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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를 줄게. 하나, 네가 네 사랑을 버리면 한 명은 살아. 둘, 네가 네 사랑을 버리지 않으면 둘 다 죽어.”
사랑이라니. 딱히 애인이라는 적당한 말로 정정해 달라고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라 너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무시무시한 음색의 남자는 빙글 빙글 권총을 돌리고 있기도 했는데, 우발적으로라도 쏠 것 같아서. 물론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사실 저 총의 총알이 그대로 뱃속을 관통한데도 억울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억울할만한 일 따위 만들어놓지도 않았다. 아마 그녀의 뱃속을 뻥, 쏜다 해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이를테면 뻥과자 같은 사람이니까. 그녀는 아무 것도 갖지 않고 아무 것도 얻으려 하지 않았으니까. 이 삶은 이를테면 덤이다, 생각하고 살았다. 한편으로는 억울하지도 않아? 이런 마음도 들었지만 체념이 빨랐다. 어차피 안 될 거야, 하는 그럼 체념.
“난.”
“벌써 선택하려고? 아 세 번째 보기도 줄까. 혹시 네가 삶에 대한 미련이 길까 봐. 보기 하나 더 줄게. 네 대신 네 사랑을 버려. 네 사랑, 하나 죽이는 걸로 퉁쳐줄게.”
차도남스럽게 생겨서는 말하는 건 좀 유치찬란했다. 퉁쳐준다니. 생각보다 수다스러운 남자였다. 굵은 선과 어두운 피부, 석탄처럼 까만 눈동자를 보면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섭게 잘 생긴 남자였다. 그래서 이를테면 ‘죽을래?’란 한 마디로 지금의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 남자였다. 지금의 상황이란, 그녀의 집 거실 한가운데에 대자로 뻗어있던 그녀에게 갑자기 하늘에서 나타난 남자가 저렇게 지껄이고 있는 바로 그 상황을 말하는 것이었다.
“죽여요.”
“뭐?”
“그냥 날 죽이라구요. 빵, 쏴 버려.”
이거 정신 나간 거 아니야? 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남자의 눈빛에 너는 희미한 기쁨을 느꼈다.
“난 어차피 미련 없어. 25년 동안 죽을 날 기다리고 있는 일, 재미없었어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빨리 죽여줘요. 차라리 얼른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게 더 재밌겠어.”
“죽고 싶다고?”
“아니. 죽고 싶진 않아.”
“그런데?”
“죽일 거면 빨리 죽이라고.”
“좀 더 정상적인 사람의 반응은 할 수 없는 건가. 이를테면, 살려주세요라고 빈다든가.”
그는 좀 더 극적인 상황을 바랐나보다. 너가 울면서 어떻게든 살려주세요, 뭐라도 할게요, 라고 한다든지 하는 그런 상황. 하지만 너는 내내 준비해 왔다. 내내 비굴해지지 않기 위해 연습해 왔다. 그런데 지금 막상 너무나 기다려왔던 상황이 왔는데 여기에서 비굴해질 순 없는 노릇이었다.
“너, 이름이 뭐야?”
남자가 권총을 그대로 든 채 누워 있던 그녀에게 다가와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너.”
“뭐?”
“너라구요. 사너. 그게 내 이름이에요.”
“할머니, 꼴통이라구요, 완전. 대자로 누워서 죽여요, 하는 걸 할머니가 봤어야 했어.”
“그러는 너는 남의 집에 무단침입이나 해서는 그렇게 권력남용해도 되니? 권총 가져가서 그걸로 협박했다면서.”
“에이, 죽여버리라곤 한 건 할머니면서.”
“그래, 내가 그러긴 했지.”
“국민의 지팡이, 검사한테 그런 걸 시켰으면서 권력 남용 운운해도 됩니까? 살인은 범법이라구요 무려, 범법.”
“난 법이 금하는 걸 어기는 걸 업으로 살아온 사람이야. 네가 검사든 변호사든 나와는 별개의 문제이지.”
