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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고 고와라 그리고 설레어라
무 - 쌍떡잎식물 양귀비목 십자화과의 한해살이풀 또는 두해살이풀
무는 교은이 제일 좋아하는 채소다. 긴 타원 모양의 탐스러운 자태. 그리고 칼로 자르면 들어나는 희다 못해, 모든 걸 흡수할 것만 같은 투명한 화이트. 어떤 양념을 입혀도 곱게 스며들어 자태를 들어낸다. 무 앞에 서면 교은은 화가가 된다.
아.
무가 드러낼 속살을 생각하자 한숨이 새어나온다.
숫돌에 갈아놨던 반짝이는 칼을 꺼내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무를 쓰다듬고 한 손은 무를 잡고 나머지 손엔 칼을 쥐었다. 그리고 아주 가볍게 칼을 밀어냈다. 쓰윽 그 고운 속을 마주하는 순간.
“저기, 누나.”
이런, 제길. 설렘과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진다.
“어, 그래.”
교은은 주방문에 서서 활짝 웃는 경진을 보며 표정을 수습했다. 친동생 같은 경진이 교은의 모든 걸 알아도 가능하면 경진 앞에서는 더러운 성질을 자제하려는 편이다.
“누나, 바빠요?”
“아니.”
교은은 엄마미소를 지어주고는 수건에 손을 닦았다. 경진은 같은 동네에 살던 동생이다. 지금은 교은의 식당에서 서빙을 맡고 있다.
“대신할 친구 왔거든요.”
경진은 군 입대를 앞두고 있다.
“어디?”
교은은 주방과 홀을 연결하는 벽에 나 있는 가로로 긴 네모난 창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홀에 있어요.”
“그래, 나가자. 밥은 먹었어?”
도마 위에 아쉬운 눈길을
“시간이 몇 신데요. 벌써 먹었어요. 누나는요?”
“그럼, 나도.”
교은보다 머리하나는 더 큰 경진이 교은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교은은 경진을 따라 홀로 들어섰다.
“누나, 여기는 친구 도현이에요.”
“안녕하세요, 송도현입니다.”
뒤돌아 서있던 큰 키의 남자가 교은을 내려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길고 하얀 손가락. 무의 속살 같다. 교은이 잠시 머뭇거리자 그 길고 흰 손가락이 교은의 손을 감았다. 따뜻하다. 그 기분 좋은 감촉이 찰나 같다. 따뜻함이 아쉽게도 사라진다.
“손이 차네요.”
여전히 교은은 제자리로 물러난 손을 주시했다. 이상하게도 상당히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 그게 무를…….”
교은이 고개를 들자 손만큼 희고 고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은색 안경테 뒤로 보이는 진한 밤색 눈동자가 어쩐지 낯익었다.
“어, 너…….”
“누나, 기억하죠? 도현이요, 수제비 먹으러 놀러왔던.”
경진이 도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와, 그 도현이. 이렇게 컸어?”
경진의 부모님과 교은의 부모님은 친구 사이였다. 경진의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자 친척이 없던 경진을 교은의 부모님이 거두었다. 하지만 교은의 부모님은 각자의 생활로 바쁜 처지여서 교은이 다섯 살 아래의 경진을 키우다시피 했다. 경진과 도현은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고 도현이 집으로 종종 놀러오곤 했었다.
“도현이가 저보다 더 커요.”
경진이 도현의 정수리를 가리켰다. 교은의 기억엔 도현은 순정만화에 나올 법한 미소년이었다. 말수도 적고 조용히 책을 읽던. 축구나 농구를 하러 둘이 나간다고 하면 다칠 것 같아 걱정이었던. 그런데 지금은 어른이 되어, 남자가 되어 눈앞에 서있다. 세월 참 빠르다.
“그래, 진짜 많이 컸다. 유학 갔다고 하지 않았어?”
고등학교 졸업 전에 도현이 유학을 갔던 것 같다. 교은의 기억력은 사실 형편없었다. 기억력도 그다지 좋지 못했고 주위의 평으로는 자기 편한 대로 기억한다고 했으니까. 차차 경진이나 도현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괜히 머릿속을 헤집으며 과거를 추적할 필요는 없었다.
“도현이 제대하고 당분간은 한국에서 지낸대요.”
경진이 대충 얼버무렸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 싶은데 그냥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 그런데 괜찮겠어? 도현이가…….”
교은은 자신을 내려다보던 도현과 눈이 마주쳤다. 도현의 성격으로는 조금 무리인 일이 아니지 않을까. 짧은 기억으로도 도현이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말 붙이기가 조금 힘든 타입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만들어 주던 걸 먹고 잘 먹었다는 인사는 아주 잘 하던 예의 바른 구석은 있었다.
