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1.

아파트를 나서는 순간 독기 빠진 바람이 맹렬하게 덤벼들었다. 필로티 공법으로 세워진 이 주상복합 아파트는 1층이 뻥 뚫려 있는 탓에 단지 안으로 유독 바람이 세게 불었다. 선우는 야구 모자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꾹 누르고 스포츠센터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5월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선우는 손바닥으로 허리 부근을 짚으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시범 경기 두 번째 등판 직후 나타난 허리 통증이 벌써 두 달이 되도록 다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괜찮아. 사진으로 봤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어. 그냥 근육이 좀 놀란 것뿐이야.”

처음에는 구단 주치의가 제시한 낙관적인 의견을 그 역시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허리통증은 국내 최고의 좌완 투수로 손꼽히는 강선우에게 체력이 떨어져 있을 때 찾아와서 한 며칠 푹 쉬면 사라지는 감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쉬 사라지지 않는 통증 때문에 재활 치료를 시작 할 때만해도 길어야 보름이라고 생각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재활 치료가 예상 외로 길어지면서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내버려둬도 이 삼일이면 사라지던 통증이 이렇게 길게 지속된다면 뭔가 이상이 있어야 마땅할 텐데 의학적인 소견으로 아무 이상이 없다니 보통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팀 내 제 1선발 투수를 배제한 채 정규 시즌을 맞이하게 된 KJ 드래건즈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4월은 그래도 중위권을 유지하는가 싶더니 5월 들어서는 여덟 개 구단 중에서 7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아직 시즌 초반이기는 하지만 최다 우승 타이틀을 갖고 있고 매 시즌마다 우승후보로 손꼽히는 명문구단 KJ 드래건즈의 하위권 추락은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매스컴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은 물론이고, 구단 홈페이지의 팬클럽 게시판은 부진한 경기력을 펼치는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를 줄 세우며 욕설을 퍼붓느라 폭발직전이었다. KJ가 부진한 경기를 거듭할수록 모두의 관심은 강선우의 허리 부상으로 쏠렸다. 그의 등판만이 KJ를 부진에서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라고 믿는 지금의 상황이 느긋하고 낙관적인 성품의 선우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통증이 제 발로 나가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스포츠센터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내딛는 순간 오른 쪽 골반 위쪽으로 예리한 통증이 어김없이 나타났다. 어정쩡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선우의 등 뒤에서 누군가 차분한 목소리로 지적하는 소리가 들렸다.

허리를 똑바로 펴세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던 선우가 흠칫 숨을 멈추었다. 발레리나처럼 길고 가느다란 목선, 얇은 카디건 위로 도드라지는 풍만한 가슴, 티끌 한 점 없는 깨끗한 피부, 섬세한 이목구비, 탄식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가 두 계단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그래야 되는데 제가 지금 허리가 안 좋아서요.”

여자의 담담한 눈빛은 선우의 얼굴과 목소리를 확인하고도 전혀 달라지는 게 없었다. 야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유감스럽게도.

자세가 틀어지면 허리는 절대 안 나아요.”

내로라하는 의사들도 못 찾는 통증의 원인을 걷는 모습만으로 꿰뚫어보신다고.

허리만 펴면 낫나요?”

선우가 빙글거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농담처럼 건넨 질문에 여자는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필요 이상으로 진지한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기운에 일순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갑자기 도를 아십니까, 하면서 돌변하는 거 아니야?

그럼 완치는 언제 되겠습니까?”

사이비 종교 전도사인지, 아니면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을 맹신하는 선무당인지, 알고 싶어서 일부러 허무맹랑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여자가 무심히 시선을 거두고 선우를 지나쳐 제 갈 길을 걸어갔다. 쓸데없는 말장난에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총총히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선우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야 원, 제대로 한 방 맞았다.

 

선우야, 너 요가 수업 한 번 들어봐라.”

개인훈련을 도와주고 있는 트레이너 상철의 뜬금없는 제안에 선우가 들고 있던 아령을 내려놓고 눈알을 부라렸다.

요상한 동작 따라하다가 제대로 시즌 아웃 되라고?”

프로 2년 차 겨울에 유연성을 키우겠다는 목적으로 요가를 배우다가 허리에 담이 결리는 바람에 스프링 캠프도 제대로 못 치르고 고생만 죽도록 했었다. 그때 고생한 이후로 허리 통증이 한번 씩 올라왔으니 지금 이 원인불명이 통증도 따지고 보면 요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상철이 요가 얘기를 꺼내다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 잠깐 내 얘기 좀 들어봐.”

상철이 주변을 스윽 둘러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뭔데 그렇게 비장해?”

