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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음과 조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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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양식 레스토랑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얼음 조각이 놓여 있었다. 사슴을 조각한 얼음은 지나가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 정도로 우아하고 정교했다.
“민하야.”
그 소리에 민하는 얼음조각에서 시선을 떼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나머지 세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크게 뜬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 같이 심각한 얼굴들이 뚫어져라 그녀를 보고 있는 게 들어왔다.
무슨 말을 들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이렇게 따로 식사자리까지 만들어서 보고하다니 참 소심한 사람들이야, 하고 속으로만 쿡쿡.
“응.”
하지만 그런 생각은 감추고 ‘무슨 일인데?’ 하는 식으로 웃어 보였다.
“우리, 결혼한다.”
그렇게 말하는 민호의 얼굴은 전에 볼 수 없었던 행복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말하면서 민호는 옆에 앉아 있던 예비신부를 사랑스런 눈길로 쳐다봤다. 그녀도 생긋, 마주 미소를 보낸다. 그리고 말했다.
“이렇게 오빠를 뺏어가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민하야, 괜찮겠니?”
“언니도 참. 언제 오빠가 내 거였어요? 저 인간 데려가주면 나야 고맙죠. 언니 아니면 누가 데려가 주겠어요?”
민하가 장난스럽게 받아치자, 아직까지 어색함이 남아 있던 두 사람의 얼굴이 이내 환하게 변한다. 민호가 머리에 톡 하고 꿀밤을 먹였다.
“요게요게, 이제 갓 성년식을 치른 주제에?”
“내가 두더지야? 허구한 날 때리게. 언니, 오빠 버릇 좀 가르쳐 주세요. 근데 날짠 언제로 잡았어요?”
“아직 잘 모르겠어. 일단 네 허락부터 받고 생각하려고 미뤄뒀지.”
“흐응. 형식적으로 반대 좀 해 볼 걸 그랬나.”
반대는 무슨. 성은 언니라면 최고의 신부감이다. 외모, 집안이며 학벌까지 솔직히 오빠 아니라도 데려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줄을 서 있을 걸. 민하는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인간이란 이렇게나 타산적이다.
“사실 너무 기뻐요. 언니가 좀 아깝기는 하지만.”
“야! 너 누구 동생이냐?”
솔직히 반 이상 진심이다. 다행이야, 성은 언니가 오빠랑 결혼해 줘서. 그렇게 생각했다. 성은의 집은 100위 안에 들어가는 기업, 그것도 ‘알부자’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가문이다. 오빠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하면 그걸로 족하지만, 이왕이면 오빠를 든든하게 받쳐줄 수 있을 만한 가문이랑 연결되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도 성은 언니라면 말할 나위도 없지만 말이다.
“왜.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건 그렇고 나도 이제 자유의 몸이네?”
“민하야.”
예비신부, 성은의 목소리가 다시 낮아졌다.
“그게 무슨 말이니?”
“네? 말 그대로인데요? 오빠랑 언니랑 결혼하면 나도 자유의 몸이라는…….”
“우리랑 같이 사는 거……, 아니고?”
“예? 어머, 싫어요. 신혼부부랑 같이 살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당하는 거 아니야? 난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고요. 오빠 설마, 나 데려갈 작정이었어?”
“어? 어……, 우리는…….”
“난 싫어요. 나도 이제 대학생이라고요. 혼자 잘 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오빠 매일처럼 아침 차려 먹인 사람이 나잖아. 설마 자기 한 몸도 건사 못할 것 같아요?”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것은 불행 중 다행으로 민호가 사법시험에 패스한 뒤의 일이었다. 당시 사법연수원에 있었던 민호는 줄곧 신림동에서 학원 강의를 뛰면서 돈을 벌어야 했고, 고3 내내 민하는 자기 도시락 뿐 아니라 오빠의 아침까지 챙겨야 했다. 고달프고 힘든 나날이었지만, 시련은 두 사람을 성장시켰고 두 남매의 유대관계를 더욱 돈독히 만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민하는 무난히 일류 사립대학에 합격했다. 오빠가 다니던 국립대였다면 더 바랄 나위 없었겠지만, 그녀의 성적으로 거기까지는 무리였다. 더구나 지망하는 과가 경영학과였으니 말이다. 좋은 일은 겹친다더니, 여자와 별 인연이 없던 민호에게도 봄이 왔다. 친구가 주선한 소개팅에서 만난 성은과 이렇게 결혼까지 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 주선자는……,
“이야, 우리 민하 다 컸네?”
