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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딩동. 딩동.
 초인종 소리에 얇은 티를 손빨래하던 소열의 손길이 멈춰졌다. 12시도 되지 않았는데. 빨래를 하고 밥을 먹고 도망치려고 궁리하고 있던 소열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바다는 분명 오후쯤에 온다고 그랬었는데, 하고 생각하던 소열은 이 나쁜 한바다.  한바다가 뻥을 친 게 분명했다. 오리발 내미는 자신을 보며 머리를 쓴 게 틀림없었다. 친구라고 있는 게 이럴 때는 도움이 하나도 안된다. 생각하며 멈추었던 손길을 다시 움직였다. 아, 몰라. 하는 마음이 들면서 우선 이 빨래를 먼저 해결하자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 아닐지도 모르지. 주인아줌마가 전기세 받으러 온걸지도 몰라. 하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하얀 거품을 물로 헹구는 것을 마지막으로 빨래는 끝났다. 소열은 연분홍색-마시마로가 그려져있는-세숫대야에 빨래를 담았다. 이거 널고 정말 도망가야지.
하며 이마에서 나오는 땀을 팔로 쓰윽, 닦으며 밖으로 나왔다.
쿵.
거실에 서 있는 사람을 보자마자 소열은 세숫대야를 그만 쿵, 하고 떨어뜨리고 말았다. 반석오빠, 가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집 이곳 저곳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수저통이며 과도같은 것이 널려져있는 식탁이며 설거지거리가 남겨져 있는 싱크대로 시선이 갈 때는 보지 말아요, 하고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다.
반석이 갑자기 뒤돌아섰다. 소열이 한바다, 하고 바다를 부르려 했을 때. 반석과 눈이 부딪힌 소열은 따스한 반석의 눈빛에 고개를 숙여 바닥의 분홍빛 세숫대야를 꽉 붙잡았다.

-바다는요?

평소와 같은 목소리가 다행히 나왔다. 열린 문 너머로 방안을 들여다 보았으나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문을 열어주었으니 바다는 집안에 있었을텐데.

-음료수, 사온다던데.

하면서도 계속 두리번거렸다.

-앉아요. 저 잠깐 이것 좀 널을께요.

그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제 헤어지고 아침에 다시 만난 이웃집 사람처럼. 탁탁, 얇은 티를 털어 집중해서 널고 있는데 갑작스런 인기척에 깜짝 놀랐다.

-도와줄까?

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반석때문에.

-아뇨, 잠깐만 앉아있어요.

얼굴도 보지 않은 채 대답을 했다. 그래, 가볍게 중얼거리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슬쩍, 바라본 뒷모습이 무척 낯익다. 낯익다, 익숙하다, 친근하다. 알 수 없는 묵지근한 통증이 가슴을 할퀴었다. 저 나지막하고 따스한 음성, 굵지만 무뎌보이지는 않던 어깨선, 새까만 차분한 머리칼. 소열이 모르는 변한 부분이 틀림없이 있겠지만 오빠의 겉모습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 조금 키가 더 자랐을 뿐. 멋있다, 는 변함없는 사실 앞에 조금 분함이 들기도 했다. 자신의 마음이 그 때 그 순간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기에.
베란다에 있는데도 쭈볏쭈볏 그 존재감이 스물스물 느껴졌다. 언제나 눈을 뗄 수 없었던 사람. 몇 개 되지 않는 티들을 널고 분홍색 세숫대야를 들고 베란다에 서 있자니 고민이 되었다. 어색하나마 안으로 들어가 말이라도 걸어봐야 하는걸까, 아니면 이대로 바다를 기다려야 하는걸까.
열린 유리문 안으로 그가 보였다. 분홍색 소파에 앉아있는 모습이 퍽 자연스러워 보였다. 커다란 덩치에 작은 소파가 어색해 보일만도 하련만 언제나처럼 주변과 동화되어 그 속에서 빛나고 있는.
흡, 숨을 들이 마시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 그저 친구의 선배인것처럼 대하면 돼. 바다의 선배.

-뭐 마실래요? 아이스티나 녹차 시원한 거 정도는 있는데요.

투명한 유리컵을 두 개 꺼내며 소열은 소파쪽을 향해 고개를 조금만 돌린 채 묻는다.

-아, 그럼 녹차.