아 그러십니까. 아정은 할머니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할머니의 파란 보료에 드러누웠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쓰인 액자가 눕자마자 눈에 턱 걸렸다. 그 옆에는 시퍼런 칼이 유리도 없이 함께 액자에 걸려있었다. 저 두 액자가 할머니의 인생 반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할머니는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악착같이 독해져서 사람을 사고 자신의 복수를 하나하나 완성해갔다. 그것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완결된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할머니가 얼마 전 ‘이제 복수를 완결해야겠다.’고 말할 때까진. 검사인 그에게 살인-물론 그것이 직접적으로 할머니가 손에 피를 묻힌 게 아니라 하더라도 할머니가 살인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그는 생각했다.-을 한 할머니란 존재는 그의 도덕적 신념을 실험하는 존재였다. 그녀는 무려 한 일가를 섬멸했다. 할머니는 자신의 배우자였던 할아버지를 사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참히 할아버지는 살해되었고, 할머니만이 남겨졌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복수의 화신이 되었다.
아정은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크게 실감나지는 않았다. 언젠가 할머니의 장롱에서 보았던 수십개의 손가락들을 보지 않았다면 할머니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가 보물처럼 간직하는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검지를 방부 처리해 모아놓은 도감 같은 것이었다. 그 밑에는 마치 표본이라도 되는 듯 누구의 몇째 손가락, 누구의 몇째 손가락 이런 것들이 적혀 있었다. 그 순간 그의 할머니였음에도 공포감에 머리털이 삐죽 설 정도였다.
그런데 얼마 전 할머니가 그에게 말한 것이었다. ‘아직 한 명이 남았다는구나.’ 그래서 그는 어디까지난 할머니가 정말 그 여자를 죽이기라도 할까봐 시찰을 갔던 것일 뿐이었다. 정말 죽일 생각으로 갔던 건 아니었다. 마침 문이 열려있기도 했고.
거기서 헛소리가 나온 건 그의 실수였다. 그 전에 그녀에 관한 보고서를 흘깃 봤을 때, ‘애인있음’이란 문구가 보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런데 방심한 눈빛으로 이방인인 그를 쳐다봤을 때 왠지 모를 반발이 들었던 거다.
‘얘 뭐야.’ 하는 그런 뜨악함에 이어 텅 빈 눈동자를 보니 그 텅 빈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응시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어이없게도.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헛소리를 지껄여댔고, 이런 병신같은 놈이 있어? 하는 눈빛을 받긴 받았다.
그런데 이름이 너, 라니.
“예쁘던?”
“응.”
“네 입에서 예쁘단 말이 나오니 신기해 죽겠구나. 그러나저러나 어쩌나. 이제 곧 죽을 몸인데.”
하얗게 센, 고집스럽게 쪽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할머니가 심술궂게 웃었다.
“정말 죽일 참이우?”
“응.”
“그거 범법이래도?”
“알아, 이 놈아.”
“내가 잡아갈 거야, 할머니.”
“그러든지. 손자 손에 잡히는 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아이씨, 정말. 이제 고만 좀 해요. 몇십 년이나 지난 일인데.”
“아직 몇십 년 밖에 안 된 일이지.”
“고집하고는.”
“막을 수 있으면 막아봐.”
“뭐라구요?”
“막을 수 있으면 막아보라고 했다. 귓구녕이 막혔어?”
할머니가 심술궂게 부채로 그의 귀를 탕탕 쳤다. 아정은 아야, 하고 귀를 매만지며 황급히 보료에서 일어나 도망을 치며 외쳤다.
“할머닌 걔 못 죽여! 못 죽이게 할 거야. 검사 할머니가 사람을 죽이는 게 말이 돼! 두고 봅시다!”
단편이에요. 문득 생각나서.
머릿속에서 떠오른 건 굉장히 심각하고 우울한 내용이었는데, 살인이라는 말이 들어갔는데도
심각해지지 않는 분위기, 라 그냥 질러보았네요.
그냥 짧게 복수, 에 관히 써보고 싶어서.
A4 열 장 정도로 생각해 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