교은의 식당은 주로 점심 손님이 많은 밥집이었다. 메뉴는 한식, 중식, 일식, 양식 등등. 교은의 마음 대로다. 메뉴는 일주일 단위로 변경이 된다. 주방에는 교은 외에 친구인 형은과 형은의 후배, 미영 - 이렇게 조리사가 둘이 더 있고 홀은 고등학교 선배인 종연과 경진이 봐주었다.
“도현이 파리에 있을 때 레스토랑에서 2년 넘게 일했으니 잘 할 거예요. 누나 걱정 안 하게 저도 고르고 고른 걸요.”
경진이 자랑하듯 말했다. 교은은 다시금 도현을 바라보았다. 왠지 보우타이에 흰색 셔츠를 입혀 놓으면 제격일 것 같은 그림이다. 이 식당과는 너무 이질적이라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눈을 빛내며 서 있는 경진과 속을 알 수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서있는 도현을 번갈아보며 고민에 빠졌다.
“도현이 너 정말 여기서 일하고 싶니?”
“네.”
안경 너머의 영민한 눈동자를 마주보며 교은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경력 아까우니까 아는데 소개해줄까?”
“아니요. 여기가 좋아요.”
참나. 여기 있던 적도 없는데 좋기는 무슨. 입 속에서 맴돌던 말이 튀어나가려다 마음 좋은 누나의 이미지 때문에라도 교은은 참기로 했다.
“그래…….”
아무래도 교은은 마음이 조금 걸렸다. 사실 교은은 사람 보는 눈이 제로다. 채소나 과일이나 생선이나 고기를 고르라면 잘 골라도. 아, 사람은 정말 어렵다. 그래서 교은은 주방 일에만 집중하기 위해 뉴욕에서 다시 만난 종연과 3대째 한정식 집을 하는 친구인 형은과 일을 시작했다. 형은은 답답한 집안 식당이 싫다며, 종연은 실연 상처 극복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한다며 교은과 함께 이곳으로 왔다.
“교은아, 경진이 가면 우리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어느새 종연이 곁에 와있었다.
“음, 그래. 여기 있기엔 너무, 너무 비주얼이 아깝구나.”
종연은 도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쑤욱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면 셔츠와 청바지 차림이긴 했지만 다르긴 달랐다.
“도현아, 괜찮겠어?”
교은은 다시 한번 물었다. 괜히 덜컥 시작했다가 나중에 힘들어서 관둔다고 하면 손해가 막심하니까. 경진이만한 애는 없는데 정말. 벌써부터 교은은 눈물이 나려고 했다. 거의 키우다 시피한 아들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누나, 나보다 더 잘 할 거예요. 도현이 외엔 내가 안심이 안 돼서 그래요.”
경진이 도현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냐, 내가 있는데.”
종연이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형은 형문제로도 벅차잖아요. 아직도 그 여자 못 잊고….”
“아니, 이 자식이…….”
종연이 경진의 머리에 주먹을 날렸다.
“괜찮습니다. 미더우시면 며칠 보시고 말씀 주세요.”
도현이 안경 너머로 진지하게 덧붙였다. 그래, 진중한 면도 있고. 교은은 안심하기로 했다. 아니, 안심해야 편하니까.
“사실 고마운데 네가 힘들까봐. 우리야 해준다면야 좋지.”
“네, 열심히 할게요.”
도현의 입 끝이 살짝 올라가자 볼우물이 패였다. 아, 또다시 주방에 놔두고 온 무가 생각난다. 희고 고운. 그래서 수백 개, 수천 개를 잘라도 언제나 설레는.
“나는 이종연, 그냥 형이라고 부르면 돼.”
종연이 도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그래, 도현아 나는 누나.”
교은이 경진에게 하는 엄마미소를 지었다. 벌써 이렇게 자라다니. 무처럼 잘 자랐구나.
“그래도 직장인데, 사장님이라고 할게요.”
“에이, 괜찮아. 누나가 어때서? 어려워하지 말고 불러.”
서운하게 누나는 또 싫다니. 경진이랑은 다르게 조금 뻣뻣한 것 같다.
“아니에요. 그것만큼은 지키고 싶어요.”
표정은 달라진 게 없는 조금 단호하게 도현이 말을 끝맺는다.
“어, 어 그래.”
역시 애가 딱 부러지는구나. 교은은 조금 서운했지만 깍듯이 모시겠다는데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사장님이 더 위엄 있고 좋지.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래, 교은아 사장님 해. 얼마나 좋냐, 사장인데. 나는 언제 사장 하나.”
“그렇게 좋으면 사장 시켜줄게.”
“됐다, 뭐. 도현 군은 궁금한 건 없고?”
종연이 도현에게 물었다.
“그런데 간판, 안 바꾸나요? 이대로 쓰시는 건가요?”
“아, 그거….”
종연이 도현을 끌고 간판이 걸린 식당 밖으로 사라졌다.
