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오늘, 저녁이나 같이 하지.

예석의 말이 그녀의 귓가를 맴맴 돌았다. 그와의 식사라. 사라나 예린을 불러야 하는 걸까. 예석과 만난 후로, 그리고 결혼을 한 후에도 둘만이 식사를 했던 적은 없었다. 예린이나 사라가 함께였고 그렇게 몇 번이나 식사할 일 따위 생기지도 않았다. 뭐, 신혼여행자체도 생략했으니 둘만이 보낸 시간은 거의 전무하다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왜 바보 같이 그녀는 그를 사랑하게 된 걸까.

그녀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으니까. 그녀를 위협하거나 아프게 하지 않으니까. 그녀가 던져졌던 지옥불 같은 곳에서 그녀를 꺼내주었으니까. 그는 보통의 여자보다도 키가 큰 그녀보다도 키가 커서 올려다볼 수 있었으니까. 자신과 결혼해 주었으니까. 이유는 많았다. 오히려 그녀가 그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 따위가 없어보였다.

그래서 그런 이유로 그녀는 그가 밉기도 했다.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 예석의 등을 팡팡 때려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를 보면 볼수록 그녀는 자신의 빈곤함을 느꼈으니까. 이미 말라버린 마음을 박박 긁고 긁어 애정이란 감정을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자신이 싫었으니까. 그럼에도 그 얼마 안 되는 감정의 부스러기들 또한 전부 그에게 사로잡혀 버렸으니까.

차라리 이혼이 쉬울 거라 생각했다. 대한민국을 떠나 그를 보지 않게 된다면, 괴롭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조금 더 분명하게 얘기해야 했다. 어쩌면 이건 다 스스로를 기만하는 생각인지도 몰랐다. 내심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대한민국을, 양예석을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다는 것을.

-따르르르릉. 전화왔숑. 따르르르릉. 전화왔숑.

“응.”

“나야.”

“알아.”

“저녁 먹자. 이따 데리러 갈게.”

스케줄이 없는 저녁이면 사라는 크리스를 챙겼다. 첫눈에 반해 청혼했다는 예석의 거짓말 같지 않은 거짓말을 믿은 게 잘못이었다고 누누이 말하는 사라는 자신의 평생 은인이자 스승인 예석을 이제는 미워하고 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불가피한 상황이었음을 알렸어야 했던 건 아닐까, 그랬다면 사라는 예석을 미워하지 않을텐데. 그녀는 가끔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크리스 자신 때문에 예석이 사라에게 미움 받는 상황은 그녀를 괴롭게 하곤 했다. 사랑했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 있냐는 사라의 말에 크리스는 사실은 그런 거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건 예석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아무에게도 자신들의 결혼이 위장결혼이라는 것을 알리지 말 것! 그것이 그와 그녀의 약속이었다. 그랬기에 변호사 외에는 아무도 그들의 진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둘의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을 거였다. 같은 담 아래라고는 하지만 그와 그녀가 살고 있는 건물이 멀찍이 떨어져 있으니까.

“안 되는데.”

“정말? 왜. 오늘 봉사 활동 가는 날 아니잖아.?”

“예석, 씨랑 저녁 먹기로 해서.”

“응?”

“저녁 함께 하자고 하셨어.”

“저녁?”

“응.”

수화기 너무 뜻밖이란 느낌이 강하게 몰려 와 그녀가 괜히 무안해졌다. 대답을 하던 크리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화장대의 거울 앞에 섰다. 핸드폰을 든 채 거울 앞에 어색하게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대충 묶은 머리는 앞머리가 흘러내려와 있고, 아무 것도 바르지 않은 얼굴은 무표정하고 어두웠다. 왼쪽으로 보고, 오른쪽으로 보아도 어디 한 구석 마음에 드는 부분이 없었다. 크리스는 자신의 어두운 피부를 바라보다 불만스레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조금만 더 희었다면 좋았을텐데. 예석의 하얀 피부를 볼 때면 자신의 짙은 갈색의 피부가 부끄러웠다. 짙은 갈색의 피부는 어둡고 짙었다. 자신의 고국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살색일 뿐인데, 이곳에서 자신의 피부는 너무 검고 어두웠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보다 많이 여려진 편이었지만 아직도 그랬다.

“어디서 만나기로 한 거야? 대표님이 맛있는 거 사주신대?”