기대하지 않았던지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반석의 표정이 소열은 맘에 안들어 냉장고를 쿵, 하고 연다. 잠시라도 시간을 벌어보고 싶은 게 솔직한 소열의 생각이었다. 냉장고에 들어 있던 커라단 물통이 밖으로 나오자 송글송글 물방울이 맺힌다. 순간 느껴지는 시원함. 커다란 유리컵에 한가득 녹차를 담고 냉장고 윗칸에 있던 얼음도 가득 담는다.
소열은 작은 쟁반에 담아 반석의 앞에 갔다 주고는 자신의 아이스티를 따른다. 할짝, 컵속의 아이스티를 맛본 후 얼음을 두 개만 띄운다, 너무 많이 띄우면 싱거울 것 같기에. 어색하게 싱크대 앞에 서 있다가 두리번 거리고 있던 반석과 눈길이 부딪혔다.

-와서 앉아.

하는 작은 목소리에 입안을 맴돌고 있던 얼음을 불쑥 삼켜버리고 말았다. 켁켁, 거리며 급히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신다. 아, 정말 눈물이 한 방울 똑 떨어졌다. 갑작스레 느낀 차가움에 정말 순간 눈물 한 방울이 면티위로 똑 떨어졌다. 손을 눈가로 가져가 눈물을 훔쳤다. 계속 싱크대 앞에 서 있는 것도 웃겨 보여 반석과 가장 멀리 앉을 수 있는 소파끝에 조금 걸터 앉았다.
바다는 언제 오려나. 
유리컵에 생기는 물방울을 손으로 다른 물방울들과 함께 뭉개버리며 컵에 하얗게 이는 것들을 투명하게 만들며 이제나 저제나 하고 바다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야 와서 이 상황에서 나를 구해 줘.

-바다는, 안올거야.

-네?

뜻밖의 말에 소열은 놀라서 반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다, 슈퍼 간 거 아니야.

반석은 소열의 시선이 머쓱했는지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한껏 시치미를 떼는 듯한 모습. 소열은 그런 반석의 모습에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빨리도 말하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열은 아이스티를 마지막이 마지막 모금까지 마시고 컵을 싱크대에 내려 놓았다. 탁.

-그럼 오빠도 돌아가줘요.

소열은 여전히 싱크대에 놓인 컵을 쥔 채였다. 말은 똑바로 나왔다. 흔들리거나 갈라지지 않고 똑바르고 건조하게. 소열이 바라던 대로.하지만 술김이었지만 오라고 한 사람은 자신이었기에 속으로는 엄청나게 떨고 있기도 했다.

-소열아.

나지막한 반석의 읊조림. 소열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등뒤로 꽂히는 시선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녹차만 마시고 일어서세요. 할 일이 있어요.

한가한 휴일이었지만 반석이 알 바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길 바라지 않았다. 아니 만나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 반석의 관계는 6년 전 그 바닷가 흙돌위에서 끝이었다. 이런 식의 만남, 어떤 식이든지 간의 대화, 그런 것 따위 다 피하고 싶었다. 이렇게 마주 보고 에너지 소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난 할 말이 있어.

쏴아아아, 투명한 유리컵으로 부서지는 물방울들이 떨어져내렸다. 물방울들의 소리사이로 반석의 목소리가 섞였다.  탁, 물을 잠그고 그제서야 소열은 뒤돌아섰다.

-어쩌죠. 난 할 말이 없어요.

반석이 냉랭한 소열의 말에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눈빛으로 소열을 바라보았다. 차갑지도 따스하지도 않았지만, 여기있는 나를 무시하지 마 , 그런 표정.

-난, 끝 같은 건 없었던 것 같아.

얼핏, 물기가 묻어난다고 생각되는 음색이었다. 표정을 드러내지 않던 사람의 표정이 얼핏 흔들리는 것만 같은 건 소열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붉게 충혈된 반석의 눈을 바라보며 느끼는 안쓰러움을 애써 무시하며 소열은 고개를 들렸다. 확실하게 매듭지어야 해. 과거에 휩싸여 다시 몇 날 몇 일을 휘둘리고 살 순 없어.

-우린, 아니 오빠와 난 그 때가 마지막이었어요. 난 그 때 이후 오빠 다시 만날 생각 조금도 안했어요.

정말이에요, 소열은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들고 있던 컵을 투명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반석은 양 손으로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오랫동안 쌓아두었던 피곤들을 떨쳐버리려는 듯. 소열 자신도 이 상황이 너무나 피곤했다. 솟아오르는 감정이 분노인지 아님 짜증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감정만은 하나 분명했다. 

