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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디 네 혼자 몸이니? 그게 뭐야. 행사는 행사대로 망하고, 네 얼굴은 얼굴대로 상하고. 윤실장이 얼마나 놀랐겠어? 안 그래 윤실장?”
침실에 파리한 안색으로 누워있는 사라에게 다다다 잔소리를 하고 있는 건 사라가 다쳤다는 말에 정신이 없던 예석의 차키를 잡아든 예린이었다. 그러면서 시선은 예석에게 보내는 게 마치 그 보고 들으라는 말 같다. 예석은 침대 가까이 붙어선 공, 양, 예린, 윤실장 너무 파리한 안색의 사라에게 슬쩍 시선을 주었다. 입술의 피딱지가 그의 시선을 끈다. 저런 상처가 생길 정도로 누군가에게 맞다니. 지끈. 그의 가슴에 알 수 없는 통증이 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거야 있나. 그나저나 니네 사장 엄청 놀랐어. 청심환이라도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빈 말이라도 괜찮냐, 많이 다쳤냐는 말은 생략한 채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예린이 너무 예린스러워 예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어쩌자고 저 인간을 그냥 달고 왔지,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제대로 운전해 오지도 못했을 거란 사실은 무시하면서.
“어이, 차예린.”
“왜?”
“그만 가.”
“싫은데. 네 차 밖에 안 가져와서 너랑 안 가면 나 버스 타야 돼. 그거 귀찮아.”
“내 차 끌고 가.”
“정말?”
“그래.”
“흐음. 한 번 생각해 보지. 그런데 박사라, 이 사람은 누구야.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차.예.린.”
이를 악물고 한 음, 한 음 신경질적으로 끊어 말하는 예석의 무시무시한 말투에 예린이 ‘아고 무서워라.’ 식의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섰다. 물론 정말 무서워하는 건 100퍼센트 아니었다. 기가 막힐 정도로 그의 감정을 무시하는 차예린이었다.
“그래. 재미없어서 이만 가야겠다. 차는 회사에 세워둘게. 그럼 박사라, 너 꼬맹이. 사장 속 썩이지 말고 얼른 회복해라, 알았지? 너희 공, 양. 니들도 잘 협조하고.”
“네.” “네.” “네.”
세 명이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입을 모아 대답했다. YS패밀리의 마녀로 불리고 있는 예린을 무서워하는 게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예린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또각또각 높은 굽의 하이힐을 움직여 밖으로 나갔다. 휴우. 예석은 그제야 긴장이 풀려 작은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 예린 앞에 서면 긴장이 되었다. 언제나 제멋대로 하고 싶은 말을 뱉어내는 예린 때문이었다. 실수로라도 자신의 마음을 뱉어낼까 봐 그는 긴장했다. 예린이 항상 제멋대로이지만 그래도 남의 프라이버시는 지켜준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이래서 사람이 죄(?)는 못 짓고 사나보다.
“사장님, 정말 죄송해요.”
“그런 말이라면 됐어. 그보다 윤실장,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너는 왜 그렇게 멀쩡해? 사라 쟤 저렇게 될 때 넌 뭐 했어? 행사 때 달고 다니는 애들은 또 뭐하고? 걔들은 폼이야?”
예석은 시선을 그대로 사라에게 둔 채 옆의 윤실장을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자신의 소속연예인을 지키는 것, 그건 매니저로서 윤실장의 당연한 몫이었다. 그런데 얼굴에 피멍이 잡힐 정도로 상처 입은 사라의 모습과는 달리 윤실장은 옷마저 단정했다. 그게 예석의 화를 부추겼다. 공, 양, 사라에 딸린 사람만 해도 열 명이 넘는데 사라가 저런 모습으로 누워 있다는 게 그의 분노를 더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사장님, 죄송해요. 다 저 때문이에요. 실장님은 잘못한 거 없으세요.”
사라의 여린 음성의 예석의 귀를 파고든다. 아픈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음성은 밝고 명랑했다. 그게 다행이다 생각하면서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단호하고 차갑다.
“네가 껴들 얘기가 아니야, 박사라. 너랑은 따로 얘기할 거니까 조용히 누워 있어.”
“네, 죄송합니다.”
