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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어휴.”
아무도 없는 텅 빈 홀에 앉아서 수영이 진하에게 보낸 메일을 읽던 현우가 돌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이프릴입니다.
간단히 설명을 해드리자면, 세미짱...의 블로그 글에 댓글을 남긴 것은 제가 아니라 제 아이디를 종종 빌려 쓰는 사촌 오빠입니다. 두 분 사이에 무슨 말씀이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오빠는 제가 보는 앞에서 사장님과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쑥스러웠던 게 분명해요. 저한테는 세미짱...의 블로그에 댓글을 남겼다는 사실조차 숨겼거든요.
혹시 오빠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더 남아 있다면, 여기가 아니라 오빠의 메일 주소로 직접 보내세요. 그러면 훨씬 더 솔직한 답변을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이건 그냥 단순히 메일 주소만 가르쳐준 게 아니지 않은가. 사촌오빠라느니, 블로그에 댓글을 남긴 것을 자기한테는 숨겼다느니 이런 얘기는 전혀 할 필요도 없는데 무슨 힌트를 주고 싶어서 이렇게 주절주절 늘어놓은 것인지. 이거야 원 우리 사촌 오빠가 사실은 놀이터 사장 서현우라고, 실명을 밝히지 않은 게 다행스러운 지경이다.
현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수영이 진하에게 가르쳐준 자신의 메일함을 열었다. 맙소사! 걱정하던 바대로 벌써 진하에게서 메일이 도착해 있다.
에이프릴님 주소로 메일을 보냈던 삐꼴로 자르디노의 사장 이진하예요.
어휴, 이제 실명까지 밝히는구나.
일부러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진하를 속이게 된 지금의 이 상황이 현우는 몹시 불편하였다. 그가 진하의 입장이라면 이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을 때 굉장히 불쾌한 기분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 메일 주소는 어떻게 알아냈을까, 놀라셨나요?
혹시나 섬뜩한 스토커인 것은 아닐까, 소름 돋으신 건 아니죠?
사실은 에이프릴님께서 여기로 메일을 보내라고 알려주셨답니다. 그리고, 세미짱님의 블로그에 댓글은 단 것은 에이프릴님이 아니라 에이프릴님의 아이디를 종종 빌려 쓰는 사촌 오빠이고, 사촌 오빠는 에이프릴님께서 보는 앞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쑥스러워하시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답니다. 무려, 쑥스러워하신다고요.
만세!
만세라고?
느닷없이 튀어나온 과장된 표현에 현우는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 줄로 얼른 시선을 옮겼다.
제 인생을 통틀어서 쑥스럽다는 단어가 이렇게 기쁘고 반갑게 들린 적은 처음이었어요.
사실은, 사촌오빠님(에이프릴 사촌오빠님이란 호칭이 너무 길어서 줄여봤어요)께서 보내신 짧은 답변 메일을 받고 저 혼자 굉장히 전전긍긍했답니다. 처음 메일을 보낼 때는 한 줄이라도 좋으니 답변만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한 줄 답장을 받고 보니까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문장에서(물론 전적으로 제 입장에서 봤을 때) 어쩐지 사촌오빠님의 불편한 심기가 전해지는 것 같았거든요.
혹시 뭔가 실수를 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고, 그래서 제가 처음에 보낸 메일을 다시 읽었어요. 우와, 참으로 가관이더라고요. 어찌나 눈물겨운 심경 고백인지!
다시 한 번 더 변명을 하자면, 최근 들어 제가 많이 힘들어 있었고, 사촌오빠님의 댓글에서 정말 커다란 힘을 얻었으며, 결정적으로 댓글을 읽자마자 감동이 최고점을 찍고 있을 때 곧바로 쓴 메일이었어요.
쑥스러운 사촌오빠님께 다시 여쭤볼게요.
시식회 참석은 여전히 불가능하신가요?
불쾌함이 아니라 쑥스러움 때문에 일부러 무뚝뚝한 한 줄 답변을 보내신 게 맞는다면, 그 증표로 한 줄 이상의 답변 부탁 드려요.
진지한 표정으로 메일을 읽어 내려가던 현우의 입술에서 픽, 어이없는 실소가 터졌다. 불쾌함이 아니라는 증표로 한 줄 이상의 답변을 내놓으라니.
“와, 이거 진짜 난감하게 됐네.”
