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unk parad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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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박력과 무식에 가까운 과격함은 한 끗발 차이다. 작은 원형 테이블을 끼고 정우와 마주 앉은 남자의 행동거지는 좋게 말해 충분히 남자다웠고 나쁘게 말해 필요이상 요란했다. 까페라테가 반쯤 찬 머그잔이 입술과 맞닿은 순간 사선으로 들린 것은 컵이 아니라 남자의 턱이었다. 이만으론 모자랄세라, 목도 뒤로 꺾였다. 보통 커피라 불리는 탕약을 들이키느라 남자의 목울대가 격렬하게 울렁거렸다. 음료가 식도를 타고 먼 길을 떠나는 소리가 배웅이라도 바라는 냥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겨울나무같이 앙상하게 마른 팔이 던져준 시사와는 반대로, 가슴에 패기와 정열이 남아도는 남자는 머그잔과 도끼의 용도를 착각하고 있는 듯 말짱한 테이블을 패 버릴 기세로 컵을 힘껏 내리꽂았다. 실로 장희빈을 울리고 임꺽정을 기죽일 강렬한 퍼포먼스였다. 정우는 지루한 무언극 관람 중 숙면을 취하다 옆 사람의 박수소리에 깨어난 관객 역에 몰입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앙코르를 외칠 뻔했다. 말만 많은 머리와 달리 실지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손이 정우를 실례의 늪에서 구했다.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린 정우가 내심 팔 할의 순발력으로 이루어진 스스로를 칭찬했다. 남자는 정우가 자기애에 빠지지 않도록 얼른 다음 시험을 시작했다. 정우는 수업시작 바로 5초전, 교실에 무사안착하기 위해 복도를 내달리는 학생처럼 초조함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웹툰이 뭡니까?”
좀 전까지만 해도 소명의식과 직업윤리에 관한 심도 있는 토론을 요구하던 남자가 느닷없이 대화의 수준을 하향조정했다. 정우는 남자에게 들리지 않게 조심스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작게 부풀었던 가슴이 푹 주저앉았다. 남자가 거듭 정우의 교사 자질을 의심했더라면 정우는 수줍음을 무릅쓰고 남색 넥타이를 맨 그의 멱살을 잠시 대여했을 테다. 상황을 불문하고 무작정 성실한 성격이 발동한 정우가 검지를 세워 보였다.
“아, 웹상에 오른 만화에요. 대형 포털 사이트 메인 페이지에 보면 만화 카테고리가 있잖아요. 그 페이지에 접속하면 다양한 만화들이 연재되고 있어요. 스포츠 만화도 있고 휴머니즘 스토리 같은 것도 있고요. 접근도 쉽고 연출도 보통 만화책과는 달라서 시각적으로 확 와 닿는 달까요. 시간 죽이기에도 좋아요.”
“음……교사분이 만화도 읽는단 얘깁니까?”
만화로 지금의 장면을 그린다면 틀림없이 암울한 배경의 개그 컷이다. 만화와 교직을 한꺼번에 매도한 질문에, 남자의 얼굴위로 가상의 균열이 갔다. 취미를 함께 나누고 즐기며 하나, 둘 서로 공유하는 일상의 범위를 넓혀가는 연애가 정우의 꿈이건만. ……원, 편견하고는. 남자에게 더 이상 잘 보일 필요가 없어진 까닭으로, 정우는 무례하게도 대놓고 입을 삐죽거렸다. 실망과 짜증이 뒤범벅된 표정을 마주한 남자도 정우에 대응하여 길지 않은 다리를 마구 떨기 시작했다.