공과 양이 거 봐, 하는 표정으로 사라를 쳐다보았고, 사라는 혀를 쏙 빼어 무안함을 드러낸다. 예석은 그 모습을 무감하게 바라보다가 윤실장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한편으로는 씩씩한 사라의 말투에 마음 한 구석 안도감을 느꼈다.
“시작해.”
윤실장은 이래도 저래도 결국은 제 책임이 될 거라는 걸 직감하고는 결국 입을 열었다. 아이고, 또 왕창 깨지겠구만. 그는 속으로 투덜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잘못한 것은 사라가 사라졌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었고, 그가 늦게 깨달은 건 저기 사라 옆에 찰싹 붙어 있는 공과 양 때문이었다. 핑계라도 대 봤자 먹히지도 않을테지만. 어떤 부분이든 막히고 꽉 막힌 사장은 어느 부분에서도 융통성이 없었다. 더구나 자신의 소속연예인들을 챙기는 것에선 더욱 그러했다. 그 소속연예인들 중에서도 4eni1에게는 더더욱.
“오늘 **군에서 행사가 있었습니다. 지역행사인데도 제법 규모가 컸구요. 다른 때처럼 애들이 리허설 하는 거 확인하고 공이랑 양이가 배가 고프다고 해서 뭔가 포장음식이 있을까 돌아다니다가 돌아와 보니 공과 양 뿐이었습니다.”
“무진이는 어쩌고 니가 갔어?”
무진은 4애니1의 로드매니저다. 안 그래도 평소에는 견이 먹을 거나 간식거리를 사오는 일을 맡았다.
“무진이는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쉬라고 했습니다. 시간에 대느라고 3시간 동안 쉬지도 못하고 운전을 해서, 그렇겠다 싶었습니다. 평소처럼 경호하는 사람들이 붙어 있어서 다른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제야 예석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공과 양과 사라가 무언가 꿍꿍이가 있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예석은 흘깃 사라를 보았다. 차가운 그의 눈과 마주친 사라는 불안한 얼굴로도 웃다가, 입술을 움직인다. 윤실장님한테 화내지 마세요, 그런 말이었다. 분홍 입술이 동그랗게 모인다. 말간 그 얼굴과 입술이 예석의 화를 조금은 누그러뜨린다. 사라 때문에 그는 화를 내야 하는 순간에 화를 낼 수 없는 순간이 점점 늘어갔다.
“계속해.”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벗어난 걸 아는 윤실장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는 윤실장에게 채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윤실장을 독촉했다.
“그래서 일단 먹이고 있는데 아무래도 뭔가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사라가 뒷자리에서 자고 있다는데 그래도 뭐라도 먹어야 무대에 올라갈텐데 싶어 다가갔더니, 베게였습니다. 깜짝 놀라서 공과 양을 추궁했습니다. 벤을 떠난 게 한 시간도 안 됐다고 했습니다.”
말을 멈춘다. 윤실장은 잠시 망설인다. 자신의 선에서 해결을 해야하는지 사장에게 보고를 해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의 사장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의 소속사는 다른 소속사에 비해 소속 연예인의 연애에 많은 참견을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박사라였다. 박사라. 그게 사장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는 가끔 헷갈렸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저 눈빛은 아무리 봐도 남자가 여자를 보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의 주인인 박사라는 절대 알 수 없겠지만.
“사라가 서견수를 만나러 갔다고 했습니다. **군 근처 세모읍에서 요새 사극 ‘천극의 여인’이 촬영하고 있지 않습니까. 천극에서 견수가 낭도들을 이끄는 화랑으로 나오는 중입니다.”
“서견수?”
거기서 서견수가 갑자기 왜 나오는 거지? 예석은 잠시 어리둥절하다. 서견수, 란 이름이 나오자마자 사라의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것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얼굴을 붉혀?
“서견수를 만나러 빠져나갔던 거라고 합니다. 둘이 사귄답니다.”
