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4.




천장에서 쏟아지는 온풍기의 더운 바람도 손님 없는 홀의 썰렁한 분위기까지 덥히지는 못 하였다. 5시가 조금 넘어 나간 손님을 마지막으로 텅 비어 있는 홀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을 기다리며 앉아 있으려니 백 살 노파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추운 것 같아요.”


히터 바람 따뜻한 실내에서 추위 타령이라니. 동병상련이 느껴지는 윤지의 넋두리에 진하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손님이 없으니 춥지.”


차마 건드리지 못 한 부분을 가감 없이 드러내자 윤지가 본격적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근데 언니, 계속 이렇게 손님이 뜸하면 어떡하죠?”


“뭘 어떡해. 인건비부터 줄여야지.”


심각한 분위기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던진 농담에 윤지가 미안한 표정으로 진하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제가 그만 둬야겠죠.”


예능을 다큐로 만들어버리는 소리에 순간 황당해졌다.


“야,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너 진짜 비관적이다. 놀이터 오픈해서 손님 좀 뜸하다고 벌써 망할 준비 하고 있는 거야?”


목소리를 높이며 흥분하는 모습에 윤지가 손바닥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에요, 언니. 솔직히 언니 음식 솜씨로 망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내 말이!”


자신 있게 호언장담 하긴 했지만 불안하기는 진하도 마찬가지였다.


저녁만 되면 거짓말처럼 손님의 발 길이 뚝 끊기는 기현상의 원흉은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길 건너 놀이터다. 과장 좀 섞어서 말하자면 놀이터의 오픈 시간인 5시가 쁘띠 팔래스의 마감 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손님이 없는 것만도 답답한데, 바로 눈앞에서 놀이터로 향하는 손님들의 행렬까지 지켜보아야 하니 그야말로 속에서 천불이 났다. 처음 며칠이야 오픈 발이려니, 자위했지만 그게 벌써 2주일째다. 이쯤 되니 슬슬 불안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언니, 내가 진짜 이해 못 하는 게 어떤 사람인지 아세요?”


못마땅한 표정으로 놀이터 쪽을 노려보던 윤지가 불쑥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누군데?”


“음식 좀 먹어 보겠다고 기다리고 앉아 있는 사람이요.”


오픈하고 두 시간도 채 안 됐는데 벌써부터 대기석에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저 큰 홀이 다 차려면 손님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야 하는 건지, 진하로서는 감도 오지 않았다.


“그러게 말이야. 무슨 대단한 음식이라고, 저기 저렇게 죽치고 앉아 있다니.”


맛있는 음식이라면 기꺼이 기다리는 수고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남의 의견에 찬물을 끼얹을 정도로 무신경한 성격이 아닌 관계로 본의 아니게 놀이터의 비방을 거드는 모양새가 되었다.  


“아니에요, 절대 음식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그럼?”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을 좀 보세요. 죄다 여자들뿐이에요. 내가 태어나서 저렇게 여자들만 드나드는 술집은 처음 봤어요.”


물론 놀이터가 단순히 술집이라고 말하기에는 억울한 구석이 많기는 하다. 그렇지만 저녁 때 오픈해서 새벽 늦게까지 주류를 판매하니, 술집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그건 그렇지. 남자끼리 온 팀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완전 미남계라니까요!”


윤지가 분개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탕 내리쳤다. 놀이터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미남계라고 매도될 정도로 잘 생겼던가, 순간 갈등이 되기는 했지만 일단 무시하고 입을 떡 벌리며 놀라움을 토해냈다.


“설마! 저 많은 사람들이 서빙 하는 남자 인물 감상 하러 왔단 말이야?”


윤지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제 가슴을 두 번 쳤다.


“언니, 참!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어쩜 그렇게 여자 마음을 몰라요? 지금 서빙 하는 애들이 문제예요. 강동원 뺨치는 사장님이 있는데. 그 인물에 저 큰 레스토랑 사장이면 설령 애 딸린 유부남일지라도 여자들이 침을 흘릴 텐데, 그 사람은 총각이잖아요.”


