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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 예. 안녕하세요.”
바싹 얼어있는 윤지를 대신해 진하가 노련하게 미소 지으며 남자의 인사에 화답하였다. 덤덤한 표정으로 가게를 둘러보던 남자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툭 내뱉었다.
“굉장히 고소한 냄새가 나네요.”
허공에 대고 코를 킁킁 거리는 태도가 어찌나 편안해 보이는지, 순간 저 남자와 원래 알던 사이였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뭐 만드세요?”
인사 한 번 건넨 적 없는 남의 가게에 불쑥 쳐들어왔으면 용건부터 밝히는 게 우선이건만 다짜고짜 저 할 말만 하는 게 아무래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지 싶다.
“김밥이요.”
진하에게 향한 질문을 냉큼 가로채 답변하는 윤지의 목소리가 평소 보다 한 톤 높았다. 주방을 향해 서 있던 남자가 윤지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김밥도 팔아요?”
웃기지도 않은 얘기에 윤지가 명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요, 아침 식사로 먹을 거예요. 사장님도 한 줄 드시고 가실래요? 저희 언니가 만든 김밥 정말 맛있거든요. 둘이 먹다가 한 명이 죽어도 모를 걸요. 안 드시고 하면 후회하실 거예요.”
이게 뭘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라고!
진하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얼른 변명을 했다.
“어머, 아니에요. 그냥 저희끼리 먹으려고 대충 만든 거예요.”
게다가 초면에 같이 둘러앉아서 김밥 먹자는 제안을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저런 푼수 같은 소리를.......
“셋이 먹다가 둘이 죽어도 모를까요?”
진하의 말은 듣지도 못 한 척 남자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썰렁한 농담을 날렸다. 그런데 그 썰렁한 농담에 윤지가 박장대소를 하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넷이 먹다가 셋이 죽어도 몰라요. 제가 언니가 만들어 준 밥 먹으려고 여기 출근하잖아요.”
“그럼 월급은 안 받겠네요.”
“아니요, 그건 아니죠!”
아무리 강동원 앞이라지만 월급 농담까지 받아줄 순 없었나 보다. 진지하게 소리치는 윤지의 모습이 우스워, 진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쿡 나왔다.
“근데 식사 하실 시간은 되세요? 바쁘신 거 아니에요?”
혹시 하는 마음에 남자에게 도망갈 구멍을 터주었다.
“시간은 있는데, 제가 먹을 김밥이 있나요?”
“아유, 당연하죠! 언니가 원래 손이 좀 크신 편이에요.”
넙죽 대답해놓고는 자기가 생각해도 켕기는 데가 있는지, 윤지가 얼른 진하 쪽을 쳐다보며 무안한 웃음을 흘렸다.
“언니, 난 오늘 아침에 집에서 밥 먹고 왔어.”
언니가 해주는 밥 먹는 낙으로 하루를 보낸다고 노래를 부르던 애가 퍽이나. 신랑은 아침을 먹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 쓰인다면서 놀이터 강동원은 먹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모양이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파워 오브 러브인 것인가. 하도 어이가 없으니 웃음도 안 나온다.
“잠깐 앉아 계세요. 금방 돼요.”
진하가 말을 건네자 남자가 의자를 당겨 테이블 앞에 착석하였다. 테이블에 붙어 서서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윤지의 들뜬 목소리를 귀 뒤로 흘리며, 진하는 냉장고 문을 열고 멸치 우린 물을 꺼내었다. 오늘 김밥과 곁들여 먹을 국은 깨소금으로 맛을 낸 계란 국이다. 초대하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손님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요리를 하는 데 평소 보다 기합이 들어갔다. 바글바글 끌고 있는 냄비에 계란을 휘젓고 있는데, 문득 저 사람이 여길 왜 왔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설마 싱거운 농담이나 나누자고 들어왔을 리는 만무한 터.
“그런데 여기엔 웬일로 오신 거예요? 혹시 무슨 용건이 있어서 들르신 건 아니에요?”
진하의 질문에 남자가 돌연 점잔을 빼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공사도 다 끝나 가는데, 인사는 한 번 드려야 될 것 같아서 들렀습니다. 서현우입니다.”
공사가 다 끝나가는 지금 이 시점에서 통 성명을 하자고? 놀이터 공사 다 끝나면 앞으로 언제 또 마주칠 일이 있다고. 어긋난 타이밍에 기가 막혔지만 그렇다고 인사 하러 왔다는 사람을 면박 줄 만큼 야박한 인간을 못 되는지라 적당히 웃어 넘기고 말았다.
“저는 이진하예요. 사장님 옆에 서 있는 친구는 최윤지구요.”
