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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진하가 오븐에 넣어둔 빵을 점검하고 있을 때, 문에 매달린 종에서 땡그랑, 낭랑한 소리가 울렸다.
왔구나!
순간 심장이 가슴을 뚫고나올 것처럼 격하게 뛰었다. 흠흠, 목청을 가다듬고 진하는 허리를 펴서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의 얼굴부터 확인했다. 기다리고 있던 사촌오빠님이 아니라 놀이터 사장님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잔뜩 긴장해 있던 진하의 표정이 실망 섞인 미소로 바뀌었다.
“어! 사장님이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하네요.”
사장님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주방 쪽으로 흘긋 시선을 던졌다.
“식사 하러 오신 거예요? 어쩌죠. 제가 지금은 누구랑 좀 선약이 있어서 음식을 해드릴 수가 없어요. 음, 좀 중요한 약속이에요.”
미안한 표정으로 양해를 구하는 진하를 쳐다보며 서 있던 사장님이 말이 끝나자 세팅이 되어 있는 테이블로 가 앉았다.
“어머, 지금은 좀.......”
식사는 안 된다고 하는데도 막무가내로 테이블, 그것도 선약 손님을 위한 자리에 앉는 안하무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진하는 그저 당황스러운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사장님이 경우 없이 그럴 분은 아니므로.
“내가 아직도 놀이터 사장으로 보여요?”
사장님이 긴 다리를 외로 꼰 채 주방에 서 있는 진하를 향해 굳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이렇게 농담이나 주고 받고 있을 상황이 아닌데.
진하는 초조한 심정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사촌오빠님이 오기 전에 얼른 사장님을 내보내는 게 급선무다.
“죄송한데요, 사장님. 실은 오늘 중요한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지금 다른 손님을 받을 수가 없어요. 죄송해요. 일부러 들르셨는데.”
염치불구하고 무조건 나가달라는 의사를 내비치는데도 사장님은 요지부동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방금 전 했던 대사를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내가 아직도 놀이터 사장으로 보이나 보네.”
도대체 왜 이렇게 눈치 없이 구시는 거지. 사장님에게 불편한 내색은 차마 할 수가 없어 진하는 다시 한 번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죄송한데, 지금 손님이 오실 때가 됐거든요. 10시 약속이에요.”
“되게 눈치 없네. 내가 꼭 내 입으로 말을 해야 돼요? 나 오늘 놀이터 사장으로 여기 온 거 아니에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무슨 눈치가 없다는 거야.
헷갈리는 표정으로 서 있던 진하가 별안간 입을 떡 벌렸다.
“설마!”
“아마 맞을 거예요.”
사장님이 테이블 위에 올려둔 카드를 집어 들며 불이라도 튈 것처럼 격렬한 진하의 시선을 피하였다.
“잠깐! 잠깐만요. 사장님이 사촌오빠님이었다고요?”
진하가 재차 확인을 요구하자 사장님은 못 들은 척 메뉴가 적힌 카드를 들여다보았다
“와, 시식회 메뉴가 한 번 풍성하네.”
시식회! 따로 확인할 필요조차 없는 둘 사이의 키워드 아닌가.
“말도 안 돼. 세상에. 상상도 못 했어요.”
“식전주. 프로슈토와 살라미. 이탈리안 가정식 반찬 네 가지. 치아바타와 포카치아. 파스타. 스테이크. 살라메 초콜렛. 스페셜 커피. 저녁 안 먹길 잘 했다. 근데 음식은 언제 나와요? 나 지금 배고파 쓰러지기 일보직전인데.”
메뉴 카드를 들여다보며 딴청을 피우는 사장님의 옆얼굴에서 역력히 드러나는 멋쩍어하는 기색에 그녀는 더 이상 캐묻기를 포기하였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프로슈토부터 얼른 내 갈게요.”
사장님을 홀에 남겨두고 주방으로 들어온 순간 진하는 다리에서 힘이 쫙 풀렸다.
어떻게 그렇게 눈치가 없었을까? 생각해 보면 사장님이야말로 세미짱의 블로그 사건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사촌오빠를 사장님으로 대입시키는 순간 모든 일들이 순식간에 이해가 갔다. 메일을 받자마자 다음날 아침 사장님을 붙들고 그렇게 감격해하며 난리를 쳤으니, 내가 한 일이오 밝힐 수도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더 해 구구절절한 메일에다 시식회 초청까지! 사장님께 보인 주책과 꼴불견을 떠올리는 순간 진하는 스테이크 대신 오븐 안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지금은 그냥 생각을 말자! 최소한 불과 칼을 다루는 주방 안에서만큼은. 오로지 시식회 생각만 하는 거야. 밖에 저녁도 안 먹은 배고픈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고.
