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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머, 안녕하세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는 진하의 머릿속이 충격으로 하얘졌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이 남자가 이 시간에 왜 여기 와 이러고 있는 걸까? 지난 2주 동안 단 하루도 저 남자가 매장을 비우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오늘은 여기로 출근한 건가?
“시내에는 무슨 일로........?”
“오늘이 저희 가게 쉬는 날이거든요. 오랜만에 시내 볼 일 좀 보러 나왔어요. 서점도 가고, 영화도 보고.”
공연히 뜨끔해져서 묻지도 않은 일과를 장황하게 늘어놓자 현우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끝이에요?”
“네?”
끝이 아니면? 뭘 더 하란 얘기야? 사과를 하란 말인가? 뭐에 대해서? 지난 번 말실수에 대한? 설마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자 현우가 가볍게 내뱉듯이 말을 했다.
“놀이터에서 저녁을 먹는다가 빠졌잖아요.”
전혀 예상하지 못 한 말에 순간 황당해졌다. 5초쯤 멍한 표정으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등 뒤로 식은땀이 쭉 흐른다.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
진하가 짐짓 애석한 표정을 지으며 현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게 말이에요. 제가 방금 전에 저녁을 먹지만 않았어도 꼭 갈 텐데, 너무 아쉽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들를게요.”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 해 거의 공복 상태이지만 긴장한 탓에 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문 앞까지 찾아온 이웃을 그냥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죠. 추운데 몸이라도 녹이고 가요.”
현우가 왼 팔로 진하의 등을 감싸듯이 두르고, 출입구 쪽으로 성큼 걸었다.
“어머, 아니요. 괜찮은데. 저, 정말 배부르거든요!”
얼떨결에 가게 안으로 밀려들어가며 진하는 거의 패닉 상태였다.
으악. 말도 안 돼. 차라리 추운 칼바람을 버티는 게 낫지, 이 남자와 한 공간에서 어쩌란 말이야.
제 목소리로 낸 비명에 머릿속이 온통 이비규환이라 가게 인테리어고, 분위기고 하나도 눈에 안 들어왔다.
“아뇨, 사장님. 실은, 저기 제가 지금 시간이 별로 없어서.......”
어떻게든 이 위기 상황을 모면해야겠기에 스스로 듣기에도 그다지 설득력 없어 보이는 변명을 필사적으로 들이대고 있는 도중에 비니를 쓰고 헤진 청바지를 입은 남자가 현우에게 다가왔다.
“사장님, 나오셨어요? 세금 계산.......”
현우가 손바닥을 들어 뭔가 보고를 하려는 남자를 제지시켰다.
“잠깐만 이따 얘기 하자. 내가 지금 손님을 모시고 와서.”
현우의 말에 남자가 진하를 돌아보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반듯한 행동거지가 뭐랄까, 껄렁해 보일 수도 있는 남자의 자유분방한 차림새를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저 친구가 홀 담당 매니저예요. 3년 동안 쭉 서빙 하다가 3호점을 새로 오픈 하면서 승진 했죠.”
현우가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방금 본 남자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아, 네.”
홀 매니저고, 뭐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지금 현우는 그녀와 함께 앉아서 얘기를 할 분위기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죠. 특별히 가리시는 거 없으면 제가 적당히 주문을 할게요.”
현우가 안내한 곳은 귀퉁이에 있는 조용한 자리였다. 혼자 앉아 있는 틈을 타서 진하는 가게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다소 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쿵쿵 울리는 비트가 강한 음악 소리, 어디 뉴욕에나 있을 법한 창고 같은 느낌의 노출 콘크리트의 거친 느낌이 원색의 테이블과 의자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오히려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구석의 아주 세세한 곳까지 가게의 콘셉트에 어울리는 소품이 함부로 놔둔 듯 절묘하게 연출 되어 있는 섬세함에 내심 탄성이 나왔다. 이런 가게를 두고 함부로 입방정을 떨었으니, 어지간히도 열 받았겠다. 이렇게 자리를 잡고 앉은 마당에 더 이상 도망갈 구멍도 없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속 시원히 얘기를 털어놓고 말실수에 대해 사과를 하는 편이 나은 선택일 것이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할지,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심하고 있는데, 홀 매니저와 얘기를 마친 현우가 초록색 병 두 개를 들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모습이 공포 그 자체였다.