“그런데 사장님, 놀이터 언제 오픈이에요? 공사 다 끝나가는 것 같던데.”
윤지가 자못 서운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휴, 저 푼수를 진짜 어째. 문자로 그만 좀 티내라고 말을 해줘야 하나.
진하는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저러는 것도 며칠 안 남았다, 싶은 생각에 그만 두었다.
“다음 주 월요일 오픈이에요.”
“그럼 이제 사장님 뵙기 힘들겠네요.”
“자주 들러야죠. 그런데, 여기는 사장님이 직접 요리를 하시나 보네요.”
“네, 언니가 쉐프 겸 여기 사장님이에요.”
갑자기 자신의 얘기가 화제에 오르자 진하가 김밥을 썰다가 말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흘긋 쳐다보았다.
“이런 질문 실례이신지 모르겠는데, 사장님은 결혼 하셨나요?”
눈을 반짝이며 사적인 질문을 하는 윤지 때문에 칼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뇨, 아직 못 했습니다.”
어쩐지 뒤에 나올 대사가 뭔지 알 것 같아서 슬슬 불안해졌다.
“어머, 그러세요? 저희 언니..........”
가만 놔두었다가는 턱도 없는 중신 분위기를 조성할 것 같아 잽싸게 윤지의 말 사이로 뛰어 들었다.
“자, 다 됐습니다. 식사 하세요!”
커다란 접시에 김밥을 수북하게 썰어놓고, 수프를 담는 오목한 공기에 계란 국을 담아내었다. 낯선 남자와 둘러앉아 아침 식사를 하는 어색한 테이블 주변을 고소한 깨 냄새가 둥실 떠다녔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이게 보기보다 엄청 맵거든요.”
그토록 맛있다는 칭찬을 퍼부어놓았으니, 그 기대에 미치지 못 할까봐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그러게 맛있어 봐야 김밥이 김밥이지, 뭐 대단한 요리라도 되는 양 수선을 떠느냔 말이다.
“매운 거 좋아합니다.”
시원스레 잘라 말하고는 현우가 능숙한 젓가락질로 김밥을 한입에 넣었다.
맛있을까, 아니면 실망을 할까.
진하는 계란 국을 먹는 척하며 은근슬쩍 남자의 표정을 살피었다. 묵묵히 김밥을 씹던 남자의 입에서 돌연 탄성 소리가 터졌다.
“와.”
순간 수저를 쥐고 있던 진하의 손가락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맛있네요.”
순수한 감탄에 진하의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정말이지 이런 때는 세상을 다 얻은 것만큼이나 기쁘다.
“맛있죠! 김밥 뿐 아니라 이 언니가 만든 건 다 맛있어요. 정말 마법 같은 손이라니까요.”
현우가 김밥을 입에 넣으려다가 말고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건 주먹밥으로 만들어도 맛있겠어요.”
요리에도 관심이 깊은 모양인지, 그저 먹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생각이 많은 표정이다.
“주먹밥은 근데 먹기가 불편해서요. 오며, 가며 간편하게 집어 먹는 데는 김밥이 딱 안성맞춤이에요.”
“그런데 밥에서 단 맛이 나는데, 이게 뭐죠? 설탕 같진 않고.”
“매실에다 설탕 재워서 만든 매실즙이에요.”
진하의 답변에 현우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감탄했다.
“아, 이게 매실 향이었구나.”
“저희 어머니가 직접 담그신 거예요. 요리 할 때 설탕 대신 넣으면 좋아요.”
호기심을 갖는 모습이 보기 좋아, 진하는 묻지도 않은 얘기를 술술 풀어 놓았다. 누가 됐던 간에 자신이 만들어준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은 모두 반갑고 좋았다.
“언니네 어머니가 김치며, 된장, 고추장 다 직접 담가서 보내주시는데, 언니 보다 음식 솜씨가 더 좋으세요.”
잠자코 고개를 끄덕거리며, 현우가 테이블 가운데 놓여 있는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메뉴에 대한 얘기를 나누겠구나, 싶으니 가슴이 조금 뛰었다.
“그런데, 왜 쁘띠 팔래스에요?”
엉뚱하게 상호에 대한 질문이 나와 순간 당황했다.
“어, 그거 불언데. 사장님은 불어를 읽을 줄 아시네요.”
윤지의 감탄 소리에 미동도 보이지 않은 채 현우가 진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슨 특별한 의미라도 있나요?”