무슨 그 남자가 강동원 뺨을 쳐!


서현우가 화제에 오르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대번에 종료되었다. 첫만남 이후 서현우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조차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는 마당에 그 사람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됐다! 괜한 강동원 억울하게 만들지 말고, 테이블이나 치우자.”


여전히 흥분하고 있는 윤지가 미처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테이블에 널려 있는 그릇들을 주섬주섬 모았다.


얼마나 통쾌하게 비웃고 있을까. 경쟁상대로도 생각 않는다며 잘난 척 하던 쁘띠 팔래스에 보란 듯이 한 방 먹이고 있으니.


아니,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그녀의 일방적인 자격지심일지도 모른다. 손님이 저렇게 많이 들이닥치는 가게에서 남의 사정이 어떤지 살펴볼 여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손님이 없고 시간이 남아돌아야 괜히 남의 가게에 관심도 갖고 흉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스스로 한심해져서, 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 머리를 쿵 찧고 싶었다. 


“손님 오신다!”


윤지의 탄성에 진하가 주방으로 가다가 말고 창밖을 돌아보았다. 일주일에 한 번은 들르는 단골손님이 친구와 함께 쁘띠 팔래스 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식사에 와인을 곁들여 마시는 제법 단가가 높은 손님이라 진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래, 이럴 때일수록 오는 손님께 정성을 다 한 음식을 내놓아한다! 파이팅을 다지고 있던 진하의 얼굴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분명히 이쪽으로 향하던 손님이 옆에 있는 동행과 몇 마디 하는가 싶더니 냉큼 도로를 건너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아예 다른 데로 가기를, 택시라도 잡아타기를 기도했지만 애석하게도 손님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놀이터 쪽이었다. 그것도 대기석!

“어, 그냥 가시네.”


윤지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손님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대기석이 저렇게 바글바글하니, 나라도 궁금하겠다.”


변심한 애인의 외도 장면을 목격한 것만큼이나 충격적이었지만 진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갈 거면 우리 안 보이게 몰래 가던가. 어떻게 이래요. 그 동안의 정이 있는데.”


“정으로 식당 다니니? 차라리 잘 됐어. 다른 데도 가보고 해야 우리 음식이 맛있는 줄 아시지.”


윤지와 손을 맞잡고 푸념을 하면 정말 비참해질 것 같아서, 계속해서 대범한 척 굴어 보였다.


“맞아요! 맛있는 음식도 자꾸 먹으면 익숙해진다고, 놀이터 가서 맛없는 음식도 좀 먹어봐야 우리 음식 귀한 줄을 알죠.”


“바로 그거야!”
호탕하게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가는 진하의 얼굴이 수심으로 어두워졌다.


단골손님마저 팔래스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놀이터의 음식에 실망할 거라는 건 어디까지나 진하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오히려 놀이터의 음식이 입맛에 더 맞을 수도 있고, 맛이 좀 덜하더라도 분위기가 마음에 들면 찾게 되는 게 레스토랑이다. 즉 음식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랑 메뉴가 많이 겹치는데, 놀이터는 음식 뿐 아니라 음료 면에서 선택의 폭이 훨씬 다양해요. 가격은 더 싸고.


서현우가 했던 말이 불길한 주문처럼 머릿속을 떠돌았다. 쁘띠 팔래스를 열고, 처음으로 위기의식이 들었다. 이대로 가만있다가는 망할 수도 있겠다는. 넋 놓고 앉아서 놀이터나 헐뜯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손님이 놀이터 말고 쁘띠 프랑스를 선택할 수 있을만한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놀이터가 어떤 곳인지 아는 게 급선무다. 




