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오르페우스는 오색 천이 휘날리는 나무와 기묘한 지붕의 정자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뛰었다.

 

“잠, 잠깐, 오르페우스.”

 

그녀는 숨을 헉헉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힘들어서 더 이상 못 가겠어. 하아, 하아.”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손목도 아파, 그렇게 끌면 어떡해?”

 

에우리디케는 짐짓 화난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오르페우스는 그녀가 숨을 고루 쉬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멈춰 있다가 뒤를 돌아 그녀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에우리디케는 조금 놀랐지만, 곧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듯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천천히 그의 등에 손을 둘렀다.

 

“에우리디케, 에우리디케, 에우리디케…….”

 

에우리디케는 끝없이 부를 것 같은 자신의 이름을 들으며 오르페우스가 진정하는 것을 기다렸다.

 

“응, 나 여기 있어.”

 

에우리디케도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그의 부름에 대답해 줄 수 있는 기쁨에 울음과 떨림이 섞여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도 울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오르페우스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자신의 품에서 떼어내더니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오르페우스…….”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의 이름을 부르며 그리움이 남듯 여운을 남겨 애절한 목소리를 냈다.

 

“다친 덴 없어?”

 

에우리디케는 잠시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살포시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네. ‘지금은’ 괜찮아. 아프지도 않고, 참 편해.”

 

오르페우스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얼굴 모양을 따라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미안해…….”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던 오르페우스는 긴 침묵 뒤에 다시 말했다.

 

“미안해…….”

 

에우리디케는 그의 미안해하는 마음이 느껴져 너무 아팠다.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난 여기서 참 편해. 괜찮다니까.”

 

에우리디케는 순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르페우스는 그런 그녀가 정말 편한 것 같아서 속상했다.

 

“괜찮다고 하지 마, 편하다고 하지 마, 내가 그립지 않아?”

 

투정부리듯 볼멘소리를 하며 화를 내는 그를 바라보며 그녀는 살며시 웃었다.

 

“여기는 시간이 의미가 없으니까. 당신만큼 오래 기다리지 않거든. 오늘 만나면 나는 곧 다음 순간 당신을 만날 때 어제 만난 듯 내일 만날 듯……, 그럴 거야. 지하는, 그리고 여기는 그런 세계거든.”

 

오르페우스는 잠시 편하게 미소 짓는 에우리디케를 바라보다가 손으로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헤어질 때의 이야기는 하지 말자.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 그런 생각은 하기 싫어.”

“응, 그래.”

 

1년 후, 오늘이 지나면 자신은 1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에우리디케는 그게 내일이라고 한다. 오르페우스는 머릿속의 슬픈 생각을 털어버리며 억지로 그 생각을 지웠다. 죽은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할 일이다. 하데스의 말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다시 에우리디케를 끌어안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처음 만난 것은 2년도 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수명이 짧은 인간 여성이 스무 살 중반(당시 24세)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은 것에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평균 수명 30세의 시대였다. 최소 열여섯 즈음부터 혼담이 오가는 시대에 결혼적령기가 지난 나이였던 것이다. 게다가 무척이나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성으로 뭇 남성들이 내버려두지 않았을 터인데도 에우리디케는 결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음…….”

 

이것이 아마도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를 보고 한 첫마디였을 것이다. 기억이 가물가물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람의 목소리에 그는 말했다.

 

“살려주세요.”

 

따뜻한 에게해를 배경으로 오르페우스는 환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깊은 숲 속이었고, 에게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산 너머 바다가 있었으니 그랬다 치자. 어쨌든, 따뜻한 날씨에 처음 본 에우리디케는 깊게 얼굴을 가린 두건을 쓰고 길고 두꺼운 망토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변덕스러운 날씨가 일상적인 땅에서 방문한 외국인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다년간의 경험에 본능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여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곧 입을 닫고 두려움에 떨었다.

 

“…….”

 

그랬다. 잘생긴 외모와 천재적인 음률이 화가 되어 여자들에게 시달리다 못해 여성공포증이 생겨버린 오르페우스였다. 그 당시에도 오르페우스는 구혼하는 여성들에게 쫓기다 숲 속을 굴러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오르페우스는 미처 피하지 못한 여성이 끝내 날 죽이려(쫓아) 왔구나 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리고 하루 뒤,

 

“아직 안 죽었네.”