못살아. 그젯밤 꿈에서 흡사 개처럼 생긴 돼지를 보고 난 뒤 미심쩍은 심정으로 구입한 복권의 운명이 결정되어버렸다. 서투른 진동이 무릎에서 골반을, 다시 늑골을 타고 달려와 명치 한 뼘 아래까지 도달하자 본의 아니게 남자와 테이블을 공유한 정우의 가슴도 분노로 떨렸다. 정우에게 찾아왔던 소심한 복은 저를 쫓는 인위적인 떨림에 옛말 그대로 황급히 달아나고도 남았다. 남자에게 할애한 천금 같은 시간을 굽이굽이 베어내어 황진이 이불에 깔아주면 차라리 좋으련만. 아연함이 엄습하여 정우와 남자 사이에 흐르던 얄팍한 친밀감과 어색한 대화마저 모조리 쓸고 가 새하얀 공백이 났다. 틈을 메우려는 듯 옆 자리 연인들이 나누는 달콤한 소곤거림이 한껏 증폭되어 상세하게 들려왔다. 정우는 손톱이 바짝 깎인 손끝으로 머그잔 표면을 뽀독뽀독 긁어 어린 연인의 수줍은 사생활을 지켜주려 했지만 무리한 시도였다. 열린 귓가에 멋대로 스며드는 얘길 듣자니 그들 각자는 상대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즉, 서로를 자기라고 불렀다는 뜻이다.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구워서 먹으리. 무명의 누리꾼이 무료로 배포한 명시가 그나마 황폐해진 정우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럼요. 만화가 교사를 읽을 순 없는 일이니까.”
“주어와 목적어의 도치로군요. ‘당하다’를 넣어서 연결하면 수동태가 되겠습니다.”
태도와 언변이 불러일으킨 약간의 의혹은 잔재하나, 남자의 조건은 가히 탁월하고 우월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모자란 것 하나 없이 자라 강남8학군의 중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국내 최고의 국립 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취득한 동시에 토지공사에 붙어 입사했단다. 중간에 경시대회 수상경력이며 어학연수경력 인턴경력 등을 구태여 보태지 않아도 상관없다. 정우는 새삼 신입사원을 뽑을 적에 좋은 학벌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 유수의 대기업들에 일침을 가하고파졌다. 사람이 기껏 진심을 말하면 뒤에 “농담이시죠?”라는 꼬리를 달아 상대를 무안케 하고, 막상 심혈을 기울인 농담에는 더없이 진지하게 응수하여 함부로 가벼운 발언을 뱉은데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꼴이란. 남자의 동류들이 회사를 장악했다간 창문을 활짝 열어도 이미 심해처럼 어두컴컴하게 침체된 사무실 분위기를 환기시킬 수 없을 게 분명하다.
정우는 남자에게 보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빨대를 세게 빨아들였다. 선한 갈색의 기포가 빨대 둘레를 장식했다. 꼬로로로록, 어린 애 배곯는 소리가 점잔을 빼고 앉아 속으론 오만 망상을 전개하는 두 사람을 조롱했다. 상냥한 미소의 이정우는 진작 닳아 지워지고 그 밑으로 반 아이들이 티베트 여우와 닮았다 놀리는 만사 귀찮은 토요일의 이정우가 드러났다. 이쯤 되면 세상에서 가장 신중한 사람조차도 이 소개팅의 결렬을 확신할 것이다. 정우는 남자도 역시 정우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쪽에 오만 원을 걸었지만 이내 반대편에 돈을 걸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깨닫고 시무룩해졌다. 둘 곳 몰라 헤매던 눈길이 무심코 뿌연 전창 밖 아득히 먼 창공에 이르렀다. 좌우가 뒤집힌 큼지막한 영자가 유리창에 붙어 시야를 방해했지만 정우는 개의치 않았다. 소금처럼 빛나는 소혹성 하나도 곁에 없이, 이르게 나선 반달 홀로 지키는 청보라빛 하늘이 몹시도 고적했다. 달, 달이라. 가만 따지고 보면 달이야말로 정우가 팔자에도 없는 소개팅에 나서도록 종용한 배후세력이었다.