진하는 프로슈토와 살라미를 와인과 함께 내갔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까, 막막해 하고 있는데 다행히 사장님이 먼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이 햄들은 어디서 사죠?”
접시 위에 다양하게 세팅 되어 있는 프로슈토와 살라미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폼이 진심으로 궁금한 기색이다. 지금 이 상황에 이걸 어디서 샀는지가 궁금하다니! 태평한 태도에 내심 어이가 없었다.
“따로 거래하는 데가 있어요. 이탈리아 식재료들만 수입해서 파는 곳인데, 관심 있으시면 연락처 알려 드릴까요?”
그러자 사장님이 접시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종류가 굉장히 다양하네요. 보통 이렇게 많은 종류를 맛보기는 힘든데.”
“이건 이탈리아 가정식 반찬이에요. 유학 시절 스승님 댁에 식사 초대 받았을 때 배워둔 레시피대로 한 번 만들어 봤어요.”
네 가지의 이탈리아 가정식 반찬을 내놓으며, 설명을 덧붙이자 사장님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소박한 반찬들을 들여다보았다.
“이탈리아 가정식 반찬이라. 괜히 특별해 보이는데요.”
“전에 삐꼴로 자르디노만의 콘셉트에 대해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래서 생각한 건데, 이탈리아 가정에 식사 초대 받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살려보려고요.”
“좋은데요.”
그것만으로 합격점을 받은 것 같아 진하의 표정이 처음으로 환해졌다.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어필할 거죠?”
“일단 제 생각으로는 밖에 간판에 조그맣게 간판을 하나 더 덧대어 달까 해요. 이탈리아 가정식 요리라고.”
그러자 사장님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네요. 그런데 이탈리아 가정식 요리보다는 이탈리아 가정의 식사초대가 더 구체적으로 들리는데요?”
“아, 그래요? 그건 그냥 제가 노트에 메뉴 구상할 때 적어본 건데.”
“그럼 아예 이건 어때요? 이탈리아식 오첩반상.”
엉뚱한 표현에 진하는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기발하긴 한데 그건 표절이에요. 경상도 쪽에 벌써 이탈리아식 백반이라는 상호가 있거든요.”
“말도 안 돼! 나보다 할 발 앞선 사람이 있었다니.”
“개그맨 전유성 씨요. 전유성 씨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라는데요.”
“그래요?”
“네. 경상북도 청도에 전유성 씨가 하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거기 주방장이 따로 독립해서 개업을 했대요. 그래서 직접 상호를 지어주셨대요.”
진하의 얘기를 듣고 있던 사장님이 픽,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인터넷 엄청 했나보네요. 간판에 뭐라고 써야 하나 생각하느라.”
“어, 어떻게 아셨어요?”
“척하면 척이죠. 그 눈치 하나 없을까 봐요.”
“눈치 빠르신 분은 좋겠어요.”
새침하니 얘기하고는 소심하게 등 돌려 주방으로 향하는 진하의 등 뒤에서 사장님의 웃음소리가 낮게 들렸다.
마지막으로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자 사장님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잠깐 앉아서 얘기 좀 해요.”
“잠깐만요.”
진하는 도망치듯 주방으로 들어와 얼음을 가득 채운 유리컵에 탄산수를 가득 따랐다. 갑자기 입안이 바싹 말랐다.
“목이 말라요?”
사장님이 진하가 들고 있는 유리컵을 발견하고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네.”
주눅 든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 진하를 쳐다보며, 사장님이 입매를 허물며 슬쩍 웃었다.
“왜 긴장을 하시나. 난 그저 모니터 요원으로서 몇 가지 조언을 좀 하려고 했을 뿐인데?”
빙글거리며 놀리는 게 얄밉긴 하지만, 대놓고 따질 수도 없는 입장이라 잠자코 수긍을 하였다.
“무슨 조언이요?”
“주방 앞쪽으로 오픈 냉장고를 하나 놔두면 어때요?”
“왜요?”
굳이 그렇게 할 게 뭐 있나 의아해서 묻자 그가 대답했다.
“프로슈토랑 살라미 종류도 많고 좋은 품질을 쓰고 있잖아요. 손님들에게 그런 걸 은근슬쩍 부각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소박한 가정식을 표방하는 곳이니 굳이 감추며 멋 부릴 필요 없잖아요. 어디서 구하는지 궁금해 하는 손님들한테는 아까 나한테 말했던 것처럼 솔직하게 말하지 말고 살짝 바꿔서 얘기해요. 이탈리아에 아는 지인이 있는데 그분한테 부탁해서 직접 공수하고 있다고.”
