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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내 도움이 필요하진 않을까, 생각했지. 하지만 잘 적응했더군. 오히려 내가 가서 방해를 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던데. 홍유비랑은 언제 만난 적이 있던 건가.”
심상한 말투에 크리스는 예석의 얼굴을 흘깃 바라보았다. 무슨 의미로 건네는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화가 난 건가? 싶었지만 예석은 얼핏 미소라고 부를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 당신이 회사에 나오는 경우도 거의 없었으니, 그 말이 맞을테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뒷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리는 말투였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어딘가 딱딱해 보이는 예석은 어쩐 일인지 모르지만 화가 난 듯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웃고 있었다. 그래서 어쩐지 그녀는 그가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그에게 예석의 미소란 낯선 것이었다. 그런데 무서운 한편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예석은 아름다웠다. 눈부시도록.
“식사를 제대로 못했겠군.”
“아, 네. 괜찮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금방이라도 배에서는 꼬르륵 꼬르륵 소리가 날 것 같았다. 헤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 짓고 있었다. 배가 고픈 건 아무래도 좋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예석의 옆에 앉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좋았다. 저녁 내내, 밤늦게까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이렇게 앉아만 있어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식사를 해야겠군.”
피식. 예석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그녀도 덩달아 웃음이 난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녀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명랑하게 대답한다.
“정말 괜찮은데요.”
“괜찮다는 말, 질리지도 않아?”
금세라도 예석이 내려 식당으로 갈까 그녀는 이제 조바심이 난다. 덕분에 그녀는 외투를 식당 안에 놓고 왔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그냥 이렇게 조금만 같이 더 있어요. 그럼 정말 좋을 것 같은데. 그냥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기분이 든다는 걸 그는 모르겠지.
“아까 한 약속, 이제라도 지켜볼까?”
“네?”
“저녁 먹으러 가지.”
그리고는 이내 예석은 시동을 걸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부우웅, 시동 켜지는 소리처럼 그녀의 심장도 두두둥, 시동을 거는 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할로할로가 뭐지?”
“네? 아, 할로할로. 필리핀음식이에요. 음, 이를테면 팥빙수 같은 거요. 얼음 위에 여러 가지 젤리랑 아이스크림을 얹어서 비벼먹어요. 우베아이스크림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거예요. 여기엔 우베아이스크림 파는 데가 없어서 아쉬웠어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말을 하는 걸 보니 정말 좋아하는가보다고 예석은 저도 몰래 단정지어 생각하고 말았다. 할로할로까진 아니어도 팥빙수 정도는 사줄 수 있었다. 물론 식사를 한 다음이다. 결혼을 하기 전보다 더 마른 듯한 크리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과는 달리 불퉁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날이 차. 팥빙수는 다음에 먹지.”
“네.”
할로할로든 팥빙수든 지금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실은 배고픔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예석 앞에서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할 것 같았다. 무언가를 우적우적 먹어치우는 모습 같은 것,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여기 연포탕이 괜찮아.”
예석이 그녀를 데려간 곳은 낙지전문점이었다. 조용하고 깔끔한 분위기의 식당이었다. 홀이 아닌 방으로 되어 있어서 개인의 사생활도 보호가 되는 분위기였다. 예석은 연포탕과 낙지구이를 시켰다. 막상 둘이 마주 대하고 있자니 예석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기분에서는 사람들 속에 크리스가 섞여 있는 게 싫었다. 스스로를 언제나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사는 예석이었는데 아까의 감정만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크리스가 만인 앞에 있는 게 싫었다. 왜? 부끄러워서? 아니다. 그건 분명히 아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꾸민 모습이긴 했지만 크리스는 처음부터 나쁘지 않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머루알처럼 까만 눈동자에 고운 진흙빛의 피부는 매끄럽고 고왔다. 더구나 말랐음에도 몸의 비율이 괜찮아 그녀를 제대로 보았던 순간에는 연예인을 시켜도 좋겠군, 하는 생각을 3초 정도 했더랬다. 가만히 앉아 자신의 감정을 분석하던 예석은 결국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뭐야. 양예석, 너 크리스가 여자로 보였던 거야?’
설마. 그럴 리가. 그는 불현듯 깨달은 자신의 감정이 어이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예쁜 건 사실이지만 여자라니. 이제 몇 달 후면 헤어져 남이 될 사람인데.
“들지.”
그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목소리는 제대로 나와 주었다. 차갑고 무뚝뚝한 자신의 목소리 그대로였다. 크리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의 손이 천천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예석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처럼 조급한 느낌에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었다. 그 순간까지는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은 일이었는데 뭔가 홀린 듯 그랬다.
