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14.


옷을 다 챙겨 입고 옷장 키를 빼는 순간 가방 속에 넣어둔 핸드폰에서 문자 알림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을 꺼내 들고 문자를 확인하던 현우가 픽, 어이없는 웃음을 날렸다.

-오빠, 지금 운동 중?

수영이다. 매일 아침 빼먹지 않는 운동을 하고 있는지가 새삼스레 궁금해서 이 시간에 굳이 문자를 보냈을 리는 없고, 메일 사건이 어떻게 진척이 되었는지를 알아내고 싶은 것이다. 현우는 핸드폰을 그대로 손에 쥔 채 사우나 탈의실을 빠져나왔다. 현우가 키를 건네자 카운터 앞에 매일 서 있는 여직원이 수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지금 가세요?”

“네.”

벌써 10년 가까이 같은 스포츠센터를 다니고 있지만, 그는 여직원들과 사적인 대화는, 설령 그게 가벼운 인사말일지라도 거의 삼가는 편이었다. 별 의미 없이 던지는 미소와 인사말이 여자들에게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하루 되세요.”

관심 어린 눈빛으로 인사를 건네는 여자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현우는 곧장 등을 돌려 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오빠!

근래에 보기 드물게 들뜬 목소리다.

“너 지금 자야 될 시간이잖아. 근데 왜 문자야.”

모른 척 시침을 뚝 떼자 수영이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져왔다.

-메일은 왔어?

“아니, 안 왔어.”

현우는 태연한 목소리로 거짓말을 하였다. 메일이 온 것은 물론이고 홀에 켜진 조명 빛을 보고 불이 난 줄 오해해서 진하가 잠옷차림으로 놀이터로 직접 뛰어왔다는 사실을 이실직고해서 불난 집에 기름을 부울 수는 없지 않은가.

-진짜? 에이, 뭐야. 사장님 실망이야.

“네가 기대하는 관계 아니니까, 신경 끄록 했지.”

-알았어. 

진하가 메일을 보내지 않은 것이 큰 결례라도 되는 것처럼 유감을 표하더니 수영은 잠을 자야한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이로써 골치 덩어리 하나는 해결이다. 십대 소녀처럼 들뜬 표정으로 메일을 기다리고 있어요, 말하던 이진하가 아직 남아 있지만, 그것 역시 해결 방법을 생각해 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진하에게 메일 보내지 않기. 그것이 밤새 결정한 이 말도 안 되는 해프닝의 해결책이었다.


잠에서 깨어나자 진하는 새벽에 있었던 일들이 꿈처럼 아련하게 떠올랐다. 밤의 요정이 저지른 짓궂은 장난이 분명하다. 홀 안 쪽에 켜놓은 조명이 어쩜 그렇게 불꽃처럼 보였을까. 메일이나 확인해 볼까, 하고 눈을 떴다가 창밖으로 놀이터의 화재 현장을 목격했으니, 그녀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일자르디노와 아저씨의 악몽에 덜덜 떨며, 그녀는 무작정 놀이터로 뛰어갔다. 뭘,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저 두 번의 화재는 막아야 한다는  신념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놀이터에서 마주친 것은 텅 빈 홀에 홀로 앉아 있는 놀이터 사장님의 황당한 표정이었다. 불이 난 게 아니라 홀 안 쪽에 켜놓은 조명 빛에 속은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진하는 부끄럽다는 생각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훨씬 더 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제대로 마주한 사장님은 평상시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목까지 잠그던 셔츠 단추를 두 개 푸르고, 흐트러짐 하나 없던 셔츠자락이 허리춤에서 반쯤 비어져 나온 긴장이 풀어진 모습. 뭐랄까, 평상시 바라보던 사장님이 그림이나 조각처럼 느껴졌다면 새벽에 만난 사장님은 사람, 그것도 남자로 보였다. 브라운 슈가의 유선이 구구절절 늘어놓던 예찬론이 바로 이거였던가, 한 방 맞은 기분이랄까. 잘 생긴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그림으로 승화한다더니, 흐트러진 모습이 이렇게 섹시하게도 보이는구나. 술에 취한 것처럼 괜스레 기분이 붕 뜨고, 아무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어색한 기분에 몰려 사장님한테 횡설수설, 너무 많은 얘기를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장님을 붙들고 세미짱의 블로그 댓글 남긴 사람하고 메일을 하고 있다느니, 연애처럼 설렌다느니 그런 얘기는 왜 한 건지. 푼수가 따로 없다, 진짜.

“내가 못 살아.”

