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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얼음에 동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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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엽군.
“……훗.”
강인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음을 흘리면서 핸드폰의 폴더를 닫았다. 살롱 한구석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던 그는 일어서기 위해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정장이 어울리는 늘씬한 몸이 지면에 수직으로 일으켜 세워졌다.
“사소한 일에 애들을 풀고 다니나? 좀 창피한 짓 아냐?”
건장한 몸. 칼자국이 선명한 오른 눈썹. 정명회의 중간보스인 여천우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톤으로 강인은 반은 농담처럼, 그러나 뼈를 섞어 답했다. 입술 끝은 들려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결코 웃고 있지 않은 모습으로.
“처음부터 그렇게 배워서 그렇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하죠?”
“사소한데 집착하는 건 타고난 성격이겠지.”
“글쎄요, 자기가 가진 것만으로도 모자라 어떡하면 남의 것까지 뺏을 수 없나 호시탐탐 엿보는 승냥이들보단 낫다 생각합니다만.”
여천우는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아니, 그렇다기보다 전혀 자기 말에 신경 쓰지 않는 아래 서열의 중간보스에게 어지간히 열 받았지만, 꾹 눌러 참는 눈치였다. 회합은 막 끝난 참이었지만, 그는 이 젖비린내 나는 녀석에게 할 얘기가 있었다.
“복학했다지. 아직 대학생인가? 하, 부럽군. 난 대학 문은 밟아 보지도 못했는데, 역시 날 때부터 금 수저를 물고 나온 사람은 다르다니까. 공부는 할만해?”
“그럭저럭 즐기고 있습니다.”
자신보다 10살 이상 나이 많은 여천우다. 그럴 필요성이 있든 아니든, 강인은 말투에 철저히 예의를 갖췄다.
“즐긴다? 똑똑한 놈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여천우가 빈정기 담은 웃음을 슬며시 흘렸다.
“이 바닥 일에선 손떼고 아예 공부에만 전념하는 게 어때? 공부와 양립도 힘들 것 같고 뭣보다 이 바닥이 어울린단 생각 안 들어. 그 머릴 좋은데 써야지, 안 그래? 그리고 원래 여기 있을 몸도 아니시잖나.”
“그냥 본론을 말씀하시죠.”
우회하는 거, 어울리지 않습니다. 강인은 코끝으로 웃듯이 느긋하게 대꾸했다. 여천우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으로 일그러지려다 간신히 평정을 유지했다.
“지역관리, 혼자서는 힘들지 않나? 우리한테 손을 빌리는 게 낫지 않겠어?”
우리? 우리라……. 훗, 이젠 둘이 합쳤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시는군.
강인은 느슨하게 선 자세로, 말을 이어가는 여천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전에는 형님이 같이 관리하셨지만 지금은 혼자서 하고 있잖나. 아무래도 꽤 버거울 거란 생각이 드는데 말이야.”
“그쪽은 버겁지 않으십니까?”
강인은 그렇게 반문했다. 그는 본의 아니게 외국생활을 오래 한 덕분에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외국어에 능숙했고, 그런 이유로 일본과 홍콩, 마카오 그리고 대만 등과 연계된 일을 맡고 있었다. 그가 맡은 구역이라 함은 주로 그런 방면에 관련된 지역을 뜻했다. 그의 본가 청현회는 이런 쪽에서는 타 조직이 쫓아올 수 없을 만큼의 행사력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가 현재 속해 있는 정명회는 강인이 들어오기 전엔 전혀랄 만치 이 방면에 있어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었다. 그런 까닭일까 강인이 이쪽에서 독점적으로 일을 맡게 되면서 정명회의 수입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 성과는 순전히 강인 혼자 만들어낸 것으로 ‘혼자서는 버거울 것’이란 말은 어디까지나 여천우의 생각, 착각, 또는 트집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강인이 나머지 두 중간보스와 대등하게 세력다툼을 하고 있단 게 영 못마땅한 것이 분명했다. 오늘 회합도 실은 강인에게 이 제안을 하기 위해 불러냈을 것이다. 그의 날개를 조금이라도 꺾기 위하여.
“나누려면 같이 나누죠. 독점을 풀려면 공평하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우린 이쪽에서 잔뼈가 굵었어. 넌 이제 겨우 스물다섯 아냐.”
스물다섯의 ‘애송이’ 아냐. 생략된 단어가 여천우의 얼굴에 보란 듯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강인은 그런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세 사람의 수입이 엇비슷해지면 한번 생각해 보죠.”
“뭐야?”