“3개월 뒤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지금 봉사활동을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일정 시간 이상 봉사를 해주면 숙식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뭐?”
예상지 못했던 크리스의 말에 예석은 둔기로 머리를 두드려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지금 이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사라는. 예린은 친하게 지내던 게 아니었던가. 더구나 미리 치밀하게 생각이라도 해두었던 것처럼 망설임 없는 대답에 더 기분이 상해버렸다.
“잘 하면 아르바이트 시간까지 낼 수 있으니 걱정 없어요.”
방긋, 크리스는 미소까지 지었다. 스스로를 책임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녀는 잊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우고 얹혀살 듯 살았던 시간들이 그녀에게는 마음의 상처였고 지울 수 없는 후회였다. 자기 스스로 당당하게 일어설 수 있다면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청소든 뭐든.
“당신은 내가 이혼하면 빈 몸으로 내쫓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군. 교회에 몸을 의탁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마. 크리스, 당신은 양예석의 부인이야.”
고아도 아니고, 교회의 도움이 아니면 갈 데가 한 군데도 없는 사람처럼 말하는 크리스에게 그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차라리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말이면 그는 화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는 눈앞의 그를 두고도 그의 심정이 어떨지는 조금도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걸 그는 깨달은 것이다. 그냥 남이었다, 그녀에게는.
“위자료도 안 받을 생각인 건가?”
물음이 아니라 확신이 담긴 말투였다.
“그건 받을 수 없습니다.”
그가 무심히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은 척 꺼낸 말에 크리스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미 너무 많은 폐를 끼쳤는데 마지막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미 혼전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지 않았던가. 그 계약서에는 위자료를 요청하지 않겠다는 조항도 있었던 걸 그녀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모으고 있는 돈에다가 교회에서 몇 달만 더 버틴다면 자그마한 방을 얻을 수 있는 돈이 모여질 거였다. 그녀 자신의 힘으로 해나갈 수 있는데, 예석에게 위자료까지 받는다면 그건 그녀 스스로 너무 비참한 일이 될 거였다. 그녀는 마음에 가득한 수많은 생각들을 말로 할 수 없어 그저 고개를 숙였다.
그 후로는 거의 침묵 상태였다. 예석은 연포탕을 뜨는 둥 마는 둥 했고, 크리스는 그런 예석을 바라볼 수 없어 묵묵히 식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을 먹었고 결국 집에 가서는 소화제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가지.”
팟. 물방울이 한 순간에 터지듯 환상은 끝났다. 차가워진 예석의 얼굴을 보고서 크리스는 그 걸 알았다.
이상하다. 어차피 예석이 차가운 남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칠 듯 뛰는 심장이 통증을 호소했다. 아파, 아파, 그렇게 소리치는 심장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예석의 말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은 이대로 땅으로 꺼져버리고 싶은 그녀였다.
양예석 앞에선 항상 동정해 달라고 두 손 내미는 거지가 되는 기분이 드는 그녀였다. 단 한 번만이라도 그 기분에서 벗어난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그녀였다. 왜 난 항상 당신 앞에선 헐벗은 거지가 되어버리는 기분일까, 슬픈 그녀였다.
-만인의 연인, 양예석! 결혼한 지 이미 3년째, 비밀결혼의 배경에 있는 그녀는?
-비공개로 치러졌던 그들의 결혼식 사진 단독입수!
-비밀결혼에 숨겨진 한 남자의 억울한 사연?
-숨겨진 양예석 사장의 부인은 외국인! 흑발에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 직찍 단독공개!
-갈색 피부의 매력녀, 차가운 양예석을 사로잡은 매력은? 단독 취재!
-홍유비의 새로운 그녀는 누구! 홍유비의 라이벌은 사장님????!!!
“어떻게 할까요?”
예상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순간엔 이런 걸 원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 때 그 순간, 홍유비에게 웃어주는 크리스를 보며 느꼈던 독점욕은 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었다. 뭐랄까. 뜨겁게 달궈진 사막에 바람이 부는 듯한 기분, 그런 거였다.
“사진 당장 내리라고 해. ”
박대리가 프린트 해 온 사진을 한 손으로 구기고는 그리고도 성이 차지 않은 듯 예석은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자신이 벌인 일이었음에도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거였다. 왜 그 순간 앞뒤 구분 없이 행동해 버린 건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데일리스포츠, 한성호. 뉴데일리스포츠, 강형균. 그는 사진이 실린 신문사와 기자 이름을 씹듯이 되뇌었다. 그와 크리스의 사진이 실린 것도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거기에 홍유비란 이름까지 따라붙은 게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상했다. 다시는 그 식당을 가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보안을 부탁했는데도 이 정도라면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였다. 오히려 마음먹고 내보일 생각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 정도가 되냔 말이다.
