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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니, 여기 팔래스 앞에 조그맣게 쓰여 있는 건 뭐에요?”
서빙 직원 윤지가 냅킨을 꽂다가 말고 궁금한 표정으로 상호가 적힌 아랫부분을 들여다보았다. 싱크대 앞에 서 있던 진하가 기막힌 표정으로 윤지를 쳐다보았다.
“석 달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야 우리 집 상호가 뭔지 궁금해졌니?”
윤지가 멋쩍게 웃으며 진하와 눈을 맞추었다.
“내가 원래 영어랑은 안 친하잖아요.”
“영어가 아니라 불어거든. 쁘띠(petit). 작다는 뜻이야.”
학창 시절을 연애로 점철하다가 고등학교 졸업보다 임신을 먼저 했다는 윤지가 단어 한 마디에 진하를 존경의 눈빛으로 우러러보았다.
“우와, 언니. 불어도 해요?”
과분한 칭찬을 들을 때면 늘 그렇듯 진하가 볼을 붉게 물들이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에이, 사전 찾았지.”
“근데 왜 사전까지 찾아가면서 불어로 이름을 붙였어요?”
“다 뜻이 있느니라.”
사실은 팔래스의 메뉴판 표기법이 불어였던 것을 기억하고 거기에 따른 것뿐이다.
“있어 보이려고요?”
꼭 저 같은 해석이라, 짧게 웃었다.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댄데, 불어 한 마디 썼다고 있어 보이겠니? 시내에 나가 5분만 걸으면 뜻 모르는 외국어 간판들이 수두룩한데.”
“차라리 팔래스가 낫지 않아요? 앞에 괜히 이상한 불어를 붙여놓으니까 이름이 너무 어렵다.”
윤지의 지적에 괜스레 마음만 찜찜해졌다. 그렇지만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조그만 식당에다가 팔래스라는 이름이 가당키나 하냔 말이다. 어떻게든 팔래스란 이름은 살려야 할 것 같은데 그대로 쓰자니 과장이 지나쳐 우스워 보일 것 같아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고심하다가 결국 쁘띠라는 사족을 붙이기로 한 것이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쓴 것은 어떻게든 팔래스란 이름을 훼손하기 싫은 그녀 나름의 궁여지책이 되겠다.
“그렇지만 인간적으로 이 조그만 데다 팔래스라고 떡하니 이름 붙이기엔 좀 찔리지 않겠니?”
윤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요, 꼭 팔래스라고 이름 붙어야 됐어요? 좀 올드하잖아요.”
순간적으로 울컥 치밀어 오르기는 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요즘 시대에 누가 레스토랑에 팔래스란 이름을 붙이겠는가. 모텔이라면 또 모를까. 그렇다고 네 말이 맞는다고 맞장구를 쳐 줄 기분은 아니라 묵묵히 오늘 샐러드로 낼 야채를 다듬었다. 채소의 껍질을 벗기고 찬물에 흔들어 씻고 먹기 좋을 정도로 찢고 자르는 단순한 작업은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는 적역이었다.
요리사 겸 주인, 그 밑에 홀 담당 직원이 달랑 한 명, 4인용 테이블 다섯 개를 억지로 우겨넣은, 아담한 양식당. 스파게티 두 종류, 스프 한 종류, 바게트 샌드위치 세 종류, 샐러드 한 종류, 오늘의 메뉴라는 이름으로 매일 바뀌기는 하지만 하루에 열 가지가 채 되지 않는 간략한 메뉴. 거기다 대고 팔래스라니, 차라리 진하네 주방이라는 이름이 훨씬 더 근사해 보인다. 그렇지만 간판을 걸 때만 해도 팔래스란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게끔 제대로 해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작은 식당의 규모가 문제였다. 주방이 차지하는 공간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데다가 화장실에 주차 공간까지, 생각지 못 했던 공간까지 만들고 나니 홀이 터무니없이 작았다. 매일 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몇날며칠을 고심 하다가 결국 생각한 것이, 사전 예약 레스토랑이었다. 테이블은 딱 두 개만 놓고, 예약을 받을 때 미리 메뉴 주문까지 받아서, 테이블 세팅부터 음식 서빙까지 손수 다 하는, 제대로 된 1인 레스토랑을 꾸려갈 작정이었다. 말도 안 된다, 네가 무슨 호텔 주방장 출신이라도 되냐, 턱도 없이 무슨 예약제냐, 반대 의견들이 난무했지만 임대료를 내야 하는 것도 아니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로 무조건 밀어붙였다.