여천우의 얼굴이 이번에야말로 하얗게 일그러진다. 강인은 그에 전혀 개의치 않고 눈을 엷게 깜박이며 천천히, 어디까지나 느긋한 톤으로 말을 덧붙였다.
“할 말 끝나셨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강인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막 몸을 돌리려 했을 때.
“청현회 쪽 선수로 지하 투길 뛰었다 들었는데.”
독기를 품은 목소리가 뒤로부터 울려나온다. 강인은 입을 열어 대꾸하지 않고 그게 어쨌다는 거지? 라고 말하듯 어깨를 아주 희미하게 들어올렸다.
“정명회 중간보스가 청현횔 위해 몸을 굴린다? 어째 넘 구리잖아?”
“…….”
“양다린 곤란해. 다릴 잘라서라도 한곳에만 중심을 잡아줬으면 좋겠는데.”
아니, 이쪽에서 자르지 않으면 먼저 칼 들고 덤벼올 사람이다. 말이 너무 많군. 잘라야 할 건 다리가 아니라 저 남자의 혓바닥인 것 같은데. 강인은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려 부드럽게, 그러나 냉기를 담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명심하죠.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씀대로 학교에 다니니까 신경 써야 할 데가 많아서 말이죠.”
학교……, 학교라.
대학은 자신에게 있어 낚시 같은 거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매일 속, 유일하게 여유로이, 유유자적 즐길 수 있는 시간과 장소. 가끔 눈에 띄는 물고기가 있다면 더욱 더 즐거운 일이다. 그 물고기가 지금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란 데 생각이 미치자, 강인의 입가에는 다시금 미소가 어렸다.
그는 여천우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살롱 입구를 나섰다.
15
맨션 안은 제법 크고 넓었다. 사람은 달리 아무도 없었지만, ‘이런 정도의 맨션에 혼자 산다는 건 말도 안돼’, 라고 민하는 생각했다.
크기에 비해서 가구는 별로 없었다. 사람이 여기에 살면서 생활한다는 느낌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 그녀가 앉아 있는 소파 위쪽으로 꽤 비싸 보이는 추상화 한점이 걸려 있었다. 언뜻 들여다 본 침실은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지만, 역시 붙박이 외에 따로 산 가구라고는 침대와 그 옆에 놓여진 작은 서랍장 정도뿐이다. 키친에는 바 형태로 테이블이 연결돼 있고 반짝반짝 욕조가 빛나는 욕실에서는 큼직한 창문을 통해 바깥 정경이 그대로 내려다보였다. 고급스런 천으로 맞춘 듯한 커튼과 블라인드가 방방 창문마다 걸려 있다.
그 커튼을 들추고 밖을 내다보니 이미 날은 어둑해져 있었다.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이 눈동자를 비춘다. 그 광경은 아름답지만 어딘가 인공적인 느낌이었다.
자신이 왜 여기까지 따라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따라’ 왔다기보다는 ‘끌려’ 왔다는 표현이 맞겠지. 그녀만을 집안에 들여보낸 채 ‘똘마니’ 남자들은 나갔다. 완전 철수한 건 아니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험악한 가문 출신이란 말은 거짓 소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휴우…….”
어쩌자고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이건……, 뭐지? 호기심일까? 자꾸만 끌려가게 된다. 그의 페이스에 휘말리고 또 휘말려 정신을 차리면 다시 그의 옆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모르겠다.
끼익.
문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그다.
“왜 겉옷을 입고 있지? 덥지 않아?”
“금방 갈 거니까요.”
강인의 질문에 그녀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왜 딴 식구는 아무도 없죠? 설마……, 혼자 살아요?”
대답하지 않은 채,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보면 알잖아?’의 동작.
“사람을 기다리게 해 놓고 어딜 다녀온 거예요?”
“아아. 동호회 친목모임……이라고 하면 될까?”
느슨한 어조로 대꾸하는 그는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정장을 입은 모습이었다. 아니, 여름이었던 그 때완 달리 좀 더 어른스럽고 무게 잡힌 분위기의 블랙 슈트에 실크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까지 갖춰서 매고 있다. 귀걸이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피어스를 하고 있었다.
생소했다.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된다.
바보 같아!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는 그를 보다가 민하는 고개를 돌렸다. 미운데, 얼굴을 맞대고 욕을 잔뜩 퍼부어 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는데, 그것조차 귀찮아졌다.
“갈게요.”
그를 스쳐가려다 손목이 잡혔다. 반사작용처럼 몸이 흠칫, 떨린다.
“이렇게 가 버리면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잖아?”
민하는 그를 올려다봤다. 그녀 눈높이에는 커도 너무 크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최대한 열심히 째려보면서 그녀는 싸늘하게 말했다.
