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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밀 통로




예나는 들어오던 길로 무작정 뛰었다. 들어왔던 길이라고 생각한 길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예나는 계단을 두 개 뛰어 내려가고, 모퉁이를 세 개 돌아서 자기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성 안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오고 나서야,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벽돌을 쌓아서 회를 바른 성 안과 달리 넓적하고 커다란 돌로 지은 것 같은 벽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기름을 채워 넣은 고상하고 우아한 램프 대신 철망 속에 횃불이 꽂혀 있는 것도 달랐다. 나무판을 댄 후 위에다 보드라운 양탄자를 겹겹이 깔아 놓았던 성과 달리 이곳의 바닥은 약간 축축하고 차가운 돌 그대로였다. 쥐나 벌레가 나올 정도로 축축하지는 않았고 거미줄도 없고 이끼도 끼지 않았지만,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었던 것만 같은 돌이었다.


예나는 기억을 되돌려 보았다. 분명히 계단을 두 번 올라서 왼쪽으로 조금 가면 그 방이었으니, 나올 때는 오른쪽으로…… 예나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몸을 돌려 가면서 시험해 보니 왼쪽으로 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오른쪽으로 갔다고 해서 이렇게 다른 곳이 나오다니 그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예나는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히 계단을 두 번 올랐고, 내려올 때도 두 번 내려왔으니 적어도 같은 층이어야 할 텐데, 지금 여기는 아무리 봐도 땅 밑인 것 같았다. 창문도 없고 불이 작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위층보다 어두웠고, 습기도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두 번 내려온 게 맞던가? 예나는 처음에 올라갔던 계단은 직선이었고, 내려온 계단은 나선이었던 것을 떠올렸다. 나선이어서 끊어지질 않아서 두 번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길었던 게 아닐까?


어쨌든 원인이 무엇이었든 길을 잃은 건 확실한 것 같았다. 예나는 뒤로 돌아서 왔던 길로 또다시 올라가려 했다.


그런데 뒤로 돈 순간 멈춰 버리고 말았다. 계단에서 내려서서 복도를 보자마자 멈춰 서서 생각을 하고 돌아선 것인데, 계단이 없었다. 막다른 곳도 없었다. 예나의 뒤는 앞과 똑같은 복도가 되어 있었다.


“말도 안 돼!”


예나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돌아선 그대로 뛰어갔다. 거울도 아니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복도였고, 그것도 꽤 긴 복도였다. 넓적하고 단단한 돌이 투박하고 차갑게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복도였다.


복도는 조금 못 가서 오른쪽으로 꺾였다. 예나는 정신없이 모퉁이를 돌아 뛰었다. 성이 넓긴 했지만 이렇게 뛰는데도 막다른 곳이나 계단이나 다른 방이 안 보이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한 것은 좀 전까지 막혀 있던 곳이라도 들어가 보면 이미 불이 켜져 있고, 멀리서 어두운 복도라고 생각했는데도 막상 가까이 가 보면 횃불이 타오르고 있고 전혀 어둡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횃불은 철망 안에서 예나를 환영하듯 흔들렸다. 마치 바람이 부는 것처럼.


지하에서 바람이 분다는 것은 공기가 흘러 들어와서 흘러나가는 곳이 있다는 뜻이다. 예나는 언젠가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대로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바람의 방향을 느끼려고 해 보았다. 아주 약하긴 해도 분명히 바람이 불고 있었다. 예나는 조심조심 방향을 놓치지 않으려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넓적한 돌이 깔린 복도는 그 후로도 조금 더 계속되었다. 여전히 예나가 가는 곳마다 횃불이 밝혀져 있는 것도 같았다. 복도는 두 갈래 길로 나뉘기도 하고 세 갈래 길로 나뉘기도 했다. 다시 한 번 예나는 이 성의 지하 면적에 감탄했다. 생각해 보니 지하는 성보다 더 넓게 팔 수도 있을 것 같긴 했지만 왜 그렇게 만들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퍼뜩 생각이 닿은 것은 비밀통로였다. 어쩌면 예나는 자기도 모르게 이 성의 지하 비밀 통로로 와 버린 게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가는 길의 끝은 성에서 떨어진 곳으로 나가는 문일지도 모른다. 예나는 그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악마의 성에서 악마가 만들어 놓은 비밀통로를 통해 달아나 버리면 그 악마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일 테니까. 두고두고 놀려 줄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물론 여기를 빠져나가서 다시 그 악마에게 가서 놀릴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그 작자랑은 다시는 얼굴도 보지 않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자 조금 마음이 느긋해졌다. 예나는 팔을 달랑달랑거리고 관광이라도 온 듯 주위를 돌아보면서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대로 돌뿐이었지만 조금 지나자 복도의 벽과 바닥이 확 바뀌었다. 희고 결이 있고 매끈매끈한 돌로 만들어진 벽과, 벽과 비슷하게 칠해서 언뜻 보면 통으로 만든 듯한 나무 바닥이 나타났고, 세 사람쯤 나란히 서서 갈 수 있을 것 같던 복도가 한 사람이 가기엔 넓고 두 사람이 가기엔 좁을 정도 너비로 좁혀들었다.