윤실장은 이왕 밝히기로 한 거 속시원히 말을 끝낸다. 시간을 끌어봤자 사장의 기분이 더 상할 뿐이다. 우뚝. 혹시나 했던 의혹에 윤실장은 쐐기를 박았다. 사라가 견수를 만나러 갔다고. 둘이 사귄다고. 아무래도 그의 꼬맹이 아가씨는 사랑에 빠진 듯 했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는 사라의 까만 머리통에 그의 망막에 사로잡힌다. 그래. 내가 보기에도 이렇게 귀엽고 예쁜데. 그런데 뭐, 서견수? 서견수라면 카사노바도 울고 간다는 그 서견수를 말하는 건가. 말도 안 돼. 그런 녀석은 안돼. 예석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서견수의 뒷조사를 꼭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저희가 말렸어야 했는데, 하도 간절히 부탁해서. 그래도 거절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공이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제가 리더이니 책임도 크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예석은 그녀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 십자가가 잔뜩 박힌 병원복을 입은 사라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다.
“그런데 서견수 그 녀석은 왜 여기 없는 거야? 기자라도 쫓아올까 봐 벌써 도망이라도 간 건가?”
버럭, 예석이 소리를 쳤다. 화가 나 못 참겠다는 듯이. 여자가 다쳤는데 어떻게 자신만 쏙 빠져나갈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게 촬영이 밀려 있어서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사라를 업어오고, 수속까지 끝내 놓고서 떠났습니다.”
묘하게 편을 들던 윤실장은 예석의 사나운 눈빛에 말끝을 흐렸다. 사장의 기분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휴우. 그래. 그건 됐고, 이제 본론이나 말해 봐. 대체 사라가 누구 때문에 여기 누워 있는 거야?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그 시간에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두근두근했다. 이렇게 만나봐야 1시간 정도의 시간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라는 신나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공과 양이 가지 말라고 말릴 때는 눈물이 날 정도로 속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역시 자신에게 약한 공과 양은 윤실장님에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그녀를 보내주었다. 그녀는 공과 양을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일찍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 생각은 견수를 만나면 뿅, 하고 사라져버릴 생각이긴 했지만 말이다.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견수는 언제나 빈정대기 일쑤에 모난 말을 일삼는 형편없는 남자였다. 거기에 바람둥이라는 소문은 그를 더욱 안 좋게 보였다. 하지만 진짜 서견수란 남자는 소문 속의 그 남자가 아니었다. 물론 지나친 과거 아닌 과거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녀에게만 다정한 남자였다.
‘바람둥이? 날 알고서 하는 소린가?’
피식, 웃으며 비웃던 견수의 얼굴. 처음 만났을 때 선배들의 경고 덕분에 그녀는 그를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쳐다보지 마. 그의 웃는 얼굴을 보면 빠져들 게 될 거야.’ ‘보지 마. 빠져들면 너만 손해야. 그는 나쁜 남자거든.’ 이런 말들을 누구에게도 들을 수 있었다. 소문 속의 그는 손만 대면 모든 여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옴므파탈처럼 들렸다. 데뷔한 지 고작 3년째인 그녀는 어쨌든 스캔들을 조심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누가 안 그렇겠냐만은) 바람둥이를 싫어했다. 하지만 그와 연기호흡을 맞춰야 했다는 게 문제 아닌 문제였다. 그녀는 프로페셔널하지 못하게 그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제대로 연기를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신은 상관없었지만 유독 그와의 신은몇 번이나 NG를 내버렸다. 상관없어, 고개를 들어. 바보처럼 이러지 마. 그녀는 스스로를 몇 번이나 자신을 다독였지만 잘 되지 않았다.
휴식시간, 같이 연기를 하고 있는 가수 출신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너 견수랑 할 때 왜 그렇게 집중을 못 해.’
‘쳐다볼 수가 없어요.’
‘왜?’
‘바람둥이잖아요.’
‘뭐? 하하하. 바람둥이라고 잡아먹지는 않아.’
선배 언니는 그녀의 대답이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순간, 또각, 음료수 따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오는 소리에 사라, 그녀가 고개를 돌린 순간 휴게실 문에 기대 서 있던 견수의 눈과 딱 마주쳤다. 황량하게 비어있는 그 검은 눈과.
‘보지 마. 빠져들게 될 거야. 그럼 너만 손해야.’
마치 주문과도 같은 말들이 그녀의 귀를 맴돌았다.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검고 황량한 사막과 같은 눈은 사라지지 않고 그녀의 시야를 맴돌았다. 그 때 귓가를 들려온 그의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
모두의 말은 사실이었다. 보는 순간, 그녀는 빠져들고 말았다.