벤치프레스에 걸터앉으며 선우가 주먹으로 허리를 툭툭 쳤다. 자세를 좀만 바꿔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통증 때문에 허리를 두드리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우리 센터에 오전반 요가 선생이 한 명 있는데 허리나 어깨 같은 부위의 만성 통증을 잘 잡아준다고 소문이 자자해. 회원이 하도 많이 몰려서 타임을 하나 더 늘렸을 정도니까.”

뜬구름 잡는 소리에 선우가 대뜸 손사래를 쳤다.

어후, 됐어.”

이러다가 몸에 들러붙은 귀신 쫓아내야한다며 굿이라도 한 판 벌이자고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그럼 너 시즌 끝날 때까지 계속 구경만 하고 있을 거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아무리 그래도 올스타전까진 낫겠지.”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회복에 대한 불안감이 커져가고 있는 것은 선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밑져야 본전이잖아. 파스 한 장 붙여 본다고 생각해.”

무리한 동작 따라하다가 괜히 더 악화 될까봐 그래. 여기서 좀만 삐끗하면 정말로 시즌아웃이야.”

상철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선우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렸다.

누가 아주머니들 사이에 섞여서 하래? 개인 강습 할 거야.”

개인 강습이라고?”

일대 일 수업이라면, 선우의 몸에 최대한 맞추어서 하는 것이니 무리한 동작을 따라 하다 부상을 당할 위험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우 코치가 원래 개인 강습은 안 받는데, 설득해야지.”

상철이 결연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한 번 마음먹으면 치사할 정도로 끈질긴 데가 있는 사람이니, 수단 방법 안 가리고 허락을 받아낼 것이다. 그런데 스포츠센터 강사가 돈벌이가 되는 개인 강습을 안 받는다니, 굉장히 특이한 경우였다.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선우의 귀에 대고 상철이 장난스럽게 속닥거렸다.

우 코치, 엄청 미인이야.”

실없는 농담에 선우가 피식 웃으며 상철의 팔뚝에 가벼운 잽을 날렸다.

그 중요한 얘길 왜 이제 해?”

상철과 같이 운동을 한지도 벌써 7년이 넘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대구에 내려와 개인 운동을 하고 있는 것도 순전히 상철 때문이다. 선우의 몸 상태에 대해서는 구단 소속 트레이너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다. 상철의 조언이라면 일단 따르는 것이 맞다.

 

-우 코치, 수업 끝나고 나한테 좀 들러줘.

출근길에 본부장에게서 온 문자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회원들 사이에 또 무슨 소문이라도 떠도는 걸까. 지난주에 석진철 회원이 저녁 먹자고 한 걸 거절했는데, 그게 문제가 된 건가, 아니면 권오순 회원이 한전에 근무하는 자기 조카랑 소개팅 해보라고 한 걸 거절한 게 문제가 된 걸까. 도대체 자신을 두고 어떤 얘기들이 오가는지, 진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소문은 대부분 그녀의 상상을 초월했고, 항상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진은 정말이지, 사람이 두려웠다.

진이 무거운 마음으로 소파에 앉자마자 본부장이 예상치 못한 얘기를 꺼내었다.

우 코치, 개인 강습 하나 해줘야겠는데.”

개인 강습은 전적으로 코치의 의사에 달린 문제인데도 본부장의 태도는 그녀가 거절을 하는 일은 애초에 생각지도 않는 듯 권위적이었다. 진이 잠자코 바라보자 본부장이 한 발 뒤로 물러나 타이르듯 설명을 덧붙였다.

시간은 우 코치 편한 대로 하면 돼. 페이 문제도 최대한 맞춰줄게. 지금 상황이 워낙 급해서 말이야. 내가 우 코치한테 부탁 좀 할게.”

본부장은 아무 때나 허리를 굽히는 사람이 아니다. 상황이 급하다는 말이 빈말은 아닐 것이다.

개인 강습은 안 합니다.”

본부장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그래서 부탁한다고 하잖아.”

순간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지금 본부장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면, 센터에서 자른다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본부장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녀에게는 강력한 위협 카드였다.

운동선수야. 병원에서 이상이 없다는 것으로 봐선 심한 부상은 아닐 거야. 만성 통증 같은 건데, 도무지 가라앉질 않아. 우 코치가 조금만 봐주면 나이질 것 같아서 그래.”

본부장이 간절한 눈빛으로 진을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다친 사람과 일대일 강습이라니, 도무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본부장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남자 회원이랑 일대일로 개인 강습을 하면 여러 가지 말이 나올 텐데요.”