지금 말한 사람이다. 민호의 대학 동창에 연수원 동기이자 성은의 사촌인 성원 오빠. 민호와 나이가 같으니까, 성은보다는 세 살 많은 나이. 민호와는 아주 사이가 좋다. 민호가 연수원을 졸업하기 직전, 검사를 지망하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변호사를 하려고 했을 때, 먼 앞날을 보라며 설득시킨 사람도 성원이었다. 정작 그런 자신은 로펌으로 갔으니 웃기는 일이지만.
“머리 쓰다듬지 말아요. 헝클어지니까.”
“민하 너무해. 차가워! 얼음 같아!”
성원이 놀란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도 결국 머리 위에 손을 올린다. 민하도 말과는 달리 잠자코 있었다. 실은 성원의 손이 닿으면 크림 먹은 고양이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마음 한구석이 허한 기분도 들었다. 자신이 바라는 건 이런 게 아닌데…….
“오빠니까 봐 준 줄 아세요? 다른 남자라면 벌써 한대 맞았을 거라고요. 누가 건드리는 걸 내가 얼마나 싫어하는데…….”
“나한테만 특별대우라니 기분 괜찮은데? 그런 의미로 둘이서만 건배!”
성원이 와인글라스를 들어 올렸다.
“건배!”
민하도 웃으면서 잔을 부딪쳤다. 손이 조금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성원 앞에서는 언제나 몸이 움츠러드는 자신을 느낀다.
무테안경 속으로 보이는 상냥한 인상의 눈. 지적인 인상을 주는, 올곧게 선 콧날.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을 때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빨려 들어갈 것이다. 좋은 집안에서 잘 교육받고 자란 듯한 분위기, 아쉬울 것 없는 환경에서 다 갖고 자란 자의 여유. 이른바 ‘부티’가 물씬 풍기는 것은 사촌인 성은과의 공통점이다. 키가 크고 늘씬하게 잘 빠진 스타일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처음 본 순간부터 반해 버렸다.
그렇지만 안돼. 절대 들켜서는 안돼.
성원 오빠에게는 자신이 친구의 동생, 그 이상 그 이하로 절대 비치지 않는 것이다.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드러내서 둘 사이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일러.
“오빠. 지금 그 분위기가 아니잖아. 심각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성은이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예쁘게 칠한 눈을 깜박이면서 나무랐다. 민하는 생긋 웃으며 와인 잔을 입에서 뗐다.
“언니, 여기 음식 너무 맛있어요.”
“어머, 그러니?”
성은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이 레스토랑으로 나머지 일행을 데려 온 건 다름 아닌 그녀였기 때문이다.
“이 빌딩은 아버지 회사에서 지은 거야. 이 레스토랑도 아버지 회사에 수주 준 회사가 운영하는 거구. 한번쯤은 여기서 식사해야 한대서 별 기대 안하고 왔었는데, 의외로 괜찮더라. 민하랑 민호 씨랑 한번 데려와야겠다고 싶었지.”
“……난 뭐냐. 들러리?”
옆에 있던 성원이 한숨 섞인 농담을 던지자, 성은은 ‘어머나, 잘 아네?’ 하고 대꾸하고는 다시 민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기 지하에 있는 바도 괜찮아. 근데 아까 한 말 말인데…….”
민하는 성은을 똑바로 바라보며 괜찮다는 뉘앙스의 미소를 지었다.
“저, 이번 전세기간 끝나면 원룸으로 옮길게요. 기숙사에 들어갈 수도 있고.”
“정말로 결심한 거야?”
“응. 아, 그런 표정들 짓지 말아요. 정말로 그러고 싶단 말이야. 꼭 방해될까 봐 이러는 거 아니니까.”
