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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몸이 굳어서 한 걸음 물러나는데 뒤따라오듯 그가 말했다.
“이리 와.”
“왜, 왜요?”
“그럼 여기 계속 있을 건가?”
그 말에 예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깥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눈을 감고 있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어디인지는 몰랐다. 머리 위로 희미한 빛이 비추어 들어왔지만 너무나 어두운, 오래 자란 키 큰 나무들이 빽빽이 늘어선 숲 한가운데라는 것을 알자 다시금 소름이 끼쳤다. 어릴 때 숲에서 살았기에 한밤의 숲이 얼마나 공기가 무거운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잘 아는 예나는 얼른 다시 영주님 옆으로 가고 싶었다.
그런데 마음속의 아가씨는 이번에도 강했다.
“어차피 나가려고 했어요. 예정한 것과는 좀 다르지만 마을로 가는 길로 나오긴 했네요.”
“진심인가?”
아뇨! 물론 아니죠!
“그건 실례되는 질문인걸요? 위기 상황에서 구해 주신 건 감사해요.”
그러니까 예나는 마음속의 아가씨와, 그 아가씨를 키운 엄마와, 그 아가씨를 이기지 못하는 자기가 참으로 미웠다.
“그럼 난 이만 가지. 늑대 몇 마리나 만났는지 세었다가 나중에 들려 줘. 물론 살아 있다면 말이지만.”
영주님은 그렇게 딱 한 번 물어본 후 깨끗이 돌아서 버렸다. 예나는 벌벌 떨면서 그 뒷모습을 보고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망토, 검은 부츠를 맞춰 입어서 조금만 시야에서 벗어나도 그림자에 녹아든 듯 보이지 않았다. 조금 지나자 사박사박 흙을 밟는 부츠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사방은 고요했고, 벌레가 우는 소리, 가끔 부엉이가 우는 소리만 들려왔다.
예나는 계속해서 벌벌 떨었다. 무서운 것도 무서운 것이었고, 한밤중이 되니 급격히 추워졌다. 추위에 피부가 곤두서자 마음속의 아가씨도 웅크린 것 같았다. 예나는 용기를 짜내어 소리를 내보았다.
“저기요…… 영주님? …… 계세요?”
나무 사이가 어찌나 빽빽한지 조금 메아리가 휘돌다가 사라졌다.
“영주님?”
조금 소리를 높여 보았다. 메아리가 조금 더 길게 휘돌았다.
“영주님! 진짜 간 거예요?”
버럭 소리를 지르니 소리가 더 멀리 가는 것도 같았다.
“진짜 갔어요? 영주님? 어이! 야!”
아무 반응이 없자 조금씩 조금씩 심장의 열기가 머리로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차마 영주님 앞에서는 한 글자도 꺼내지 못할 이런저런 호칭으로 영주님을 부르던 예나는 끝내 자신이 아는 가장 나쁜 말로 영주님을 불렀다.
“한 번 물어보고 그냥 가냐, 이 나쁜 놈아!!!”
그러고는 그 정도 말까지 내뱉었다는 것에 놀라서, 그리고 기운이 빠져서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버렸다. 계절은 가을이고 날씨는 평균이었지만 밤에는 추웠다. 브나스카야는 원래도 추운 동네였고 숲은 더욱 그러했다. 입은 옷도 그다지 따뜻하지는 않았다. 예나는 아주 잠깐 감아 봤지만 몹시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영주님의 망토를 그리워했다. 단단하게 지탱해 주던 품이나 팔도 생각났다. 어떻게 모르는 사람과 포옹하거나 입을 맞출 수 있는지, 남자와 닿는 것은 다른 느낌일지 전혀 알 수 없었는데, 조금은 알 것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미쳤나 봐.’
예나는 고개를 일부러 크게 젓고, 자기 머리에 꿀밤을 먹이고 뺨도 두드렸다.
