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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컹.


25년 전통을 자랑하던 양식당 팔래스의 간판이 내려졌다. 팔렸다고 하더니, 이제 본격적으로 리모델링 작업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진하는 씁쓸한 표정으로 자바라 창 앞에 바싹 붙어 서서 철거 작업을 지켜보았다. 인부들이 거친 동작으로 함부로 바닥에 내팽개친 간판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벌써 5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진하네 집 바로 앞, 폭이 좁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우뚝 서 있는 팔래스의 화려한 외관을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우리 집이 지어진 바로 그 해에 오픈을 했다고 몇 번이고 말씀하시던 아버지. 우리 집과 팔래스가 역사를 같이 했다는 사실을 두고 진하가 품었던 뿌듯한 자부심도 아버지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게 무어 그리 대단한 영광이냐며 의아해할 수도 있겠지만 팔래스는 그저 단순한 레스토랑이 아니었다. 양식이라고 하면 돈까스가 고작이었던 척박한 시기에 제대로 된 양식을 서비스하는, 그 안에 앉아서 식사하는 것만으로도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드는 최고의 레스토랑이었다. 그토록 고고하고 위풍당당하였던 팔래스도 마지막 모습은 예외 없이 초라하였다.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살아계시던 그때가 진하네 집도, 팔래스도 최고의 전성기였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간암으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아버지가 아내와 외동딸에게 남겼던 유일한 유언은 생계를 위해 아무런 일도 벌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유능한 회계사였던 당신의 그늘 아래서 안락하게만 살아온 아내가 섣부르게 일을 벌여 물려준 재산마저 허무하게 날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 탓이었다. 숨이 다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신 없이 세상을 헤쳐 나가야할 아내와 딸 걱정에 눈조차 제대로 감지 못 하였던 아버지 덕분에 지금껏 별 탈 없이 살고 있지만 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어머니의 쓸쓸한 옆얼굴, 반창고를 찾으려고 뒤진 서랍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메모지에 적힌 아버지의 익숙한 필체, 결혼식장에서 딸의 손을 잡고 걸어 들어가는 신부 아버지의 듬직한 뒷모습.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상적인 풍경에 목구멍이 아플 정도로 차오르는 울음을 어찌하지 못 하고 방 안에 웅크리고 앉아서 숨죽이며 통곡하던 무수한 날들.


한 바탕 울음을 토해내고 기운 없이 앉아 있으면 창 밖에서 팔래스의 간판이 자애롭게 진하를 바라보았다. 곧 괜찮아질 거야, 위로라도 건네는 것처럼.


생일, 입학식, 졸업식, 크리스마스, 주말 외식....... 세 식구의 모든 추억이 온전히 녹아 있는 사진첩 같은 저 곳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하는 걸까. 제발 기적이 일어나기를, 환하게 불이 켜진 팔래스의 간판을 바라보며 기도하였던 그 무수한 밤들.




1년쯤 사귀었던 남자 친구와 헤어졌던 작년 겨을, 어머니가 집을 떠났다. 신부전증으로 제법 오래 투병을 하던 이모부가 세상을 뜨자 이모네 집으로 들어가 살림을 합치게 된 것이다. 혼자서 적적하게 집이나 지키고 있는 것보다는 이모가 계신 전원주택으로 내려가 텃밭을 일구며 사는 편이 어머니에게 훨씬 더 나은 선택이라는 생각에 정말로 괜찮겠느냐며, 몇 번이고 확인하며 걱정하는 어머니의 등을 진심으로 떠밀었다. 그러나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티가 난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썰렁하던 집이 어머니마저 떠나고 나니 무덤처럼 적막하였다.


12월, 뼛속까지 스미는 냉기에 몸을 잔뜩 움츠리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밑도 끝도 없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친구와 끝장이 나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텅 빈 집으로 들어가는 초라한 이십 대 후반. 아무 비전도 없이 그저 하루, 하루 시간을 때우는 게 고작인 지루한 노처녀. 학창시절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함께 걸어가던 친구들은 모두 저만치 앞서 가는데 혼자만 뒤쳐진 채 여전히 느리게 걷고 있는 낙오자. 이렇게 살다가 30대를 맞이하고, 40대, 50대, 점점 더 남루하고 초라해지는 인생이 되어갈 것이다.


이진하, 네 인생 참 깜깜하구나.


우울한 절망 속에서 바쁘게 걸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오로지 오늘쯤 불을 밝혔을 팔래스의 크리스마스 불빛이었다. 별이 쏟아진 것처럼 화려한 꼬마전구의 불빛을 보면 행복한 기운이 샘솟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팔래스 앞에 다다르자 꼬마전구는 물론이고, 간판마자 꺼져 있었다. 팔래스의 정기 휴무는 매월 첫째 주 월요일뿐이다. 불길한 기운에 사로잡힌 채 도로를 건너 굳게 닫혀 있는 팔래스의 문 앞에 섰다. 문 앞에 하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임대 문의.


순간 너무 놀라 숨을 멈추었다.