“그 심정 이해한다.”
심각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두 남녀를 바로 옆에 두고, 성원은 잘생긴 입술을 슬쩍 움직여 민하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원래 그 나이는 자립하고 싶어 미치는 나이인 거야.”
‘그 나이는.’
이라고 했다. 성원은 민하와 10살 차이였다. 처음 성원을 만났을 때 그는 민하의 나이였다. 그리고 그 때 민하는 12살이었다.
「네가 민호 동생이구나? 반갑다.」
오빠가 새 친구를 데려왔다! 반 호기심으로 거실로 나갔던 민하는 놀라버리고 말았다. 오빠보다 더 큰 사람이 있었다니,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훤칠한 키에 잡지에서나 볼 수 있을 수려한 외모를 한 젊은 남자가 미소를 짓는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걸 가리켜 페로몬을 발산한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발이 공중에 뜬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귀여운데? 왜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고 했는지 알겠다.」
「내가 언제 그랬냐? 이 자식 말도 잘 지어내네. 가만……, 위험한데? 임마, 너 내 동생한테 껍적대면 죽인다?」
「넌 내가 로리콤으로 보이냐?」
오버 반응하는 민호에게 성원이 기가 막힌 듯 대꾸했다.
「니 놈 평소에 하는 걸 보면 절대 방심할 수 없으니까. 돈주앙과 카사노바를 합체시킨 것 같은 놈을 어떻게 믿어?」
「넌 친구도 아니야, 임마.」
두 사람은 곧바로 아웅다웅하기 시작했다. 민하는 사뿐히 걸어가서 두 사람 앞에 섰다. 두 사람이 어? 하고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방긋이 웃어 보였다.
「오늘 아줌마 안 오시는 날이야. 엄마도 나가셨거든요? 오렌지 주스? 아니면 커피 뽑아 드려요?」
잠시 동안 멍하게 있던 성원이 이내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리며 민호의 어깨를 탁 쳤다. 그것은 이미 민호도 어이없는 미소를 피식 흘렸을 때였다.
「동생 무시하지 마. 너보다 정신연령이 배는 높아 보인다.」
「자식, 말 바꾸지 마. 넌 분명 로리콤이 아니라고 니 입으로 말했다?」
로리타.
그렇다, 그 때의 민하는 확실히 그 말을 갖다 붙여도 될만한 나이였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는 것. 로리타도 언젠가는 정말로 성숙한 여자가 된다. 알아요, 성원 오빠? 나도 이젠 오빠랑 나란히 있어도 우습지 않은 나이라는 거.
식사를 마치고 막 레스토랑에서 나오는데, 성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계산하는 민호에게 손짓으로 같이 하자는 의사를 표시한 성원은, 그래도 계산을 감행하는 친구를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폴더를 열었다.
“예? ……아아.”
“여자구만.”
계산을 끝낸 민호가 전화를 받는 성원을 보고 눈을 한번 슬쩍 깜박이더니 말했다. 성은은 그 옆에 선 채 기대에 찬 시선으로 성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누구야?”
전화를 끊은 성원에게 그녀가 물었다.
“지연 씨.”
그의 대답에 민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연? 여자 이름이다……. 대조적으로 성은은 환한 표정을 지었다. 아는 이름인 것 같았다.
“와! 결국 사귀기로 한 거야?”
“뭐……, 그렇다고 해야 하나.”
“잘했어, 잘했어. 지연이 만한 여자가 어디 그리 흔한 줄 알아? 얼굴 이쁘지, 능력 있지. 이번엔 오빠 정착하는 거 볼 수 있는 거야? 기대되네?”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성은과 조금은 쑥스러운 듯 무언으로 긍정하는 성원을 번갈아보며 민하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갔다. 성원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클라이언트 접대가 막 끝났다고 만나자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왜? 만나면 되지.”
성은이 무슨 고민이냐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민하는 오늘 내가 데려다 주기로 한 거잖아. 근데 만나자는 방향이 완전 반대야. 어차피 벌써 저녁인데 지금부터 만나면 얼마나 만난다고. 됐어. 어차피 만날 생각도 없었어. 안되겠어. 전화해야지.”