“원하던 대로 되서 속이 시원해요?”
그가 입 끝을 슬쩍 들어올렸다.
“뭣하면 용돈 정도는 내가 줄 수 있는데.”
“웃기지 말아요!”
민하는 소리쳤다.
“과외를 하지 않겠단 뜻이 아니야. 또 구하면 되니까. 그래, 알았어. 여학생으로 구하면 되는 거지?”
말하면서 분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선배……, 아니, 선배란 말도 아까워! 당신의 말을 다 듣겠다는 뜻이 아니야. 재한이가 걱정돼서 그럴 뿐이지. 이런 유치한 협박에 놀아나는 나도 불쌍하지만, 이런 유치한 방법을 쓰는 당신이 더 불쌍해.”
실은 별로 불쌍하지도 않다. 그저 그렇게 말했을 뿐.
“하지만 또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 땐 나도 정말 용서 못해요.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겠어. 알아들어요?”
“호오, 얼마든지. 하지만 소용없을 걸?”
“무슨 말이에요?”
“넌 어린애에 지나지 않아. 경찰이 네 고충을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지. 내가 네 주변인들을 해쳤다는 증거는 찾기도 힘들 거고, 설사 찾았다 해도 그들은 그런 정도의 사소한 일로 골치를 썩고 싶어 하지도 않을 걸. 뭣보다 우리 집안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분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단 말이지. 느긋하고 점잖고 다른 걸로 바쁘신 분들이 이런 개인적인 문제에까지 신경 써줄까?”
“사실인가요? 선배 집이…….”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를 데려온 사람들……. 하지만 확인의 말이 나온다. 물론 상대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대답할 필요도 없다.
“뭐, 문제가 생겨도 나대신 처리해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집안 ‘빽’이 좋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그 힘을 이런데 이용해? 치사하고, 비열하고, 조잡한 자식!
“이봐, 힘 빼고……. 한잔 하지 않겠어?”
민하는 이 인간이 또 왜 이래? 하고 생각하면서 강인을 다시금 노려봤다. 그는 무심한 눈을 한 채, 재킷을 벗고 있었다.
“오늘 내 생일이거든.”
“아하!”
황당했다. 하아, 그래서. 지금 축하해 달라고 날 부른 거니?
“이젠 아주 드라마 각본까지 쓰시지 그러세요? 참 신기하네요. 생일도 있어요? 하는 짓이 인간 같지 않아서 생일 같은 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짐승도 태어난 날은 있어.”
‘인간 같지 않은 인간’, 혹은 ‘짐승’이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을 낳으신 어머니가 안 되셨을 뿐이에요.”
말하고 보니 좀 지나쳤다는 생각이 든다. 넥타이를 완전히 풀고 맨 윗 단추를 풀어 내린 강인의 목에 은색 체인 목걸이가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은이 아니라 백금이겠지만, 어쨌거나 ‘금’보다는 차가운 ‘은’이 훨씬 그에게 어울린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민하는 오히려 불안해졌다.
“한잔이라니, 기대도 하지 마요. 스쳐가며 보는 것도 싫은데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있으라고? 미쳤다고 내가 그 말을 들어줄 것 같아요? 여기 온 건, 더 이상은 주변 사람을 괴롭히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런 짓을 더 한다 해도 반발심만 키울 뿐, 그쪽 뜻대론 안 될 거니까.”
“상관없어.”
막 돌아서려던 몸을 멈추고 돌아봤다. 강인이 그녀 쪽으로 다가와 가슴이 얼굴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섰다. 희미한 스킨향기가 콧속을 잠식한다.
“차라리 나한테 뭐라고 하는 편이 더 빠르지 않아요? 왜 애꿎은 딴 사람들을 괴롭히려는 거예요?”
“너한테는 손대지 않아. 누구나 자기 물건은 아끼는 법이니까.”
뭐라고? 물……건……?
“내가 침 발라 논 것에 딴 놈들이 얼쩡거리지 않으면 돼. 네가 반발해도 상관없고, 나를 미워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호감이나 사랑 따윈 언젠가는 바래지고 사라질 허접한 감정에 지나지 않으니까. 차라리 증오나 경멸 쪽이 상대에게 자신을 기억시키는 데는 훨씬 효과적이지.”
그가 몸을 숙였다.
“훗, 안심해. 너는 건드리지 않을 테니. 절대, 건드리지 않아…….”
입술이 얼굴 가까이 다가온다. 놀라 몸을 빼려는 민하를 붙들더니, 그의 입술은 그녀의 얼굴을 스쳐 귓불로 다가왔다.
“……!”