<예약 손님만 받습니다.>
가게 문 앞에 팻말을 걸어놓을 때만 해도 오며 가는 길에 아무나 닥치는 대로 들어와서, 예약제에 대해 물어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가 무색해질 정도로 가게는 조용하였다. 정말이지, 텅 빈 주방에 홀로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식당 주인의 심정이 어떨지는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으면 차라리 낫다. 끊임없이 오가기는 하는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때의 그 애타는 마음은 남녀 간의 짝사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쩌다 한 번 눈길을 줄 때면 쿵쿵, 가슴이 뛰다가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털썩 체념하듯 내려앉는 마음.
이쯤 되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너무도 고맙고 반가워, 뭐라도 해 주고 싶어 안달이 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프로의 세계에서 이런 태도는 금물이라는 생각에 손님을 향한 애절한 순정을 어색한 미소 뒤로 감추고, 능숙한 프로인 척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어서 오세요.”
예약 소리는 입 밖에도 내지 않은 채 달랑 두 개 밖에 없는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당당히 요구하는 손님에게 문 앞에 쓰여 있는 팻말을 읽지 못 했느냐며 지적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다가가 죄 지은 목소리로 고백성사를 하는 것이 고작이다.
“죄송한데요, 손님. 저희 집이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거든요.”
“아, 정말요? 그럼 예약 안 하면 주문이 안 되는 거예요?”
실망으로 일그러지는 손님의 표정과 마주한 순간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던 경영철학이 단숨에 흔들리고 만다.
그렇게 일주일을 버티다가 정확히 2주가 되는 날 “죄송한데, 그냥 지금 해주시면 안 돼요?” 하는 손님에게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마땅히 준비해 놓은 재료가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점심 식사로 만들어둔 바게트 샌드위치 서빙 했는데, 그게 대 호평이었다.
“와, 맛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맛있게 먹어주는 손님의 모습에 손끝까지 뜨겁게 흥분이 되었다. 그리고는 그날 밤 조용히 문 앞에 걸어두었던 예약제 팻말을 떼어냈다.
첫날 다녀갔던 손님이 나름 유명 블로거였던 모양인지, 블로그에서 보고 왔다며 바게트 샌드위치를 주문하는 손님들이 대부분이라 진하가 점심으로 먹던 바게트 샌드위치가 쁘띠 팔래스의 간판 메뉴가 되었다. 아무리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지만 쁘띠 팔래스에서 제대로 된 거라곤 간판뿐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바게트 샌드위치 덕분에 테이블 세 개를 더 넣게 되었고, 윤지 월급 정도는 거뜬히 남을 만큼 운영해 나가고 있다.
“옴마야. 강동원 왔다!”
윤지가 유리창을 닦다가 말고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실제 영화배우 강동원이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애석하게도 건너편 놀이터의 공사를 맡은 인테리어 업자다. 놀이터 역시도 애들 노는 놀이터가 아니라 요즘 잘 나가는 퓨전 레스토랑이다. 말이 레스토랑이지, 주방장이 제대로 조리한 요리를 서빙 하는 게 아니라 주방 직원이 매뉴얼대로 만들어낸 음식을 내놓는, 흔하디흔한 집이다. 하여간 중요한 사실은 스무 살에 큰 아들을 낳고, 그 이듬해 둘째를 낳아 스물일곱 나이에 벌써 초등학생 학부모인 윤지가 저 인테리어 업자만 보면 아이돌 가수 극성팬 못지않게 흥분을 한다는 것이다. 훤칠한 키에 주먹만 한 얼굴, 광활한 어깨, 윤지의 침을 튀는 열변에도 불구하고 강동원에 비할 바는 아니라는 게 진하의 결론이었다. 아니, 솔직히 자기가 강동원이면 왜 저기서 레스토랑도 아닌 술집 인테리어나 하고 있겠냐고.
“오늘은 왠지 운이 좋을 것 같은데요. 오픈 전부터 강동원을 보다니.”