‘바람둥이? 날 알고서나 하는 소린가?’
“사라!”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견수를 보고 사라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있는 것은 신경쓸 수도 없을만큼 그녀에겐 견수 밖에 보이지 않았다. 견수는 그런 그녀를 소중히 껴안고 자신의 차 안으로 들어갔다. 시골이었지만 눈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나도. 짧은 그의 한 마디에 그녀의 마음이 촉촉해진다. 이제 그의 말투는 더 이상 황량하지도 건조하지도 않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다정하고 부드럽다. 그는 정말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뜨겁게 느껴지는 그 감정에 사라의 마음이 격렬히 출렁인다. 사랑은, 정말 좋았다.
“견이라도 데리고 오지 그랬어. 너 혼자 위험하면 어떻게 해.”
“오빠가 있잖아요.”
“혼자 기다렸잖아.”
“싫어요, 다른 사람이랑 있는 거. 오빠랑 둘이만 있고 싶어요.”
가감 없이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는 사라의 말에 순간 견수의 광대뼈에 붉은 기운이 스친다. 사라는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며 가슴이 충만해진다. 진짜야, 진짜 이 사람은 날 사랑하고 있어.
“그래. 나도 그래. 그래도 다음부터는 누구든 같이 다니는 거야. 알았지?”
응.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오빠가 불안하다면 그렇게 할게요. 그녀의 끄덕임을 이해한 견수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가자. 시장 구경시켜 줄게. 여긴 우릴 알아보는 사람이 적을 거야.”
“좋아요.”
그와 그녀는 견수가 준비한 커플 모자를 머리에 쓰고 달랑 달랑 잡은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섰다. 5일마다 열린다는 시골장은 그녀가 필리핀에서 보았던 재래시장과 비슷했다. 다만 파는 물건들이, 파는 사람들이 다를 뿐이었다. 순간 필리핀에서의 추억이 남실 실려와 그녀는 순간 그곳이 한국의 세모읍이라는 것도 잊는다. 이렇게 오른쪽으로 돌면 과일 가게가 있고, 그 다음에는 꽥꽥 거리는 동물들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치지직, 룸피아나 꼬치구이가 익어가고 있다. 나중에 오빠랑 꼭 같이 가야지. 그녀는 자신의 손을 꼭 잡은 견수를 보며 싱긋, 웃으며 생각한다. 언제가 꼭 함께 가야겠다고.
“오빠, 떡볶이 먹어요.”
“떡볶이?”
“응. 와, 저기 있다. 빨리요, 빨리.”
그녀는 견수의 손을 잡은 채 가볍게 뛰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많은 장터이니만큼 속도는 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녀는 신이 난다. 옆에는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여기는 누구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심전심. 신난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 견수는 가타부타 아무 말도 없이 그런 그녀의 손을 그저 꾹 마주잡는다. 좁은 길에 사람들의 어깨가 부딪혀 와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막 떡볶이노점에 보이는 지점이었다. 견수의 모자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덜렁거려 잠시 섰을 때였다. 손을 떼고 그녀가 모자를 다시 씌어주려는데 견수가 장난스레 웃으며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놓기 싫어.’ 견수의 입모양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손으로 그의 모자를 다시 꾹 눌러주었다. 견수가 다른 노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걸어가려고 발을 떼는 순간, 시장 골목에서 낼 수 없는 속도로 달려온 누군가가 견수에게 부딪혔다. 그리고는 바닥에 툭, 쓰러졌다. 죽은 것처럼 미동도 없는 사람의 형체에 견수와 그녀는 불안해졌다.
“여보세요! 괜찮으세요? 여보세요.”
견수가 가볍게 쓰러진 사람의 몸을 흔들었다. 제대로 되지 못한 입성에 헝클어진 머리, 피가 맺히고 멍이 든 얼굴을 보는 순간 사라의 동공이 충격으로 흔들렸다.
‘말도 안 돼.’
「살려줘요, 살려줘요.」
검은 얼굴, 까만 눈동자. 웃으면 예쁘게 벌어지는 입술. 헝클어진 머리와 잔뜩 부어오른 눈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한 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필리핀 친구, 크리스라는 걸.