부드럽고 따뜻하고 축축한 것이 귓불의 도톰한 부분을 나긋하게 핥아 올리자, 발끝에서부터 오싹한 전율이 치밀어 올라온다. 천천히, 어디까지나 상냥한 동작으로 혀끝을 놀리며 민감한 부분을 자극하자, 희롱당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몸을 빼기가 힘들어져 버렸다. 목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빳빳하게 굳어버려 몸을 빼기는커녕 움직일 수조차 없다.
아, 밀쳐내야 하는데.
제발……, 밀쳐 내야 돼.
밀쳐…….
저도 모르게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동요하고 있었다. 목이 바짝바짝 타는데, 목젖을 울릴 정신조차 없다. 아아, 뿌리쳐야 하는데……, 말도 나오지 않아…….
좋은 냄새가 난다.
시원하고, 상쾌하고, 그러면서도 자극적인 남자의 냄새가.
바보처럼 이, 무슨…….
……그 때.
“좀 짜지만 맛있었어.”
그가 순식간에 입술을 떼더니, 건조할 만치 담담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고는 그대로 물러나가 버린다.
멍하게 흐려졌던 정신이 돌아오자, 일시에 밀어닥친 것은 수치감이었다.
“머……, 먼저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민하는 물기어린 눈을 하고 소리쳤다.
“생일 선물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남자의 입술은 젖어 있었지만, 그녀를 보는 눈은 말투와 같이 건조하고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부드럽다 못해 유유하기까지 한 눈빛.
또 당한 거야, 나?
모……, 못된 자식!
16
아직도 귓불에 강인의 입술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마음으로는 한없이 미운데 몸으로는 끌릴 수도……, 있는 것일까?
난생 처음으로 민하는 경박한 자신에게 지독한 수치심을 느꼈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물건’이라고 했는데, 그녀 자신은 그에게 있어 소유욕 이상 이하도 아닌 한낱 ‘물건’일 따름인데……. 그런데 그런 그에게 끌린 자신이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간의 반응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실은 그가 너무나 밉다. 최하의 인간으로 경멸하고 있었다. 당연히 한순간 느낀 감정은 호감이나 사랑은 절대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증오나 경멸, 반발심에서 나온 반작용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지.
그래, 그럴 것이다.
아파트 입구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장갑을 낀 남자가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남자는 오토바이에 타려고 하고 있었다. 그 오토바이에 ‘OO 꽃 배달 서비스’라고 적혀 있는 것이 보인다. 민하는 그 광경을 별 관심 없이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들어갔다.
“너 여자애가 이렇게 늦게 다녀도 되는 거냐?”
돌아온 민하에게 들린 것은 일주일 만에 집에 들어온 민호의 목소리였다.
“으응, 오늘 아는 사람 생일이어서…….”
되는대로 변명을 중얼거리면서 민하는 오빠가 있는 거실로 들어갔다.
일중독자인 민호는 집에 돌아와서도 언제나 거실에서 일거리를 붙들곤 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노트북 키보드를 두들기는 모습이었다. 그 옆에 서류더미가 잔뜩 흐트러져 있다. 피곤한데도 일감을 놓을 수는 없는지, 오빠는 미간을 문지르며 계속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코코아 타줄까, 오빠?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좀만 기다려.”
민하는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에 목소리가 수그러드는 자신을 느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부터는 누가 뭐래도 어엿한 집안의 가장인 오빠다.
늦게 들어온 것도 늦게 들어온 거지만, 민호에게 요즘의 고민을 털어놓아야할지 말아야 할지 스스로도 의심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얘기해야 할까? 아니, 안돼. 가뜩이나 일로 바쁜 오빠한테 이런 신경까지 쓰게 만들 수 없다. 혼자서 해결해, 서민하. 넌 더 이상 어린애가 아냐.
“코코아는 됐어. 옷 갈아입고 와서 여기 좀 앉아 봐라.”
여느 때와 좀 다른 민호의 말투에 민하도 움찔해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민하를 힐끗 보더니, 민호는 손에 들고 있던 파일뭉치를 내려놓고 옆자리를 툭툭 치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는 오빠에게 민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무섭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앞으론 일찍일찍 다닐게…….”
“너, 우리한테 부담될까 봐 같이 살기 싫다는 거냐?”
민호의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심각하기까지 했다. 그는 몸을 뻗어 노트북 뚜껑을 닫더니, 소파에 몸을 기댄 자세로 여동생을 직시했다.
“성은이가 물어봐 달라고 하더라. 부담스러워서 그런 거면, 자긴 정말 괜찮다며. 너 혼자 어떻게 사냐며. 외롭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할 거라고.”
