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3.




오전 10시. 진하는 쁘띠 팔래스의 자바라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환기를 하였다. 어제 밤 마감을 하면서 깨끗하게 청소해 놓은 가게 앞이 밤새 지나가는 사람들이 투척한 빈 깡통이며 담배꽁초들로 어질러져 있었다. 청소용 집게를 들고 나와 가게 앞 도로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쓰레기들을 집어 봉투에 담으면서 맞은편 건물을 관심 없는 척 쳐다보았다. 다소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고풍스러웠던 팔래스의 흔적은 완전히 지워지고, 완전히 새로운 퓨전 레스토랑이 떡하니 서 있는 광경이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오늘 놀이터가 오픈을 한다.


공사 현장 책임자에게 정색하며 달려들었던 일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한 귀로 흘려들었으면 될 일을 갖고 왜 그리 흥분을 해서는 주제 넘는 소리를 퍼부어댔을까. 잠자리에 들 때마다 그날 했던 말을 곱씹으며 이불을 잘근잘근 씹은 지 벌써 며칠 째다.


“아우, 몰라. 언제 또 만날 일이 있다고. 됐어, 신경 꺼!”


낯 뜨거운 기억을 머릿속에서 훌훌 털어내기 위해 진하는 고개를 격하게 흔들었다.




“어! 사람이 또 들어가고 있어요! 이번에는 네 명!”


윤지가 출입문 앞에 바싹 붙어 서서 놀이터 앞의 상황을 생중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5시 오픈이라고 떠억 하니 써 붙여 놓았는데도 손님의 발 길이 끊이질 않는 모양이다.


“한가할 때 점심이나 먹어야겠다.”


진하는 전혀 관심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 사람들도 도로 나오네. 그러게 왜 시간도 되기 전에 들어가.”


고소해 하며 킥킥 거리는 윤지와는 달리 진하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이 시간 때가 원래 한가한 시간이라고는 하나 최근 들어 이렇게까지 손님이 뜸한 적은 처음이다. 새로 오픈을 하는 가게, 더군다나 놀이터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레스토랑이니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게 당연하다고 머리로는 생각은 하지만 내심 서운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머, 어머! 손님이 또 들어가네! 아니, 저 사람들은 시간도 안 보나? 왜 자꾸 오픈도 안 한 가게를 들어가고 그러지? 여기 이렇게 멀쩡하게 문 열고 있는 집 놔두고.”


제 나름으로는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라는 건 알지만, 그게 오히려 신경을 긁었다.


“됐어, 그만 신경 꺼.”


잔뜩 흥분하고 있는 윤지의 등에 대고 진하가 따끔하게 한 소리 하였다. 말 속에 감정이 느껴졌는지, 윤지가 진하를 돌아보았다.


“다 오픈 발이죠, 뭐. 원래 오픈 하면 처음 며칠은 바글바글 하잖아요.”


새로 오픈한 가게에 사람 좀 들어간다고 신경질이나 내는 속 좁은 사람을 만드는 말에 순간 열이 확 받았다.


“그만 좀 쳐다보라고. 너 그러고 있는 거 밖에서 보면 되게 웃겨 보이겠어.”


“아, 그런가.”


“당연하지. 누가 보면 너 완전 염탐하는 포즈야. 문 앞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그건 그러네. 알았어요.”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창밖에 계속 미련이 남는지, 은근슬쩍 시선을 주더니 또 다시 목청을 높인다.


“어머머! 저게 누구야?”


유리창에 얼굴을 들이대는 것도 모자라 문까지 열어젖히고 목을 쭉 빼고 있는 모습에 그만 어이가 없어졌다. 


“빨리 들어와. 염탐한다는 소리를 정말로 듣고 싶어서 그래?”


잔뜩 날이 선 목소리에 윤지가 냉큼 문을 닫았다.


“언니, 완전 황당한 일이 목격했어요.”


윤지의 호들갑에 진하가 턱을 삐딱하게 쳐들었다.


“무슨 일인데?”


“방금 bmw에서 웬 늘씬한 여자가 한 명 내리기에 우와, 하고 쳐다보고 있었는데, 서현우 씨 있잖아요. 놀이터 강동원. 그 사람이 양복 차려 입고 나와서 여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거 있죠.”


“그게 황당한 일이야?”