문을 닫는다고? 팔래스가? 그렇다는 것은 앞으로 영영 팔래스에 갈 수 없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결코 덜 하지 않은 절망감에 진하는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굳건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팔래스가 사실은 휘청거리고 있었다니. 바로 건너편에 살면서도 전혀 몰랐다.
주택가였던 이 동네가 상업 지구로 바뀐 게 벌써 몇 년 전 일이다. 카페나 술집, 레스토랑으로 개조한 집이 한 집, 한 집 늘어나더니 지금은 주택을 찾기가 힘들 정도다. 진하네 옆집도 재작년에 화로구이 집으로 바뀌어 제법 손님들이 드나들고 있고, 진하네 집으로도 괜찮은 조건을 들이대며 집을 내놓을 생각이 없느냐는 부동산의 문의 전화가 자주 걸려왔다. 급변하는 세상의 흐름에 팔래스도 결국은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이다. 힘들다고 쳐다본 것인지도 모르고, 제 편한 데로 해석한 채 나 몰라라 외면했던 것인가 싶으니, 속이 상하였다.


터벅터벅 집으로 들어와 2층 방 창가에 서서 불이 꺼진 간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팔래스가 사라지는데, 이대로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능에 눈물이 쏟아졌다. 지금보다 상황이 나아지면, 반드시 가려고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이라도 가는 건데. 뒤늦은 후회에 가슴이 미어졌다.


어쩌지, 어쩌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었을 때 팔래스는 그저 세 가족의 추억이 오롯이 녹아 있는 가슴 아픈 레스토랑이더니, 이렇게 닫히고 나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진하가 붙들고 있는 희망 전부가 되었다. 가슴 찢어지게 아플 때 위로해주고, 언젠가는 다시 저기 드나들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마음을 다잡아 주던 그녀만의 이상향. 이제 그것마저 잃었으니 어떻게 살아갈까. 서러움에 눈물이 터지려는 순간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생각이 섬광처럼 머리에서 번쩍 터졌다.


내가 직접 운영을 하자!


이 집을 판다고 해도 저 큰 건물의 임대료조차 빠듯할 테니 팔래스를 직접 운영하겠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그러니까, 팔래스라는 이름을 걸고 작은 레스토랑을 오픈을 하겠다는 말이다. 요는 팔래스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것이다. 인생은 길고, 레스토랑의 수명은 짧다. 일단은 열심히 돈을 벌어 모아서, 팔래스에 새로 들어온 레스토랑 주인이 두 손 들고 나갈 날을 기다렸다가 그때 팔래스를 임대하면 되는 거다.


죽어가는 팔래스는 다시 살리겠다는 황당하고 무모한 계획 때문에 진하는 아버지의 간곡한 유언을 깨기로 과감하게 결심을 굳혔다.


요리를 잘 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진하 역시도 요리 하나만큼은 자신 있단 소리 할 정도는 되었다. 그래서 평소에도 레스토랑이나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상사에게 깨지고 나서, 좋은 혼처 만나 결혼한 친구의 집들이를 갔다 온 날 도피처처럼 꺼냈다가 에이, 내가 어떻게, 하고 집어넣었던 한낱 개꿈이 한 순간에 절대로 거스르면 안 되는 운명처럼 되어버렸다.




본격적으로 책상 앞에 앉아서 레스토랑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가장 중요한 게 레스토랑의 위치인데, 옛 팔래스를 기리기에 최적의 위치인데다 무엇보다 임대료 부담을 덜 수 있다는 점에서 진하네 집 1층을 개조하기로 정하였다. 담을 허물어 야트막한 울타리를 만들고, 마당에는 널찍한 나무 테이블을 하나 놔둬도 괜찮을 것이다. 봄, 가을에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느끼려면 벽을 허물어 모두 자바라 창으로 바꾸는 게 좋겠지. 


절대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별거 아니었다. 가장 큰 고비가 엄마의 동의를 얻는 일이었다. 그 이후로도 일사천리로 진행 되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모두 다 견딜 만 한 고생들이었고, 해결책이 있는 문제들뿐이었다.


꼬박 6개월을 바쳐서 만든 레스토랑의 오픈을 바로 하루 앞두고 오늘, 팔래스의 간판이 내려졌다. 새로운 간판이 올라가기 바로 전날, 옛 간판이 내려지다니, 마치 하늘에 있는 아버지가 응원을 보내는 것 같아 예감이 아주 좋았다.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오랜만입니다~! ^^
이번 주부터 연재 시작이구요, 매주 일요일날 한 편씩 올립니다.


댓글 '6'

깡이

2010.12.13 15:10:22

좋아요! 기다립니다.

이경화

2010.12.13 19:11:30

꺄아아아악..리앙님 오셨군요.
이제 일요일만 손꼽아 기다리게 되겠네요.

마야

2010.12.15 16:43:38

얼마만이신가요??
저도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떡하니 글이 있어서 넘 기쁩니다.

레띠츄

2010.12.16 21:03:18

으아아아아아아 ㅠㅠㅠㅠㅠㅠㅠㅠ
웰 컴 백!!! 반갑습니다!!

피오나공주

2011.01.12 15:17:43

간만에 들어 왔는데.. 선물이 있네요.. 즐거운 하루가 될듯..
건필하세요

핑키

2011.08.09 23:36:40

여기서 편히 보는 즐거움에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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