마감을 하고 집으로 올라온 진하는 우선 컴퓨터부터 켰다. 그리고는 퓨전 레스토랑 놀이터를 검색해 블로그 글들을 낱낱이 살펴보았다. 와인에 세계 맥주, 사케까지 온갖 주류를 다 판매하는 술집, 세련된 카페 분위기의 인테리어, 그리고 패밀리 레스토랑처럼 다양하고 캐주얼한 메뉴.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놀이터는 술집과 밥집을 겸비한 멀티 플레이어였다. 부어라 마셔라 왁자하게 떠드는 술집 보다는 분위기 좋은 곳에서 한 잔 하고 싶거나, 식상한 패밀리 레스토랑 말고 좀 더 색다른 장소에서 식사하고 싶은 사람 모두를 만족시키는 장소. 설상가상으로 놀이터에서만 먹을 수 있는 독창적인 메뉴 몇 가지와 주인의 취향이 드러나는 독특한 인테리어가 놀이터를 유행을 앞선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가야 하는 필수코스처럼 만들었다. 그러니 놀이터에 가는 게 일종의 자랑처럼 되어 그저 들르고 마는 것이 아니라 방문 후 블로그에 글을 남기게 되고, 좋은 평가와 멋진 사진들이 놀이터를 자연스럽게 홍보해주었다.


글을 읽어갈수록 진하는 놀이터에 직접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남의 글, 남의 사진은 어디까지나 남의 시각일 뿐이다. 직접 경험해서 제대로 된 판단을 직접 내리고 싶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놀이터에를 들어갈 수가 있느냔 말이다. 혹시나 가게 앞에서 서현우와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엄청 주의하고 있는데, 제 발로 놀이터로 들어간다고? 동물 탈이라도 쓰지 않는 한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어찌할까 손톱만 깨물고 있다가 문득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시내에 있는 본점으로 가면 된다!


사장인 서현우가 새로 오픈한 놀이터에 연일 눌러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시내는 다른 매니저가 맡아서 운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쁘띠 팔래스의 정기 휴일인 둘째 주 월요일, 진하는 일찌감치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서점에 들러 요리 책을 두 권 사고, 영화를 한 편 보고 나니까 4시 35분이었다. 6시가 넘으면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서둘러 놀이터가 있는 중심가 쪽으로 향했다. 매섭게 부는 칼바람에 머플러를 단단히 여미고 앞만 보고 걷는 진하의 표정이 비장하였다. 팔래스의 간판을 내리고 보란 듯이 제 간판을 내 건 놀이터에 쁘띠 팔래스마저 한 방에 넉아웃 당할 수는 없다!


가서 낱낱이 살펴보리라. 놀이터에는 없는 무언가를, 반드시 찾아내리라.


비장했던 각오와는 달리 막상 놀이터의 간판이 보이자 들어가는 게 꺼려졌다. 혹시나 아는 얼굴이라도 만난다면 어쩌지? 만에 하나 서현우가 여기에 들른다면!


생각만으로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그냥 갈까? 여기서 밥 한 번 먹는다고 무슨 굉장히 지략이 나올 거라고. 괜히 모양새만 우스워질 수도 있다. 아니야, 밥 한 번 먹을 수도 있지. 도대체 길 건너 구멍가게 같은 식당 주인을 누가 주시하고 있으라고. 착각도 유분수지.


놀이터 근처를 서성거리며, 수십 번도 넘게 마음을 고쳐먹고 있는데,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진하의 등을 툭 쳤다.


“여기 왜 이러고 서 있어요?”


깜짝 놀라 뒤를 도는 순간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에 진하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하였다.


서현우다! 


댓글 '2'

윤소영

2011.01.24 15:46:33

설마했는데 정말 딱 마주쳤네요 ㅎㅎ
놀이터 사장 현우가 쫌 얄밉기는 해요 ㅋㅋ

진하

2011.01.24 17:54:29

여주 이름이 저랑 같아서 좋아요~~
거의 남자 이름이었는데.ㅠㅠ
여주가 된 기분이에용용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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