“크리스한테 경호원 붙여.”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책상 위에 던져져 있는 사진들을 보며 툭 던지듯 한 마디 내 뱉는 예린이었다. 그러면서도 예쁘게 잘 나왔네,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태연하다.
“별 일 없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유비무환이지. 안 그래? 홍유비 팬 중에 과격한 애들도 있으니까.”
“너 때문이야.”
그의 뜬금없는 비난에 예린이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 예린의 눈빛이 대답했다. 하지만 예린의 붉은 입술은 다른 말을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생각해.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해?”
“아니.”
“인정은 빨라서 좋네. 어젠 바보 같은 행동을 했어. 홍유비가 불안했겠지만, 그 옆에 나도 있고 사라도 있었잖아.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는데 괜히 기자들한테 좋은 일 시켰잖아.”
“알아.”
“천하의 양예석이 머저리 같은 짓을 한 건 알고 있구나. 너 때문에 크리스는 뭐니. 물론 네가 크리스를 구해줬던 건 사실이지만, 이제 그 은혜는 안하니만 못한 게 되어버렸어. 비공개로 했었던 건 다 이유가 있던 거 아니었어? 그럼 그렇게 멍청하게 말해버리는 일 따위 하지 말았어야지.”
비웃는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예석의 얼굴은 불만으로 일그러졌다. 가끔은 저렇게 속을 뒤집는 말을 하는 사람인 걸 알면서도 그랬다. 아니 평소대로라면 그에 맞춰 반박을 하거나 퉁박을 줬겠지만 어제 실수를 한 게 그였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어서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이.
“그래.”
그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건 그렇고 비비드 일본 컴백 날짜를 언제로 할까?”
“뭐?”
“내가 뭐 한가하게 크리스 때문에 너 찾아온 줄 알았어?”
“그런 컴백 날짜야 네가 알아서 정하는 거지. 니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속을 줄 알고. 벌써 홍보 다 하고 티저까지 다 뿌렸으면서 떠보지 마. 그나저나 비비드 말고 키라들은 어때. 저번 주에 생음에서 몇 위했어?”
생음은 생방송음악채널의 줄임말이다. 조금 촌스러운 이름이지만 요새 대세를 알 수 있는, 탑에 드는 음악프로그램이었다. 생음에 나가지 못하면 요새 아이돌 축에는 낄 수도 없었다. 사업 이야기를 하는 예석의 눈은 크리스 이야기를 할 때와는 다르게 차갑고 냉정하다.
“1위 아니면 다 똑같지 뭐. 반응은 나쁘지 않았는데 탑은 아니었어.”
흐음. 예석은 엷은 한숨을 흘렸다. 아직 나온지 얼마 안 됐지만 느긋하게 생각할 수도 없다. 첫인상에 따라서 그 연예인, 혹은 그 팀의 연예계 행로가 급격히 달라지는 것이다. 느긋하게 여유를 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우선 연예계에 얼굴도장을 찍는 게 중요하다고 그는 판단했다. 일단 지나가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까지도 키라키라가 누군지는 몰라도 그 이름이라도 그럼 알지, 이렇게 나오게 만들어야 했다.
“매니저팀, 코디팀, 홍보기획팀 다 소집해.”
“지금?”
놀란 예린의 얼굴에 예석은 흘깃 손목을 확인한다. 오전 9시 25분. 하루를 막 시작한 사람들이 딱 정신없을 시간이었다. 잽싸게 처리하고 다른 일을 하려던 예석은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해결할 수 있는 건 모두 해결한 뒤에 크리스와 자신의 일을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11시 정각.”
“알았어.”
“그만 나가 봐.”
나가겠다는 예린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예석은 검은색 회전의자에 앉은 채 등을 돌렸다. 생각이 필요했다. 대책도 필요했고.
신경 쓰지 않을 예정이었다. 지금껏 그대 왔던 대로 무시해 줄 참이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면 제 소원대로 잘 가라고 손 흔들어줄 생각이었는데. 예석은 책상 위에 구긴 채 버려두었던 기사용지로 손을 뻗었다. 잘 찍힌 사진은 아니었다. 몰래 훔쳐 찍은 터라 제대로 된 각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잘 나온 사진이었다. 처음 상처 입은 채 환자복을 입고 있던 때의 그녀를 생각하면 이건 일취월장, 괄목상대였다. 어떻게 구했는지 그와 그녀의 썰렁했던 결혼식을 멀리서 잡은 사진마저 올라와 있었다.
