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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스포츠센터를 벗어나는 순간 화창한 5월의 하늘이 한 눈에 들어왔다. 평일 대낮에 야구장 밖을 한가하게 어슬렁거리고 있으려니 수업에 땡땡이 치고 나온 학생처럼 괜히 마음 한 구석이 불안했다.
“후아, 날씨 좋다.”
애매한 기분을 토해내기 위해 선우는 하늘을 향해 긴 한숨을 내뱉었다. 상철이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나른한 기지개를 켰다.
“이런 날이 며칠 없긴 하지. 요즘엔 제대로 된 봄도 없이 하루 춥다 하루 덥다 하다가 여름 되니까. 좋긴 좋네.”
간만의 해바라기가 좋기는 한지 상철의 얼굴에 소풍 나온 어린 아이처럼 천진한 미소가 걸렸다. 지금 머리통으로 쏟아지는 이 따스한 봄 햇살이 선우에게는 여기서 지금 뭐하고 있느냐는 질책처럼 느껴졌다.
“형, 진짜 웃기는 게 뭔지 알아?”
“뭔데?”
“이렇게 화창한 날에 야구 안 하고 쉬고 있으니까, 되게 죄짓는 기분이야.”
상철이 쓴웃음을 지으며 다독거리듯 선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야, 그거 일중독이야. 선수 생활 하는 동안에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휴식 기회인데 뭐 하러 죄책감을 느끼고 그러냐. 그냥 맘 편하게 즐겨.”
피하지 못 할 바에야 즐겨라, 말이 쉽지. 기한이 정해져 있는 휴식이라면 그도 얼마든지 유유자적해줄 수 있다. 이 좋은 날에 상철의 기분까지 가라앉게 만들긴 싫어서 선우는 코웃음 한 번으로 상념을 털어버렸다.
“날씨고 뭐고 배고파 죽겠다. 형, 빨리 가자.”
점심은 으레 상철과 함께 밖에서 사먹었다. 혼자 지내면서 가장 번거로운 일이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다. 사먹는 음식에 질리고 서툰 솜씨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가장 그리운 것은 엄마가 아니라 구단 요리사의 손맛이었다. 열 가지가 넘는 밑반찬은 기본이고, 낙지볶음, 찜닭, 갈비구이 등등 매일 바뀌어 제공되는 메인 메뉴는 식당에서 사먹는 맛과는 감히 비교불가였다. 야구할 때는 주말에 노는 회사원들이 그렇게 부럽더니 평일에도 놀 수 있는 백수 신세가 되니 야구장에서 훈련했던 시간들이 왜 그리 충만하게 느껴지는지. 이래서 사람은 갖지 못 하는 것을 꿈꾸며 사는 동물이라 그러는 모양이다.
“이번 주말에 동우 형 대구 내려온대, 형수님이랑.”
문득 말을 꺼내자 상철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사장님 결혼기념일마다 여기 오시잖아.”
초등학교 동창이던 짝사랑을 이곳에서 다시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두 사람에게 대구는 이른 바 오작교 다리인 셈이다. 명절이나 제사 때를 제외하고는 얼굴 보기도 힘들었던 무뚝뚝하던 사촌형의 모습을 떠올리며 선우가 쿡 웃음을 터뜨렸다.
“참, 기막혀서. 동우 형이 이렇게 말랑말랑한 로맨티시스트로 변할 줄 누가 알았어? 지금도 형수님만 보면 눈이 하트로 변하니, 사람은 진짜 모르는 거야.”
“보기 좋잖아.”
상철은 농담으로라도 동우에 대해서 가볍게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일개 트레이너에서 대구 지점을 총괄하는 본부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상철에게 있어 동우는 단순히 사장이 아니라 따라야할 인생의 모토이고 은인인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나 이번 주말에 형네 집에서 신세 좀 지자.”
두 사람만의 연례행사에 불청객으로 끼고 싶지는 않다.
“왜. 비켜주라고 하셔?”
“그걸 말로 해야 아나. 공짜로 집 빌려 쓰는 주제에 그 정도 센스는 자발적으로 발휘해야지.”
주거니 받거니 얘기를 나누며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상철이 갑자기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우 코치 저기 있다.”
길 건너 버스정류장에서 진이 버스가 오는 방향 쪽을 향해 서 있었다. 버스를 타고 다니는구나.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데도 내심 놀라운 기분이 들었다. 개인 강습을 거부한다는 말만 듣고 그녀에 대해 돈에 전혀 구애될 필요 없는 부잣집 아가씨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나로 틀어 올리던 머리카락을 길게 내리고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광고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버스가 아니라 캔커피를 들고 있는 남자친구가 나타나야 할 것 같다.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고 두 사람은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헬스장 코치가 왜 개인 강습을 안 하지? 그걸 해야 돈이 되잖아.”