모름지기 사람이 제대로 살아왔다면 서러운 날 티 없이 훤한 달을 보며 두둥- 떠올릴 그리운 얼굴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정우와 동기인 미술 선생님이 말했다. 정우는 이때껏 달을 보면서 그 모양 변화에 따라 새우깡과 만두와 부침개, 주로 술안주로 마땅한 음식물을 연상해왔기에 동갑내기 동성 동료의 순수하고 낭만적인 발상을 듣곤 혼자 조금 멋쩍어졌다. 본인의 경우, 달과 눈을 맞출 때마다 첫사랑의 웃는 얼굴이 어슴푸레 달 위로 겹친다는 그녀의 사족에 기묘한 박탈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게 부러운 나머지, 혹여 좁은 달 속에 억지로 욱여넣을 누군가를 이번 소개팅으로 만날 가능성도 있다는 기대를 품었다. 새로운 만남에 유독 게으른 자신을 부추긴 진짜 이유.
온화한 빛줄기가 닿아 붉게 보이는 손을 다른 손등위로 겹쳤다. 혀끝에 초콜릿 향이 번졌다. 아래로 내리깔아 반쯤 닫힌 정우의 눈에 단호한 결심이 찼다. 어서 바깥으로 나가 불쾌한 온기에 잠긴 머리꼭지에 청량한 바람과 그윽한 달빛을 쐬자. 무의식이 몰래 감추고 있던 누군가가 잔물결만 이는 기억의 수면을 딛고 불쑥 튀어나올지도 모르니까. 행동이 말보다 빨랐다. 정우는 가방을 어깨에 걸고 둔부를 의자에서 조금 뗀 다음에야 남자에게 결단을 알렸다. 통쾌하단 감상도 없지 않아 눈치 없이 기분에 충실한 입 꼬리가 양쪽으로 팽팽히 당겨 올라갔다. 담대한 척 오른 손을 앞으로 내민 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심술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우 안의 다른 정우가 간지럽게 속삭였다. 아니, 틀림없이.
“강준석 씨하고 저, 시간 아까워 말고 서로 다음번 소개팅 리허설 했다고 쳐요. 아무튼 수고하셨네요.”
노상 생각하지만, 굽 높이가 7센티미터 이상인 하이힐은 신고 있다기보다 말 그대로 경사가 가파른 언덕에 올라서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뒤꿈치로 언덕을 짓이기고 싶다는 - 굽을 분질러 버리고 싶다는 - 욕구를 실천하기 직전이 되자 정우는 걸음을 멈추었다. 떨어지는 낙엽은 결코 가을을 원망하지 않고, 소개팅 테이블을 뒤집어엎은 이정우는 절대 주선자를 원망하지 않는다. 옳다고 확신할 수 없는 논리지만 아무튼 이런 맥락으로, 벚꽃향이 섞인 봄바람을 즐기겠노라 분연히 결심하고 두 정거장 거리를 내리 걸었더니만 하찮은 몸이 숨넘어가는 곡소리를 냈다. 그나마 타이밍을 그럭저럭 잘 맞추어서 코앞이 지하철 역사기에 망정이지. 잠시 허리를 접어 손으로 종아리를 풀어준 정우가 다시금 기운을 냈다. 코끝에 감기는 밤바람이 겨울처럼 냉랭했다. 하기는, 예전엔 억지로 껑충 깨금발을 들고 냉기에 얼굴을 디밀었던 적도 있었지.