무언가 변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릿결을 스치고 간 그 느낌처럼. 마음 어딘가가 간질간질 거렸다.
“나왔다.”
“어디, 어디!”
“저기다, 저기.”
저기,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우르르 그녀 쪽으로 몰려드는 모습을 보면서도 크리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크리스는 자신을 밀치듯 덤벼드는 사람에 치여 넘어질 듯한 몸의 중심을 잡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예석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당분간 봉사활동이랑 아르바이트는 쉬지.’ 예석의 말에 그러마 대답하지 않은 게 참 딱한 노릇이었다. 그 때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 말의 의미가 다 파악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로서는 이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일이었다. 물론 그녀는 예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다. 양예석이라고 인터넷에만 쳐도 뜨르르 나오는 기사들을 몇 번이고 읽어봤던 것이다. 처음엔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많았지만 이제는 알아볼 수 있는 글자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제법 거의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사라가 전화로 인터넷에 자신의 기사가 났다고 했지만 그녀는 그걸 농담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였다.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자신이 대체 인터넷 기사 같은 데 뜰 일이 뭐가 있겠어, 하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법적으로 예석의 부인이라고 해도 그건 진실이 아니었다.
“크리스씨, 양예석씨의 부인이 맞으십니까? 왜 그 동안 본인의 존재를 베일 속에 감춰두신 거죠?”
“양예석씨는 그 동안 결혼사실을 비공개로 두었는데, 그 이유는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혹시 이 결혼에 다른 사연이나 그런 게 있는 겁니까?”
“홍유비씨와의 스캔들은 사실입니까?”
“홍유비씨와는 어떻게 만나게 된 사입니까.”
“필리핀에서 처음 만났다는 게 사실입니까? 사실은 국제결혼으로 팔려오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실을 밝혀주십시오.”
갑작스러운 기자들의 등장에 놀란 크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기자들 속에 무방비 상태로 놓이게 되었다. 비공개? 그녀가 제대로 이해하는 말일까. 이제 3년 째였지만 그녀는 어려운 한자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본인의 존재, 는 또 무슨 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대한 곤란함과 함께 모르는 사람들 속에 둘러싸인 두려움에 그녀는 머리가 빙빙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할까. 지금 저 사람한테 존재가 뭐예요, 물어보면 안 되는 상황인 거겠지. 다른 사연, 국제결혼. 그녀는 머릿속에 두 단어를 꼭꼭 되새겼다. 집에 가서 아무래도 검색을 해보야할 것 같았다. 그래야 다음에 혹시라도 누군가 물어보면 당황하지 않지.
“난 그 사람 부…….”
그녀가 얼결에 진실을 이야기할 뻔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그녀와 기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섰다. 그 누군가가 그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저 사람들 말에 대답할 필요 없습니다. 자, 다들 물러서세요. 정식절차를 밟지 않은 인터뷰는 없습니다. 자 다들 물러서세요.”
아. 윤실장이었다. 이 사람이라면 그녀도 알고 있었다. 몇 번쯤 얼굴을 봐서 그나마 안면이 익은 사람이었다. 아, 예석이 사람을 보내준 걸까. 윤실장은 혼자가 아니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 서넛이 그녀의 주위를 에워쌌다. 하지만 기자들도 전혀 포기하지 않는 눈치였다.크리스는 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경호원들이 그녀의 팔을 잡아 이끄는 대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누가 이 상황을 좀 설명해 준다면 정말 고마울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한국의 연예계, 아니 연예계라고는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 지금의 상황이 무섭고 두렵기만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윤실장이 안내하는 차를 타고 가는 내내 그녀는 어리둥절한 채였다. 차에 타고 나서야, 아니 정확히는 옆에 있던 경호원이 자신의 윗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준 걸 깨닫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의 블라우스 어깨부분이 터져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고맙습니다.”
그녀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 인사를 챙겼다. 문득 서러워졌다. 왜 자신은 이렇게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상황에 자꾸 처해지는지 모르겠다. 처음 예석을 만났던 그 때도 성식에게 무자비하게 얻어맞은 후였다. 그때만큼이나 왠지 비참한 느낌이 들었다. 예석에 비해 자꾸만 하찮은 사람이 되는 듯한 기분에 괴로웠다. 이래서 떠나고 싶었던 거였다. 차라리 한국을 떠난다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눈앞에서 그 눈부심을 보지 않는다면, 그 눈부심과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하지 않을 수 있다면. 자꾸만 예석 앞에서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이 밉고 슬펐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
고맙습니다, 란 말을 하면 그대로 울먹이게 될 것 같아 크리스는 그저 가볍게 목례를 하며 차에서 내렸다. 울컥, 하고 서러움이 폭발해 그녀의 검은 눈망울에 눈물이 차올랐다. 겨우 울음을 참아가며 그녀는 윤실장의 뒤를 따랐다. 모든 상황이 자신이 저지른 일 같아 속상했다. 이러려고 어제 예석의 초대를 받아들인 게 아니었다.
