가 결혼하든 말든 나는 관심 없단 말이다!

이런 이유로 소설 전반은 매우 지루하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부분부분 등장하는 리오우에 관한 에피소드가 매우 감각적이어서, 건조하고 다분히 늘어지는 다른 파트를 그 매력으로 덮어주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원래 이 소설은 '내 손에 권총을'이란 소설을 대폭 가필해 탄생한 소설이라 한다. 허나 증가한 에피소드가 과연 꼭 필요한 부분이었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마니아에게만 매력있을 부분(권총과 기계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과 등장인물의 과거 등으로 꾸역꾸역 채워진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 리오우가 별로 안 나와 엄청 슬펐던 한 여인네의 불평인 것이다.

여하튼 리오우만은 매력덩어리였다.

중간에 '리오우'를 하얀 얼굴이라는 의미에서 '바이미엔(白面)'이라고 부르는데, 바이미엔이라고 불리는 단어에는 '아편(白麵)'이라는 뜻을 가진 것도 있다. 작가가 의도하고 그렇게 쓴 것인지; 아마 의도한 거 같다. 정말로 리오우는 아편처럼 사람을 강하게 끌어들이고, 주인공 카즈아키가 그러했듯이 그 매력에 중독되어 버리는 캐릭터였으니까.

이 소설은 단점도 아주 많지만, 지루하기 십상인 소재에 구성에 문체였지만, 그럼에도 매력적인 캐릭터와 절대로 진부하지 않은 설정, 그리고 프로다운 배경묘사가 무척 돋보이는 글이었다. 그리고 주인공의 성장 이야기 이면에 숨어 있는 작가의 의도도. 가끔 최소한의 의도도 없이 되는 대로 쓴 듯한 글을 보는데, 거창한 주제의식은 아니더라도 의도는 갖춰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점에서 리오우는 프로인 척 하는 많은 '아마추어'의 글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게다가 그 역사적인 설정과 인물의 상황이 매끄럽게 용해시키는 솜씨는 대단했다. 대개 국소적인 감정묘사에 치중하는 여성 작가들은 이런 부분에 약하기 마련인데, 다카무라 카오루는 남성 작가도 힘들 상당한 스케일과 대담한 플롯을 구사한다.

결론은,
다카무라 카오루의 다른 소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는 것이지만.

한 가지 매력만 제대로 살려도 수많은 단점을 상쇄할 수 있다는 걸,
이 책을 읽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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