진하는 이불을 뻥 차고 일어나 컴퓨터부터 켰다. 사장님한테 저지른 푼수 짓의 근본적인 원인을 따지고 보자면, 바로 이 메일 때문이다! 에이프릴님 본인이 보낸 메일을 읽고는 쑥스럽다는 말 한 마디에 완전히 들떠서 사촌오빠에게 곧장 메일을 보낼 때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삐꼴로자르디노의 마감 시간인 10시가 넘도록 메일의 수신확인조차 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고는 덜컥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 것이다. 에이프릴님의 메일만 믿고 너무 상황을 낙관적으로 해석해버린 것이 아닐까. 만약 에이프릴님이 사촌오빠의 의중을 잘못 파악하고 메일주소를 알려준 것이라면, 그녀가 보낸 메일은 단순히 사촌오빠와 그녀 둘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사촌 남매 지간의 다툼으로까지 번질 수도 있다. 한 번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니까 끝도 없이 불길한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초조한 마음으로 메일함을 들락거리며 수신확인을 하다가 억지로 잠을 청했으니 깊은 잠을 못 자고 자다 깨서 조명 빛을 보고 화재로 오인을 한 것이니, 이게 다 메일 때문이다!

“과연 수신확인을 하셨을까. 두둥!”

진하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메일함을 클릭하였다.

“왔다!”

환희에 찬 얼굴로 메일을 열어본 그녀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세상에, 너무나 근사한 메일이다. ‘불쾌함이 아니라는 증표로 사족을 덧붙이자면’ 이라니, ‘사장님의 인생에서 기쁘고 반갑다는 의미로 변했다는 단어 쑥스러움 때’ 이라니, 품위 있는 유머 감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시식회에 참석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는 모습에서는 뭐랄까, 세미짱의 블로그 댓글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그대로 묻어났다. 기분 상하지 않게, 그렇지만 분명하게. 이렇게 합리적이고 세련된 남자가 내 요리를 맛있게 먹었다니, 그것도 사촌동생인 에이프릴님이 알까 봐 불편해하면서도 굳이 댓글을 남길 정도로! 정말이지 감동 그 자체다.

진하는 세미짱의 블로그로 다시 들어가 사촌오빠님이 남긴 댓글을 다시 한 번 정독하였다.

문화적인 차이가 부른 오해인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에 댓글 답니다. 삐꼴로 자르디노 사장님은 이탈리아에서 요리를 배운 분입니다. 심지어 한국에 온지도 얼마 안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본토 레스토랑에서는 요리사가 마감을 하고 나오면 홀에 있는 손님들이 박수를 쳐준다는 걸 알고 계시는지요. 그건 그러니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준 요리사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일종의 관습인 셈이죠. 그런 문화에서 요리를 하던 사람이 한국 블로거 문화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로 공짜 음식을 서비스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면 당연히 요리사로서의 자존심을 부정당했다고 생각했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도 노여움이 풀리지 않는다면 다시 방문해 제대로 된 가격을 치르고서라도 음식을 먹어보라 권하고 싶네요. 그만 하면 충분히 요리사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울만한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두어 번 정독하던 진하가 뭔가 이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요리를 배운 걸 사촌오빠님이 어떻게 알았지? 게다가 한국에 온지도 얼마 안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라고?

처음 읽었을 때는 그냥 스쳐 지나쳤던 것들이 이제야 머리에 와 박혔다. 세상에, 이건 그녀의 지인들만이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닌가 말이다. 왜 애초에 이런 의심을 갖지 않았을까. 그 동안 삐꼴로 자르디노에 드나든 손님들 중 남자 손님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다 대부분 여자 친구 손에 끌려온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 사람들 중 그녀의 음식을 그토록 맛있게 먹어준 사람이 누구일까, 세밀하게 기억하려 애쓰고 또 애썼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얼굴을 찾지 못 하였던 것은 그녀의 기억력의 탓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녀를 아는 사람, 아마도 그녀의 측근이 인터넷에서 삐꼴로 자르디노를 검색해 보고 단순히 의리로 그런 댓글을 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순간 온몸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누구일까? 어쩌면, 진짜로 사촌오빠일지도 모른다.

진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메일쓰기 버튼을 눌렀다.


사촌오빠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제가 이탈리아에서 요리 공부를 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나요? 설마 저도 한 번 본 일이 없는 매체를 통해서 정보를 얻으셨을 리는 없을 텐데요. 그리고 제가 한국으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어떻게 아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느냐면,

사촌오빠님이 실세로 저와 굉장히 가까운 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가령, 정말로 제 사촌오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시죠?