“경진아.”
“네, 누나.”
교은은 유리 너머로 보이는 도현과 종연을 쳐다보았다.
“걱정된다, 쟤.”
“걱정 마요.”
경진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교은을 안심시켰다.
“그래?”
교은은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똑같이 되묻기만 할 뿐이다.
“그럼요. 얼마나 하고 싶어 했는데요.”
“이 힘든 게 그렇게 하고 싶대? 생긴 거랑 다르네.”
“도현이가 달라요, 꽤. 쟤, 한다면 하는 애에요.”
“뭘 한다고?”
뭐든지 진지하게 열심히 하는 타입인가 보다.
“아, 뭐긴요. 알바요. 제가 뭐든 잘 하는 애라.”
경진이 부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쟤 생활이 어렵니?”
“하하하! 그건 아니에요.”
“그럼 나중에 식당하고 싶대?”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여기에서 무척 일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 그럼 다행이긴 한데.”
“저 군대 안 갔으면 큰……. 아니, 한국에 있는 동안 누나가 해주는 밥 먹고 싶었나 봐요. 그때도 제 간식 다 뺏어 먹었잖아요, 누나가 해준 거.”
“아, 그래.”
기분이 좋아졌다. 맛있다고 하는 것만큼 기분 좋은 말은 없다. 최고의 칭찬이니까. 그래서 그랬나, 남자가 좋아한다고 하면 화가 나는데 해준 음식이 맛있다고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누가 좋아한다고 하면 해줄 수 있는 게 없지만 맛있다고 하면 해줄 수 있는 게 많다.
“그러게 매일 놀러 오라니까 안 오고.”
경진이 교은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누나 간판 안 바꿔요?”
“가족적이잖아. 손님들이 정감 있고 좋대서 그냥 내버려뒀어.”
교은이 인수할 때부터 붙어있던 간판, 부부 식당. 이미 십년을 넘게 한 식당 자리라 교은도 그대로 두기로 했다. 홀에 나가지도 않을뿐더러 남들의 생각 따위 별로 관심도 없었다. 식당이란 자고로 맛이 생명인 법. 내용에 충실할 뿐이다. 종연과 형은이 제발 우리도 비주얼에 신경도 쓰고 온라인 활동도 하자고 했지만 교은은 그런 건 딱 질색이었다.
“하긴, 뭐 부부가 될 거면…….”
교은은 경진의 말을 서둘러 잘랐다.
“경진아, 나는 종연 선배가 가족 같아, 정말. 하지만 부부는 아니야. 실연의 상처로 길바닥에 쓰러져서 망신창이가 된 선배를 데리고 왔을 때 나는 이미 내 가족으로 생각한 사람이야.”
강인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종연은 사랑 때문에 강물에도 뛰어 들고 다리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럼요, 그럼요. 저도 종연 선배는 아니라고 봐요.”
“그럼. 선배도 나 무서워서 싫댔어. 너는 좋은 사람 만나서 꼭 잘 살아. 하지만 이 누나는 괜찮아. 누나는 사랑이니 결혼이니 그런 거 다 개떡 같이, 아니지 개떡은 정말 귀하지. 어쨌든 그딴 건 거지 같이 생각하는 거 알지?”
“아주 잘 알죠. 하지만 누나 그래도…….”
“알아, 경진이 마음. 우리 경진이는 그저 이 누나 몫까지 잘 살면 되는 거야. 알았지? 좋은 여자 만나서 토끼 같은 자식 낳아서. 그럼 이 누나가 반찬이랑 김장해서 열심히 나를 테니까 음식 걱정은 절대 말고.”
교은은 경진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네,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지만요.”
경진의 말은 교은의 귓가에 들리지 않았다. 이미 교은은 주방에 놔두고 온 무 생각에 재빨리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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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다.는 제목도 바꾸고 작업도 할 겸 내렸습니다^^;
저도 모르게 뒷얘기가 너무 혼란스럽고(조기마감중증환자)
몸도 안 좋아 모든 걸 스탑했었습니다.
그래서 여름 내내 멍했다가 찬바람이 나서야 다시 붙들게 되었어요.
드.다는 그동안 했던 밝은 글이 아니라 쓰면서도 힘들어서(내공 부족-_-),
예전 분위기로 돌아갈까 해서 새론 글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보.복.이 이후로, 제목이 영 잘 안 나와서,
우선은 채소커플로 하게 되었어요-ㅅ-
그나마 주인공들 이름은 돌림이라 편해서(여주는 -은, 남주는 -현)
뚝딱 만들었는데 제목은 힘이 드네요;;
읽는 내내 속에서 뭔가가 간질간질 거려요.
어딘가에서 봄바람이 불어 오는 것도 같고 ㅎㅎㅎㅎㅎ
글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잘 읽을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