매끈매끈한 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이 반쯤 파묻혀 있었고, 기둥에는 어김없이 복잡한 조각이 되어 있었는데, 대개는 덩굴에 휘감긴 나체에 가까운 남자나 여자의 모양이었다. 덩굴을 옷처럼 감고, 눈을 감고 팔로 중요한 부분을 가리고 한쪽 발을 조금 앞으로 내밀고 서 있는 자세가 무척 자연스러워서 누군가 진짜로 거기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쪽을 보다가 무심코 눈을 돌리던 예나는 몇 번인가 기둥에 새겨진 사람이 자기를 쳐다보는 줄 알고 가슴이 내려앉기도 했다.


기둥과 기둥 사이 벽은 섬세하고 선이 굵은 그림체로 벽화가 주욱 그려져 있었다. 예나는 그림이 순서대로 있다는 걸 알자마자 처음 그림이 나타나는 데로 돌아갔다. 다시 구경할 기회가 없을 것 같으니 한번에 잘 봐 두자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그림은 빛에 싸인 사람들과 어둠에 싸인 사람들의 무리가 싸우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양쪽의 수는 비슷했고, 손에 든 무기도 비슷했다. 쌍둥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다만 빛과 어둠만이 차이가 날 뿐, 너무나 비슷했다.


두 번째 그림에서는 싸우고 있는 전체 수는 줄지 않았는데, 어둠에 싸인 사람이 훨씬 늘어 있었다. 그리고 어둠의 무리 가운데에 찬란히 빛나는 사람이 하나 있고, 그 주위로 무리가 구름처럼 몰렸다. 어둠 속에서 빛난다는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 사람은 검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빛의 무리가 그 검은 빛을 멀리서 보면서 괴로워하는 모습도 묘사되어 있었다.


세 번째 그림에는 빛의 무리가 거의 남지 않았다. 가장 아름답고 위세가 당당하던 빛의 사람이 피투성이가 된 채 무릎을 꿇고 고개를 떨어뜨렸고, 검은 빛을 내뿜는 사람이 그를 밟고 서서 창으로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 하고 있었다.


예나는 약간 눈을 찡그렸다. 언젠가 같은 장면을 본 것 같았다. 어릴 때, 아니면 조금 커서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과거에. 어쩌면 꿈을 꿨던 걸지도 몰랐다. 예나는 고개를 흔들고 다음 그림으로 향했다.


네 번째 그림에서, 세 번째 그림에서 쓰러져 있던 빛의 사람은 엄청난 피를 쏟으며 완전히 죽은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예나의 눈이 뜨거워지고 머리가 핑 돌았다. 그런데 환호해야 할 어둠의 무리들은 괴로워하면서 물러나고 있었다. 빛의 사람이 쓰러져 있는 왼쪽 위로부터 찬란한 빛이 내려와 어둠의 무리를 불태웠다. 검은 빛을 찬란히 내뿜던 그 사람도 팔을 들어 그 빛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다섯 번째 그림은 반으로 갈라진 듯 흑과 백이 나뉘었다. 왼쪽에 있던 빛의 사람 시체는 피만 남고 사라졌고, 그 주위를 눈부신 흰 빛이 보호하듯 둘러쌌다. 빛은 피웅덩이만이 아니라 사방으로 널리 퍼져 가면서 어둠을 살라 먹었고, 이제는 진짜 어둠이 적게 남았다. 어둠의 무리들은 빛 속에서 재가 되기도 했고, 좁은 어둠 속에서 몰려서 이를 드러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러나 분노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 같았다. 검은 빛을 둘러싼 사람만이 빛과 어둠의 경계에 서서 피웅덩이 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그의 검은 빛도 많이 약해졌다. 그러나 손을 뻗는 자세나 그쪽만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단호하고 결연했기 때문에, 분노로 두려움을 감추고 있는 다른 어둠의 무리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고, 그 때문에 아직도 그는 우두머리로 보였다.