“민하는 민호 씨랑 내가 데려다 주면되잖아.”
“저, 저도 약속 있어요!”
민하는 재빨리 말했다. 검사 일로 바쁜 민호가 모처럼 시간을 낸 참이다. 두 연인이 모처럼 데이트할 시간도 뺏을 수는 없었다. 속으로 한숨이 새어나오는 걸 눌러 참았다. 들러리는 다름 아닌 나였구나.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데?”
성원이 의심스런 눈을 하고 물었다. 민하는 그 눈에 진실을 간파당할 것 같아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억제하고 대답했다.
“여기요. 일루 데리러 온다고 했어요.”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전화하면 데리러 올 사람은 분명히 있었다. 아마 열일 제쳐놓고 데리러 와 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4
“웬일이야? 천하의 서민하가 날 불러내 주시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준의 눈은 즐거운 듯이 빛나고 있었다. 민하는 시큰둥하게 맥주 잔, 엄밀히 말하면 그 위에 떠 있는 거품을 들여다보면서 반문했다.
“천하의 서민하?”
“만나달라고 사정사정해도 안 만나주던 사람이잖아. 전화 받고 이게 웬 떡이냐 싶었거든. 무슨 심경에 커다란 변화라도 있었던 거야?”
“거창하구나.”
민하는 오른손바닥에 얼굴을 괸 채 웃었다. 마음에 따로 둔 남자가 있으면서 허한 가슴을 달래려고 대타로 다른 남자를 불러내다니. 다른 여자들이 이런 자신을 보면 엄청 얄밉다고 할지도 모른다. 자신조차 지금 그런 생각이 드니까.
맥주잔을 입에 가져가고 있는 유준을 봤다. 희고 매끈한 얼굴. 웃으면 눈 꼬리에 귀여운 주름이 잡힌다. 키도 성원보다는 작지만 제법 큰 편. 성원과는 스타일이 많이 다르지만 귀공자 스타일의 전형이란 점은 마찬가지다. 자세히 보면 원빈하고도 좀 닮았다. 저 정도면……. 흐응, 상당히 괜찮잖아.
“민유준. 너 나 좋아하니?”
“어?”
당돌한 질문에, 유준이 놀란 얼굴을 돌렸다. 민하의 고등학교 동기 동창인 이 어린 남자는 아직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는 순수함을 갖고 있었다.
“나 좋아하냐고 물었어.”
“…….”
“너만 괜찮으면 우리 사귀자.”
“뭐?”
“귀 먹었어? 사귀자니까?”
유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머쓱해진 민하가 농담으로 돌릴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담담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싫어.”
“……?”
“넌 지금 날 놀리고 있는 거야. 사람 우습게보지 마, 서민하. 나도 울 엄마한테는 귀한 아들이라고. 1회용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는 건 딴 놈들로 참아 주시지.”
목소리에는 조그맣게 분노가 실려 있다. 더욱 더 머쓱해진 민하는 이 순간, 한마디밖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화났어?”
대꾸 없이 가만히 있는 상대를 보고 있자니, 다시 여유가 생겼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는다. 민유준. 너, 웃긴다. 조금 좋아지려고 해.
“날 엄청난 바람둥이로 보고 있는 모양인데, 아아……. 내가 정말로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봐요, 민유준 씨. 난 댁한테 사귀자고 했어요.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겠다는 소리, 뻥끗도 한 적 없어. 싫으면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 뭐가 그리 힘들고 거창…….”
“사귀자.”
이번에야말로 ‘벙 쪄서’ 상대를 고쳐봤다. 무슨 남자가 이랬다저랬다 말을 쉽게도 바꾼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민하에는 아랑곳없이, 순정파 남자는 순정파다운 대사를 읊어 내려갔다.
“널 좋아해.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
민하의 표정이 굳어졌다.
“넌 아직 날 좋아하지 않아. 어지간한 바보가 아니라면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이렇게 사귀다가 정말 날 좋아하게 될지.”
감동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동감했다. 실은 자신이 성원에게 하고 싶던 바로 그 말이었다. 눈앞의 순정파 남자가 귀엽고, 또한 부러웠다.