“어, 아닌데…….”
민하는 웅얼거렸다.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그런 식으로까지 미래의 올케가 자신을 생각해 주고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걱정 끼치고 있었던 거야, 나?
“나 정말 괜찮아. 그렇게 나한테 믿음이 안 가, 오빠?”
“그런 건 아닌데…….”
미간 사이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며 말을 찾는 오빠에게 민하는 말했다.
“정 걱정되면 나, 룸메이트 구할게. 어차피 전세계약기간도 남아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해서 자립하고 싶은 거냐?”
“응.”
“……알았다.”
민호가 아직도 어딘가 석연찮은 표정으로, 하지만 알았단 듯 수긍하며 답한다. 그러더니 여동생을 툭 건드리며 다짐하듯 덧붙였다.
“하지만 니가 외롭거나 혼자 사는 게 고달프면, 언제든지 들어와라. 우린 진짜 괜찮으니까.”
민하는 응, 하고 밝게 웃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너 요즘 연애 하냐? 아님 쫒아 오는 남자라도 있는 거야?”
쿵! 가슴이 울린다.
“무……, 무슨 말이야? 왜?”
“오, 뭘 그렇게 화들짝 놀라?”
다 알았다는 표정으로 오빠가 킥킥 웃었다.
“저기 너한테 꽃바구니 와 있더라? 경비아저씨가 줘서 들고 올라왔지.”
그러고 보니 거실 한 구석에 꽃바구니가 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아까 그 꽃 배달맨이 왔던 집이 다름 아니라 우리 집이었던 건가? 민하가 얼떨떨하게 바구니를 쳐다보자, 민호가 기지개를 쭉 켜면서 실실거리는 소리를 냈다.
“니 어디가 좋다고 그러는지 눈도 참…….”
“오빳!”
남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민하는 입으로만 궁시렁거리며 꽃바구니 쪽으로 걸어갔다. 보니, 바구니 안에 작은 카드가 한 장 꽂혀 있는 것이 보인다. 민하는 손을 뻗어 카드를 꺼내들었다. 꽃문양이 박혀 있는 흰색 카드를 펼치자…….
- 항상 널 보고 있다. 내 마음 느껴지니?
미, 미친 자식!
구토가 치밀어 오를 만큼 느끼한 표현. 메시지는 그것 뿐, 누가 보냈는지 발신자명은 전혀 씌어 있지 않았지만.
누가 이 따위 카드를 보냈는지 안 봐도 훤했다. 민하의 머리에 차가운 안광을 가진 눈으로 즐기듯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떠올랐다. 초승달 모양을 한 채 한쪽으로 비틀려 올라간 얇은 입술도.
저절로 몸에 소름이 돋아 오른다.
이젠 이런 식으로까지 사람을 약 올려? 정신병자를 상대하는 듯한 기분까지 들 정도다. 그 자식은 뭔가가 결여된 인간임에 분명해!
한순간이지만 그런 놈에게 끌린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분했다.
나도 그 순간 정신이 나갔던 거야!
민하는 카드를 구겨서 부엌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계속.
수정작업과 또 하나를 병행중이어서 당분간 성실연재는 어려울 듯합니다.
죄송;
댓글 '22'
Lian/ 아녀요... 나쁜 남자는 의외로 쓰기 쉽답니다. 착하고 매력적인 남자가 더 어렵죠...; 리앙님이 쓰시는 나쁜 남자가 훨씬 멋질 듯합니다.
야광우비/ 헉...; 그렇게 닭살스러우셨나요? @..@
phoebe258/ 그렇죠? 저 메모 안 어울리죠? 흣흣.
캉깡/ 핫핫, 약간 능글맞긴 한데 리마리오 수준은 아니랍니당.
까망사자/ 느리게 연재해서 죄송해요... 실은 요즘 약간 슬럼프라서...;
판당고/ 훗훗. 그러게요. 근데 강인은 아마 끝까지 능글맞긴 할 거야요.
꼬맹이/ 넵. 완결편 보여드려야죠! [05][09][07]
야광우비/ 헉...; 그렇게 닭살스러우셨나요? @..@
phoebe258/ 그렇죠? 저 메모 안 어울리죠? 흣흣.
캉깡/ 핫핫, 약간 능글맞긴 한데 리마리오 수준은 아니랍니당.
까망사자/ 느리게 연재해서 죄송해요... 실은 요즘 약간 슬럼프라서...;
판당고/ 훗훗. 그러게요. 근데 강인은 아마 끝까지 능글맞긴 할 거야요.
꼬맹이/ 넵. 완결편 보여드려야죠! [05][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