“오래 기다리셨죠? 일단 버니니 두 병 갖고 왔어요. 잠깐 기다려요. 잔 갖고 올게요.”
진하가 이미 주방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현우의 뒤통수에 대고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마셔도 되는데.”
지금 그녀에게 잔에 따라 마시느냐, 병 째 마시느냐 하는 것은 전혀 관심 밖 사항이었다. 2주일 동안을 도망 다니던 사람과 마주 앉아서 술을 마시게 생겼는데, 그것도 사과를 해야 할 처지에 처해 있는데, 잔에 따라 마시느냐, 병 째 마시느냐 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한 문제이겠는가 말이다.
“식사를 하셨다고 해서, 가볍게 참치 샐러드로 준비 했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현우가 버니니 전용 잔과 참치 샐러드를 세팅하는 동안 진하는 결연한 표정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까짓것 사과 하자!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앞으로 도둑고양이처럼 놀이터 눈치 살피지 말고 당당하게 다닐 수 있어.
마음의 결정을 내린 순간 심장이 쿵쾅쿵쾅, 입안이 바싹 말랐다.
“근데, 뭘 그렇게 유심히 봐요?”
현우의 의아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선을 향한 곳이, 맙소사, 하필이면 현우의 바지 지퍼가 있는 부위다!
화들짝 고개를 쳐들고 놀란 눈으로 현우를 쳐다보았다.
“엄마야, 죄송해요. 저기 잠깐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귀까지 새빨개져서 손을 휘휘 젓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현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뭐야, 지금. 내 말을 안 믿어?
사과고 뭐고,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겠다는 생각에 진하가 정색하며 현우를 바라보았다.
“제가 지금 생각이 좀 복잡해서, 잠시 넋을 놓고 있었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몰하게 해요?”
갑자기 말을 하려고 하니까 정리가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개업 케이크 맛있게, 잘 먹었다고요.”
“케이크가 맛있다는 생각을 그렇게 골몰하게 하셨군요. 방금 저녁 식사를 하셨다더니 후식이 절실하셨던 모양이에요. 샐러드 대신 케이크를 내올 걸 그랬죠?”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본 것처럼 현우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은근슬쩍 비꼬았다. 망측한 오해를 받느니 차라리 털어놓자 싶어서, 진하가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폭포수처럼 단어들을 쏟아냈다.
“그게 아니라요. 개업 케이크 받는 즉시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아시다시피 제가 말실수를 한 게 있어서 도저히 연락드릴 용기가 나지 않더라고요.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그래요, 저는 사장님이 놀이터 사장님인 걸 모르고 그저 현장 감독인 줄로만 알았어요. 그래서 홧김에 그런 건방진 말도 했던 거고요. 죄송합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일단은 목구멍에 얹혀 있던 말들을 내뱉으니 속은 후련하였다.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현우가 아무 일도 없다는 표정으로 버니니를 잔에 따랐다.
“한 잔 해요.”
“네?”
“아까부터 바싹 긴장해 있었잖아요. 목 좀 축이라고요.”
현우의 말을 듣고 보니 입 안이 버석거리는 소리가 날 것처럼 건조했다. 그가 따라준 버니니를 마시면서 과연,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하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진하의 상태를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주변 상황을 냉정하게 읽고 제대로 된 대처를 하는 것이야말로 서비스의 기본이 아닌가. 역시나 체인점을 몇 개나 내며 성공적으로 영업을 하는 사람은 다르구나, 하는 감탄이 들었다. 탄산 때문에 싸해진 콧잔등을 살짝 찌푸리며, 진하는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알코올이 들어간 탓일까, 아니면 속엣 말을 털어놓고 시원해진 탓일까 가슴을 옥죄던 긴장감이 한결 느슨해졌다.
“근데, 사장님도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뭘요?”
“그때 인사 하러 오셨을 때 저희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으면 바로 잡아주고 가셨어야죠. 케이크 배달 온 선아 씨한테 얘기 듣고 우리 둘 다 완전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요.”
현우가 눈살을 구기며 환하게 웃었다. 웃는 얼굴이 순진한 소년 같아서, 순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와, 진짜 잘 생기긴 한 인물이구나, 새삼 감탄이 되었다.
“말 하면 엄청 민망해 할 것 같아서, 말 못 했어요.”
“어휴, 나중에 아는 게 더 민망하죠.”
진하의 격한 항의에 현우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안 볼 때 그러는 건 상관없어요.”