춥고 놀라고 서글퍼서 미쳐 가는 거야. 그런 재수 없고 냉정한 사람을 그리워할 때가 아니잖아.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탓인데. 원래 누구한테나 그러는지 자기한테만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영주님이 트집을 잡기 시작한 게 잘못이었어. 그러고 보니 뺨 한 대 맞았다고 지금 복수하고 있는 거 아냐? 위험한 데에서 한 번 구해 주고선 그 다음에 이렇게 버리고 가다니, 끝까지 무책임한 사람이라니까.
예나는 그렇게 계속 자신을 설득했다.
하지만 부엉이 소리에 섞여서 멀리서 하늘 위로 맑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듣자, 정말로 거기 신경 쓸 때가 아니게 되었다. 늑대였다. 몇 마리나 만났는지 들려 달라고 하는 걸 보면 이 근처에 진짜 많은 모양이었다.
예나는 세상에서 늑대가 제일 무서웠다. 그보다 더 센 동물이 있다는 이야기도 듣긴 했지만, 예나가 제일 무서워하는 건 늑대였다. 털이 하얀 늑대면 이불 뒤집어쓰고 꼴사납게 숨어서 덜덜 떨 정도로 무서워했다. 특히 숲에서 나오는 늑대는 더 싫었다.
덜덜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서 예나는 숲을 걷기 시작했다. 성으로부터 반대편으로만 가면 될 것 같았다. 가다가 또 겁이 덜컥 났다. 마차를 타고 오면서 봤을 때 숲이 굉장히 길었는데, 성으로부터 멀리 가려고 하다가 숲 가운데로 기어들어가는 게 아닐까? 마차가 다니던 길을 찾아볼까? 하지만 나무가 워낙 빽빽이 들어차서 어느 쪽을 둘러봐도 뚫린 곳이 보이지 않았다. 해가 뜨면 그걸 보고 방향이라도 짐작하겠지만, 지금은 한밤중이거나 한밤중으로 달려가는 시간이었다. 할아버지가 달을 보고 방향을 보는 법을 알려 줬을 때 잘 들을걸 하는 후회가 마구 밀려왔다.
다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느낌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울음소리에 화답하는 다른 울음소리가 들렸다. 예나는 무작정 걷는 속도를 높였다. 좀 전까지 걱정하던 다른 모든 가능성이 머리에서 사라지고, 그저 빨리 움직여야겠다는 생각밖에 남지 않았다.
성을 등 뒤로 하고 무작정 걷던 중, 이번에는 풀을 스치면서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운 곳이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뭔가 역한 냄새가 먼저 풍겨왔다. 예나는 우뚝 멈춰 섰다. 이번엔 걷는 데 너무 몰두해서 주위를 하나도 안 보고 있던 참이었다. 어깨와 목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찬 바람에 떨면서 고개를 돌리니, 나무와 나무 사이 어둠 속에서 한 쌍의 빛이 보였다. 녹색으로 번들거리는 눈. 그리고 조금씩 빛이 퍼져 가면서 보이는 까만 주둥이와 약간 드러난 날카로운 이빨, 침…….
“꺄아아악!”
예나는 무작정 그 눈과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빽빽한 나무 사이로 뒤를 돌아보면서 뛰니 무사할 리가 없었다. 나뭇가지가 튀어서 얼굴에 상처를 내고, 간혹 놔주질 않아서 소매가 찢기기도 했다. 뒤에서 드디어 본격적으로 땅을 밟고 달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예나는 이제 귀까지 막고 뛰기 시작했다. 앞에 나무가 있든 없든, 부딪히든 말든 상과하지 않는 자세로.
그리고 진짜로 무언가에 부딪혔다. 나무라고 하기엔 푹신하고 보드랍고 탄력 있는 뭔가와 예나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나가떨어진 것은 예나였고, 상대는 미동도 없이 멀쩡했다.
“헤매도 운은 좀 있군그래. 아직도 허세 부릴 텐가?”
“아뇨! 아뇨, 데려다 주세요!”
아까와는 판이하게 매달리는 예나를 보더니 영주님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아마도 웃은 것 같았다.
“성으로 간다.”
“네?”
하지만 거기에 다시 가고 싶진 않았는데.
“싫으면 혼자 가면 되는 거고.”