달칵. 윤실장의 손에 의해 문이 열렸다. 윤실장이 그녀에게 들어가란 손짓을 했다. 아.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예석의 회사라는 걸 깨달았다. 얼결에 쫓아와서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였다. 비서실의 박대리며 유신이 자신을 쳐다보는 걸 깨닫지도 못한 채 그녀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서 지금 어쩐단 말이야? 그걸 말이라고 해. 일이야, 일. 그렇게 개인감정으로 휘둘릴 거면 당장 그만두라고 해. 뭐? 넌 그걸 그대로 듣고 있었어? 잘 한다. 그런 말이나 듣고 있게. 당장 촬영장으로 원위치 못 시키면 너부터 해고야, 알겠어?”
언성을 높이진 않았지만 날카롭고 차가운 말투에 예석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하필 그 타이밍에 들어선 크리스는 자신이 왔다는 걸 알려야 하는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핑계는 거기까지. 원위치 시켜!”
탁. 예석의 화가 그대로 담긴 전화기가 자신의 원위치로 돌아갔다. 지금이야. 나 왔어요, 라고 말해. 얼른. 이대로 있으면 훔쳐보기나 하는 사람이 되는 거야. 아무리 뇌에서 그렇게 신호를 보내도 그녀의 입술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왔군. 앉지.”
전화기를 박살낼 듯 던져버렸던 예석이 문앞의 그녀를 눈치챘다. 그리고는 방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제법 누그러진 목소리로 앉을 것을 권했다. 아직 눈매가 매섭게 번쩍이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적어도 그녀에게 화가 난 눈치는 아니었다.
‘어떡해. 다리가 움직이지가 않아.’
그런데 그녀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기자들이 찾아와 자신을 괴롭힌 일 때문에 자신을 책망하려는 걸까. 그녀는 조금 무서워졌다. 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변명이라고 해야할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던 차에서는 떠오르지 않던 생각들이 퐁퐁 솟아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내색이라도 하듯 복잡한 크리스의 얼굴을 보다가 내선번호를 누른 예석은 예신에게 커피 두 잔을 부탁했다. 자신이나 크리스에게 카페인이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문 앞에서 나누기엔 조금 부적절한 얘기인 듯 한데.”
“네, 네.”
검은 가죽소파에 앉아 손잡이를 톡톡, 두드리는 예석의 모습을 보고서야 크리스는 겨우 발걸음을 떼어 예석의 건너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병원은 안 가도 되는 거야?”
병원? 뜬금없는 말에 크리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머리가 조금 어지럽긴 했지만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의 대답에 예석이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어깨 부분을 톡톡, 건드렸다. 예석의 시선을 따라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어깨로 향했다. 아. 블라우스의 어깨부분이 뜯어져 자신의 살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당황한 크리스가 서둘러 블라우스를 추슬러 보았지만 이미 찢어진 블라우스는 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들어오기 전 윤실장에게 겉옷을 벗어준 걸 후회해봤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드러난 어깨를 감싸안았다.
“괜찮습니다.”
예석는 왼쪽 눈썹이 순간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무심했던 표정이 순간 냉담하게 변했다.
“그 괜찮다는 말은 정말 지긋지긋해.”
“정말입니다.”
진짜 나는 괜찮아요.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정말 괜찮아요. 이런 일 정도는 아무렇지 않아요.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지나가버릴거예요. 크리스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래왔듯.
“그래, 좋을대로.”
그녀는 그 좋을대로, 하는 말에 갑자기 서운함이 밀려들어 스스로에게 어이없음을 느낀다. 대체 어떤 반응을 기대한 거야? 스스로 물어보아도 대답은 없다. 톡톡, 자신의 이마라도 치고 싶은 마음을 참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도 생각해 보니, 지난 2년 동안 보다 요 며칠 새 예석을 더 자주 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과연 좋은 일일까.
“두 가지 방법이 있어.”
아. 그 순간 지금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 여기가 아니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빵집이어야한다는 걸 깨달았다. 데구르르 눈동자를 굴리던 그녀는 예석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그저 맹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아, 이걸 어떡해. 지금이라도 전화를 해줘야 할텐데.’
그녀는 지금 예석을 앞에 두고 처음으로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