-오빠가 어제 바다에게 그랬다죠. 제가 아몬드 알레르기가 있다구요. 땅콩도 못 먹는다구요..... 저 아몬드 먹어요. 땅콩도 먹고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오빠가 말한 끝이 있었든 없었든...... 이 만큼의 거리가 오빠와 저 사이에 있어요. 전 그 거리를 좁히고 싶지 않아요... 돌아가주세요.

소열은 말을 맺음과 동시에 뚜벅뚜벅 거실을 지나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소열의 두 눈도 번쩍이는 듯 붉게 빛났다. 눈에 꾹 힘을 주었다. 볼썽사납게 울어버릴 수는 없었다. 도도하고 건방지게. 거절을 하는 사람은 소열 자신이었다. 반석은 천천히 일어나 문을 잡고 있는 소열의 곁으로 걸어나왔다.

-또 보게 될거야.

하며 사라지는 반석을 바라보다가 소열은 쿵, 문을 닫고 밀려드는 어찌할 수 없는 감정에 현관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엉엉엉 소리내며 크게 울어버렸다.
우아아아앙, 아아아아앙.
서럽게 퍼붓는 듯한 소열의 울음소리가 텅 비었던 집안을 가득 채웠다.
보고 싶지 않았다고, 보고 싶지 않았어. 나타나지마 목반석, 나타나지마. 욕심내지 않을거야, 내 거 아닌 거 욕심 내지 않을거야. 당신은 내 게 아니야.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6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목반석이란 사람에 대한 면역체는 아직 소열의 몸 속에서 생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열은 초인종 소리에 급히 현관문을 열었다. 따가운 눈을 식혀주던 얼음주머니를 싱크대에 버리듯 던져버리고서.

-나다. 넌 아직두 사람 확인 안하고 문 열어주니.

들어오자 마자 잔소리를 하는 환희. 깊숙이 쓰고 있던 야구모자를 벗으니 머리카락이 출렁이며 어깨 너머로 쏟아져 내렸다.

-왔어? 너니까 됐지 뭐.

하며 소열은 애써 물기묻은 목소리를 지우며 환희가 내미는 패스트푸드점 봉지를 받아들었다.

-치킨이야. 손닦고 먹자. 근데 바다는? 아 배고파.

연거푸 쏟아지는 말들. 환희가 집에 들어서면 말의 홍수가 일어나곤 한다.

-집. 제사래.

대답하며 봉지에 담긴 치킨이며 콘, 들을 꺼냈다. 치킨은 냅킨을 깐 넓은 접시에 담고 미니스푼을 꺼내고 냉장고에 있던 아이스티를 꺼내고 얼음을 몇 개 띄웠다. 소열은 화장실로 급히 들어가는 환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쁜 두 눈을 가리고 있던 어설픈 뿔테안경. 우습지도 않은 분장. 머리를 모자 속에 넣고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매니저 없이 외출을 할때의 모습.
환희는 연예인이었다. 연기자.
2년 전, 이었던가. tv프로그램에서 우연히 만났다. 연예인과 일반인이 함께 팀을 이뤄 퀴즈를 푸는 게임이었다. 바다가 장난삼아 소열의 이름으로 등록한 것이 통과가 되었던 것이었다. 바다는 어째 됐든 좋다는 얼굴로 사돈의 팔촌까지 모두 신청하였지만 네가 되었다, 고로 네가 우승을 해야 하며 또 환희의 싸인을 받아와야할 의무가 있다고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면서 꼭 나가라고 귀찮아하는 소열의 등을 떠밀었었다.
머리, 화장, 옷까지 모두 준비를 해주더니 ‘야, 환희 싸인 꼭 해와. 안 그럼 문 안 열어줄거야. 네가 참여하는 프로그램 고정이야. 어쩌면 너랑 퀴즈 같이 풀지도 모른다고.’ 하는 거였다.
흑심투성이 한바다.
소열은 그런 바다의 말에 아무 것도 모른 채 함께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섞여 있는 분장실 안을 둘러보았다. 환희, 환희라. 그때 거울 앞에서 막 분장을 끝낸 남자 출연자가 보였다. 쭈삣쭈삣, 그 남자연예인에게 쫓아가 부끄러움을 숨긴 채 말을 했었다.

-저 환희씨죠? 싸인 좀 해주세요.

순간 정말 분장실 안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곧 그 안이 떠나갈 듯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지만.

-너, 얼굴도 모르고 싸인해 달라는거야?