영주님은 걷다가 잠깐 예나 때문에 멈췄던 것처럼,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예나는 옆을 지나가는 영주님 팔에 달려들어 그 팔을 안듯이 두 팔로 가두고 매달렸다. 거기에는 영주님도 놀랐는지 걸음이 다시 멈췄다.
“뭐냐?”
“무서우니까요. 같이 가요.”
“팔에 혹 달고는 못 간다.”
그래도 예나는 고집스럽게 팔을 잡고 놓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영주님이 덧붙였다.
“놔. 불편하다.”
“놓으면 그냥 가 버릴 것 같아서…….”
“버리고 가진 않겠다.”
“진짜죠? 약속해요.”
“약속하면 믿긴 할 텐가?”
영주님이 지그시 바라보면서 말하자 예나는 다시 발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고 있지만 이 인간, 눈이 반짝반짝하다. 놀리고 있는 거야!
“믿을 테니까 약속해요!”
예나는 우격다짐으로 자기가 낀 팔의 손가락을 펴서 새끼손가락 고리를 걸려고 낑낑댔다. 그러나 가볍게 영주님이 팔을 젓자 고리를 만들기는커녕, 매달렸던 팔마저 놓치고 말았다. 예나는 순간적으로 울 뻔했지만 꾹 참았다.
“약속한다. 그러니까 그냥 따라와.”
“알았어요.”
그래도 같이 갈 사람이 있는 게 어딘가. 일단 성에 가기만 하면 아침이 되길 기다렸다가 나가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예나는 영주님 뒤를 터덜터덜 따랐다.
신기하게도 영주님과 만난 순간부터 늑대 울음소리가 가까운 데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간혹 멀리에서 한 놈이 울고 거기에 다른 놈이 화답하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이젠 그것도 여기와는 관련 없는 일로 우는 것 같았다. 예나는 진짜로 그런 건지, 안심해서 그렇게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안심이라고?’
예나는 걸음 폭을 전혀 좁히지 않고 마치 혼자 가듯이 성큼성큼 앞서서 걷고 있는 영주님의 뒷모습을 노려보면서 속으로 반문했다.
도대체 뭘 믿고 안심하고 있는 걸까. 물론 다시 돌이켜보면, 간단히 팔을 뺄 수 있었는데도 그때까지 그러지 않고 놓으라고 일단 말이라도 한 게 신기하다. 잡히자마자 바로 내동댕이칠지도 모른다는 각오도 하고 매달린 거였는데. 아니, 지금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애초에 놓고 가 버린 게 누군데. 왜 자꾸 애써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려고 하는 거야. 엄마는 언제나, 상대에 따라 기대할 수 있는 게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면 최소한 해 줘야 할 선이 있는 거라고 하셨다. 그 말이 맞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저 사람은 완전히 탈락이다. 사람을 가축처럼 대하고, 놀리고, 버려두고 가고…….
그래도 제일 위급한 때에는 두 번이나 구해 줬네. 게다가 어떻게 한 건지는 볼 수 없었지만 그곳에서 위로 뛰어나갈 만큼 뭔가 신기한 능력이 있는 사람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이상하단 생각도 못했는데,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온 걸까? 그리고 언제부터 거기 있었지? 나를 따라왔나? 하지만 뒤에는 석상뿐이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예나는 갑자기 눈앞에 나무뿌리가 보여서 놀랐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잠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더 놀랐다. 아픔은 그 다음이었다.
“아야아…….”
평소 같으면 비명 지르면서 난리 피울 것처럼 아팠는데, 비명조차 지를 수가 없었다. 그저 약하게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어딘가 크게 다친 것 같은데, 어디를 다쳤는지 둘러보려고 해도 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움직이질 않았다. 예나는 그제야 자기가 그만큼이나 바싹 얼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주님…….”