“크리스! 크리스.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크리스.”
“아는 사람이야?”
“네. 내, 내 친구예요.”
사라의 눈망울에 왈칵, 눈물이 고인다. 뭐야,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어떻게 된 거야. 말로 뱉어내지 못한 말이 자꾸 떠오른다.
“일단 병원으로 가자.”
“맞아요, 병원. 병원.”
바보. 그녀는 미처 병원을 생각해내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며 바닥에 쓰러진 크리스를 견수와 함께 일으켰다. 주머니에서 급히 손수건을 꺼내 크리스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보려 했지만 이미 딱딱하게 굳은 후였다. 왈칵. 결국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힘겹지 않게 견수가 크리스를 업었다.
“뭐여, 니들은 뭔디 남의 마누라를 델고 가는 거여?”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늙은 남자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더니 남자는 견수에게 업힌 크리스를 한 손으로 억지로 끌어내리려 했다. 다른 한 속에는 초록색 술병이 들려 있다.
“뭡니까.”
견수가 등의 크리스를 추스르며 성식의 팔을 막았다. 피식, 성식이 웃으며 들고 있던 소주병을 들고는 꿀꺽 소주를 삼켰다.
“나는 이 남자, 남편이여. 남편. 고것이 뭔 말인지 모르겠어?”
“정말입니까?”
견수는 미심쩍은 시선을 하며 성식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그것이 성식의 기분을 더욱 나쁘게 했다.
“그려, 사람들한테 물어봐. 이 년이 내가 필리핀에서 1000만원에 사 온 마누라가 맞는지, 틀리는지. 엉? 물어보란 말이지?”
아. 사라는 입술을 악물었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순간 이해가 된 것이었다. 어떻게 크리스가 한국의 세모읍, 지금 여기에 있는 건지. 순간 참담함이 그녀의 가슴을 뒤덮는다.
“그니까 내놓으란 말이여. 이 년을 일하라고 데리고 왔더니 내빼기나 하고 말여.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됐는데 말이지. 이 년아 일어나, 안 일어나냐? 일해라 말이여. 내가 널 데꼬와서는 되는 게 없단 말이야.”
퍽퍽. 성식이 쓰러져 있는 크리스의 머리통을 쳤다. 한낱 미물인 파리라도 저렇게 치진 않겠다. 사라의 마음에 파사삭 금이 간다. 그래서 그녀는 크리스를 막고 선다. 순간 관성을 이기지 못하는 성식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휘갈긴다.
“그만하세요. 뭐하는 짓이에요.”
“넌 또 뭐여.”
“괜찮아, 사라야?”
“괜찮아. 것보다 아저씨, 이제 그만하세요. 사람을 이렇게 때리는 법이 어딨어요.”
“법? 뭔 법까지 딜먹이는 겨. 내가 내 마누라 패는데 뭔 상관이란 말이여. 남 일에 상관 말고 썩 저리 비키지 못혀!”
버럭, 성식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악다구니가 시작되었다. 성식이 견수에게 달라부터 업고 있던 크리스를 끌어냈고, 크리스는 바닥에 철퍼덕 쓰러져버렸다. 꺄아악, 소리를 지른 사라가 크리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견수가 성식의 얼굴을 퍽, 하고 때렸다. 비틀대며 바닥에 쓰러졌던 성식이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견수에게로 몸을 던졌다. 물론 술에 취한 성식이 견수에게 댈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견수가 걱정이 된 사라가 그 앞을 막아섰고 사라에게 성식의 주먹이 다시 또 날아들었다. 그 힘에 밀려 사라가 바닥으로 푹 쓰러졌다. 하지만 사라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다시 일어나 견수를 막아섰다. "오빠, 그만해요. 그만해요. 응?"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두 방이나 때린 성식 때문에 견수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삐용. 삐용. 삐용. 신고를 받은 경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견수가 크리스와 사라를 데리고 사라진 후였다.
너무 덥네요.
그래도 처서, 이제 여름은 안뇽! 이에요!
모두 즐거운 일요일 오후 되세요.
문제는 아직도 크리스와 예석은 만나지도 못했다는 거 ㅡ.ㅜ;
저렇게 된거였구나..
크리스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네..
예석이랑 크리스는 언제 만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