서현우가 지금 놀이터에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놀랐지만 윤지의 장단에 맞춰주고 싶지 않아 일부러 센 척을 해 보였다.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여자를 데리고 들어갔다니까요.”


“그래서?”


“그래서가 아니죠. 놀이터에 온 초대 손님을 직접 모시고 들어갔다니까요. 그렇다는 건 서현우 그 남자가  놀이터 사장이랑 뭔 관계가 있다는 말이잖아요.”


“당연한 거 아니야? 이게 벌써 3호점이라면서. 공사를 세 번씩이나 맡겼다면 원래 친분이 있는 사이이거나 마음이 굉장히 잘 맞는다는 얘기겠지. 그게 무슨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호들갑이야.”


그렇게 잘 알면서, 사장하고 친분 있는 사람 붙들고 놀이터 험담을 그렇게 해댔던 것이냐, 이진하!


서현우가 사장을 붙들고 팔래스 이름을 괴상하게 도용한 저 구멍가게 같은 조그만 데서 놀이터 따위는 경쟁상대로도 생각 안 한다고 흥분하더라고 낄낄 거리며 얘기를 전했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 재미있는 얘기를 전하지 않았을 리가 만무하다. 둘이서 그 얘기를 하며 얼마나 웃어댔을지 생각을 하니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진하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윤지가 두 손을 모아 쥐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와, 서현우 씨가 단순히 현장 감독이 아니었구나. 사장이랑 친인척 관계였어! 어쩐지. 사람이 귀 티가 나더라니.”


친인척! 본인 흉보다 더 듣기 괘씸한 게 가족 흉인데, 이 일을 어쩌나.


등 뒤가 따가워서 누구한테 싫은 소리 한 번 해 본 일이 없는 진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었다.




“밥 먹자!”


오늘 점심은 매운 떡볶이다. 속 답답할 때는 그저 매운 음식 먹으면서 혀 빼고 하아, 하아, 심호흡 하는 게 최고다. 매운 혀를 달래기 위해 탄산수에 레몬즙을 짜고 시럽을 휘휘 저어 만든 레모네이드를 커다란 잔에 가득 담았다.


“아싸! 떡볶이다!”


진하가 주방으로 부리나케 달려 들어오는 윤지를 밉게 않게 째려보았다.


“밥 먹으라고 하니까 문 앞에서 떨어지냐. 이걸 진짜 자르던가 해야지. 뭔 말을 이렇게 안 들어.”


말 아픈지도 모르고, 헤헤 거리는 윤지와 마주 앉아서 시뻘건 가래떡을 한 입에 넣었다.


“맛있다!”


행복해 보이는 윤지의 표정에 절로 웃음이 났다.


“엄마가 보내준 가래떡 냉동실에 잔뜩 있어. 아주 질리도록 해먹자!”


“그래도 남으면 우리 떡국도 해먹어요!”


“당연하지.”


앞으로 해 먹을 음식 얘기를 하고 있으려니까 마음이 한결 낫다.


“근데요, 언니. 내 동생이 그러는데 놀이터에서 일하는 애들은 죄다 꽃미남들이라네요.”


또 다시 튀어나온 놀이터라는 단어에 잠깐의 행복이 부서졌다.


“여자 손님들 많이 오겠네.”


마지못한 반응에 윤지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내 동생도 꽃미남 본다고 갔던 거래요.”


“너를 쏙 뺐구나. 꽃미남 좋아하는 게.”


“그런데 말이에요, 아무래도 놀이터 사장, 여자일 것 같지 않아요?”


갑자기 진지하게 묻는 바람에 진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알바생도 꽃미남, 인테리어 감독도 꽃미남. 완전 수상하잖아요!”


꼭 저 같은 소리에 파안대소하고 말았다.


“왜,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안 드니?”


“게이? 게이가 남자끼리 좋아하는 건가?”


진심으로 헷갈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윤지를 향해 손바닥을 휘 저었다.


“신경 쓰지 마, 그냥 헛소리니까. 그나저나 놀이터 얘기 좀 그만 하면 안 되냐. 소화 안 되려고 그런다.”


그러자 윤지가 다 안다는 표정으로 진하의 팔뚝을 콕 찔렀다.


“언니. 그날 서현우 씨한테 화냈던 거 땜에 그러는 구나?”


