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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762
저자/김준경
출판사/청어람

작은 성, 침묵 속에 잠들어 있던 아내가 눈을 떴다.
그녀는 진정한 왕자를 선택할 수 있을까, 아니면 거친 가시덩굴로 뒤덮인 황폐한 성에서 다시 잠들어야만 하는 것일까.
"불행한 결혼과 남편에게 미움받는 아내의 이야기는 자주 사용되는 소재 중 하나다. 나 역시 이런 소재를 다룬 소설들을 보면서 여주인공의 괴로움에 함께 슬퍼했고, 마침내 행복해졌을 때 함께 기뻐했다. 내가 진부한 소재를 다시 한번 지루하게 반복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소재야말로 무감각에서부터 황홀한 기쁨과 카타르시스까지 느끼게 하지 않을까..." 작가 후기에 언급되는 말이다. 이런 변명 비스무리한 문장으로 리뷰를 시작하는 이유는 <잠자는 숲속의 아내> 역시 '정략결혼'을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
저자 말대로 '정략결혼'이란 소재는 너무 많이 울궈먹어 이젠 빼내먹을 건더기도 없을 지경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이 소재가 심심치않게 사용되어오고 있는 중이다. 지겹다, 지겹다 하면서도 이런 소재의 소설을 다시 집게 되는 건 습관 혹은 익숙한 소재에 길들어진 탓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그동안 보았던 정략결혼을 소재로한 소설들은 그게 다였었다. 어떤 식으로든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남편은 바람을 피든 감정적으로 거리감을 갖든 뭐든 아내를 방치하다가 갑자기 아내를 여자로 보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남편이 아내를 여자로 보기 시작하는 기점은 또 대부분 다른 남자의 등장 때문이다.
예전 할리퀸에서 이런 소재가 자주 사용되었다. 요즘 국내작에서도 이런 소재가 자주 사용되고 있다.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번역작은 남편이 감정을 먼저 느끼고 있다는 것, 국내작은 아내가 먼저 느끼고 있다는 것, 그 외 정형적 패턴은 대동소이하다. 이 글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려서부터 가족들로부터 감정적 육체적 학대를 받아왔던 아내, 세나는 제윤이란 남자와 강제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고 자폐증 혹은 정신병을 갖고 있다고 오인 받은 채 5년간 방치된다. 제윤은 회사의 경영권 방어차원에 반드시 필요했던 세나 아버지의 협박에 못이겨 그녀와 결혼을 했으나 덜떨어진 아내를 숨겨둔 채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정부인 민혜를 통해 세나를 괴롭히기도 서슴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세나가 머물고 있던 집에 불이나고 재건축을 위해 고용했던 서훈을 통해 세나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이를 눈치 챈 제윤은 세나가 그동안 자신을 속였다는 데에 분노하고 동시에 서훈에게만 해맑게 웃는 그녀에게 격렬한 질투를 보이게 되는데...
뻔한 스토리에 뻔한 결말. 위 줄거리를 읽고 대략 뒤는 어떻게 되겠네 싶으셨다면 그게 다란 말씀.
사실 꽤 재미있게 읽었다. 아는 분들은 아시다시피 난 전형적인 글을 좋아하는 편이라 이런 식의 스토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책을 재미있게 읽었고 그래서 리뷰를 쓰려고 여기 앉았는데, 막상 이야기를 풀다보니-아니, 글의 내용을 머리 속에 떠올리다보니 몇 가지 흠집이 보이기 시작한다.
비문이나 문체나 뭐 그런 게 걸린 건 아니다. 눈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문장이었으니까. 되돌아 생각해보니 재미는 있음에도 뭔가가 빠졌다고 느끼게 된 이유는 "왜?"에 대한 해답이 부족했기 때문인듯 하다.
플롯을 짜다보면 앞부분에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몇 가지 복선을 깔아두게 된다. 힌트를 던져주며 독자들이 계속 따라오기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작가의 의도대로 독자는 도대체 왜 그렇게 되는 건지 궁금해 계속 글을 읽어나간다. 그러다 뒷부분에 가서 그 왜가 왜 일어난 건지 비로소 알게 되면 문제 하나를 풀어낸 것처럼 속시원하게 책을 덮는다. 그런데 이 글은 질문은 던져두었으나 해답이 없었다.
1.제윤은 갑자기 왜 세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
1.세나는 왜 그렇게까지 감정을 숨기고 인형처럼 살 수밖에 없었나?
1.세나의 아버지 민학은 왜 그렇게 세나를 미워한 건가?
1.둘을 괴롭히기 위해 민학이 강제로 제윤과 세나를 결혼시켰다는데 세나는 그렇다고 쳐도 민학은 제윤을 왜 미워하는 것인가?
1.처음 세나에게 관심을 보였던 서훈은 갑자기 왜 오빠니 어쩌니로 돌아서고 말았나?
1.세나의 엄마는 중요한 키워드임에도 왜 대충 넘어가고 말았나?
1.잊고 있던 과거에 대한 세나의 기억은 왜 떠오르다 말았나?
1.세나의 오빠 세준은 왜 그녀를 괴롭혔는가?
