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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사람을 엄청 열받게 한 일이 있은 후. 고기 부페에서 고기를 먹고 (예. 저 고기 무척 좋아합니다. 그리고 열받으면 먹지요. 거기다가 사장님이 벌이신 일에 더불어 예상치 않게 직장 식당에 밥이 떨어지는 바람에 저녁도 못 먹었었습니다.) 집으로 오니 아버님이 제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셨었더군요. (에티켓 모드여서 못 듣다.)

그래서 그 쪽으로 전화를 해 보니 아버님 왈.

아버님 : 천안 갔다 오마.

나 : 넹.

천안 다녀오신다면 최소 이틀 잡고. 오늘 안 들어오신다고 치고... 하며 계산을 마치고 부엌에 불을 켜니. 그 곳에 안스러운 표정을 한 김군이 서 있었습니다.

알바생 김군 : 누님

나 : 응?

알바생 김군 : 호빵, 어떻게 찌는 지 알아?

나 : ┐('~`;)┌

... 어쩐지 수상스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주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손 치더라도, 호빵 찌는 간단한 스킬마저 모른다니. 이건 말이 되질 않잖습니까!!

나 : ... 스물 삐리리 해 살아오며, 도대체 뭘 보고 뭘 배우며 산 거냐?

알바생 김군 : 글쎄.

나 : 어디 가서 내 동생이라고 하지 마라. 이건 창피야. 극악의 창피라고. 내 라면을 국물 두 배 우동으로 만드는 것도, 김치 볶음밥 만든답시고 아까운 신김치 포기를 후라이팬 속에서 쪄낸 것 까지는 이해한다만. 그 간단한 호빵 찌기 같은 것도 못하다니.

알바생 김군 : ...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말 할 필요는 없잖아.

나 : 그건 그렇고 호빵은 어디서 구했어?

알바생 김군 : 조계종... 아니, 조계장님이 주셨어.

오늘 저희 남매는 끼니 운이 없는 듯. 은행이 바빠서 점심도 저녁도 거른 동생을 불쌍히 여긴 계장님께서 집에 가져가시려던 호빵 한 봉지를 하사하신 모양이었습니다. 퇴근 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집에는 아무도 없고. 거기다 오늘은 아무도 아침을 먹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에 이불 빨래 하느라 밥 짓는 것을 미뤘더니 동생이 집에 왔을 무렵에는 밥 한 톨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던 겁니다.

나 : ... 시켜먹지 그랬어. 동네 모 우동에 누나가 외상 계좌 터 놨건만. 월 5만원까지는 그냥 달아놔 주는데.

알바생 김군 : 그런건 미리 말 해줘야지!!!

나 : 아. 말 안했던가?

알바생 김군 : 말 안했어!! (거의 절규수준)

나 : 어쨌든 호빵도 쪄 먹을 줄 모르는 동생에게 그런 걸 알려주는 건 아깝지. 자 줘 봐.

찜기 (라기 보다는 중국식 후라이팬 냄비) 에 물을 적당량 붓고, 받침판을 놓고, 뚜껑을 덮습니다.

나 : 자. 이대로 끓어 올라서 김이 슉슉 소리를 내며 허옇게 차오르기 시작하면 가스렌지를 끄고.

알바생 김군 : (뭔가 적고 있다...;;;;) 응.

나 : 적당히 뜸을 들인 다음, 뚜껑을 열어 빵을 호호 불어가며 먹으면 돼.

알바생 김군 : (적다가 말고 강아지 같은 눈으로 쳐다보며) 누님.

나 : ... (뭔가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낍니다) 응?

알바생 김군 : 멋져!

나 : ... 이런 게 멋질 리가 없잖아!! (발판과 손재주만 있다면 세 살짜리 어린애도 할 줄 아는 것을!!)

알바생 김군 : 그래도. 멋져.

나 : ... 너, 나중에 어떻게 살래?

알바생 김군 : 아직은 편의점이 있어.

나 : 그건 그렇구나.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알바생 김군 : 그 때는 죽도록 벌어서 매일 시켜먹을 수 있는 자금을 모으면 돼.

나 : ... 그럼 그러던지.

어쩐지 우울해졌습니다... (동생의 앞날은 과연?)






Jewel

2004.10.29 02:23:49

-ㅁ-;;; 씨엘님 아버님이 안게시는 동안 철저히 교육을 시켜서 요리사과정과 청소기능사 과정을 마스터 시키세욘!! 화이팅!   [01][01][01]

D

2004.10.29 08:39:59

김군 만세!!!!!!!!!!!!!!!! 나도 연하가 좋아지려고 하오.   [01][01][01]

변신딸기

2004.10.29 09:02:46

씨엘님~ 멋져요!!! 으흐흐
저는 호빵 그냥 전자렌즈에 돌려 먹는데...-_-;;;;
그나저나 강아지 같은 눈으로 쳐다보는 김군의 모습을 한번 봤으면 좋겠어요 +_+   [05][05][09]

Miney

2004.10.29 09:54:42

이런 김군님에게는 아마 요리솜씨가 '몹시' 좋은 여친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어요. 강아지 같은 눈이라니! 절로 뭔가를 갖다 먹이고 싶어질 듯. >_<;;   [01][01][01]

릴리

2004.10.29 11:00:56

흐흐흐.. 김군 정말 귀여워요. 조계종..이라니..큭큭큭..ㅠㅠ   [01][01][01]

리체

2004.10.29 11:54:52

아하하..ㅠㅠ 여전히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시엘님과 김군..ㅎㅎㅎ   [01][01][01]

ciel

2004.10.29 13:38:06

Jewel/ 그게 가능하다면 저 녀석 지금 저 지경이 되진 않았습니다... (ㅠㅠ) 그저 마음이 애릴 뿐.

D/ ... 연하는 좋지요 잇힝~ (>_<)=b (의미 불명)

변신딸기/ 저희집에는 전자렌지가 없어서... (그리고 김군 눈이 작아서 강아지 눈 하고 바라보면 웃겨요.)

Miney/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군대가기 전에 사귀었던 은*양의 요리솜씨는 제 괴식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괴식이었습니다.)

릴리/ 저런게 귀엽다고 하시면... (먼 눈)

리체/ 예... 저희 이러고 놀아요...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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