“모르겠어.”

모르겠어. 그의 말대로 그 시간들을 채워 아무렇지도 않게 그와 남이 되는 절차를 밟는 게 나은 건지, 아니면 이대로 그냥 도망쳐 버리는 게 좋은 걸지. 난 정말 모르겠어.

 

 

“취업비자를 받는 게 좋겠습니다.”

“그게 좋겠군요.”

예석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깨어나기 시작한 도시는 네온사인으로 요란스레 반짝이고 있었다. 변호사가 권한 건 크리스의 취업비자였다. 취업비자를 신청하고 취업을 하면 국내에서 지낼 수 있는 비자였다. 하지만 지금 크리스는 불법체류인 상태였다. 물론 그의 소속사에 어떤 자리든 하나 만들어 그녀를 끼워 넣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일단락 짓기로 결심했다. 허수아비 자리 하나를 만들면 됐고, 일을 하고 싶다면 자리를 하나 내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성식이었다. 취업비자를 받게 해야지, 결론을 내린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일은 벌어졌다.

멍청한 자식. 그답지 않게 험한 말을 뇌까렸다. 몇 달 동안이나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제 아내라고 소리치는 모습이 얼마나 멍청해 보였던가. 천만 원만 돌려주면 끝일 거라고 소리쳤던 성식이 병원에 찾아와 다시 한 번 크리스를 다치게 한 일이 발생했다. 사라나 애들이 스케줄이 없을 때면 거의 점거하다시피 머물렀고, 덕분에 매니저들도 거의 상주하다시피 했다. 게다가 예석이 붙여놓은 간병인까지 해서 1인실로 옮겼지만 크리스의 병실은 항상 붐비는 편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그랬을까. 어떻게 알았는지 성식이 크리스의 병실을 찾아왔다. 크리스가 불법체류의 상황이기 때문에 크리스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지도 않은데 크리스를 찾아온 게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이 기집애야, 여기 이렇게 숨어 있으면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냐, 엉? 너 이리 못 와.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망신을 당했는 줄 알아? 천만원? 이 천만원만 갚으면 니가 될 줄 알아, 이년아!”

제대로 씻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운 시커먼 손이 힘없이 누워있던 크리스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그 손놀림에 크리스가 털썩, 흡사 인형처럼 침대에서 떨어져 병실 바닥으로 쓰러졌다. 놀란 크리스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일은 금세 벌어졌고, 병실에 있던 누군가가 정의감에 불타올라 신고한 경찰이 출동한 상태였다. 뜻하지 않게 그 순간에 그가 병실에 도착한 건 순전히 하늘이 도왔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예. 불법체류 상태인 듯 보입니다. 출입국관리소에 일단 신고 부탁드립니다.”

신고해 온 경찰은 멍청이처럼 신나게 떠들어 댄 성식 덕분에 크리스의 신원에 대해 알게 됐다. 그 순간 예석이 병실에 나타났던 게 천운이었을까, 악운이었을까.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양예석이라고 합니다. 이 쪽은 제 약혼자이구요.”

“거짓말 말어. 이쪽은 내 신부랑께. 아, 경찰양반 이 양반 말 듣지 마소. 저짝은 내가 필리핀에서 데꼬 온 년이랑께.”

“저 분이 아무래도 알콜 기운이 약간 있다 보니까 가끔은 자기도 모르는 얘기를 한다고 하는군요. 이쪽은 크리스티나 크로나비 사라난드. 제 약혼자입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지만 곧 결혼식을 할 예정이고, 이미 필리핀에서는 약혼식을 치른 상태입니다. 뜻하지 않게 사고를 당해 제대로 된 절차를 받지 못했지만 퇴원하는 대로 출국신고 등 모든 부분에서 제대로 된 절차를 밟을 예정입니다.”

그는 명함과 함께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 남들 모르게 경찰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경찰의 손을 꾹 잡아눌렀다. 너무나 제대로 된 공무원의식을 갖고 있는 경찰이라면 오히려 지금의 행동이 역효과를 낼 지 모른다는 것조차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에 따라 지금 당장 크리스를 연행할 수도 있었다.

“흠,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저는 일단 신고를 해야하는 상황이고, 그 다음은 출입국관리소에서 결정할 문제죠. 하지만 말씀하신대로라면 별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분은 제가 이쯤에서 모셔가도록 하죠.”