사자머리-더구나 노랗게 염색된, 더구나 그렇게 보글머리라니. 옆에서 분장을 하고 있던-한 여자가 소열을 향해 무서운 얼굴로 쩌렁쩌렁 울릴 듯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아, 저...

소열은 말문이 말힌 채 남자연예인과 그 여자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누구지?

-tv 도 안보면서 이런 덴 어떻게 나온거야? 종이, 내놔봐.

도도한 말투. 카랑카랑하게까지 느껴졌던 목소리.

-아, 네.

소열은 바다가 가방에 넣어주었던 까만 책을 꺼내 유성펜과 함께 내밀었다.

-뭐야, 화보집까지 사놓고.

여자가 무심히 화보집을 넘기는데, 소열의 얼굴이 이내 발갛게 달아올랐다. 넘기자마자 그 여자의 모습이 가득 차 있었으므로. 바다가 평소에 예쁘다고 꺅꺅 거리던 사람이었다. 으윽,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소열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환희, 환희라고 이름에 왜 남자를 상상해 버렸던 걸까.

-이름.

-염소열.

슥슥, 역자는 무심히 화보집에 싸인을 마치고는,

-염소열? 뭐야, 내 퀴즈파트너네. 어리버리. 잘 해보자고. 게임은 이렇게 하면 안된다. 꼴찌 먹는다고.

싸인을 다 한 여자는 볼 일 다 봤다는 듯 뒤돌아 거울 앞으로 가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

-이래뵈도 지금 5주째 연승중이라고. 너 때문에 내 연승을 물거품 시킬 순 없단 말이야. 알겠어?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해야돼.

도도한 표정- 물론 나중엔 그게 다 가짜이고 하나도 안 무섭다는 걸 알게 됐지만-으로 소열을 바라보는 바람에 소열은 자신의 이름으로 바다의 화보집에 싸인을 받았다는 것도 까많게 잊은 채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예인은 무섭구나, 생각하면서.

-으왓. 너 귀엽다. 너 내 동생 해라.

환희가 소열의 볼을 쎄게 꼬집으면 말했다.



-먹자.

손에 묻은 물기를 위에 입은 면티에 쓰윽, 닦으며 환희가 치킨접시로 달려들었다.

-어,

손만 씻는 줄 알았더니 그 새 옷장을 뒤져 연분홍색 츄리닝바지와 흰색티로 갈아입은 환희.

-오늘 자고 가려고 왔단 말이야.

환희는 소열의 말에 대충 대꾸하고는 치킨날개를 먹기 시작했다. 그런 환희를 쫓아 치킨을 먹기 시작하는 소열. 하지만 더워서 그런지 치킨으로는 손이 잘 가지 않고 목이 말라서 그런지 아이스티만 연거푸 먹고 있다.

-너, 근데 눈이 왜 부었냐?

치킨을 야금야금 먹다가 그제야 소열의 퉁퉁, 부은 눈이 눈에 들어왔는지 -하지만 여전히 치킨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소열을 바라보며 묻는다. 눈은 소열을 바라보면서도 용케 손은 치킨을 잡는다.

-내 눈이 왜?

소열은 애써 눈빛을 외면하며 날개 하나를 잡아들었다.

-왜는 무슨 왜야. 눈이 벌겋구만. 울었냐?

치킨 다리를 한 입 크게 베어 불며 환희는 시큰둥한 얼굴로 묻는다. 하지만 소열은 그 무심하고 시큰둥한 눈빛이 환희의 진심이 아니란 것을 안다. 환희는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거나 좋아하는 것에 관해서는 유독 초연했다. 그것을 잃어도 상처받지 않겠어, 라는 식의 태도였다. 좋아하더라도 꺅꺅 거리며 열광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을 바라보며 눈부시게 웃지도 않았다. 그저 시큰둥하게 무심하게 바라보곤 했다. 처음엔 그런 태도가 모든 것에 무관심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별로 좋아하는 것도 없고 싫어하거나 가리는 것도 없다고. 하지만 조금 알게 된 환희는 시큰둥한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 그런거였다. 또 그것보다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진짜 속마음은 그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지나쳐 잃었을 때 평정을 잃는 것을 두려워 하는 거였다. 난 널 죽도록 원하지 않아. 그러니 이 정도까지는 내 옆에 있어도 좋아. 그렇게 해서라도 잃지 않을거야 널, 하는 식의.

-조금.