누가 됐든, 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니 이쯤에서 정체를 밝혀주세요. 더 이상 끌면 진짜로 화가 날 것 같거든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지만, 만에 하나 정말로 제 손님이 맞는다면, 결백의 의미로 위의 두 질문에 합당한 답을 보내주세요.

그럼 제가 사과하죠.


현우는 굳은 표정으로 진하에게서 온 메일을 닫았다. 기어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이렇게 되기 전에 연락을 끊어버리려고 했는데, 한 발 늦었다. 단순한 호의로 시작한 일이 이렇게 크게 번질 것이라고는, 전혀 계산하지 못 하였다. 괜한 거짓말로 둘러대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모양새를 구기면서까지 굳이 진실을 밝히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될 대로 되어라, 내버려두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그저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혹시라도 그녀 쪽에서 사장님이 사촌오빠님인가요, 하고 묻기라도 한다면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뿐이다. 메일 주소로는 아무것도 유추해내지 못 할 테니.


진짜 사건은 저녁 때, 놀이터가 가장 붐비는 시간에 터졌다.

-오빠, 지금 잠깐 나올 수 있어?

수영이 전화를 걸어 그렇게 얘기를 할 때만 해도 현우는 일말의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 하였다. 

“지금은 힘들지. 왜?”

생뚱맞게 밖에서 만나자는 얘기를 하다니, 특별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저녁이나 같이 먹자.

“네가 여기로 오면 되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식으로 일축하며 전화를 끊으려는 현우의 귀에 충격적인 단어가 날아와 박혔다.

-나 지금 삐꼴로 자르디노야. 여기로 안 올래?

순간 너무 놀라 현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네가 거기 왜 가 있어?”

-스파게티 먹으러. 도대체 얼마나 맛이 있나 궁금해서.

수영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천연덕스럽게 말을 하였다.

“야, 수영이 너! 당장 거기서 나와. 좋은 말로 할 때 말 들어.”

현우가 서슬 퍼런 목소리로 다그치는데도 수영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천하태평이었다.

-안 돼. 내 건 벌써 주문했어.

“야! 너. 잠깐만.”

현우는 문 앞에 서 있는 정환에게 급하게 사인을 보내 카운터를 맡기고 핸드폰을 들고 주방 쪽 뒷문으로 나갔다.

“너 내 얘기 잘 들어. 지금 당장 일어나서 거기서 나와. 급한 일 있어서 식사는 못 하게 됐다고 핑계대고 나오라고. 알았어?”

-오빠, 진짜 왜 그래? 아무 사이 아니라면서. 난 그냥 여기 음식이 얼마나 맛있기에 오빠가 댓........

“그만!”

가만 뒀다가는 세미짱의 블로그며, 메일 얘기까지 죄다 생방송으로 털어놓을 기세라 현우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수영의 말을 잘랐다.

“알았어. 너 그럼 거기서 스파게티만 먹고 나와. 대신 나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마. 알았지?”

-무슨 말을 해. 스파게티만 먹고 갈 거야.

“너 거기서 내 얘기 한 마디라도 뻥긋 하면 다신 내 얼굴 못 보는 줄 알아.”

-와, 무섭네. 알았어. 알았다고.

현우는 전화를 끊고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이건 아니다. 될 대로 되어라, 내버려두었다가는 수영의 페이스에 말려 질질 끌려갈 수밖에는 없다.  누구를 탓하랴. 애초에 어울리지도 않는 참견을 한 것부터가 실수였던 것을. 실수를 저질렀으면 해결을 해야지.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현우는 카운터로 돌아와 메일함을 열고 글쓰기를 눌렀다.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시식회에 참석 하겠습니다. 

날짜는 제 임의대로 정해도 좋다고 말씀하셨으니, 제가 정하겠습니다.

내일 삐꼴로 자르디노의 영업이 끝나는 시간인 10시.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댓글 '3'

레띠츄

2011.08.29 10:05:47

오옷 이제 진도를 빼는 건가요? 역시 둘에게만 맡겨두기엔 무리!!

사촌 동생이 없었으면 어쩔뻔 했나요..ㅋㅋㅋㅋㅋㅋㅋ

귀여운 것들;; ㅋㅋㅋㅋ

margot

2011.08.29 17:22:48

순둥이 진하가 현우가 염려하던걸  알아챘네요 ㅎㅎ

빨리 커밍아웃해야겠어요 ㅎㅎㅎ

큐리

2011.08.30 16:03:26

음.. 진하에 대한 오해를 현우가 제대로 풀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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