성식을 어깨에 떠멘 채로 경찰관이 멀어졌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신고하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고 느꼈는데 얼마 있지 않아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들이닥쳤고 그와 크리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란히 결혼식장에 서 있는 촌극 아닌 촌극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비밀결혼 아닌 비밀결혼이었기에 지인들을 제외한 이들은 그가 결혼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해물종류를 좋아한다고 했던가.’

문득 기억을 되새김하던 그는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는 크리스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사소한 버릇이나 음식 취향, 뿐만 아니라 일상을 어떻게 지내는지, 일주일에 몇 번이나 봉사활동을 가는지, 그가 주는 생활비를 마다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닌다는 것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전부 알고 있었다.

의무감이었다. 그의 비호 아래 살아가게 된 여자니까 그가 책임져야 할 책임들 중 하나라고 여겼다. 그래서 모든 걸 보고 받았고 원치 않는 생활비도 억지로 쥐어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제공하는 집에 살고는 있었지만 그에게 손을 벌리거나 그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가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사라의 말을 들어보면 원래 그런 성격이라고 했다. 그래서 오히려 그는 사라에게 책망 아닌 책망의 눈빛을 받곤 했다. 사장님이 사랑해서 결혼하셨다 했잖아요, 반했다고 하셨잖아요, 그 말을 믿었어요, 그런데 크리스가 좋아서 한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 아르바이트를 시키시는 건 아니잖아요. 사장님은 크리스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 거같아요. 크리스에게 필요한 건 커다란 집이 아니라 관심이에요. 왜 결혼을 밝히지 않으세요. 혹시 크리스가 부끄러우세요.

사라의 책망만큼 크리스가 미워졌던 순간이었다. 사서 무덤을 판 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의 책망을 듣는 순간들엔 크리스가 미워졌다. 그래서 더욱 그녀를 방치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무시하고 방치했다. 그녀에 대한 보고서가 책상 위에 쌓이면 쌓이는만큼 그녀의 존재는 희미해졌다. 마음 한 구석에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 생기는 만큼 그녀에 대한 반감도 자라났다. 사라에 대한 애정, 사랑이던 감정이 희미해지는 대신 크리스에 대한 어떤 감정이 흙탕물에 가라앉은 앙금처럼 서서히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미웠던 거다, 그녀가. 그건 분명 공정하지 못하고 정당한 감정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랬다. 그녀가 미웠다. 그녀가 밉고 그녀가 미운만큼 억울했다. 어른스럽지 못했지만 마치 초등학생이 되지 않는 떼를 쓴 것처럼 그는 그녀가 미웠고 보기 싫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던 거다. 차라리 그녀가 그에게 관심을 갖거나 그를 귀찮게 했다면 그의 미움은 계속 되었을 거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그는 그녀가 궁금해졌다. 역설적으로 그녀가 그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그녀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어떤 음식을 먹고 지내는지,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는지 알고 싶어졌다.

똑똑. 갑작스런 노크 소리에 그는 크리스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흘깃, 손목의 시계를 일별한 그는 고개를 들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웬일이야.”

“내가 언제부터 너한테 오면 온다 연락하고 오는 사이가 된 거야?”

“용건만 간단히.”

예린이었다. 언제나처럼 화려한 웨이브에 쫙 붙는 원피스차림의 예린은 한 마리 공작처럼 화려하고 눈부셨다. 하지만 그런 모습과는 달리 자그마한 얼굴엔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났다. 붉은 립스틱이 그녀의 피로를 더 부각시켰다.

“저녁 사 줘.”

권하지도 않았음에도 이미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은 예린이 피곤한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중얼거리듯 말 했다.

“저녁?”

“응. 오랜만에 우리 사장 좀 벗겨 먹자. 나 맛있는 것 좀 사 줘. 사장 돈 벌어다 주느라 너무 힘들어. 오랜만에 회식 어때.”

“오늘은 선약이.”

“아, 정말. 사장, 비싼 척 좀 하지 마. 박대리한테 예약하라고 한다. 한턱 내.”

“카드 줄게.”

“중요한 약속이야?”