소열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문을 열었다. 치킨은 양념이 고루 베어 싱겁게 먹는 소열의 입에는 짰지만 환희는 머스타드 소스를 뿌려 먹는 걸 아주 좋아했다. 냉장고에서 반쯤 들은 머스타드를 꺼내드는 동안 소열은 갑작스레 찾아와 정신을 흔들어주는 환희에 대해 묘한 고마움을 느꼈다. 혼자서 저녁을 차려먹기도 귀찮았거니와 청승맞게 앉아 옛 일을 추억하며 눈물젖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잠들고만 싶었는데 잠은 오지 않았다.
 치킨다리에 머스타드소스를 뿌리는 무언가에 열중인 환희의 표정에 소열은 알 수 없는 실소를 터트렸다. 저렇게 작은 일에 집중하고 열중할 수 있다는 것. 과연 언제 느껴본 일이었는지. 특별히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거나 멍한 상태가 아닌데도 집중하거나 열중할 수 없는 상태. 눈앞의 것들이 선명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잡을 수 없게 되는 날들이 주욱 흘러가곤 했다. 딱히 그 시간들을 잡거나 묶어두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저렇게 무언가에 열중인 누군가의 모습을 바라보면 생각이 들고는 한다. 나는 열심히 살고 있는 걸까. 성의껏 열심히 살고 있는걸까. 자기 비하나 책망의 마음은 아니었다. 그저 그런 기분이 들고는 했다. 지금도.

-나 처음에 이 맛이 너무 싫었다.

치킨 조각에 머스타드를 뿌리다가 머스타드를 조금 흔들어 보이며 환희가 말을 꺼냈다.

-소세지에 햄에 핫도그에... 엄마는 그렇게 가정적인 사람이 아니었거든. 냉장고에 가득 들은 인스턴트 제품을 냉장고에 해동하거나 가끔 엄마가 요리-그걸 요리라고 할 수나 있는지 모르겠지만-해주는 그런 것들에 뿌려지는 머스터드가 너무 싫었어. 3분이면 땡하고 끝나는 엄마의 요리처럼. 그게 날 대하는 엄마의 마음 같았지. 순간적으로 덥혀진 것들에 노랗게 구불구불한 선을 그리는 그 걸 보면서 어른이 되면 절대 저런 것 따위 먹지 않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봐. 웃기지? 습관이 된거지. 3분짜리 엄마의 관심에도 익숙해졌듯이 비려보이는 노란 색깔에도, 그 시큼하고 왠지 달달한 맛에 익숙해진거야.

치킨을 덥썩, 무는 환희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환희는.

-습관이란 거 무서워.

우물우물, 치킨을 씹으며 환희가 무심히 푸른 꽃무늬 자잘하게 피어있는 화장지에 기름기 가득한 손을 닦았다. 푸른 꽃.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꽃의 푸른 청승맞음.

-너 그렇게 혼자 울고, 또 울지도 못하다 삭히면, 나중엔 울지도 못하고 아무 것도 못하고 병신된다, 병신.

신랄하게 말하며 환희는 기름기 닦은 화장지를 금방 나온 쓰레기를 담은 비닐봉지에 던져버린다.

-슬퍼도 울지를 못해, 가슴이 아픈데 누구한테 말도 못하지.

치킨을 잡은 소열의 손이 지르르 흔들린다. 알고 있구나, 그 마음을. 환희 너는 알고 있구나. 입안에 넣었던 치킨이 침과 섞이지 못하고 퍼석하게 느껴졌다. 꿀꺽, 하고 삼켰다.  소열은 말을 끝내고 싸우듯 치킨을 뜯는 환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큰둥한 표정. 언제 내가 무슨 말을 했니, 하고 시침을 떼는 듯한.
그런 환희를 보자니 자신이 더욱 비겁하게 느껴졌다. 오래 전 좋아하던 사람을 만났어, 그래서 마음이 조금 성글어서 슬픈 거 같아. 이렇게 말해버리면 환희는 더 캐묻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의외로 집요하게 물어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말해 버릴 자신이 사실 없었다.
먹다가 놓아버린 치킨다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치킨맛. 고소한 튀김옷에 조금 짭짤한 양념. 맛없지 않았다. 하지만 맛있지도 않았다. 그냥 치킨맛. 말을 하면 지울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말을 하며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이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이런 순간이 지나갈까.
오물오물 치킨을 먹는 환희를 바라보며 소열은 생각했다.
아니, 그런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거야.

댓글 '1'

Junk

2005.12.27 14:25:03

환희란 사람, 멋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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