후덥지근하게 달아오른 대기가 끈적이는 손으로 피부를 감싸는 여름날, 체육시간을 마치고 나면 냉방기 주변에 아이들이 대거 몰렸다. 일사병쯤이야 가볍게 찜 쪄 먹는 남학생들이 공을 찬답시고 교실을 비운 틈을 타 여학생들은 냉방기를 둘러 할렘을 조성했다. 반장 소녀는 능숙하게 움직여 실내온도를 제일 낮게 맞추고 냉기가 바로 머리위로 쏟아지도록 풍향을 조절했다. 어느덧 차가운 바람이 새어나와 열기를 껴안기 시작하면 하나같이 천국에라도 입성한 듯 행복한 미소를 그렸더랬다. 실지, 썩 잘 돌아가는 기기는 아니어서 전원을 켜고도 수분 동안은 기도하는 심정으로 냉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해바라기처럼 오종종 모여 투덜거리고 있노라면 개중 가장 키가 큰 여학생이 가장 먼저 만족스런 탄성을 흘렸다. 그녀의 신장은 해발고도 170센티미터. 고작 10센티 남짓한 차이가 뭐라고, 위쪽 공기를 독차지한 장신의 소녀를 향해 시기가 쏟아지곤 했었다. 평균 신장에 그럭저럭 만족하고 사는 정우지만 그때만큼은 말간한 피부에 유난히 낯을 가리던 키 큰 소녀가 부러웠다. 아마도 그 때 그녀의 신장이 지금 8센티미터 하이힐 위에 엉거주춤 버티고 선 정우의 키와 비슷하겠지.
회상에 젖은 참에 그녀의 이름을 떠올려 보려 머릿속 서랍을 뒤적거렸지만 좀처럼 주인에 알맞은 명찰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가 벌써 십년 가까이 되어가니 여태 한 번을 정리하지 않은 서랍에서, 원하는 기억을 단번에 끌어내는 건 확실히 무리인 것도 같다. 등 뒤로 쌓인 떡국 그릇의 숫자를 세어보던 정우가 새삼스런 허무감에 사로잡혔다. 고개를 털고 가슴을 쓸어내린 정우는 아직 젊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어주다 불현듯, 젊다는 말 자체를 민망해 했던 이십대 초반의 이정우의 비웃음소릴 들었다. 이게 다 뭐람. 체념하고 뇌까리는 중, 정우를 스쳐 지나는 교복 입은 어린 여학생에게서 풋풋한 비누냄새가 간지럽게 풍겨왔다. 유혹할 상대를 대단히 잘못 고른 향취에 정우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어깨선에서 되는대로 잘린 머리칼과 넉넉하게 맞춰 입은 블레이저. 무릎 아래로 반 뼘 내려간 치맛단과 목에 장신구처럼 두른 투박한 형태의 헤드폰.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시선은 편협한 만큼 정직할 테다. 십여 년 전 이정우가 꼭 저랬을지도. 겸연쩍은 웃음도 청춘에 대한 부러움을 완전히 가리진 못했다. 정말이지 괜스런 경쟁심이 발동해 구태여 학창시절 모셨던 담임선생님들의 성함을 곱새기던 정우는 금세 좌절의 구렁텅이에 한발을 빠트렸다. 다 맞추기도 전에 흥미가 달아나 외롭게 방치된 직소퍼즐처럼 기억의 군데군데가 비었다. 이름이 빈 백지 명패가 놓인 자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형복, 전준호, 함영임, 한용덕……아 전준호 선생님은 담임이 아니라 학생 부장이었는데, 그때 담임이 누구더라. 역사로 내려가는 계단을 디디며, 창에 김이 서린 듯 어렴풋한 상념을 이어가던 정우의 몸이 휘청 흔들렸다. 일순 무너진 중심을 바로잡는 새, 정우의 어깨가 묵직하고 단단한 몸집을 들이받았다. 뜻밖의 봉변에 남자가 뒤로 떠밀렸다. 쩔겅. 열쇠고리 따위를 바닥에 떨어트렸는지 맑은 쇳소리가 울렸다. 간신히 철제 손잡이를 붙든 정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꾸벅 내렸다.
“죄송합니다.”
“예.”