새치름하게 웃으며 떫은 표정을 짓는 예린의 표정에 어린 피로함이 그의 시선을 끈다. 예린은 생긴대로 독하게 일하고 좀처럼 앓는 시늉이라거나 힘든 기색을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그녀도 가끔씩은 그에게 와서 투정을 부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때는 그녀 스스로 이가 부서져라 이를 악물고 참다가 참다가 오는 경우였다. 드문 경우였지만 그런 때는 온 회사 직원이 총출동 되어 부어라 마셔라 1,2,3차 니가 죽나 내가 죽나 마셔보자 하며 마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그게 지금 오늘이란 말이 된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한 3초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할 수 없다. 크리스와의 약속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후우. 어쩐지 그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내일 저녁으로 미루지. 먼저 한 약속인데 이쪽 형편대로 깨버리는 게 미안하지만 이쪽도 사정이 있어서.”

그답지 않게 말이 길어지는 걸 보니 미안하긴 한가보다고 크리스는 속으로 웃음 지었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면 그는 그녀를 이상해하겠지. 아무리 찾아봐도 옷장에 입을 옷이 마땅치 않아 안 그래도 고민이던 참이었다. 오히려 안심이다.

갑자기 그녀가 살고 있는 건물로 찾아와 놀란 가슴을 진정하기도 전에 예석은 약속 취소를 알렸다. 갑자기 회사 회식이 잡혔고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약속 취소보다도 변변히 내놓을 차가 없어 내놓은 인스턴트 녹차가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취향이 아닌 걸까. 그는 입도 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자꾸만 쏠리는 신경을 분산시키려 고개를 들었다. 근엄하달까, 경직되었달까. 잘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예석 얼굴엔 항상 불편한 기색이 어려 있다. 그녀가 그를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일까. 그 순간 예석을 올려다보던 그녀의 시선이 정면으로 예석의 것과 마주쳤다.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네, 괜찮아요. 편하게 하세요.”

“……나오겠어?”

“네. 네? 아닙니다.”

굳이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아도 전 정말 괜찮습니다. 크리스는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언제든 져버릴 수 있는 관계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섭섭한 건 스스로에게도 공평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내심 기대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그 건 아니다. 실망할 일도 기대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야 했다. 더구나 회식에 참석하다니. 생각만 해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어떻게 처세해야 할지도 모르는 자신이 참석했다가는 예석만 웃음거리로 만들게 될 게 분명했다. 결혼을 비밀에 부친 것도 아마 그래서일 거라고 그녀는 몇 번이나 생각했던 것이다.

“사장님, 갈 겁니다, 크리스. 저랑 같이 갈 거예요.”

언제 왔던 걸까. 그녀가 앉아 있는 소파로 뛰어들 듯이 나타난 사라가 황급히 외친 말에 그녀와 그의 안색이 동시에 굳었다.

“뭐?”

“크리스랑 선약이 먼저셨잖아요. 그러니까 크리스가 회식에 같이 가면 되죠. 같이 갈 거지 크리스. 같이 가자. 우리회사 회식하는 집 맛있는 거 많이 나와. 너 저번에 할로할로 먹고 싶댔잖아. 내가 이따가 사줄게. 가자? 응?”

“사라.”

그러지 마, 하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예석을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 대신 거절의 말을 해주길 바랐다. 그도 예의상 권했었지만 그녀가 그런 공식적인 자리에 나서길 바라진 않을 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사라의 간청으로 예석이 마음을 바꾼다면 그녀는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괜찮으니까 차라리 됐다고 다시 시간을 잡아보자는 이야기가 나오길 바라며 그녀는 예석을 바라보았다. 어서 그건 아니라고 얘기해요. 사랑의 청을, 그렇게 쉽게 수락하지 말아줘요.

“같이 가지.”

그의 말에 싫다고 할 수 없는 자신을 저주 하리라. 하지만 그녀는 저주 대신 고작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미치는 영향력 따위에 대해 생각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가끔 인생은 외로운 거라고 알고 싶지 않아도 알려주는 순간이 있다. 지금이 그랬다. 사라가 최선을 다해 그녀를 꾸며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회식장소에 들어선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를 쫓았다. 그 속에 섞인 경멸이나 비웃음을 읽고 싶지 않아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사라를 쫓아 가장 구석자리로 자리를 잡았다. 화장을 하지 말 걸 그랬다. 아니 조금 더 옅게 할 걸 그랬다. 어차피 까만 살결인데 하얗게 보이자고 애쓴 것처럼 보일까 봐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조심스레 토닥였다. 조금이라도 더 자연스러워 보일까 해서. 사람들과 섞이고 싶으면서도 사람들 속에 서는 일은 언제나 무섭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더욱 그랬다. 사람들 속에 서면 혼자 거리에 서 있을 때보다 더 외롭고 무서웠다.