그건 괜찮아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에 진은 기분이 상했다.

본부장님은 괜찮으실지 몰라도, 저는.......”

강선우에요.”

본부장이 불쑥 말을 자르며 누군가의 이름을 댔다.

?”

개인강습 받는 사람이 투수 강선우라고.”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분위기라 진이 애매한 표정으로 물었다.

투수라면 야구선수인가요?”

불의의 일격을 당한 사람처럼 본부장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강선우를 몰라요? KJ 드래곤즈 투수 강선우. 이런. 야구를 전혀 안 보나 보네. 베이징 올림픽 때 야구 안 봤어요?”

.”

본부장이 허허, 황당하게 웃었다.

우 코치는 가만 보면 세상 등지고 사는 사람 같아.”

진은 가만히 미소 짓고 말았다.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게 가능하다면, 그렇게 살고 싶다. 비수가 되어 꽂히는 언어와 시선을 피할 수 있다면 기꺼이.

국내 최고 투수예요. 그리고 여기 트로피칼 스포츠센터 강동우 사장님, 사촌 동생이야. 프로 입단 초기 때부터 내가 개인 훈련을 맡아왔기 때문에 나한테는 친동생이나 마찬가지고.”

강선우를 얘기하는 동안 날카롭다는 느낌을 주는 본부장의 인상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얘기를 들을수록 진은 점점 머리가 무거워졌다. 강동우 사장과 엮인 인물일 줄이야. 그건 전혀 예상 밖의 얘기였다. 그녀가 가족과 연을 끊기 위해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럼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녀를 받아주고 여태까지 비밀을 지켜주고 있는 고마운 분이다. 잠자코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에게 본부장이 타이르듯 말을 건넸다.

소문은 걱정할 거 없어. 선우가 여자한테 질척거리는 애도 아니고, 설사 이상한 소리가 나온다 해도 어차피 허리 나으면 여기서 떠날 텐데 무슨 걱정이야.”

운동선수의 부상은 평범한 사람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천천히 장기적으로 망가졌기 때문에 그만큼 고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운동선수의 부상은 요가 자세로 고치기 어렵습니다.”

본부장이 노골적으로 답답한 심경을 드러내었다.

그건 우 코치가 걱정할 필요 없어. 결과는 어떻든 상관없으니까 일단 맡아서 손 좀 봐달라고.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 없다고 하는데, 재활 치료니 뭐니 받아봐야 아무 진전이 없는데, 그러느니 차라리 우 코치한테 매직을 바라는 편이 낫지. 안 그래?”

병원에서 원인을 찾지 못 하는 통증은 진의 전문분야다. 그러나 심한 부상의 경우는 자세 교정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요?”

그럼. 지금 당장 시합에 나가야 하는 팀 내 최고 에이스 투수가 허리 통증 때문에 연습투구도 못 하고 있는데. 선우 때문에 지금 팀 성적도 말이 아니야. 하루 빨리 통증을 잡아야 돼. 우 코치, 내가 진심으로 부탁 좀 할게.”

진은 가만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지금 여기서 거절하면 센터에서 나가야 한다. 안정된 직장을 잃지 않으려면 본부장과 타협을 해야 한다. 길어야 두 달. 그 안에 통증이 나으면 다행인 거고, 두 달이 지나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다면 저 쪽에서 스스로 그만 둘 것이다. 상황이 급한 사람일수록 결과를 재촉하게 마련이다. 두 달만 참자. 곧 떠날 사람이라지 않은가.

, 수업할게요. 그렇지만 완치가 된다고 장담은 못 드려요.”

그래, 우 코치 고마워요!”

본부장이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서둘러 일을 진행시키려는 본부장의 기세에 밀려 진은 당장 내일로 수업 시간을 정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부상당한 야구 선수와 일대일 수업을 한다는 것을 현준이 알면 노발대발할 것이다. 그렇지만 직장을 잃고 현준에게 신세를 지는 것보다는 낫다.




댓글 '6'

Junk

2012.10.08 00:06:45

어... 리앙님 예전에 이거 단편이었던? 와...!

Lian

2012.10.08 00:29:55

와, 정크님 정말 기억력 좋으시네요!

전혀 다른 인물들이지만, 그걸 모티브로 쓰는 거 맞아요.

노리코

2012.10.13 20:41:27

아, 재미있어요~

기대기대기대` ㅎㅎㅎ

판당고

2012.10.28 04:06:57

저도 기대 기대~~~

키리

2012.12.28 10:07:01

잘 읽을께요

핑키

2013.01.16 17:46:19

오~ 진의 과거가 넘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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