 

그것이 오르페우스가 들은 그녀의 두 번째 말이었다. 무심함이 매력(성격)인 그녀는 죽어가는 남자를 방치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오가는 길에 또다시 살아있는 오르페우스를 발견한 것이었다. 오르페우스는 또다시 방치하려는 에우리디케의 치맛자락을 잡고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 자신도 자신이 여자한테 매달리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목숨만이 아닌 사랑에 대한 의미에서도 시작에 불과했다.

 

“…….”

 

에우리디케는 무심히 자신의 치맛자락을 물고 늘어지는 오르페우스를 한번 발길질하고 경사면에서 다시 주르르 흘러내린 그의 빈사인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르페우스는 그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몰랐지만, 나중에 들어보니 자신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한번은 도와주자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덧붙여 어쩐지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이라 내일도 살아있을 듯해서 그랬다는 말은 농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어쨌든, 그런 느낌이 처음이었던 오르페우스는 세상에 자신을 이렇게 냉대하는 상대가 존재할 수 있다니 라는 생각에 감동을 받았다. 이런 여자라면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해 차츰 에우리디케에게 마음이 끌렸다. 자신이라면 쉽게 몸을 던지고, 자신의 의견은 없이 꼭두각시처럼 고개만 끄덕이고, 심지어 일상생활을 모조리 감시하며 압박감마저 느끼게 하는 여자들만 보다보니 자신의 죽음마저 방치(?)하는 에우리디케가 신선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에우리디케는 그 근방의 유명한 약초꾼이었다. 산과 숲을 누비며 약초를 채집하고 그것을 파는 일로 먹고 살았다. 그녀는 장터에 나가 약초를 매매할 때나 외출 할 때는 늘 깊게 망토에 달린 모자로 얼굴을 가렸고, 망토로 그 몸을 가렸다. 여성의 느낌은 감출 수 없었지만, 음습하고 은둔자 같은 분위기의 그녀의 외모를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약초를 팔기 위해 마을로 내려갈 때는 자신만의 비밀 기술로 약초를 이용해 외모를 상처투성이와 두드러기가 난 상태로 만들어 자신의 외모를 감추었다. 어쩌다 두건이 벗겨져도 그 외모가 튀지 않도록, 도리어 사람들로 하여금 회피하게 만들도록. 그녀는 지독한 남성혐오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오르페우스가 그녀의 미모를 확인한 순간은 그를 질질 끌어 사냥꾼의 오두막(자신의 집으로는 결코 데려가지 않았다)으로 자신을 옮겼을 때였다. 아무리 그녀라도 이 더운 날씨에 망토를 내내 걸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사실 약초를 캐기 위해 산행을 나설 때도 만일을 위해 망토를 가지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입지 않았다. 낮선 오르페우스를 발견하고 그 앞에서 몰래 두르고 지나갔던 것.

 

“다리가 부러졌어.”

 

에우리디케는 그의 몸을 유심히 살피고는 그렇게 선언했다.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다리임에도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돌리고 긍정했다.

 

“어, 보기만 해도 아플 정도로 이상하게 틀어졌어.”

“용케 아직 살아있네.”

 

내출혈을 일으켜도 남을 상처였지만, 운이 좋게 뼈만 비틀리고 출혈은 일으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방치한 상태에서 사망했을 것이다.

 

“아플 거야.”

“뭐?”

 

오르페우스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나 싶어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에우리디케는 비틀린 다리를 순식간에 맞추었다.

 

“으악!”

 

그리고 그는 기절했다. 다음 순간 깨어났을 때, 다리는 완벽하게 처지 되어 있었다. 약초냄새가 나고, 막대기로 고정되어 있는 다리를 보았을 때, 웬만한 돌팔이보다 좋은 솜씨에 놀랐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녀는 없었고, 어디선가 찾아놨는지 몸을 지지하기 편한 게 생긴 나무 막대가 하나 침대 가에 기대어 있었다. 오르페우스는 밖이 궁금해 막대기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문을 열리더니 타오르는 모닥불의 열기와 빛과 함께 그녀가 들어왔다. 어두운 숲의 밤 속에서 두건을 젖힌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떠올라 있었다.

 

“…….”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의 얼굴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생각보다 늦게 깼네, 자 이거 먹어. 이틀 동안 굶어서 스프를 끓였어. 골절에는 고기가 필요하지만, 지금은 일단 속을 달래는 게 먼저니까.”