심심하리만치 짧은 대답은 외려 남자의 상한 기분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창피한 나머지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나 몸뚱이가 워낙 둔해빠져 흉기로 돌변하는 사례가 전에도 종종 있었으므로 상대의 몸에도 아무 이상이 없음을 살피고 정우 자신과 예비비 통장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둔통이 얼얼하게 퍼져나가는 어깨를 주무르며 정우는 눈을 들었다. 마침 열쇠고리를 무사히 회수한 남자도 상체를 곧추세웠다.
처마가 따로 없는 역사의 출입구라 남자는 여유롭고 널따란 어깨에 소슬한 밤을 지고 있었다. 별스럽게 휑한 하늘은 비의 전조였을까.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정우의 속눈썹에 걸렸다. 무조건 반사로 눈꺼풀을 깜빡이고 난 다음, 정우의 동공이 확 번졌다. 당혹스런 정우의 얼굴을 담은 남자의 새까만 동공도 확장됐다.
찰나, 정우와 남자는 황량한 사막에 남은 마지막 선인장 두 그루처럼 서로를 보았다.
깨달음은 섬광처럼 날아들었다. 곁에 선 선인장은 이미 한 번 길들였던 장미임을.
그림에는 재주가 없어 네안데르탈인만도 못한 정우였지만 지금만은 어렵지 않게 남자의 얼굴위에 꼭 장난감 같은 까만 뿔테 안경을 그려 넣을 수 있었다. 살이 없어 날렵한 하관을 젖살로 조금 부풀리고, 세월이 벼려놓은 매서운 눈빛에서 독기와 피로를 거르자 정우가 기억하는 소년과 얼추 비슷한 인상이 완성됐다.
“……젠장. 이정우.”
욕설같이, 어쩌면 감격에 겨운 듯이 정우의 이름을 부른 남자는 속에서 뭔가가 치받쳐 오른 표정을 감추려 손으로 하관을 덮었다. 쑥스러운 기분을 드러내는 평범하고 흔한 습관이 유난히 낯익고 또 낯설다. 역류하는 감회를 애써 눌러 삼킨 정우는 한번 입술을 물었다 놓고서야 간신히 남자를 불렀다.
“너……!”
파도처럼 밀려든 추억이 잔상을 남기고 산산이 부서졌다.
당시 정우는 회의주의와 냉소주의에 심취해 있었으므로, 교실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건이 정우의 안중을 벗어나 있었다. 오죽하면, 여학생들에 비해 남아들의 명문대학 진학률이 상대적으로 달리자, 교정 한 편을 내어 남근을 닮은 거석을 심는 학교장의 정신감정 결과가 정우의 최대관심사일 정도였다. 달리 말하면 정우가 학교에 적응을 잘 못하고 있었다는 얘기도 된다. ……의미 불명이야. 창문에 매달린 여자아이가 내지르는 새된 비명이 대기를 찢었다. (그녀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정우의 고막도 대기와 함께 비명횡사할 뻔했다.) 혼을 넣은 그녀의 응원이 교실에서 한참 먼 농구코트까지 닿아, 손끝에 공을 놀리는 소년들에게 전해졌는지 여부는 알 수 없었다. 무슨 날이니 하는 것들은 항상 부산스러움과 소란스러움을 양산해내서 정우로선 도무지 좋아하려야 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시끄럽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만한 용기까지는 없어서 정우는 인상을 긋고 노트에 코를 박는 것으로 의사표현을 대신했다.