“왜? 얼굴이 따가워?”

“아니. 괜찮아.”

“너 오늘 예뻐.”

환하게 웃음 지으며 그녀를 칭찬하는 사라야말로 정말 예뻤다. 하얀 살결과 잘 어울리는 아이보리빛 원피스를 입은 사라는 공기 중으로 사라질 것만 같이 천사처럼 곱고 예뻤다. 그녀는 사라의 칭찬에 어색한 웃음으로 답했다. 주위에서 ‘저 사람은 누구야.’ 하며 자신을 가리키는 손짓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예석과 아무 사이도 아닌지라 그녀가 예석의 부인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마 예린과 사라, 그리고 예석의 비서인 박대리를 제외한다면 거의 모르는 게 대부분일 거였다.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테이블만 보고 있었기에 회식자리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걸 그녀는 알지 못했다. 부드러운 갈색빛 피부에 어울리는 연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자그마한 인형처럼 예쁘고 귀여웠다. 다만 자신의 모습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는 그녀만이 자신에 대해 잘 모를 뿐이었다. 한국에서 3번의 겨울을 지나는 동안 크리스는 예린과 사라의 손에 이끌려 그녀들이 다니는 피부과나 헤어샵을 함께 다니곤 했다. 그녀에게는 눈이 휘둥그레질만큼 비싼 가격이었음에도 예린은 혼자 가느니 안 가는 게 낫다며 항상 크리스와 함께 가기를 원했다. 그렇게 한 달에 두어번은 사라, 예린과 다니다보니 그녀의 피부결도 처음 예석을 만났던 때와는 달리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아무리 그녀가 싫어하는 갈색빛이라도 해도, 남들이 보기에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색깔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자신이 없었고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자신을 알지 못했다.

‘후아. 정말 사람이 많잖아. 다들 정말 당당해 보인다.’

그녀는 자신앞에 놓인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해물샤브샤브였음에도 지금 이 순간에는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낀 것처럼 불편하고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역시 괜히 온 듯 싶었다.

“여어, 이 테이블에는 미녀들이 전부 모여 계시네요. 예린씨, 오랜만. 사라도 오랜만이잖아. 그건 그렇고 여기 계신 분은 초면인 것 같은데. 누가 소개시켜 줄 사람.”

빙글 빙글 웃고 있는 사람은 소속사에서 바람둥이로 유명한 한량, 홍바람이었다. 실명이 바람은 아니고 쉬쉬하며 부르는 별명이었다. 아마 자기가 홍바람으로 불리고 있다는 걸 알면 껄껄껄 웃으며 즐거워할 인간이었다. 본업인 탤런트보다 여자 만나는 걸 더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었고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이 시간이면 어느 여자와 술 한 잔 하며 뒹굴고 있는 게 보통 일과인 그가 어쩐 일로 회식에 참석했는지가 불가사의였다.

“아무도 인사시켜 주는 사람이 없으면 혼자 인사하는 수밖에. 안녕하세요, 저는 홍유비라고 합니다. 오늘따라 술 한 잔 할 사람이 없어 회식에 참석했더니 다 그쪽을 만나려고 그랬던 거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대답하지 마, 크리스.”

옆에서 사라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며 그녀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면서 유비를 한 눈으로 흘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유난히 색기가 흘러내리는 저 눈꼬리 좀 보라지.

“아, 크리스.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이름이군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한 잔 받으시죠.”

은연 중에 자신이 이름을 알려준 모양이 되자 사라가 예쁜 눈을 세모로 세워 유비를 흘겨보았다.

“네, 고맙습니다.”

크리스는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그녀의 잔에 거의 억지로 붓다시피 하는 유비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잔을 제대로 들었다.