기타등등 기타등등~
위의 질문에 대해 물론 자세하진 않더라도 적당히 해답을 던져주고 있다. 읽다보면 의례 그러려니 하면서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막상 글에서 빠져나온 후 되짚어보면 확실히 메워지지 않은 구멍들이 눈에 보이고 만다.
'정형적'은 적당히 버무려 글로 내놓기 좋다. 작가가 다 해결해주지 않아도, 개연성이 없어도 독자는 알아서 판단하니까 말이다. 전형적인 소재에 더불어 전형적인 진행 방식, 그리고 전형적인 결말은 얼핏 장르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왜"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로맨스란 다 그런 거 아니냐"란 간단한 대답을 돌려줄 수 있다. 하지만 제발 강조하건데 로맨스란 다 그게 그건 아니다.
로맨스도 하나의 글이다. 작품은 어떤 형식을 띄던, 어떤 장르에 해당하든 치밀한 유기적 플롯 하에 진행되어야 한다. A란 일이 생성되었으면 '이런 설정 잘 알잖아?'로 쉽게 넘어가지 말고 그 연유와 필연적 원인을 규명해주어야 하며, 동시에 B로 진행시켜야한다. 반면에 만일 A를 극적 반전으로 사용할 거면 사건을 B-C-...등으로 진행시킨 다음 Z 부분에 와서 A에 대한 명쾌한 해석을 반드시 매듭지어줘야 한다. 모든 사건을 의례 있을 법한, 적당한 구색 짜맞추기로 나가지 말고 말이다.
또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할 때, 행동의 이유를 반드시 규명해줘야하고 개연성을 제시해야한다. 예를 들어 "제윤은 갑자기 왜 세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란 질문에 있어서, 제윤의 변화에 대해 독자를 설득시켜 줘야한다는 거다. 그렇지 않고 그저 5년간 거의 방치해뒀던 여자가 갑자기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 같아서 시선이 끌린다? 게다가 초반에서는 인형보다 못한 취급에 더해 엄청난 증오심을 쏟아부었으면서도 갑자기 육체적으로 갖고 싶어져 버렸다? 초반에서는 계속 미워한다, 증오한다 중얼거리다가 뒷부분으로 가서 알고보니 처음부터 그녀에게 끌리고 있었다란 문장은 또 뭔가?
그래, 여태 나왔던 로맨스 독자들이라면 이런 걸 일일이 알려주지 않아도 다 알아서 판단하고 해석하고 감정 이입을 한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장르를 벗어나 일반 독자들에게 이 글을 보여줬을 때 제대로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 글쎄...과히 만만치 않을 터이다.
글 전체의 개연성, 당위성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주인공의 변화, 그에 따른 장면 설정, 극적 재미를 더해주는 흥미로운 반전, 그리고 해피엔딩. 이런 것들이 독자들에게 만족을 주지만, 더해서 각각의 사건과 행동 및 감정 변화에 개연성을 충분히 실어준다면 작품은 만족 그 이상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전형적인 소재를 사용한다는 게 나쁘진 않다. 전형을 비틀려 노력하는 글도 재미있지만, 전형 그 자체를 굉장히 산뜻하게 풀어나가는 글도 재미있다. 그러나 '전형적'으로 흘러가려면 반드시 명심해야할 일이 있다. 주인공들의 감정 변화에 대해 개연성을 제시해야하며, 이미 흔하디 흔한 설정이라 해도 작가 개인은 처음부터 치밀한 플롯을 짜서 진행시켜야하고, 단지 주인공을 돋보이기 위한-그럴싸한 장면만이 아닌 반드시 글의 진행상 마땅하다 싶은 장면으로 작품을 구성해야한다는 거다. <잠자는 숲속의 아내>는 재미있었음에도 그런 점들에서 매우 미흡했다.
리뷰 앞부분에 제시한 후기를 다시 한번 살펴보면 작가는 "불행한 결혼과 남편에게 미움받는 아내의 이야기는 자주 사용되는 소재 중 하나다" 라고 했다. 이는 아마도 소재 자체의 흔함에 대한 변명인듯 하다(사실 후기라는 것 자체가 대부분 변명을 주어섬기기 좋은 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후기를 쓰길 거부하는 이들도 있고). 솔직히 장르에 몸담고 있는 이상 이런 흔한 소재에 대한 도전 의식은 작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자주 사용되는 소재'에 대한 독자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면죄부를 청할 게 아니라, 이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풀어나가느냐에 작가가 더 관심을 기울었으면 좋았으련만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정크 읽지는 않았지만 읽어보고 싶습니다. 왜냐면, 일단 제목에 후한 점수를 주고 있기 때문이죠. 작가의 센스는 가장 먼저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 이런 말을 할 처지는 못되오나; 2003-12-22 X
정크 그리고 로맨스 독자와 일반 독자의 감정이입도와 설득되는 정도는 틀리다는 것, 이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동감하는 바입니다. 로맨스의 정형성은 갖추되, 일반 독자들이 읽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심리전개, 개연성을 갖춘 로맨스를 보여주기 위해 작가들 스스로가 다 같이 노력해야겠죠. 굉장히 어려운 일인 것만은 사실입니다만. 2003-12-22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