아무래도 이상해서 선우가 물었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개인 강습 안 하겠다는 코치는 처음 봤다.”
“진짜로 자기한테 관심 보이는 남자 회원들 때문에 안 하는 거야?”
“모르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애도 아니고, 딱히 이렇다 할 이유는 못 들었어.”
“희한하네.”
“근데 뭐, 빤하지. 남자고 여자고 간에 쟤가 원래 사람 상대를 잘 못 하거든. 가뜩이나 성격도 그런데 유난히 남자들이 많이 꼬이는 스타일이야. 마음에 없으면 적당히 핑계 대 가면서 유들유들하게 피해가면 되는데, 그걸 못 하니 사고가 나지.”
상철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사건사고가 있었나 보네.”
“말도 마라. 요가반 회원들끼리 회식을 한 번씩 했는데, 우 코치가 거길 한 번도 참석을 안 한 거야. 남자 회원들 대부분이 저한테 마음을 두고 있으니, 가기가 불편했던 거지. 그런데 오지랖 넓은 아주머니 회원들이 총각들 중매 노릇하시겠다고, 우 코치더러 회식 자리에 오라고 막무가내로 권유를 한 거야. 못 가겠으면 적당히 핑계를 대던가, 그게 힘든 상황이면 적당히 얼굴만 내비치고 오면 되는데 말이야. 다들 그렇게 하고 있고, 그런데 거기다 대고 회원들과 개인적으로 엮이기 싫습니다, 수업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 이래버리니까, 아주머니들도 열 받지. 건방지네, 이기적이네 하면서 쌍욕까지 튀어나오고, 아주머니들이 단체로 몰려와서 우 코치하고는 수업 못 한다고, 카운터에다 따지고 아주 난리가 났어. 사장님이 직접 뽑은 애만 아니었으면 그때 잘랐을 거야.”
전에 윤희에게 들었던 것과는 다른 얘기였다. 자발적으로 옮긴 것과 외부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것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동우 형이?”
“결과적으론 잘 보신 거지. 오전 요가가 원래 인기가 없는 타임인데, 우 코치가 맡으면서 자리가 없을 정도니까.”
수업 시간에는 수업만 했으면 한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이 적어도 열 명은 된다는 생각을 하니 문득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하여간에 별나도 너무 별난 성격이다. 호감 보이는 게 정 그렇게 부담스러웠다면 남자 친구가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던가. 입은 뒀다가 어디에 쓰려고 할 말도 안 하고 일을 키우는 건지.
식당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상철이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소문이 많은 애야. 동거 하는 남자가 있단 얘기도 있고, 유부남이랑 사귀다 들켜서 대구로 쫓겨 왔다는 얘기도 있고, 나한테 들리는 얘기만도 한, 두개가 아니야.”
“우 코치?”
선우가 묻자 상철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문은 그냥 소문이야. 뭐 하러 그런 얘길 전해.”
설령 그게 진실일지라도 남의 뒷얘기에 한 마디도 거들고 싶지 않다. 그 역시도 다른 사람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리는 직업에 속한 사람이다 보니, 가볍게 놀리는 세치 혀에 당하는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잘 알기 때문이다.
“절대로 네 상대는 아니니까 행여나 관심 두지 말라고 하는 소리야.”
공연한 걱정에 선우가 실소를 터뜨렸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말 한 마디 잘못 걸었다간 수업에서 쫓겨날 분위긴데 무슨.”
그렇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묘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말 한 마디 못 붙이게 철벽 방어를 치는 여자가 사실은 남자와 관련된 구설수가 끊이질 않는다니. 뭐랄까, 전혀 예상치 못 했던 결말로 끝이 나는 서스펜스 영화를 보고난 기분이다.
일요일 대낮부터 L백화점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뉴스에서 연일 떠들어대는 불경기가 주말의 백화점에서는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진은 8층 식당가에 위치한 엔제리너스의 2인용 테이블에 앉아서 30분 넘게 주차전쟁을 치르고 있는 현준을 기다렸다.
-주차하기가 만만치 않겠다. 넌 엔제리너스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있어. 난 주차 하고 갈 테니까.
토를 달아봐야 결국 현준이 하라는 대로 하게 될 테니, 진은 군소리 없이 차에서 내려 그가 준 카드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했다. 카운터 옆쪽으로 잡지책이 구비가 되어 있었지만, 책보다 사람 구경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부부, 나이 지긋한 어머니와 손을 붙잡고 걸어가는 30대 여자, 팔짱을 꼭 끼고 걸어가는 어린 연인들. 다양한 사람들이 짓는 다채로운 표정은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즐거웠다. 아장아장 걸어가는 손녀딸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할머니를 흐뭇하게 쳐다보다가 문득 연우랑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애는 텔레비전에 강아지가 나오면 귀엽다며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도 실제로 강아지가 다가오면 비명을 지르며 줄행랑을 쳤다. 강아지와 접촉하는 것이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진은 사람이 그랬다.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건 좋은데, 그녀의 마음속으로 들어오려는 사람은 두렵고 무섭다. 마음속으로 들어오게만 하지 않으면, 자신을 두고 무슨 말을 하건 상처받지 않을 수 있으니까. 청색 줄무늬 남방과 베이지색 치노 팬츠 차림의 현준이 걸어오는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진은 머그잔을 카운터에 반납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사람이 남친인가봐.”