그래, 널 정말로 좋아하게 만들어 주면 좋겠다. 손에 닿지도 않는 사람을 계속 좋아하다 괴로워 숨이 넘어갈지도 모를 나를 좀 붙들어 주면 좋겠어.
민하는 웃으며 성원이 그랬듯이 잔을 들어 유준의 것에 부딪쳤다. 유준의 얼굴이 발개지면서 쑥스러운 듯 미소 짓는다. 역시 귀여운 남자였다. 하지만 아직은 남자로 느껴지지 않는다. 노력해 보겠지만, 아직은.
“전화 왔다.”
갑자기 유준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대더니 말했다.
“여보세요? 응? 아, 진욱이냐? 뭐라고? 잠깐만. 내가 그쪽으로 할게.”
그리고 전화를 끊더니 민하에게 말했다.
“여기 너무 시끄러우니까 잠깐 나갔다 올게.”
사실 음악 자체가 시끄러운 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더 시끄러웠다. 성은이 여기 괜찮다더니 인기가 많기는 많은 모양이다.
입구로 향하는 유준의 뒷모습을 힐끗 보고, 민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마음을 다잡고 싶어. 자신의 마음을 다잡을 만한 다른 것이 필요했다.
- 와! 결국 사귀기로 한 거야?
- 뭐……, 그렇다고 해야 하나.
- 잘했어, 잘했어. 지연이 만한 여자가 어디 그리 흔한 줄 알아? 얼굴 이쁘지, 능력 있지. 이번엔 오빠 정착하는 거 볼 수 있는 거야? 기대되네?
성원에게는 언제나 여자가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 만날 여자도 학벌에 집안에 간판에 미모까지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겠지. 미모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성은이 예쁘고 능력 있다고 말했다면 정말로 그럴 것이다. 당연히 그럴 거야. 보지 않아도 안다. 성원 오빠, 눈 높은 걸?
“쨍그랑!”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가 그 때까지 바 안에 가득 차 있던 일체의 다른 소음들을 일시에 걷어버렸다. 민하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악!”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
깨진 유리조각이 어지럽게 흩어진 바닥. 그 광경에 저편에 서 있던 한 남자가 맞은편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선 여자의 따귀를 후려치는 장면이 들어왔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한 일격이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난 슬립 원피스를 걸친 미녀는 단 한방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바 안의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는데도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털끝만큼의 동정심도 없는 표정으로 여자를 내려다보면서 뭐라고 말하고 있다. 그 광경을 보자 갑자기 열이 머리끝까지 뻗쳐왔다. 여자를 때리다니, 저런 망할 인간을 봤나!
“괜찮아요?”
왜 그랬는지 모른다. 민하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갔다. 여자는 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민하는 여자를 부축하는 동시에, 남자를 향해 들으란 듯 소리 질렀다.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비키시지.”
‘아가야.’ 라는 말을 덧붙이면 딱 어울릴 나긋나긋한 말투는 남자의 것이었다. 지독하다 싶을 만치 낮은 음성이 순식간에 정적으로 변한 바 안에 울려 퍼진다.
등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지만, 민하는 기죽지 않고 반박했다.
“여자를 때리다니 손이 부끄럽지도 않아요?”
“맞을 짓을 했으니까.”
“어떤 이유로든 여자한테 손대는 남자는 정신적인 고자나 다름없어.”
민하는 강한 시선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장신(長身). 확실한 건 아니지만 언뜻 성원보다도 큰 체구로 보일 정도다. 남자도 민하를 내려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안광이 어두운 바 속에서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싱긋 웃었나 했더니, 남자는 민하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와 멈췄다.
“뭐……!”
말도 채 못한 채 팔목을 잡혔다. 붙들려서 일으켜 세워진다. 민하의 몸이 부들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남자를 아는 듯한 바텐더가 옆에 와서 뭐라고 애원조로 사정했지만, 남자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말없이 민하를 들여다 볼 뿐. 조용한 동작이었지만 그 분위기는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이 남자, 이상해. 보통이 아냐…….’