뭐랄까, 취조하는 것 같은 눈빛이라 순간 당황했다. 남의 집 상호에 저토록 날카로운 관심을 보일 리는 없고, 혹시 상호를 도용했다고 생각하는 걸가? 간판을 직접 내렸으니, 팔래스라는 상호를 누구 보다 더 잘 기억하고 있을 터. 사정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잘 나가던 레스토랑이 문을 닫자마자 냉큼 상호를 가로채 사용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아뇨, 그냥 별 뜻은 없어요. 그냥 가게가 작아서요.”
그렇다고 잘 알지도 못 하는 사람 앞에서 묻지도 않은 구구절절한 사연을 읊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남자가 진하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다시 메뉴판을 쳐다보았다.
“메뉴가 상당히 심플하네요. 스파게티하고 스프는 매일 바뀌나 보죠?”
별 것 아닌 질문이 취조처럼 느껴져 마음이 불편하였다.
“네, 그날 메뉴를 칠판에 써 놔요.”
윤지가 발랄한 표정으로 문 앞에 있는 칠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문 앞에 있는 칠판이요.”
현우가 문 쪽으로 흘긋 시선을 주고는 메뉴판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김밥을 집어 진하 쪽으로 밀어 보였다.
“이걸 만들어 팔 생각은 없어요? 반응 좋을 것 같은데.”
“아뇨,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제대로 된 레스토랑으로 가고 싶어요. 이것, 저것 섞어 파는 퓨전이 아니라.”
딱 잘라 거절을 하자 현우가 사족 한 마디 없이 들고 있던 김밥을 입에 쏙 넣었다.
“놀이터 가 본 적 있어요?”
뜬금없는 질문에 진하가 멍하지 쳐다보자 현우가 싱거운 소리를 했다.
“어린이 놀이터 말고요, 시내에 있는 레스토랑 놀이터 본점 말이에요.”
“아니요, 직접 가 본 적은 없어요.”
그런 데가 있다는 것도 팔래스 자리에 들어서는 게 도대체 뭔지 궁금해서 검색해 보고 처음 알았다.
“여기랑 메뉴가 많이 겹치는데, 놀이터는 음식 뿐 아니라 음료 면에서 선택의 폭이 훨씬 다양해요. 가격은 더 싸고.”
그래서 뭘 어쩌라는 얘기?
불편한 심기를 눈치 챘는지, 윤지가 눈치 있게 끼어들었다.
“전 가 본 적이 없는데, 제 동생 말로는 놀이터는 맥주에 사케, 와인까지 팔고, 오후 늦게 문 열어서 새벽까지 운영하던데요. 우린 밥집이고, 거긴 술집이고, 완전 다른 느낌인 것 같은데요.”
“술도 파는 밥집이겠죠. 그리고 일찍 문을 열긴 하지만 여기도 가장 손님이 많이 오는 시간은 저녁 이후 아닙니까?”
“그건 그러네요.”
허를 찔린 표정으로 수긍하는 윤지의 모습에 순간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자기가 뭐라고 남의 영업집에 들어와 되도 않는 훈수를 두고 있느냔 말이다. 그렇게 잘 알면 자기가 식당을 차려서 하던가.
“왜요, 저희가 놀이터에 밀릴 것 같아 걱정 되세요?”
다소 도전적인 질문에 현우가 난감한 시선으로 진하를 쳐다보았다.
“제가 그런 걱정을 할 만한 입장은 못 되죠.”
“충분히 그래 보이시는데요.”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진심이 보이지 않는 사과에 빠지직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옆구리를 찌르는 윤지의 손을 붙잡아 단호하게 떼어놓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놀이터처럼 반짝 떴다가 인테리어가 유행에 뒤쳐지면 손님 떨어지는 그런 데는 경쟁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저는 레스토랑을 일, 이년 하다가 말 게 아니라 평생 할 거거든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현우가 픽, 어이없는 웃음을 날렸다.
“상당히 신랄한 평가군요. 가 본 적도 없다면서.”
“제 취향이 아니라서 안 간 거예요. 전 음식이 최우선이 아닌 데는 영 싫거든요. 물론 사장님 센스를 폄하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사진으로만 봐도 인테리어는 굉장히 멋지더라고요.”
황당하게 쳐다보고 있는 현우를 향해 윤지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사장님, 이제 공사 끝나면 얼굴 뵙기 힘들겠네요. 공사 맡았다고 놀이터에만 들르지 마시고, 저희 집에도 종종 오세요. 음식은 우리가 훨씬 맛있을 걸요. 언니, 음식 솜씨 아시죠?”
현우가 돌연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앞으로 자주 봅시다.”
<혹시나 연재 글 기다리셨던 분들께 죄송하단 말씀 전합니다. 연말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컴터 앞에 앉을 시간이 없었어요. T_T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현우가 놀이터 주인인가요.
재밌습니다. 새해에도 건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