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unk paradise
- 라운지
- 리뷰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판타지와 현실을 종종 헷갈리는 경우가 생긴다. 머리에서 나오는 명령을 따르라고 남에게 평생 충고하고 살아도, 결국 가슴에서 나오는 명령을 차마 거역하지 못해 죽임을 당하는 조내시가 가장 그 대표적인 예다. 음란서생에서는 판타지가 완벽하게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현실이 완벽하게 진실이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속고 속이는 관계. 판타지와 현실의 간극은 딱 그 정도의 간격으로 벌어진채 몇백년이 지난 지금도 서로가 진짜인양 삿대질하며 싸우고 있다.
온갖 난잡한 성행위를 그려놓은 그림이라도 글보다 못할 때가 있는 것은 바로 글이 사람의 상상력과 결합하기 때문인데, 글과 그림이 결합하면 판타지는 놀랄만큼 현실에 근접하게 된다. 추월색은 그 환상과 욕구를 더욱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글에 삽화를 집어넣기로 마음을 먹는데 그 때부터 판타지로만 존재해야 했던 현실과의 경계는 무너지기 시작하고, 이것이 영화의 중요한 갈등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흑곡비사의 판타지를 현실에서 확인하고난 순간부터, 그리고 소설가 추월색이 아닌 윤서(한석규)로서 사랑에 빠진 정빈을 이용해 그것을 판타지에 뒤섞어넣을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 파국은 걷잡을 수 없는 내리막길로 치닫는다. “꿈을 꾸는, 꿈에서 본 것 같은, 꿈처럼 하고 싶은” 환상과 현실을 잠시 망각한 죄다.
잠시 샛길로 빠져서, 국내 일부 과격한 로맨스 소설 속에서 간혹 다뤄지는 '강간(强姦)'도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 사이의 아슬아슬한 소재이기 때문에 종종 비난을 사기도 한다. 이상하게도 강간 - 여기에서는 여자가 이성적으로 끝까지 거부하며 성적으로조차 흥분하지도 못한채 당하는 모든 강제적인 섹스만을 이야기한다 - 은 국내 로맨스에서 종종 '상간(相姦)'으로 미화되거나, 너무 쉽게 용서가 되곤 하는데, 소재의 자유를 외치는 작가의 목소리가 글에 대한 책임감을 요구하는 독자의 목소리에 종종 눌리는 까닭은 강간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작가의 자세가 독자(혹은 피해자)의 생각과 이해를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맨스처럼 감정이입이 쉬운 장르에서 강간 혹은 유사 강간의 소재를 남성의 카리스마와 트라우마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상처 정도로만 대변하는 정도로만 묘사해서 그럴까. ‘사랑할 줄 모르는 남주가 여자를 사랑하는 방법의 일종’ 정도로만 묘사해놓고 행위에 대해서 책임지지도 설득시키지도 못한다면 그 비난의 강도는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범죄일 뿐인 강간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싶다면, 정상적인 현실에서 강간을 통해 사랑으로 승화된 경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정확하게 인지한 상태에서 출발해야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대부분 겉핧기로 끝나서 사랑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거나, 소재를 소홀히 다룸으로 인해 피해자의 상처를 난도질하는 결과밖에 낳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피해자의 심리를 묘사하기보다 가해자의 욕망을 사랑이라고 둔갑시키는 게 더 쉽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은, 결국 소재의 문제는 작가의 인식과 소양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데굴데굴 웃고 끝난 이야기지만 윤서가 SM을 야오이에 접목시키기로 생각을 확장시킨 점은 장르가 욕구의 문학이라는 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여성 독자 장르의 욕망을 어떻게 확장시켜야 하는지 윤서가 정확하게 짚고 있는 작가라는 점이, 살아남아 계속 음란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야오이에서는 사디즘이든 마조히즘이든 강간이든 상간이든 화간이든 상관하지 않고 오직 탐미적인 쾌락만을 추구하기에 그 소재가 무궁무진한 편인데, 결국 윤서는 그 여성향 장르를 조선 최초로 개척함으로써(물론 허구일지언정) 분야 최고의 명성을 다시 한번 날릴 기회를 얻게 된다는 점이 상당히 유쾌했다. 이것이 바로 영화에서 말하는 '진맛'의 정의를 발전시킨 결과가 아니겠는가. 포르노의 주체는 남성이지만, 여성만이 즐기는 포르노라할 수 있는 장르인 야오이에는 여성화된 남성이 등장할망정 여성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교묘히 적용시킨 예라 하겠다.
“꿈을 꾸는, 꿈에서 본 것 같은, 꿈처럼 하고 싶은” 그 무엇을 실제로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비극이 시작되므로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판타지인지 정확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현실의 인간은 반드시 난처한 지경에 이르게 되어 있다. 윤서가 살아남은 이유는 이런 현실과 판타지를 조율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며, 바로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서일런지도 모른다. 어떤 소재를 가진 글을 쓰든 그 작가가 어떤 사람인가가 정말 중요한 이유 또한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작가가 흔들리지 않아야 제대로 된 글이 나오는 법이고,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모든 슬럼프는 대부분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사랑한다고 말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데 어찌 사랑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호소하는 윤서의 대사는 이 현실과 판타지의 절묘한 경계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작가로서의 모습을 대변해주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도색작가이든 당대의 명문장가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음란한 글을 위해서 정빈을 이용했을지언정, 목숨을 위해서 사랑을 함부로 팔지 않는 윤서의 성품은 역설적으로 그가 사랑은 포기할지라도 음란을 통한 쾌락을 추구하는 붓은 놓지 않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떠한 글을 쓰든 용서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이다. 초반 도색작가로 들어서기 전까지의 소심하고 고지식한 윤서의 됨됨이에 대한 이야기가 다소 길고 느린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윤서를 기준으로 놓고 보자면 음란서생은 결코 사랑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멜로물로 빠진 졸작이 아니다. 윤서가 유배된 이후에 정빈과 추월색의 다음권을 궁금해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정빈과 윤서의 못 믿을 연애담도 <음란서생>이라는 이야기 안에서 펼쳐진 하나의 액자식 이야기일 뿐이었구나 싶기도 하다.(사실 윤서의 흑곡비사 내용 그대로이기도 하고) 정빈이란 여자는 사랑이냐, 음란함이냐를 놓고 윤서를 고민시키고 도덕적 양심을 환기시키는 역할일 뿐, 결코 영화 주제를 말하는 인물이 아니다. 여성이 판타지에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를 증명해주는 인물일 뿐이다. 사대부가의 지체높은 양반이 도색소설이라는 음지의 장르에 발을 들여놓았으면서도, 붓을 놓지 않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정직하고 욕심없는 윤서가 '작가라면 으레 당연히 써야 한다는 안경'의 사치를 거절하지 않으며 혼자 몰래 뿌듯하게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욕망에 솔직하게 부응했을 때 가장 행복하게 웃을 수 있다는 주제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영화가 '음란'이라는 어둠의 단어를 제목에 떳떳하게 드러내놓고도 시종일관 뻔뻔하게 웃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한석규가 연기하는 윤서의 캐릭터가 중심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글쓰는 사람 입장에서 보는 음란서생의 묘미는 스스로를 음란하다 말하면서도 2,3백년 후를 이야기하며 껄껄 웃을 수 있는 해학과 유머스러움에 그 진가가 있다. 어떤 극단적인 소재를 다룰지언정 판타지와 현실을 헷갈리지 않는 윤서라는 캐릭터는 바로 이 <음란서생>이라는 영화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주는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