 

그렇게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에게 나무로 된 투박한 스프 그릇을 내밀었다.

 

“어……, 그래…….”

 

에우리디케는 순간 초점 없는 오르페우스의 눈과 느린 반응에 의아해하다가 자신이 두건을 벗고 있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황급히 팔로 얼굴을 가리며 다시 그릇을 들이밀었다.

 

“뭘 봐? 어서 처먹기나 해.”

“…….”

 

오르페우스는 아름다운 얼굴에서 튀어나온 거친 말투에 상반된 매력을 느꼈다. 에우리디케는 화가 나서 뜨거운 스프를 확 얼굴에 뒤집어씌우고 싶었다고 한다. 여전히 느린 반응에 멀거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오르페우스가 싫어서. 그녀는 스프 그릇을 억지로 오르페우스에게 맡기고 오두막을 서둘러 나가버렸다.

 

“어! 잠깐…….”

 

사라지는 미인을 잡고 싶어서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잡고 싶었지만, 다친 다리 때문에 손만 뻗어 오두막을 나가버리는 에우리디케의 뒷모습을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오르페우스는 막대기를 찾아 짚고 스프그릇을 든 채로 일어서려다가 바닥에 구르고 말았다.

털석!

무방비하게 구르는 소리는 의외로 조용해서 에우리디케에게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오르페우스가 스프그릇을 뒤집어 쓴 소리는 크게 들렸다.

 

“앗! 뜨, 뜨, 뜨, 뜨거!”

 

그야, 크게 소리를 질렀으니까. 에우리디케는 놀라서 일어서려다가 멈칫 그 자리에 굳었다.

 

“…….”

“…….”

 

그녀는 이 낮선 남자를 신경 써 줘야 하나 마나 고민을 했다. 치료는 했으니 마음에 걸리는 건 없고, 그냥 사라져도 상관없지 않나 싶은 갈등이 생겼다. 그와 동시에 오르페우스는 바닥을 구르며 스프그릇을 뒤집어 쓴 건 정말 뜨거워서 정신이 없었지만, 어쩐지 반응이 없는 밖의 상황에 당황했다. 그리고 잠시 후,

 

“으아악! 내 다리, 내 다리, 피, 피가!”

“뭐야, 뼈가 튀어나왔어?”

 

그제서야 에우리디케는 고정된 뼈가 충격으로 살을 뚫고 나왔나싶어 오두막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

“…….”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스프를 뒤집어 써 목과 가슴 사이가 벌겋게 물들긴 했지만 부목으로 고정된 다리는 멀쩡했고, 오르페우스는 여자의 시선을 끌었다는 기쁨에 헤실헤실 웃으려다가 두건 사이로 보이는 야간에 빛내는 짐승의 눈처럼 살기가 깃든 에우리디케의 눈동자를 보고는 금세 얼굴을 굳히고 시선을 피했다.

 

“여자한테 맞아 죽어보고 싶어?”

“……아니.”(유사경험 많음)

 

에우리디케는 눈을 한번 부라리고는 다시 오두막 문을 나섰다.

 

“어, 잠깐!”

“왜!”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의 신경질적인 반응이 놀라 겁을 집어먹은 목소리로 조그맣게 말했다.

 

“스프…….”

 

어찌되었든 산 속에 방치(?)되어 있던 오르페우스는 굶주렸고, 잠에서 슬슬 깨기 시작하니 배가 고픈 것을 드디어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끌기 위해 장난 친 것을 후회는 했지만, 그래도 살고는 싶었다. 그리고 에우리디케는…….

 

“킥!”

 

그 처절함과 절절함과 그래서 구걸해야만 하는 상황을 이해한 그녀는 웃음이 터졌다.

 

“큭큭큭.”

 

소리를 죽였지만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에우리디케는 계속 웃었고, 분위기 파악을 못한 오르페우스는 조울증을 오락가락하는 에우리디케가 무서워(더불어 같이 웃었다가 화내서 안 줄까하고) 스프 그릇을 꼬옥 쥐고 겁에 질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댓글 '2'

Junk

2012.10.30 10:54:43

그리스 신화 관련이야기인가 봐요. 오르페우스 성격이 새롭네요.

과객연가

2012.10.30 19:39:17

신화상으로는 인기남에 구혼하는 여자들을 외면했다가 맞아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저럴 수도 있지않을까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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