잘 움직이지 않는 입술로 부르면서 예나는 아까처럼 영주님이 그대로 가 버릴까 봐 너무나 무서웠다. 소리 지를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지금 여기에 홀로 남겨진다면,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위험한 처지가 되어 버릴 것이다. 아니, 그런 이성적인 판단 외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두렵고 막막했다. 귓가도 멍멍해지면서 다른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예나는 다시 한 번 영주님 이름을 불렀지만, 자기가 듣기에도 자기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정말로 입 밖으로 낸 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무력감에 눈이 젖었다. 눈물이 흘러서 눈앞을 가리는데, 닦아낼 수도 없었다. 예나는 시체들이 자신을 향해 기어올 때보다 더욱 강하게 죽음을 느꼈다. 눈앞이 흐리니 이제 짐승이 습격해 와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 버릴 것이다.
“가지가지 하는군.”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가 이만큼 반가울 날은 다시없을 것이다. 예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영주님이 거침없는 걸음으로 다가와서 예나가 끼어 있던 무언가로부터 예나의 몸을 빼내고, 아까의 그 비단 망토를 덮어 주는가 싶더니 눈물을 닦아 주었다. 예나는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와 있는 영주님의 얼굴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머리를 다쳤군, 실없이 웃는 걸 보니.”
“진짜 안 버렸네. 고마워요.”
거의 입술만 달싹거리는 수준이었지만 영주님은 알아들은 것 같았다.
“약속은 지킨다.”
“숲은 무서워요…… 늑대도, 시체도 싫어…….”
영주님은 혀를 잠깐 차더니 아무 말 없이 예나를 안아 올렸다. 계속해서 횡설수설 중얼거리는 것도 무시하고 고개를 들더니 다시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예나는 그 팔이 얼마나 단단한지 다시 한 번 느끼고 안심했다.
영주님이 똑바로 나간 쪽은 마차가 다니는 길이었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시야가 뻥 뚫리고, 넓고 잘 다져진 길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앞에는 검은 말 두 마리를 맨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마부석에는 예나를 처음 맞아 주었던 남자가 앉아서 기다렸다.
“아, 오셨습니까.”
“그래.”
남자가 문을 열어 주자 영주님은 예나를 안은 채로 가볍게 뛰어 올라탔다. 남자가 예나를 힐긋 보더니 말했다.
“생각보다 금방 찾으셨는데도 꼴이 말이 아니군요.”
“헤매고 괴물 만나고 얼어서 넘어지기까지, 고루고루 다하더군. 내 탓은 아니다.”
말하면서 영주님은 예나를 반대쪽 좌석에 눕히려고 했다. 그러나 손을 떼면 바로 굴러떨어질 것 같자 불만에 찬 얼굴로 다시 예나를 무릎에 앉히고 두 팔로 안아들었다. 예나는 짐처럼 이리 놨다 저리 놨다 당하면서도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굴리고 있었다.
“쯧쯧, 상태가 심한데요.”
“크게 다치진 않았어. 성에 데려가서 배 채우고 몸 녹이고 달래 놓으면 된다.”
“그러니까…….”
결국 예나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고 말았다.
“사람을 그렇게 가축처럼 가리키지 말란 말이에요. 기분 나빠요.”
“하나 더 있어, 루치안. 예의와 규칙도 가르쳐 놔.”
영주님의 말에 루치안은 그냥 헛웃음을 흘리더니 문을 닫고 마부석으로 갔다. 예나는 한마디 더 하려다가 마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얼른 입을 다물어야 했다. 성에 들어갈 때 탄 마차가 많이 흔들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혀를 깨물거나 입술을 깨물 것 같았다.
하지만 영주님의 팔이 여전히 단단히 예나를 잡고 있었다. 예나가 눈을 감자 열을 재 보려는 듯 이마에 손을 얹기도 했다. 장갑을 벗은 듯 서늘한 맨 살 감촉이 좋았다. 예나는 그 성에 있지 않을 테니 당신네 예의와 규칙은 배울 필요가 없다는 말은 나중에 또 화나면 하기로 하고, 지금만은 이 악마를 용서해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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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월요일 아침에 휘릭 올리고 사라지는 자하입니다. (아직 사라지진 않았지만...)
오늘부터는 이틀에 한 번 정도, 월, 수, 금에 연재하려고 해요.
일정 지킬 수 있도록 격려해 주세요.
그럼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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