이거야말로 시트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이 아닌가 말이다. 오해한 것도 없는데 굳이 변명을 하겠다고 메일을 써 보냈는데, 그걸 또 수영이 먼저 발견해 읽고는 쓸데없는 호기심을 발동시켜 세미짱의 블로그를 찾아가게 만들고, 저 혼자 앞뒤 상황 유추하고 내린 결론이 로맨스라니. 저 혼자야 연애 소설을 쓰던, 추리 소설을 쓰던 무슨 상관이겠느냐만, 왜 진하에게 답장을 보내서 일을 이 지경으로 꼬이게 만드느냔 말이다. 도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을 해야 하는 건지, 그로서는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다. 이제 와서 내가 그랬소, 밝힐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아무 답변 없이 무시하고 지나쳐버리자니 저 혼자서 속 태우며 있지도 않은 최악의 상황을 그리며 전전긍긍할 진하가 측은했다. 하는 수 없이 메일함의 글쓰기 버튼을 누르며 현우는 절망스러운 탄식 소리를 내뱉었다.
“돌겠다, 진짜.”
생각할수록 기가 믹히는 일이다. 정체를 숨긴 채 메일 주고받기라니. 아닌 게 아니라 하는 짓만 두고 보면 짝사랑이라고 몰아붙여도 할 말 없음이다.
제 답변이 그토록 거센 후폭풍을 몰고 왔다니, 그저 놀랍고 유감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제 댓글이 사장님께 큰 힘이 되었다는데, 제가 불쾌해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미 알고 계신 그대로 사촌 동생에게 빌린 아이디로 블로그에 댓글, 그것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 댓글을 남겼다는 게 편하지는 않은 상황이었다는 점 고백합니다. 그래서 제 나름으로는 더 이상 말이 오갈 필요 없이 깔끔한 답변을 한다는 것이 본의 아니게 사장님 보기에 다소 무뚝뚝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식회 참석은 여전히 불가능합니다.
불쾌함이 아니라는 ‘증표’로 사족을 덧붙이자면, 사장님의 인생에서 기쁘고 반갑다는 의미로 변했다는 단어, ‘쑥스러움’ 때문입니다. 전 그저 삐꼴로 자르디노에 편안한 마음으로 들르는 손님이고 싶을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습니다.
부디 충분한 답변이 되었길 바랍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에 혹여 무뚝뚝하게 보이는 단어는 없는지, 체크하기 위해 내용을 꼼꼼히 확인해 보았다.
이게 제발 마지막 메일이 되기를!
현우가 전송 버튼을 누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출입문이 조심스레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조명을 완전히 꺼버렸어야 했는데, 메일을 확인하려고 서두르는 통에 카운터 쪽 조명을 그대로 켜둔 채 내버려뒀더니 아직 영업 중인 것으로 착각을 한 취객이 한 잔 더 하러 들어온 모양이다. 귀찮은 마음은 깊숙이 밀어 넣고 얼른 사무적인 미소를 그린 채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눈을 댕그랗게 뜬 채 겁먹은 표정으로 서 있는 진하와 정통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어쩐 일이에요, 이 시간에?”
현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진하가 서 있는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귀 밑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에는 베게에 눌린 자국이 선명하고 헐렁한 트레이닝복 바지에 슬리퍼 차림. 그러나 지나치게 편안해 보이는 복장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항상 밝은 기운을 뿜어내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혼비백산한 것 같은 기운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혹시 혼자 자고 있는 집에 도둑이라도 든 건 아닌가 걱정이 되어, 현우는 허리를 굽혀 조심스럽게 진하의 표정을 살피었다.
“와, 다행이에요! 사장님이 여기 계셨구나. 자다가 깼더니 놀이터 안쪽으로 불이 환하게 켜 있는 거예요. 불 난 줄 알고 부리나케 뛰어왔어요.”
아직까지도 긴장이 풀리지 않았는지, 가슴을 쓸어내리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화재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공포에 휩싸여 옷차림도 추스르지 못 하고 무작정 달려온 것이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아 현우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화재가 난 줄 알았으면 119에 신고를 해야지, 왜 혼자 달려와요. 소화기 들고 진압하려고?”
마음 속 동요를 들키지 않기 위해 현우는 일부러 가벼운 농담을 툭 던졌다.
“너무 놀라서 그럴 정신도 없었어요.”
정말 힘든 것은 죽음 그 자체보다 화마 속에서 몸부림치며 돌아가셨을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상상된다는 것이었다. 아주 사소한 단서에도 재생되는 그 괴로운 상상은 그때마다 번번이 그의 가슴을 예리하게 상처 내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도 자신과 똑같은 상처가 있다고 생각이 드니, 진한 연민이 느껴졌다.
“다행이네. 신고라도 했으면 머리 아팠을 텐데요.”