“화는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나도 모르게 흥분 좀 한 것 갖고.”


“에이, 언니. 말은 바로 하랬다고, 흥분 좀 한 건 아니죠. 내가 언니 그렇게 화내는 거 처음 봤는데.”


무슨 대단한 실수라도 한 것인 양 몰고 가는 분위기에 순간 울컥 했다.


“솔직히 그 남자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야? 공사 기간 내내 가만있다가 다 끝난 마당에 언제 또 볼 일이 있다고 가게에 불쑥 들어와서 통성명을 하자니. 들어왔으면 인사나 적당히 하고 나갈 일이지, 김밥 먹겠다고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을 일이니. 그래, 그것까지도 좋다 이거야. 자기가 뭐라고 남의 가게 흥망성쇠를 걱정 하냐고. 아니, 자기가 그렇게 잘 알면 직접 레스토랑을 하나 차리던가. 입만 살아서 나불대는 사람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이야.”


입에서 불을 뿜는 진하를 쳐다보며, 윤지가 입을 떡 벌리며 박수를 쳤다.


“우와, 언니. 래퍼해도 되겠어요.”


아니, 인간적으로 사람이 이렇게까지 열변을 토하면 적당히 맞장구치는 척이라도 해 줄 일이지, 저 장난스러운 반응은 뭐냔 말이다. 지난번 그 인간한테는 아무 것도 아닌 말에도 자지러지게 웃어 넘어가더니. 일일이 따지는 것도 치사스러워서, 떡볶이를 잘근잘근 씹었다.


“난 그래도 서현우 씨 멋지더라. 자기가 공사한 매장을 대놓고 씹는데도 쿨하게 웃어넘기는 것 좀 봐요. 더군다나 자기랑 친한 사람이 하는 가게면 완전 화 났을 텐데. 나 같음 누가 우리 가게 그렇게 얘기하면 못 참아요.”


순간 콧구멍에서 더운 바람이 씩씩 나왔다. 반박할 여지가 없다는 데서 더욱 그러했다.


“야, 너 그 인간 칭찬할 거면 떡볶이 먹지 마.”


진하가 벌떡 일어나 테이블 가운데 있는 떡볶이 냄비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 언니, 치사하게.”


“먹고 싶으면 맹세해. 다시는 놀이터랑 그 진상 얘기 다시는 안 꺼내겠다고!”


그때 딸랑딸랑 종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다. 기겁하며 쳐다보니, 쁘띠 팔래스 바로 옆에서 케이크 공방을 운영하는 유선아가 케이크 상자를 손에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어, 웬일이세요?”


진하가 냄비를 얼른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무안하게 웃었다.


“개업 케이크 전해주려고 왔어요.”


“개업이요?”


“놀이터에서 개업 케이크 주문 들어왔거든요. 쁘띠 팔래스는 저한테 전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요.”


선아의 얘기에 윤지가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표했다.


“놀이터 사장님 봤어요? 여자예요, 남자예요?”


그러자 선아가 황당한 표정으로 윤지를 쳐다보았다.


“네? 6개월 넘게 거의 매일을 봤으면서 무슨 소리예요.”


순간 윤지와 진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누군데요?”


“그 왜, 키 크고 잘 생기신 분 있잖아요.”


순간 윤지가 입을 떡 벌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서현우 씨요?”


“이름도 아시네!”


“서현우 씨가 놀이터 사장이라고요?”


“네.”


“확실해요?”
진하가 거의 기도하는 심정으로 선아를 바라보았다.


“그럼요. 제가 명함까지 받았는걸요.”


순간 다리에 힘이 쭉 풀렸다. 진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망연자실 놀이터를 바라보았다. 살다 살다 어째 이런 실수를!




댓글 '3'

큐리

2011.01.17 15:48:11

이런이런..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요.
진하와 현우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두근두근합니다.

윤소영

2011.01.17 16:09:12

역시 현우가 사장이였네요 ㅎㅎ
앞으로 놀이터와 쁘띠 팔레스의 신경전이 기대됩니다 ㅋㅋㅋ

레띠츄

2011.01.17 16:57:22

이럴 줄 알았어, 이럴줄 알았다구요~ㅋㅋㅋ
현우씨 응큼한 사람이네;; ㅋㅋㅋㅋ
읽다가 한번 뜨끔했네요;; 아하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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