진하가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건 좀 사기 치는 거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반찬 네 가지 놔두고, 이탈리아 가정의 식사 초대라는 것도 사기에요.”
“그런가........”
고개를 갸웃하며 헷갈려하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사장님이 갑자기 그 얘기를 꺼냈다.
“처음부터 일부러 숨길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냥 난 지금처럼 뭔가 설명을 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을 피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단정하고 서늘해 보이는 눈매가 난감하게 찌푸려지는 것을 쳐다보며 진하는 저절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제가 눈치만 좀 빨랐어도 이렇게 쥐구멍을 찾고 싶은 상황은 안 만들었을 텐데. 참 면목이 없네요.”
그 동안 보낸 구구절절한 메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면서 진하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건 그래요.”
사장님이 너무 쉽게 동의를 하자 순간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힌트라도 좀 주시지.”
“뭐라고 줄까요.”
“놀이터, 모른 척 하시오 이렇게 적어서 메일을 보내시면....... 네, 그래요. 무조건 죄송하게 됐어요.”
진하가 자신 없이 꼬리를 내리자 현우가 짐짓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도 뭐, 재밌었어요. 메일함 열어볼 때마다 얼마나 스릴이 넘치던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내젓는 사장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진하는 조금 가슴이 쓰렸다. 뭐랄까. 가슴 설레며 정성스레 서서 보낸 편지가 함부로 구겨진 채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 이럴까.
“그때는 진짜 너무너무, 기쁘고 설렜거든요. 그렇게 댓글을 남길 정도로 내 음식을 맛있게 먹어준 손님이 있었다니. 인기 많은 가게도 아니고 정말 드문드문, 손님이 너무 없어서 고민일 정도로 한산한 가게에 들러준 손에 꼽을 정도의 손님 중에 그런 손님이 있었다니. 게다가 글도 너무 근사하게 잘 썼잖아요. 와, 이렇게 멋진 사람이 내 음식을 인정해줬어! 너무 뿌듯하고 자랑스럽더라고요. 너무 들떠서 이성이 마비 됐나 봐요.”
그러자 사장님이 억울한 표정으로 불쑥 끼어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자랑스럽지 않다는 거예요?”
“감사한 일이지만 자랑스러울 건 없죠.”
“왜요?”
“사장님은 손님이 아니잖아요.”
“어! 돈 안 냈다고 손님 취급도 안 해주네. 이럴까봐 내가 돈을 내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렸는데.”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진하가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나 맛없게 먹은 음식, 맛있다고 댓글 남길 정도로 그렇게 인정 많은 사람 아니에요. 그게 그렇게 근사한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굳이 댓글 달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기는 했어요.”
“고맙습니다.”
괜스레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쳐다본 창밖으로 여느 때와 다른 없는 밤풍경이 평화로웠다. 이따금씩 지나가는 자동차, 주홍빛으로 빛나는 가로등, 새까만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가로수 너머 또렷하게 빛나는 놀이터의 간판.
“이번 휴일엔 놀이터에 갈게요. 생각해 보니까 놀이터 음식을 한 번도 안 먹어봤네요.”
진하는 처음으로 그가 하는 레스토랑의 음식은 어떤 맛일지, 식사를 할 때 어떤 분위기가 나는지, 알고 싶어졌다.
“우리 음식이야 뭐 자타가 공인하는 대중적인 맛이죠.”
“어떤지 먹어보고 싶어요.”
“이거 갑자기 전세가 역전 됐네. 나 왜 갑자기 긴장 되지?”
짐짓 긴장한 표정으로 이마에 땀을 닦는 시늉을 하는 남자의 긴 손가락을 홀린 듯 쳐다보다가 진하는 얼른 시선을 떼었다. 위험! 모든 여자가 흠모하는 남자를 쳐다보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긴장하지 마세요. 어지간한 음식은 다 맛있게 먹으니까.”
“그게 더 무서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란 말을 들으면 치명타거든.”
“왜 갑자기 소심해지셨어요?”
“잘난 척 못 할까 봐 그러죠.”
“아직도 남았단 말이에요?”
“내가 언제 잘난 척을 하기는 했나?”
“와, 앞으로는 우리 메일로만 만나요. 글로는 멋있었던 분이 말은 왜 이래요.”
생각지 못 한 공격이 재미있었는지, 사장님이 눈을 구겨가며 환하게 웃었다. 진하는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만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였다.
서로에게 한발짝씩 다가가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