또 시답잖은 찬양을 늘어놓을 분위기라 진하가 지레 뒷걸음질을 쳤다.
“윤지야, 오픈 시간 얼마 안 남은 거 알지?”
“걱정 마세요.”
룰루랄라, 엉덩이를 흔들며 신나게 유리창 얼룩을 닦는 윤지의 뒤통수에 대고 그만 픽, 웃고 말았다. 입이 가볍다는 것만 빼면 정말이지 나무랄 데가 없는 아이다.
윤지와는 3년 동안이나 같은 부서에서 일을 했다. 진하는 정식 직원이었고, 윤지는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생이었는데, 마음이 잘 맞아서 퇴근 후에도 따로 만날 정도로 친하게 지냈었다. 2년 전에 윤지가 회사를 그만 두게 되면서부터 연락이 뜸하다가 홀 서빙 일을 부탁하기 위해 진하가 먼저 연락을 했다. 3년 동안 지각 한 번 한 일 없을 정도로 성실한데다 행동이 재바르고 늘 웃는 얼굴에 고지식할 정도로 투명한 금전 감각. 홀 서빙 직원으로 윤지 외에 다른 사람은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였다.
“근데 언니, 오늘 메뉴는 뭐예요?”
윤지가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으로 묻는 오늘의 메뉴는 손님들에게 서빙 하는 메뉴가 아니라 본인이 먹을 아침 식사 메뉴다. 쁘띠 팔래스에서는 오픈 전에 늦은 아침 식사를, 손님이 뜸한 4시쯤 늦은 점심 식사를 한다. 양식을 별로 안 좋아하는 윤지 때문에 식사 메뉴는 주로 한식이다.
“김밥이야.”
손이 많이 가는 일반적인 김밥이 아니라, 김밥 속에 한 가지 재료만 넣는 이른 바 진하네표 김밥이다. 오늘 넣은 김밥 속 재료는 혀끝이 얼얼해질 정도로 매운 어묵 볶음이다. 학원가 앞에서나 시장에서도 이런 김밥을 판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진하네 집에서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김밥을 만들었다.
“아싸! 유리창 빨리 닦고 김밥 먹어야지.”
콧소리를 섞어가며 스피드를 올리는 윤지의 성원에 힘입어 진하는 밥통을 열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현미밥을 커다란 볼에 퍼 담았다. 깨소금, 매실 엑기스, 참기름을 밥 위에 넓게 펴서 뿌리고 주걱으로 고루 섞었다. 양념은 모두 어머니가 직접 만들어 가져오신 것들이다.
진하에게 있어 어머니의 향은 향수도 화장품도 아닌 참기름 냄새였다. 어머니의 손에서는 항상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감돌았다. 언제, 누가와도 밥 한 끼 정도는 힘 하나 안 들이고 뚝딱 만들어내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부터 집에 손님을 들이는 일이 뜸해졌다. 대학생이던 아버지가 고등학생인 어머니의 수학 과외 선생으로 갔던 게 두 분의 첫 만남이었다. 어머니를 보고 첫눈에 반한 아버지는 어떻게든 어머니를 대학생으로 만들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공부를 가르쳤다고 한다.
한 여름 폭풍 같던 사랑이 따뜻한 아랫목 같은 사랑으로 바뀌고, 그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다가 하루아침에 혼자가 되어버린 어머니는 유달리 휘청거렸다. 아직 중학생이던 진하를 처량하게 바라보며,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라는 말을 건넸을 때 위태로워 보였던 어머니의 표정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깊은 밤 잠 못 이루고 거실 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어머니의 쓸쓸한 뒷모습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며 같이 밤을 지새웠던 기억은 아직까지도 마음속에 남아서, 어머니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저렸다.
“엄마야!”
느닷없는 비명 소리에 진하가 김밥을 말던 손을 멈추었다.
“왜 그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윤지가 기겁한 표정으로 진하를 돌아다보았다.
“와요!”
“누가?”
“그 사람이요!”
“누구?”
“강동원이요!”
순간 실제 강동원이 오는 건가 싶어 멍해 있는데, 윤지가 후다닥 문가에 선 것과 거의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안녕하세요!”
그 남자다! 놀이터 강동원.
흐뭇하게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