민하는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바 안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남자에게는 뭐랄까, 압도적인 느낌 같은 게 있었다. 하는 행동 자체는 한없이 비열한데, 그것조차도 압도적이다.
“호오. 누군가 했더니 여기서 만나나. 생각보단 괜찮은데?”
남자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아주 즐거운 것처럼 들렸다. ‘무슨 소리야?’ 민하는 잠시 생각했지만, 이내 잡힌 손을 풀어내는데 신경을 집중시켰다.
“놔! 이 손 놔요!”
“민하야!”
민하가 몸을 비틀고 있을 때, 뒤에서 그제야 상황파악을 하고 달려온 유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있는 힘을 다해 도움을 청하는 소리를 질렀다.
“유준아!”
“민하야! 무슨 일이야? 당신 뭐야?”
“오, 방패가 있었어?”
남자는 의외란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손의 힘이 조금 풀렸는가 싶었는데…….
“읍!”
얼굴을 붙들렸다. 고개가 휙, 뒤로 젖혀진다. 그대로 상대의 얼굴이 다가왔다. 피하려고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눈동자가 빛나고 입 꼬리가 말려 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입술이 떨어져 내리고, 혀가 파고들어온다.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이었지만, 상대의 혀는 치열을 훑고 숨이 막혀 벌어진 입 속에 파고들어와 깊고 격하게 헤집고 나갔다. 그 어이없을 만큼 대담한 키스가 더 이어지지 않은 것은 유준이 주먹을 들고 남자에게 덤볐기 때문이었다.
“이 새끼가? 뭐하는 거야!”
“악!”
찰나의 순간, 남자가 민하를 뿌리쳤다. 그녀의 몸이 바닥으로 엎어짐과 동시, 유준의 주먹은 허공으로 한심한 곡선을 그리며 흐트러졌고, 이어 남자의 주먹에 의해 정확히 복부를 강타당한 그는 그대로 바닥으로 엎어져 신음하기 시작했다.
“아가는 나서지 마라.”
남자는 바닥에 고꾸라진 유준을 보며 입가에 초생달 모양의 비웃음을 그렸다. 그리고 이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몸을 일으킨 민하에게 상냥하게 덧붙인다.
“이런 허약체질을 믿느니, 알아서 몸조심하는 게 낫다 생각지 않아?”
말문이 막혔다. 자기가 당한 일을 생각하니 말문에 이어 숨까지 막힌다. 다른 사람들도 다를 바 없는 모양이었다.
“훗, 배짱이 제법이군. 깡 센 여자가 좋지. 또 보자고.”
숨이 막힌 채 그저 멍하니 있는데, 남자가 웃으면서 몸을 돌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들 멍청히 입을 벌린 모습으로, 문을 나가는 남자를 보고 있었다. 타이밍을 맞춰서 정신이 든 여자가 울음을 터뜨렸다. 역시 겨우 정신을 차린 듯한 종업원들도 그 때서야 머뭇머뭇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제, 젠장…….”
유준이 몸을 일으켰다. 그를 보고 있으려니 한숨이 나왔다. 사귀기로 한 첫날부터 이런 일이 터졌으니 앞으로 잘 되지 못할 게 눈에 불 보듯 훤하게 보인다. 여전히 아픈 듯한 친구를 부축하며 민하는, 혼자서 집에 들어갈 걸 괜히 유준을 불러냈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괜찮아. 근데 너…….”
유준이 민하의 얼굴을 보더니 이맛살을 찌푸렸다. 씹새끼, 하고 중얼거린다. 분하지만 자신도 제대로 한 건 없다는 사실이 민망한 모양이었다. 그 표정을 보자 다시 생각이 나며 머릿속이 들끓기 시작했다. 아까의 키스를 떠올리고, 이번에야말로 참을 수 없어진 민하는, 가방에서 항상 상비해 다니는 가그린을 꺼내들고 즉시 화장실을 향해 뛰어나갔다.
최악의 저녁이었다.
‘재수 없이 똥 밟은 거라고 생각해!’