순간 진하가 기막힌 표정으로 입을 떡 벌리며 항의했다.
“와, 완전 이기적이시네요. 눈앞에서 민망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우리 가게만 케이크 배달시키신 거예요?”
“그렇죠!”
하도 어이가 없으니, 웃음이 났다. 정말이지 진지한 표정으로 하는 말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헷갈리는 싱거운 소리뿐이다. 그런데 그 싱거운 소리로 웃게 만드는 걸 보면,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이지 싶다.
“다른 가게는 모두 손수 돌리셨다는 얘기 듣고 저한테 화 많이 나셨나 보다, 했죠. 괜히 졸았네.”
마음이 편해지니, 본격적으로 식욕이 돌았다. 진하는 포크를 집어 들고, 접시에 가득 담긴 참치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살짝 녹인 냉동 참치와 참깨 드레싱이 잘 어우러져서, 자꾸만 손이 갔다. 시장이 반찬이라더니, 그래서 이렇게 맛있게 느껴지는 건가.
“근데 좀 전에 식사했다는 거 사실이에요?”
현우의 말에 진하가 뜨끔한 표정으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샐러드가 참 맛있네요. 드레싱이 특히 좋아요.”
무안한 표정으로 냅킨을 꺼내 들고 입가를 정돈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현우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직 식사 안 하셨죠? 가게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서성거리는 거 다 봤어요.”
순간 진하의 얼굴이 벌게졌다.
“와, 사장님은 은근히 음흉한 데가 있네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배려죠, 일종의.”
계속해서 우겨대는 현우의 말에 진하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배려를 하려면 끝까지 하셔야죠.”
현우가 갑자기 잔을 들더니 진하의 얼굴 앞으로 디밀었다.
“자, 한 잔 더 해야죠.”
얼떨결에 잔을 부딪치고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말 없으니까 다른 데로 말 돌리는 것 좀 봐.
일일이 따지고 드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그저 혼자만 기막혀하고는 말았다.
“그런데 말이죠, 왜 하필 망한 데 이름을 따서 상호를 지은 거죠?”
또 상호 얘기다. 도대체 자기가 팔래스랑 무슨 관계라고, 상표 도용했다고 따지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게다가 팔래스를 두고 망한 데라니!
울컥 뜨거운 감정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거의 20년 동안이나 이 도시를 대표하는 양식당으로 운영이 되던 곳인데, 망했다는 표현은 걸맞지 않지 않아요?”
현우가 흥분으로 다소 격해 있는 진하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세기를 지나 운영되고 있는 레스토랑에 비한다면 20년은 짧죠.”
“그거야 외국 얘기고, 우리나라에선 그런 역사 깊은 레스토랑이 흔하지 않잖아요.”
“20년이 긴 세월이든 어쨌든, 결국 안 좋게 문을 닫은 건데, 하필이면 그런 데 이름을 따서 상호를 내건 게 좀 특이하네요.”
순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단순히 이름을 도용한 게 아니라 팔래스를 계승하려고 한다는 말을 솔직하게 털어놓아 봤자 이 남자의 귀에는 그저 황당한 궤변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팔래스를 계승한다고 하기에 지금 쁘띠 팔래스의 현주소가 너무나 초라하였다. 스무 평 남짓의 조그만 레스토랑, 그나마 저녁 손님은 모조리 놀이터에 빼앗겨 앞으로의 운영이 위태로운 지경.
“그냥, 뭐,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냥 생각이 나서.”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려는데, 현우가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고 레스토랑을 처음 열면서, 상호를 그냥 생각이 나서 짓는 사람은 없어요.”
계속 되는 추궁에 진하는 남아 있는 버니니를 마저 마셔버리고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무단 도용했다고 의심하셔도 할 수 없는 상황이긴 한데,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제가 팔래스랑 좀 깊은 인연이 있어요. 그래서 팔래스란 이름이 그대로 잊히는 게 아쉬워서, 제 가게에 내걸었어요.”
순간 현우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진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인연인데요?”
범인 취조하듯 추궁하는 태도가 무례한 수준을 넘어서, 분노를 치밀게 만들었다.
“그건 사적인 얘기라 말씀 드리기 곤란해요. 저, 죄송한데, 이만 일어날게요. 내일 영업 준비도 해야 해서 일찍 들어가 봐야 되거든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진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당하게 바라보는 남자를 뒤로 한 채 뚜벅뚜벅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