예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부분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그냥 그림일 뿐인데 부조로 새긴 것처럼, 그 부분만 감촉이 다를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만져 보아도 그저 물감과 기름과 회가 섞인 한 겹일 뿐인데도.


예나는 고개를 젓고 다시 가던 방향을 보았다. 여섯 번째 면은 마지막 면이었고, 까맣게 비어 있었다. 벽화를 완성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까맣게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이 의도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완성되지 못한 것이고, 완성된 것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빛은 무엇인지, 어둠에 숨은 무리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 그리고 검은 빛을 내뿜는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때 갑자기 예나의 기억 밑바닥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들은 모두 신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이야. 사실 그들이 죽을 수 없게 된 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거든. 늙지도, 죽지도 못하고 해가 뜬 하늘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영원히 그대로 살리라! 인간의 피만이 살아도 살지 않은 그 생을 유지할 터이니, 그것마저 없어졌을 때에는 무로 돌아가리라!’


너무나 깊은 곳에서 갑자기 무서운 속도로 치솟아 올랐기에, 예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 잠시 비틀거렸다.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였던가? 누구의 이야기였던가?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해도, 거기에 연결된 실을 끌어당기려고 해 봐도 아무것도 만질 수 없었다. 기억할 수 없었다. 떠올릴 수 없었다. 예나는 잠깐 이마를 벽에 댔다가 뗐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것은 열두 살 때의 기억이다. 이렇게 단편으로 부서져서 갑자기 떠오르며 괴롭히는 것은 그때 일밖에 없으니까. 예고도 없이 떠오르고, 떠오른 다음에는 꼬리 없이 사라진다. 더 이상 뭔가를 떠올리려고 해 봤자 기력 낭비일 뿐이다. 예나는 한숨을 쉬고 포기했다. 벽화도 다 봤고, 이제 정말로 밖에 나가야겠다.


복도 끝에는 까만 문이 있었다. 칠흑처럼 검은 나무로 만든 두꺼운 문이었는데, 주위 벽과 어울려서 마치 밤으로 가는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였다. 희고 매끈매끈한 돌의 색깔이 조금씩 물결치듯이 까매져서 문 옆에 가서는 아주 까맣게 변해 있었다. 바람의 방향은 확실히 문 쪽이었다. 문 양 옆에도 사람이 새겨진 기둥이 서 있었는데, 이제까지의 기둥과는 달리 이 기둥에 있는 사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갑옷을 차려입었다. 손에 든 것은 끝은 창이고 그 밑에 도끼까지 달린 무시무시한 무기였고, 자연스럽게 늘어져서 기댄 듯한 다른 기둥의 조각과는 달리 그 무기를 손에 들고 문을 지키듯이 차려 자세로 서 있었다.


예나는 보초와도 같은 그 조각상의 눈 부분에 대고 손을 흔들어 보았다. 조각상일 게 확실했지만, 혹시나 누군가 분장을 하고 정말로 지키고 있으면 어쩌나 싶었다. 눈동자까지도 돌로 새겨져 있는 게 보이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일말의 의심을 떨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자연스럽고 생생한 조각이었다.


보초는 침묵했다. 예나는 치마를 양손으로 잡고 보초에게 인사했다.


“실례하겠어요. 들어가길 허락해 주실 거죠?”


장난삼아 한 인사였는데, 인사를 하면서 퍼뜩 든 생각이, 이게 이제까지 찾던 통로가 맞다면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나가는 거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런데 나가는 문을 이런 식으로 지키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버릇처럼 들어간다고 말해 버렸다. 예나는 자기 말에 자기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문을 밀었다. 육중하고 탄탄한 것에 비해서 문은 몹시 쉽게 열렸다.


문이 열리면서 방 안에서 빛이 쏟아졌다. 과연 이곳이 나가는 문인 모양이었다. 예나는 맞게 왔다고 좋아하려다가 다시 고개를 갸웃 했다. 마차를 타고 성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가 지고 있었으니 지금 밖은 밤이어야 마땅했다.