민하는 양치질을 하면서 생각했다. 실은 자신이 거름 밭 위로 걸어가서 생긴 일이지만 말이다. 이런 걸 바로 재수 옴 붙었다고 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시련의 시작에 불과했다. 예기치 못한 재회는 채 한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기억한 것은, 남자의 눈빛이 마치 얼음 같다는 사실이었다.
계속.
지금 다시 열어보니까 너무 이상합니다. 설정도 어설프고, 스케일도 어설프고, 서툴게 만든 소품 같은 느낌이군요. 그런데 어쩌면 이 어설픔이 부담없어서 좋아보이는 분들도 계시는 것 같고; 그냥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어차피 완결하면 뜯어고쳐야 할 게 자명한 글입니다.
인생미학을 좋게 봐주신 분들 중에서는 분명 이런 스토리가 취향이 아닐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극과 극 같은 이야기에 설정에 전개니까요. 그런데 전 취향이란 게 딱히 없어서 이런 류도 써보고 싶었습니다. 이보다 더 가볍고 심심풀이 땅콩 같은 것도 좋아하구요.
사실, 얼음을 재개한 이유는 잊을 만 하면 등장하는 독촉 때문이기도 하지만, 19금방에 올릴 신작이 얼음과 아주 약간 연관되는 스토리이기 때문입니다(번외라고까지 하기는 힘듭니다. 절대 독립된 이야기입니다. 안 보셔도 절대 상관없는).
프롤로그에 보시면 명진연이 운영하는 클럽 Chilly는 독자적인 경호원을 두고 있다는 설정이 나오죠. 19금방의 신작은 바로 이 클럽 Chilly가 배경이고 신작의 남주는 부탁으로 이 Chilly의 경호원으로 일하는 한편, 모범생으로 학교에 다니는 이중생활을 하는ㅡ 나름의 비밀을 지닌 인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간간이 청현회와 강인 이야기도 나오기에 역시나 얼음을 보셔야 이해가 쉬우실 거 같아서 더 미루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뭔 사설이 이렇게 긴지 모르겠습니다.
재미없음을 잡담으로 커버하려는 충동을 막을 수가 없어서;
댓글 '17'
Jewel, 위니/ 저도 성원 좋아합니다. 조연으로 하기는 아깝다고 생각이 들 만큼... 위니님 성함이셨군요*_*
까망사자/ 그렇게 미스테리한 글은 아니야요...; 물론 어느 정도의 Q&A 구조는 갖추고 있습니다. 그게 인생미학과 다른 점이기도 하지요.
재아/ 예고한 거, 근데 시놉이 너무 아까워서 19금방에 올리지 말까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변덕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크;
phoebe258/ 피비님 글 쓰세요? 정파에도 올려주실 거죠? *_*(눈을 반짝이고 있는 정크) 그리고 과찬... 고맙습니다^/////^
larissa/ 엇, 그런가요? 고친데 전혀 없을 텐데...-0-
김영주, agjac, chika, meoroo, 샤이, 순호박, 캉짱/ 고맙습니다. 그런데 요즘 컴과 제 몸이 맛이 갔는지라 좀 천천히 올라가게 될 거 같습니다. 느긋하게 기다려 주십시오(뻔뻔;). [01][01][01]
까망사자/ 그렇게 미스테리한 글은 아니야요...; 물론 어느 정도의 Q&A 구조는 갖추고 있습니다. 그게 인생미학과 다른 점이기도 하지요.
재아/ 예고한 거, 근데 시놉이 너무 아까워서 19금방에 올리지 말까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변덕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크;
phoebe258/ 피비님 글 쓰세요? 정파에도 올려주실 거죠? *_*(눈을 반짝이고 있는 정크) 그리고 과찬... 고맙습니다^/////^
larissa/ 엇, 그런가요? 고친데 전혀 없을 텐데...-0-
김영주, agjac, chika, meoroo, 샤이, 순호박, 캉짱/ 고맙습니다. 그런데 요즘 컴과 제 몸이 맛이 갔는지라 좀 천천히 올라가게 될 거 같습니다. 느긋하게 기다려 주십시오(뻔뻔;). [01][01][01]
의문의 이중생활을 하는 고등학생이라! 기대됩니다~ [01][01][01]