“잘생겼다. 역시 끼리끼리 만나는구나.”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대생 둘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진의 귀에도 들렸다.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녀도 남자 친구와 함께 백화점에 온 많은 사람 중 한 명일 뿐이다. 평범하게, 남들처럼. 진에게는 그 말이 행복과 동의어처럼 느껴졌다. 평범하다는 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냉혹한 시선을 보내는지 모르는 것이다.
“밥 먼저 먹자. 주차 하느라 힘을 빼서 그런지 갑자기 배고프다.”
현준에게 받은 백화점 카드를 도로 건네고, 진은 그와 함께 8층 식당가를 둘러보았다. 뭘 먹을까, 고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뭐 먹을래?”
“오빠가 골라. 난 아무거나 상관없어.”
진은 늘 그렇듯 선택권을 현준에게 도로 넘겼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니까.”
현준이 나무라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현준은 항상 그녀에게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라고 하지만, 굳이 말을 해야 할 정도로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냉면 먹을까?”
고심 끝에 결정을 내리기는 했지만 정말로 냉면이 그렇게 먹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다.
점원의 안내를 받아 식당 안으로 들어가다가 진이 흠칫 놀란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창가 쪽 테이블에 강선우가 앉아 있다. 짧은 단발머리의 세련된 여자와 마주보고 앉아 있던 선우가 갑자기 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통으로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미처 알아보지 못 한 척 얼른 고개를 돌렸다.
“오빠, 우리 나가자.”
진이 현준의 팔을 잡아끌었다. 만에 하나 선우가 인사를 하러 온다면 그녀가 개인 강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현준이 알게 된다. 운동선수의 개인 강습을 한다는 것을 알면 단순히 잔소리만으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어떤 걱정을 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미 내린 결정을 번복하려 드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왜?”
“갑자기 찬 음식을 먹으려니까 속이 좀 그래서. 뜨거운 국물 먹고 싶어.”
“아파?”
“그건 아니고 갑자기 뜨거운 국물이 먹고 싶어서.”
갑작스러운 변덕에 현준이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점원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속이 좀 불편하대서, 냉면은 다음에 먹어야겠습니다.”
“아, 네. 그러세요.”
식당을 빠져나와 현준이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체했어?”
“아니야.”
“근데 왜 갑자기 속이 안 좋대?”
제 주장을 잘 보이지 않던 그녀가 갑작스럽게 변덕을 부리니 어지간히도 이상했던 모양이다.
“언제는 원하는 거 있으면 솔직하게 표현하라며.”
현준이 쿡,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머리를 콕 쥐어박았다.
“안 아픈 거면 됐어. 뜨거운 국물 뭐 먹을래? 우동 먹을래?”
“좋아.”
냉큼 대답을 하고는 일식당으로 걸어가는데 현준이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꺼냈다.
“야, 근데 저기 강선우 있더라.”
“강선우?”
진이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못 봤어? 애인이랑 같이 밥 먹고 있더라고. 강선우가 대구에 왜 왔지?”
진은 가만히 침묵하였다. 적당히 둘러대며 거짓말을 하는 데는 영 자신이 없는데다 현준은 눈치가 굉장히 빠른 편이다.
“애인이 여기 사람인가? 재활 훈련 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여자 친구 만나러 대구에 내려와 있었군.”
책망을 하는 것 같은 말투에 진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강선우가 얼마나 부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므로.
“요즘도 야구 열심히 보나 봐.”
현준이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잘 안 봐. KJ 요즘 만날 깨지니까 보면 울화가 터져서.”
KJ 드래곤즈. 강선우의 소속팀이다.
“그래?”
“강선우 빠지고 팀이 개판 됐거든. 팀은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원인 제공자는 지금 데이트 중이시라니 충격이 크다.”
여자친구가 있었구나. 수업 시간에는 수업만 합시다, 선을 그었던 그때 황당해하던 그의 표정이 문득 떠올랐다. 아무 생각도 없는데 공연히 유난을 떤다고 비웃었을까. 그가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다. 누가 됐든, 마음을 노크하도록 놔두고 싶지는 않으니까.
마음이 저절로 흘러들어와서 괴로운 경험이 있는 모양이네요.
그래도 세상과 조금씩 소통하도록 용기를 내줬으면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