“회식 자리라는 게 늘 똑같아요. 술 한 잔에 노래방. 진부하고 재미도 없어요. 어때요, 크리스? 내가 재밌는 데 데려가 줄까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어리숙한 모습으로 크리스는 유비가 따라주는 와인을 받아들였다. 사라가 질색을 하는 걸 보니 좋은 사람이 아닌 게 분명했는데도, 크리스는 이상하게 유비가 밉거나 싫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니 그냥 아무 느낌도 없었다. 단지 자신에게 처음 말을 걸어주었다는 게 조금 고맙달까. 자신을 사람처럼 대해주고 상대해주는 사람이 나타난 게 반가웠다. 크리스의 입꼬리가 아주 약간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재밌는 데라? 하지만 이미 여기도 재미있는데. 크리스는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유비가 건네는 와인병을 들어 무심결에 유비에게 와인을 따라주려는데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손이 그녀의 손에 들린 와인병을 잡았다.

“아, 사장님.”

그녀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나온 한 마디에 예석의 눈썹이 불길하게 꿈틀거렸다. 맙소사. 그녀도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고 말았다. 사장님, 이라니. 서로 어떻게 부른다는 약속 같은 건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크리스라 불렸고, 그녀는 그를 예석씨라 부르곤 했다. 아니 그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부를 만큼 둘은 마주치지 않았고, 일부러 만나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건 너무 심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적어도 예석씨라고는 불렀어야지. 그런데 순간 사장님이란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갔다. 와인병을 잡은 예석의 모습이 너무 사장님 포스였다는 게 문제다.

“사장님?”

불쾌한 듯 예석의 음색은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크리스는 저도 몰래 고개를 내저었다. 이상하다. 방금 나타났으니 술을 마신 게 아닌 게 아닐텐데, 예석에게서 달콤한 와인향이 풀어져 나와 그녀를 휩싸는 기분이다. 뭔가 알싸하고 어지러운 기분에 취한 느낌이 든다. 와인. 이름만큼이나 마음에 드는 술이다.

“사장님이 아는 분이셨군요. 잘 아시면 저 좀 소개시켜 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제가 요새 외로운 남자인 거, 사장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갑작스레 나타나 와인병을 낚아챘는데도 싫은 기색 없이 유비는 빙글빙글 웃으며 예석에게 눙치고 들었다. 예석이 그런 유비를 날카롭게 쳐다봤지만 유비는 예석의 그런 시선이 한 두 번이 아닌 듯 아무렇지 않게 웃음으로 넘기는 것이었다. 그 웃음 때문이었을까. 크리스의 미소 때문이었을까. 순간 예석은 자신답지 못하게 울컥하고 말았다.

“여기는 크리스티나 크로나비 사라난드. 내 부인이지. 크리스, 아무리 토라져서 기분이 나쁘다고 해도 사!장!님!은 좀 심한 거 아닌가.”

예석이 그답지 않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옆에서 예린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대충 집어던지며 흥미로운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난잡하기 짝이 없기로 소문난 유비가 크리스에게 다가서는 순간 문을 열고 들어서는 예석을 발견했다. 예린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만히 있었던 것인데 일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욱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는 3분 전까지만 해도 양예석이 크리스에게 관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다고 생각했다. 대체 왜 결혼 한 거야? 하는 의문이 하루라도 들지 않는 때가 없는 3년이었으니까.

‘화났군, 화났어.’

예린은 눈가가 붉어진 예석을 보며 그의 상태를 짐작했다. 저 남자는 지금 굉장히 화가 났다. 이유는 뭐, 뻔하지.

“이런. 사모님이셨군요. 조금 일찍 말해주셨더라면 제가 이런 실례를 하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제가 미처 사장님이 결혼하셨다는 걸 깜빡했나 봅니다. 술이 이렇다니까요. 크리스, 아니 사모님,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지요.”

빙글빙글, 여전한 웃음을 띤 채 유비는 크리스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보고는 이내 예석을 일별하고는 이내 자기의 자리로 돌아섰다. 예석의 입에서 ‘부인’이란 말이 나오다니. 크리스뿐만 아니라 예린과 사라가 충격으로 놀라 말없이 예석을 바라본다. 하지만 예석은 가타부타 아무 말도 없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크리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크리스는 예린과 사라에게 간다는 말도 제대로 못한 채 그렇게 끌려 나와 예석의 차에 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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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놓은 거 못 올릴 정도로 바쁜 건 아닌데 ㅜㅜ

 


댓글 '1'

판당고

2012.10.28 03:55:50

헛....저런 직원을 그냥 두다니.

오랜만에 와서 잘 보고 갑니다. 그런데 다음에는 조금만 문단을 띄워주시면 읽는 데 더 편할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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