3월 14일. 남자친구가 있는 불특정다수의 여자 아이들이 장식은 조화처럼 요란스러우나 정작 실질적 가치는 없는 사탕 바구니를 여보란 듯 널어놓는 날이었다. 그녀들은 입을 모아 교실의 협소함에 대해 성토하기도 했다. 정작 피해를 보는 사람은 따로 있어 줄맞춰 놓은 책상들 사이사이로 게임 속 장애물처럼 늘어선 바구니를 피해 정우도 몇 번이나 폴짝 뛰어야 했다. 차라리 게임이었다면 허공에 박힌 동전을 챙기거나 사과를 주워 욕심을 채울 수도 있었을 테지만 현실은 냉정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인생을 지향하는 정우에겐 달리 혜택이 없었다. 심지어 게임에선 목숨도 몇 개나 주더니만. 엉뚱한 생각을 전개하느라 에너지를 소모하며 흘깃 훔쳐본 농구코트에선 정우의 뒷자리에 앉은 소년이 그야말로 날고 있었다. 중력의 영향력을 벗어난 듯 허공을 딛고 떠오르는 소년의 몸이 부럽긴 했으나, 고작 농구경기 하나에 반 전체가 들끓는 기현상은 여전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궁금하지 않았던 사건의 전말은 이야기꾼을 소명 삼은 수다쟁이 소녀가 일러주었다. 화이트 데이 사탕을 가지고 내기를 했다나. 정우네 반이 이기면 상대 반 남자아이들이 정우네 반에 사탕을 돌리고, 질 경우엔 반대로. 뭐야 그게. 정우의 부정적인 반응에 뺨을 붉히며 이야기하던 여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멋지지 않아? 라고 반문했다. 멋지지 않아. 반사회적인 대답은 정우의 입안에만 머물렀다. 열여덟의 이정우는 준거집단의 평화를 위해 개인의 의견을 속으로 갈무리할 줄 아는 청소년이었다.
그 바로 다음 시간이었던가. 무심코 내다본 창밖이 온화함으로 충만한 즈음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사물함에서 교과서를 챙겨 책상에 올리는데 등에 작은 자극이 왔다. 명령에 순응하여 몸을 돌리자 뒷집 소년이 검지로 정우를 가리키고 있었다. 용건을 묻기도 전에 녀석이 제 입을 벌렸다.
‘아.’
적당히 그을린 색의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 성격 면에서는 참으로 오지랖이 넓은 남자아이가 정우를 향해 해사하게 웃어보였다. 귀찮다는 의미로 손을 치워내려 하자 녀석이 또 싱글 거리며, 아아-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반복재생했다. 녀석의 눈에서 의외의 집요함을 발견한 정우는 체념의 한숨을 푸욱 내쉬고 ‘어.’ 음절을 발음했다. 반만 열린 입 안으로 손톱만한 고체가 날아들었다. 이로 아드득 깨물어 조각내자 청량한 박하 향과 함께 단 맛이 번졌다. 싱글, 박하사탕처럼 알싸하게 웃는 얼굴이 정우를 놀리는 것 같기도 해서 정우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눈썹으로 사람 인 자를 그린 녀석이 길 잃은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눈망울로 정우를 공격했다.
‘사탕 싫어? 아니면 내 손이 더러울까봐 그래?’
정우는 이내 자신이 녀석에게 괜한 심술을 부리고 있음을 인정했다. 조각난 사탕을 입안에서 굴려 녹이느라 바쁜 정우의 책상 위, 소년이 양손을 뻗었다. 대개의 남학생들이 손톱을 길게 방치해두던데, 녀석은 성격이 원체 깔끔한지 손가락 끝부분의 살이 드러나도록 손톱을 바짝 깎아 놓았다.
‘봐, 깨끗하지.’
소년이 자랑스럽게 손을 뒤집어 보이다가 어라, 하고 손을 뒷짐 져 숨겼다. 내줘봐, 해서 끌어다 확인해 보니 녀석의 손바닥엔 파란색 잉크자국이 군데군데 번져있었다. 정우의 반응이 별반 싸늘하지도 않았건만, 제풀에 민망해서 반복적으로 머리를 쓸어내리던 녀석이 결국 멋쩍은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했다. 모종의 의미로서는, 참으로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농구시합을 뛰고 와서 덥다며 녀석이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바람이 엉겨들었다. 마침 사내애들을 레고블럭의 인형처럼 보이게 만드는 짙은 색 교복 재킷을 벗어던지고 흰색의 상의만을 걸친 녀석에게서 맑은 단내가 났다. 바람결을 따라 하늘하늘 가볍게 흔들리는 교복셔츠자락과 오후의 볕을 가공 없이 녹여낸 선하고 정다운 미소. 허, 느닷없이 사랑스럽다는 감상이 고개를 들어 정우는 그만 왈칵 당황해 버렸다. 씨발, 좆나 등, 일의 전개와는 관계없이 매사가 사타구니로 귀결되는 하등 생물. 특이사항, 구체를 품는 순간 이성을 사타구니로 유배 보냄. 두 문장으로 정의해 두었던 같은 학급 남학생을 남자아이로 의식하게 된. 조금 늦된 첫 번째 봄.