어쩌면 바깥에 불을 켜 놨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비밀통로 출구를 잘 보이게 해 놓는다는 건 또 이상하다.


어쩌면 밖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벌써 알고서 잡으러 온 걸지도 모른다. 예나는 겁이 덜컥 나서 문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저쪽에서는 최대한 안 보이도록 고개만 빼꼼 내밀고 밖을 보았다.


처음에 보인 것은 사람이 새겨진 돌기둥이었다. 그러니까 이 문이 바깥과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은 확실했다. 하지만 빛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예나는 조금 더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몸을 내밀다가 완전히 그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넓고 모양이 이상했다. 예나가 나온 문은 거대한 새장처럼 열두 면으로 각이 진 커다란 방의 한 면이었다. 새장과 달리 꼭대기를 잘라낸 듯 천장에 동그랗게 뻥 뚫린 부분이 있었고 거기로 밤하늘이 보이고 달빛이 비쳐 들어왔다. 마침 달이 정확히 천장의 구멍 위에 있었다. 감옥 창살처럼 구멍을 살짝 가린 틀 때문에 네모나게 쏟아져 들어온 달빛은 그 밑에 있는 분수대에 부딪쳐 더욱 환한 빛을 내뿜었다.


예나는 그것이 분수대라는 것을 보자마자 알았다. 그러나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분수대란 물건은 고상한 취미를 가진 귀족의 정원이나 앞마당쯤에 있는 물건이라고 이야기를 들어왔고, 마차를 타고 들어오면서 본 성 앞마당에 그런 게 전혀 없어서 실망했던 기억도 그리 오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여기 지하에 있다. 그것도 둥근 수반 위에 아름다운 여자 세 명이 등을 맞대고 전 방향을 보면서 서 있는 아름다운 분수대였다. 조각상과 수반 겉에는 진주가루라도 뿌렸는지, 희미한 달빛을 여러 색깔로 반사했다. 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이미 그 표면만으로도 빛을 떠안아 다시 흩뿌리는 빛의 분수나 다름없었다.


예나는 그곳에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단 열두 면의 모서리마다 기둥이 박혀 있었다. 복도에서 본 것과 똑같지만 좀 더 덩굴에 많이 휘감겨 부자유스러운 듯했고, 모두 횃불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기둥과 기둥 사이, 열두 면에는…….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사람이 들어 있는 상자가 빽빽이 들어찼다. 모두 화려한 옷을 입고, 눈을 감고, 가슴 위에 십자 모양으로 손을 포개고 누워 있었다, 아니 예나가 보는 측면에서는 서 있었다. 달빛에 희미하게 비친 그들의 얼굴은 살아 있는 사람과 다른 거뭇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탄력도 생기도 없어 보였다.


예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때 끼익 소리를 내면서 검은 문이 닫혔다. 그리고 기둥에 새겨진 조각상들이 손에 쥔 횃불이 갑자기 타오르기 시작했다. 방 전체가 흔들리면서 바닥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빛이 온 방을 비췄다. 시체를 비췄다. 시체들이 눈을 떴다. 시체들이 일어섰다. 온 방 안의 시체가 다 예나를 내려다봤다. 어딘가에서 퀴퀴한 냄새가 풍겨 와 예나의 코 속으로 훅 들어갔다.


“아아아악! 오지 마아아아아아!”


예나는 갑자기 벌어진 난장판에 놀라면서 방 한가운데로 뛰어갔다. 문은 닫히고 나갈 곳은 천장밖에 보이지 않고 사방에는 온통 죽음에서 일어난 것 같은 잿빛 인간들뿐. 예나는 분수대로 뛰어가 그 위에 올라가 다시 주위를 보았다. 맨 밑줄의 상자에 있던 잿빛 시체가 걸어오고 있었다. 더러는 덜그럭거리면서 엎어져서 기어오고 있기도 했다. 걸어오든 기어오든 그들의 뿌연 눈은 예나를 좇았다. 예나는 소름이 끼쳐서 질끈 눈을 감고 소리쳤다.


“사람 살려! 누구 없어요!!!”