“그러게요.”
고개를 끄덕거리며 애써 지어 보이는 미소가 어쩐지 서글퍼 보여, 현우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 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기분.
“근데 이 시간에 항상 이렇게 남아 계세요? 지금 매상 정리 중이셨어요?”
진하가 미안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이 테이블 위에 올려 진 노트북이라는 것을 안 순간 현우는 등줄기에 힘이 꾹 들어갔다.
“네, 뭐 거의 그렇죠.”
“놀이터는 하루 매상 정리 하는 것만도 엄청나겠다. 어떻게 정리하세요? 한 번 구경해 봐도 돼요?”
현우가 메일함이 그대로 떠 있는 노트북으로 걸어가려는 진하의 손을 확 붙들었다.
“네?”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진하를 뒤에 남겨둔 채 현우는 황급히 테이블로 다가가 노트북을 쾅 닫아버렸다.
“지금은 매상 정리가 아니라 다른 일을 하던 중이라서.”
“다른 일이요?”
엉거주춤 서 있던 진하의 표정이 곧 당황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아, 죄송해요. 허락도 안 받고 함부로 컴퓨터를 보는 건 실례인데.”
진하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필사적으로 아무렇지 않음을 가장하였다. 마치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 했으니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는 듯 말이다. 맙소사. 이대로 가만있다가는 야심한 시각에 혼자 남아서 이상한 동영상이나 보는 남자로 낙인찍히게 생겼다.
“제가 지금 뭘 좀 쓰고 있는 중이라서.”
“아, 그러셨어요?”
그거야말로 천만다행이란 듯 환하게 웃던 진하가 미처 안심할 새도 없이 난감한 질문을 던졌다.
“글 쓰시는 재주까지 있는지는 몰랐어요. 혹시 에세이 같은 거 내시는 거예요?”
단순히 쓴다는 말을 집필로 받아들일 줄이야.
“그게 아니라 그냥 일기 같은 거예요.”
일기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 한 번도 써 본적도 없지만, 야동 보는 남자로 남을 수는 없어 필사적으로 둘러댔다.
“세상에. 일기를 쓰시는구나. 12시 넘게 마감하고 오전부터 또 오픈 준비도 하셔야 되는데 어떻게 그런 여유가 있으세요. 대단하세요.”
존경심을 담아 쳐다보는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마주한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폭소가 빵 터졌다. 도대체 이 야심한 시각에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극인가 싶으니, 웃겨도 너무 웃기다.
“어, 왜 웃으세요?”
“아뇨. 그냥. 갑자기 이 상황이 너무 재미있어서요. 도대체 이 시간에 왜 자다 깬 거예요?”
한바탕 웃음을 토해냈더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실은 기다리는 게 있어서요. 확인 차 잠깐 일어났어요.”
“이 새벽에 뭘 기다려요? 애인 전화?”
빙글거리며 쳐다보자 진하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그거랑은 전혀 다른데요, 느낌은 살짝 비슷해요.”
“그게 무슨 말이죠?”
“실은 메일을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진하가 비밀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렸다. 그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던 현우의 표정이 일순 경직 되었다.
메일이라고? 설마 내 메일?
“무슨 메일인데 그래요?”
말을 할까, 말까 한참을 뜸들이던 진하가 에잇, 결심을 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요, 엄밀히 따지면 사장님도 관계자니까 살짝 말해줄게요.”
아무래도 우려하는 대답이 나올 것만 같은 예감에 현우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은 저요, 그 세미짱 블로그에 댓글 남기신 분이랑 메일을 주고받고 있어요.”
“그래요?”
괜히 조마조마한 기분에 현우는 슬쩍 시선을 피하엿다.
“참 이상한 거는요, 얼굴도 모르고 그저 댓글 하나 읽고, 메일 한 번 주고받았을 뿐인데 굉장히 마음이 쓰이는 거 있죠. 오늘만 해도 아까 저녁 때 메일을 보냈는데, 계속 수신 확인은 하셨나, 한 시간마다 계속 확인해 보고 있고, 제가 생각해도 참 어이없어요.”
자기가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라는 듯 하하 웃는 진하와는 달리 현우는 공연한 죄책감으로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냥 자요.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와 있겠죠.”
“그래야겠죠! 사장님 말씀은 항상 정답이니까.”
순진하게 바라보는 무구한 표정에 현우는 그만 아연해졌다.
나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꼭 마니또 게임을 보는거 같네요 ㅎㅎㅎ
나중에 사촌오빠님이 현우라는 걸 알게되었을때 진하 반응이 너무 궁금하네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