“윤후, 권윤후.”
정우가 지목한 틀린 성명에 신후의 호흡이 가빠졌다. 신후는 맹세하듯 가슴에 얹은 손을 지그시 눌러 심장에 압력을 가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들인 심장은, 정우만 보면 차라리 적출해버리고 싶을 만큼 난동을 피웠다. 제기랄. 하고많은 상황을 두고, 하고많은 날을 두고, 하필 이렇게 느닷없이 정우를 마주하게 될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다. 연년생, 손 위 형님의 비밀스러운 첫사랑. 반가운 기색이 저녁놀처럼 짙게 떠오른 정우의 눈이, 당장에라도 울상을 짓고픈 신후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그는 안간힘을 써서, 웃었다. 신후에게 있어 오직 한 사람. 유일했고 여전히 유일하기에 처음이란 순번이 필요치 않은 그녀, 정우. 단단하게 얼려 기억에 보관한 모습 그대로 신후의 그녀가 마주 웃어왔다. 벌써 정우의 이름을 불러버린 지금, 신후는 정말이지 어찌할 도리 없이 시간제한이 걸린 주문을 외웠다.
“그래, 내가 권윤후지.”
CHAPTER No.00 시작은 예고 없이/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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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응?! 베로베로님하고 헷갈린다?!)가 개미를 200번 넘게 개작했단 얘기를 듣고 덕후싀낀 답이 없다고 깠더랬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글은 200번 고쳐도 마음에 안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 글소개라면; 전부 세 개의 첫사랑 얘기고 (주요 라인은 엇갈린 두 개 지만) 아무도 안 죽어나가는 편안한 스토리입니다. 남주가 죄없이 엄청 불쌍하고 여주는 어쩐지 내키는 대로 사는?! 뭔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식상하고 대책 안서는 이야기요.
아 그리고. 후후, 비축분 끝났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은 가을을 원망하지 않는다 <- 이건 야구선수 장명부씨의 발언입니다!
리리플//
정크님ㅠㅠㅠㅠㅠ이쁘게 봐주셔서 넘 감사해요. 저 장편을 진짜 못쓰겠어서 쓰는 게 단편 중편(...) 근데 이건 장편이라 무려 일년 전에 연중해놓고 여직 이러고 있습니다.ㅠㅠㅠ이번엔 늦더라고 완결을 내고파요!
위니님//횡액이 아닐까 싶어요. 얽
황연경님//모든 건 상대적이더라구요. 놀때는 글쓰는 게 스트레스, 공부할 때 글쓰는게 취미생활<- 걱정 마셔요//
plum님/ 적군이는 이상하게, 쉽게 손이 안 가더라구요ㅠㅠ 사실 다음 내용도 다 있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제가 그래봤자 학원덕후라<- 결국 학교 얘기, 격투신, 야구 얘기 삼종세트는 나오게 되어있더라구요.
다향님////와와오아완결이라닛! 내후년까지는요?! (손 꼬옥)
가만 이번 작품은 장편!! 이라는 말씀이지요??? 앗싸~
신후가 깜찍하게도 윤후인 척을? 점 안찍어도 되나요^^아이고 00편에서는 절대 그런 쒸타~일로 안 보였는데 역시 얌전한 괭이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