갑자기 등 뒤에 사람이 나타난 것 같았다. 분명히 분수대의 여인상에 등을 대고 있었는데 뒤에서 강한 팔이 예나를 끌어당기더니 단단한 품에 가뒀다. 놀라서 다시 눈을 뜨자 까만 비단이 부드럽게 얼굴을 스쳤다. 예나는 그 비단의 재봉질과 형태가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왠지 모르지만 뒤에 나타난 사람은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강하게 끌어당기면서도 부드럽게 안는 팔이 안심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고, 등을 대고 있는 품도 단단하고 안정감을 주었다.


허리를 감싼 팔을 꽉 잡는 순간 갑자기 뱃속이 요동치면서 머리카락이 쭈뼛 솟는 기분이 들었다. 안고 있던 사람이 빙글 돌면서 높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뛴 것 같았다. 아니, 뛴 건 오래전이고 예나의 배가 반응했을 때는 이미 착지하고 난 후였다. 시체들이 걸어오면서 점점 더 심해졌던 냄새가 사라지고 공기가 달라진 걸로 보아 이번엔 진짜로 밖인 것 같았다. 안심이 되면서도, 좀 전에 너무 놀랐던 후유증으로 속이 메슥거리고 심장이 빨리 뛰어서 예나는 자신도 모르게 계속 그 팔에 매달렸다. 뒤에 있는 그도 예나가 진정하고 떨어질 때까지 말없이 기둥처럼 예나를 받아 주었다.


정신이 들자 예나의 머리를 가장 먼저 스친 생각은 지금의 자세가 이제까지 살아온 중 다 큰 남자와 가장 가까이 붙은 자세라는 점이었다.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던 엄마의 말은 아직도 예나의 몸을 강하게 얽매고 있었다. 예나는 자신을 구해 준 사람으로부터 황급히 떨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겁도 많으면서 길 헤매는 능력 하나는 타고났군.”


그 목소리를 듣자 예나는 얼굴을 스치던 까만 비단을 어디서 봤는지 알 수 있었다. 영주님이 치렁치렁 감싸고 있던 망토는 참으로 부드럽고 따스한 고급 천으로 만들어져 있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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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장마다 제목 짓는 게 보통 일이 아니네요. 이러다가 그냥 3장, 4장이 될지도....

  이번 장은 Devil Doll의 Dies Irae 라는 무시무시한 음악을 들으면서 썼어요. 분위기 잡느라.(...) 혹시 호러 분위기가 필요하신 분이 있다면 강추.

  주말에는 책상에 잘 붙어 있질 못하고요. 되도록 담주 초에 다음 편으로 인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꾸벅.


댓글 '7'

물빛

2005.11.11 14:33:50

위기의 순간에 왕자님 등장!!
어점 남주들은 저렇게 타이밍을 잘 맞추는지 ㅎㅎ
생각보다 일찍 오셔서 기뻐요^^

노리코

2005.11.11 14:40:41

싸가지가 쪼금만 있었어도 저의 사랑을 받았을테지만요...(니 사랑을 받아서 어따 쓰게? -_-)
아직 남주의 싸가지 정도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는 한마디였습니다..ㅡㅡ 그나저나 너무나도 궁금하군요~ 어떤 사연이 있는건지..
너무 궁금해서 돌아가시기 직전~ ㅠ_ㅠ

나미사

2005.11.11 15:14:29

생각보다 빨리 올라와서 와~좋아라 하면서 봤는데...읽으면 읽을수록 미스테리...자꾸 담편이 궁금해져요...ㅜㅜ...영주님이란 사람도 궁금하고...담편 빨리 봤으면 하는 바램입니다..ㅎㅎ 잘 보구 갑니당^^

위니

2005.11.11 15:18:22

왕싸가지라고해도 영주님인데다가 망토까지 입고있다니깐 왠지 꽤 카리스마가 있는 에로틱 고대 맨?이 느껴집니다..^^
작가님 건필하시고...

자하

2005.11.11 17:27:02

미스테리란 의견이 많네요. 후후. 좀만 기다리시압.

수룡

2005.11.11 19:01:30

싸가지가 없어서; 전 더 마음에 드네요 ㅎㅎㅎ; 자하님 홧튕!

Junk

2005.12.08 13:56:57

영주님은 말은 별로 없는데 중요한 부분에서 임팩트를 주시는군요. 근데 나중에 예나한테 휘둘릴 것 같은 예감이 무럭무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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